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연원을 은인, 즉 상이으로 보려는 의도가 보이고....
"해내", 또는 "4해"로 불리는 구역도 존재하였는데, 이것은 "9주"안에 더 커다란 하나의 구역을 포하마여 황제(천자)가 주재하는 천하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9주"의 밖인 "4해" 안에 분포하면서 한나라 왕조와 "신속" 관계를 유지하는 여러 변경 민족으로서 "외신" 또는 "번신", "번부"라고 불렀다. 다른 하나는 한나라 왕조와 신속 관계가 없거나 그 관계가 밀접하지 않은 민족 정권이었다.
선진 시기 "9주"의 범위는 대체로 왕기와 제후의 통치 구역을 포함한 것이었는데, 진한 시기에는 구현을 실시하는 모든 구역이 포함되었다.
"9주" 또는 "중국"의 범위에 모든 군현이 포함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 없이 자명한 것이다.
서역도위는 신작 3년(서기전 59)에 처름 실치한 것으로
호오환 교위는 원수 4년(서기전 119)에 설치한 것으로
호강 교위는 원정 6년(서기전 111)에 설치하였으며
속국도위는 원수 3년(서기전 120)에 설치
사흉노 중랑장은 동한 건무 26년(50)에 설치하였으며 남흉노를 관할하는 기구였다.
흉노는... 감로2년(서기전 52) 이후에야 한 왕조의 책봉블 받아들여...
서한 초기 백월은 장기간에 걸친 겸병으로 세개의 커다란 집단인 민월, 동구, 남월이 형성되었다. 민월, 동구는일찍이 초한 전쟁 때 유방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군대를 파견하여 서한이 항우를 공격하는 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한 고조 유방은 5년(서기전 202)에 무제를 밀월왕으로 책립하고 요를 동해왕으로 책립하여 동구왕이라고 불렀다.
감로 원년(서기전 53) 호한야 선우가 우현왕을 파견하여 한에 항복해왔지만 정식으로 서한에 "번신"을 칭한 것은 감로 2년(서기전 52)이었다.
예의상으로...(禮儀宜)
신당서 지리지의 기록을 보면 "당나라의 전성기는 개원(713~741), 천보(742~755)때인데, 동으로는 안동에 이르고, 서로는 안서에 이르렀으며, 남쪽으로는 일남에, 북으로는 선우부에 이를렀으니, 대개 남북으로는 한나라의 전성기와 같았고, 동으로는 미치지 못하였으며, 서쪽으로는 좀 더 커졌다"....
정관 14년(640) 후군집(侯君集)이 고창을 평정하고, 서주(안서)도호부에 이르렀다. 치소는 서주에 있다. 현경 2년(657) 11월 소정방이 하로를 평정하고, 그 땅을 나누어 몽지와 곤릉 2도호부를 두었다.
정관 21년(647) 연연도호부[치소는 지금의 내몽골 자치구 오랍특중후연합기]를 설치..한해(瀚海) 같은 6도독부와 고란(皐蘭) 같은 7주를 통솔 하였다.
영휘 원년(650) 당 왕조는 돌궐 차비가한을 멸망시키고, "이때 동궐이 모두 당나라 안의 신하가 되었으며, 선우와 한해 2도호부를 나누어 배치하였다. 선우도호부는 랑상(狼山), 운중, 산강(桑干) 3도독과 소농 같은 14주를 거느렸고, 한해도후부는 한해, 금휘, 신려 같은 7도독과 선악 같은 8주를 거느렸으니, 각자 추장들과 자사와 도독으로 삼았다.
용삭 3년(663)에는 "2월, 연연도호부를 회홀 땅으로 옮기고, 이름을 한해도호로 바꾸었다. 운중고성에서 옛 한해도호가 옮겨가자, 그곳을 다시 운중도호로 이름을 바꾸고, 적을 경계로 삼았다. 적 북쪽의 주와 부는 모두 한해도호에 예속시키고, 적 남쪽은 운중도호에 예속시켰다.
