15세기에 400두 정도였던 1결(3~4정보)당 벼 수확량이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800두로 증가하였다.
토지 1결의 평균수확고는 600두(50석)요 이보다 적은 것도 많다.『목민심서』
조선 후기, 특히 영,정조기에 와서는...지주가 5할 지대 이상을 온전히 수취해가는 완전반수제인 도조제의 소작이 널리 행해졌다....반수소작제가 하필 개혁군주 시대의 문예부흥기와 공존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려운 낯선 풍경임에 틀림없다.
그(정조)가 관심을 보인 것은 조선 초기의 제도였던 직전법(職田法)과 농업 증산을 위한 농업기술, 즉 농업의 개량이었다.
고대 흉노족의 경우 1인당 소 사육두수는 17.8~19마리로....
필라스에 의하면 유라시아 초원의 칼무크족이 18세기 중반에 5인 가족 1가구당 사육한 평균 가축 수는 암말 8마리, 수말 1마리, 암소 10마리, 수소 1마리였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같은 칼무크족 1가구가 사육하는 가축 수의 하한선이 50~100마리였다고도 했다. 게오르기는 부유한 카자흐족 1가구가 말 30~50마리, 양 100마리, 대형 가축 15~20마리, 염소 20~50마리, 그리고 낙타 몇 마리를 가졌다고 했다. 톨리 베코프는 카자흐족 한 가구(4~5인)가 낙타 15~20마리와 새끼들, 말 4~5마리, 양과 염소 100~150마리를 최하한선으로 가졌다고 했다. 마이스키는 20세기초 몽골족 5인 가족이 말 14마리, 낙타 3마리, 대형 가축 13마리, 양과 염소 90마리를 필요로 했다고 본다. 루덴코의 계산에 따르면 5인 가족의 최소 생계를 위해서는 최소 25마리의 말에 해당하는 수의 가축이 필요하다. 중동 지역에서는 1가구당 낙타나 나귀 1마리와 염소나 양 30마리를 갖고 농산물과 교환하면 비교적 부유하게 생활할 수 있다고도 한다. 가라지스탄에서 1인이 필요로 하는 최소 사축 수는 양 10마리, 낙타 1마리라고 본다. 그런데 1마리가 1년간 필요로 하는 목초지의 면적은 얼마나 될까? 중동 초원지대에서는1헥타르 정도이나 사막 지대에서는 3~10헥타르의 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낙타와 말은 대형 가축이니까 이보다 최소 10배이상의 초지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렇다면 5인 가족 1가구가 필요로 하는 최소 가축 수를 말 25마리로 할 때 중동초원일 경우에도 최소 250헥타르, 사막 지대 라면 최대 약 2천500헥타르의 초지가 필요하다. 가라지스탄에 서처럼 1인당 최소 가축 수를 양 10마리, 낙타 1마리로 잡을 때도 5인 가족 한 가구가 필요로 하는 초지는 최소 100헥타르에서 최대 1천 헥타르 이상이다. 그렇다면 몽골 유목족들이 그렇게 천시하고 짓밝았던 농경을 할 경우 같은 땅의 생산력은 얼마일까? 땅 1헥타르의 10분의 1인 10아르(300평)는 목축을 할 경우 아마 토끼 한 마리를 기르기에도 부족한 면적일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이 현대 농업기술로 벼농사가 가능한 지역이라면 벼 단작만으로도 현미가 약 391킬로그램이나 생산되고, 만일 이모작까지 가능한 지역이라면 밀이 약 345.7킬로그램이나 추가로 생산되어 알곡의 생산 총량이 736.7킬로그램이나 된다. 이는 지금의 곡류 소비량으로는 최소 5~10인의 1년 식량이 되고 채소, 과일, 생선, 고기 등의 부식이 매우 귀해서 칼로리 섭취를 거의 전적으로 곡류에만 의존했던 전통시대에도 2인 이상의 1년 식량이 된다. 유목으로 생계를 꾸려갈 경우는 5인 가족 1가구당 아무리 저게 잡아도 100헥타르 이상의 땅이 필요한데, 농경으로 살 경우에는 현대적 집약농업 아닌 전통적 조방농경으로 하더라도 이모작이 가능한 논은 30아르(900평)가 필요하고, 일모작의 저습담일 경우데도 그 2배인 60아르(1천800평)면 된다. 1아르=30평
고조선의 유물로는 평양 일대에서 출토된 세형동검이 있는데 이 세형동검의 문화 상한선도 기원후 3세기에서 4세기를 넘지 못한다. 그러나 세형동검이 원형인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분포된 지역은 마주의 요령성(遼寧省 일대다. 연에 패배하여 평양애 천도하기 전 고조선의 초기 중심지가 어디인지 확실하게 비정된 바는 없지만, 이 비파형동검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요하 하류 동편에 있는 해성개평(海城蓋平) 방면 어디인 것은 틀림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성립 상한 연대는 비파형동검의 상한 연대와 같이 기원전 10세기가 된다. 북한 학계도 요동반도 끝 여대시(旅大市) 감정자구(甘井子구) 후목성(后牧城)에 있는 기원전 8세기경의 강상 무덤의 발굴에 의거하여 고조선의 기원을 기원전 10세기경으로 잡고 있다. 22개의 무덤구덩이에는 수많은 순장자가 묻혀 있었고, 그 중 7호 무덤은 순장자가 무려 100여명인 것으로 보아 그 무덤의 주인공은 그 많은 순장자를 가질 만큼 노예제가 발전한 노예제 국가의 귀족일것으로 추정했다.
각지에서 발견된 앙소 분묘의 부장품에서는 빈부의 차이를 발견할수 없었다. 섬서성 보계현(寶鷄縣) 북수령(北首嶺)의 분묘 유적에서는 400구에 가까운 시신이 발굴되었는데, 모두 여성 분묘에 부장품이 많은 , 여성 중심의 매장지였다고 한다. 이로써 앙소 문명기는 모계중심사회로 마을 정치는 각 씨족의 장로에 의해 운영되는 자치공동체 사회임이 규명되었다.
용산문화는...매장법과 부장품에서도 크게 차이가 있어 빈부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또 남성 묘에서 많은 부장품이 발견된 데 비해 여성묘에는 부장품이 없어 이전의 모계사회에서 남성 중심 부계사회로의 이행을 보여주었다.
은 왕조의 유적에서 발견된 대량의 갑골문자에서는 하늘에 대한 제사의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타난 최고신으로 보이는 '제(帝)'라는 문자는 후대에 말하는 천제(天帝) 또는 상제(上帝)가 아니라 부족신의 조상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천(天) 숭배 사상은 기원전 11세기에 은을 정복하고 세워진 주 왕조에 와서 확립된다. 천 숭배 사상은 농경민의 사상이 아니다. 물론 고대 중국 고유의 사상도 아니다. 그것은 원래 유목민의 사상이다. 그것은 중국 인근의 유목민에게만 한정된 사상도 아니고 중동과 근동, 그리고 유라시아 대륙의 사막이나 초원에 거처하는 세계의 모든 유목민들의 보편적인 사상이다.
통일 왕조의 이집트 국왕은 실로 막강한 권력으로 국민과 모든 산업을 지배한다. 국민은 농업과 목축에 종사하는 농민과 파피루스나 공예품을 제작하는 기술자로 분류되고, 막대한 부를 창출하는 교역과 상업은 모두 왕실이 독점했다. 이집트는 교역에 토대한 왕조인 셈이다. 그래서 이집트에서는 왕조의 최후까지도 상인 계급이 발달하지 못한다.
수메르인들의 지역에서는 기원전 2800년대까지 그들의 도시국가들에서 다양한 경제적 역할을 맡은 시민들이 공존하고 있었지만, 계급적 구분과 차별은 거의 없었다. 도시 지도자들은 시민 모임에서 선출되었고, 세급 귀족이나 왕권은 아직 없었다. 사제들이 행정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했지만, 특별한 계급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도 전쟁포로를 죽이기보다는 살려서 노예로 삼아 그 노동력을 활용했다.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소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이 크레타 섬 중심에 청동기 문명인 미노아 왕국을 세웠다. 그리고 기원전 2000년경부터는 유럽어족의 일파인 아카이아인이 발칸반도의 그리스로 남하하여 선주민의 미노아 문명과 섞여 공존하다 그 세력을 키워 자신들의 북방적 문명을 혼합하여 독자적인 미케네 문명을 만든다. 이 아카이아인들이 세운 국가들 중에서 가장 강대한 왕국이 미케네 왕국이었다. 아카이아인들의 미케네는 기원전 1400년경에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인 크레타(미노스) 왕국을 대신하여 에게 해 일대에 세력을 확장, 오리엔트식의 정치구조를 취한 미케네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하면 기원전 1200년경 왕국의 왕궁과 주거지들은 화재와 파괴로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것은 기원전 1200년 무렵 두번째로 발칸반도로 남하하기 시작한, 도리아계 방언을 쓰는 동족(그리스인)에 의해서일 것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아직도 청동기를 쓰던 미케네는 철제무기를 쓰고 자유로운 전사들로 구성된 씨족공동체인 도리아인들에 의해 정복되었을 것이다. 도리아인들도 아카이아인들과 같이 기원전 2000년경 발칸반도에 남하한 유목민이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그리스 서북부에 머물다 기원전 1200년경에 철기 문명을 받아들여 이것을 앞세우고 그리스 본토로 진출했던 것이다. 그들은 기원전 1200년에서 1100년 사이에 미케네 왕국을 포함,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있던 미케네 문명의 요충지를 거의 점령한다. 이리하여 오리엔트식 사회구조를 지녔던 그리스의 청동기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 결과 그리스에는 오리엔트식 국가 조직이 소멸되고 이주와 전쟁이 일상화되는 이른바 암흑기가 오랫동안 계속된다. 이 암흑시대를 벗어나 그리스에 새로운 도시국가 형태가 출현한 시기가 기원전 8세기 전후다.
노르테 치코는 지구상에서 정부가 최초로 만들어진 두 곳 중 하나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모두 정부를 이어 받았을 뿐이죠. 다른 사람들은 정부가 있는 사회에서 태어났거나 주변의 정부를 보고 그 개념을 모방한 것입니다. 하지만 노르테 치코 사람들은 정부라는 개념을 스스로 만들어냈습니다. 노르테 치코는 중앙아메리카의 마야 문명과는 완전히 별개로 지금의 페루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한,...
찰스 만, 전지나 옮김,『목민심서』(오래된미래, 2005), 273~274쪽.
(미국) 남부 지역...카호키아는 북아메리카 농경문화의 중심지로 번영이 절정에 달했던 서기 700년에서 1400년 사이 약 4만 명이 정주했던,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도시였다. 카호키아는 사방 60리의 광대한 지역에 120개의 흙무덤(mound, 土)을 남겼는데, 그 중 최대 규모는 몬크스 만운드(Monk's Mound)다. 이 흙무덤은 기초의 넓이가 1맘 9천500평, 높이가 약 31미터이다. 이 규모는 이집트의 기제 피라미드보다 큰 규모다. 이 마운드는 천문학적,수학적 원리에 따라 만들었는데, 남쪽에는 정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고 정상에는 원주민들이 신앙하는 태양신을 받드는 지배자 신관의 저택과 신전이 남향으로 지어져 있었다고 한다. 카호키아 고분에서는 한 무덤 속에 무려 300명의 젊은 여인의 유골이 있었고, 지배자로 보이는 45세 전후의 남성의 유골은 2만 개가 넘는 조개구슬로 장식된 담요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또 이 남성 옆에는 4명의 남성과 15세에서 25세로 보이는 젊은 여인들의 순장유골도 53구나 발견되었다. 이런 무덤 양식으로 보아 북아메리카 인디언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도 왕국까지는 아니지만 계급과 신분 차별이 뚜렷해지는 군장사회 또는 부족연맹체 사회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카호키아 문명은 역시 이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것은 기원전 600년경에 멕시코 중남부의 중앙아메리카인 중에서 나후아틀어를 썼던 톨택 이주자들이 건설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왕국(가나)이 정확히 언제 탄생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서기 8세기 아랍 저술가들이 이 왕국에 대한 기록을 남긴 것으로 미루어 8세기 이전에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가나의 왕은 군장국가들과 소규모 부족공동체들로 이루어진 느슨한 연맹체를 관할했을 뿐 실질적인 권력은 거의 없어쓸 것으로 보인다. 11세기에는 그 군장사회들이 해체되어 두 세기 동안 끊임없이 다투다가 순디아타라는 유능한 군장 통치자가 나와 1230년니제르 강변의 말리에서 말리왕국을 세웠다. 말리는 금과 상아의 교역을 바탕으로 한때 번영했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전에는 유럼 금의 3분의 2 이상을 말리와 그 이웃들이 공급했다. 교역으로 세를 키운 니제르 강변의 교역 중심지인 가오의 지도자들은 말리에 반기를 들고 1340년 송하이 왕국을 세우고 말리를 대체한다. 그러나 송하이도 유럽 금의 보급지가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대체되자 155
0년 몰락하고, 정치 권력의 중심지는 지금의 가나, 나이지리아, 코트디부아르에 해당하는 남쪽의 열대우림과 해안지방으로 옮겨가 금, 상아, 노예 교역을 주도하게 된다.
필방조(畢方鳥) , 판천(阪泉) , 상류(相柳) , 무지기(無支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