인덕 원년(664) 운중도호를 선우도호로 이름을 바꾸고 총장 2년(669)에는 한해도호를 안북도호로 이름을 바꾸는데,....
조로 원년(679) 교주도독부를 안남도호부로 이름을 고쳐...
장안 2년(702) 당 왕조는 서역에 북정 도호부를 설치하여...
당 왕조의 사신은 황제의 성지를 받들어 "조칙(詔勅)"이라고 부르지 않고 "서(書)"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두 정권이 서로 평등한 지위에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신은 자기 총치자를 대하는 예의에 따라 상대방 통치자를 대해야 한기 때문에 꿇어앉아 절(跪拜)를 해야 한다.
상인은 우리나라 동부 지역에서 기원...
최유가 눈을 부릅뜨고 나무라면서 주먹으로 (고구려 왕인) 성을 쳐 용상 밑으로 떨어뜨리자 성의 좌우 신하들이 숨을 죽이고 감히 꼼짝도 못한 채 사죄하고 복종하였다. 북사 고구려전
삼국사기 가 써지기 이전 왕시 고려의 통치자 역시 고구려 왕계에 "騶"라고 불리는 국왕이 있었다고 여기고 있었다는 점에서 잘 증명된다.
송 원봉 5년(1082) 고려 왕정의 "고려세차"에는 분명하게 "추(騶)라는 이름이 나타난다.
한대의 "새(塞)"는 장성을 가리키는 것...
현도, 낙랑, 진번, 임둔은 장성 밖으로 소위 "새외"에 있었기 때문...
고구려 15만 호에 해당하는 거의 80만 명, 즉 고구려 전체 이구의 8분의 1에 못미치는 인원이 지금의 신라 정권에 들어가...
고(高)는 광운에서 古(gu)음과 勞(lao)음을 합친 것이고 지운에서는 居(ju)와 勞(lao)음을 합친 것으로 나온다. 구(句)는 음이 ju이나 군국 지명에서는 gou로 읽히며 광운에서는 古(gu) 음과 侯(hou)음을 합친 것, 집운에서는 居(ju)음과 侯(hou)음을 합친 것이다. 광운에서든 집운에서든 고(高) 구(句)는 쌍성자로 모두 통할 수 있다.
고(高)는 고(古)와 노(勞)의 발절이며, 구(句)는 고(古)음과 후(侯)의 반절이다. 고(高) 와 구(句)는 쌍성자이다. 고구려는 고-구려로 읽을 수 있고, 고구-려로도 읽을 수 있으며, 빨리 읽으면 구(句)-려(麗)는 서로 비슷하다.
후한서 고구려 전에는 동한 안제 건무 원년(121)에 "이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이 왕이 되었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민중왕(44~48)
모본왕(48~53)
태조대왕(53~121)
차대왕(121~126)
신대왕(126~179)
고국천왕(179~197)
산상왕(197~227)
동천왕(227~248)
중천왕(248~270)
서천왕(270~292)
봉상왕(292~300)
미천왕(300~331)
고국원왕(331~371)
소수림왕(371~384)
고국양왕(384~391)
반절이란 한자로 한자 읽는 법을 나타내는 방법인데, 총성이 같은 글자와 중성과 종성이 같은 글자 두 자로 나타낸다. 여기서 고(高)는 古(gu)의 초성과 勞(lao)의 중성 종성을 따서 'gao' 라고 읽는다는 것이며, 구(句)자는 古(gu)의 초성과 侯(hou)의 중성 종성을 따서 'gou'라고 읽어 결국 고구(高句)를 'gaogou'라ㅣ고 읽는 다는 뜻이다.
첫댓글 씨앗말을 찾아서 , 골[배산 임수의 집단 거주지] = 고올 [ 그 거주지의 높은곣에 성을 쌓고 지역을 관할하는 지역의 우두머리 집단 거주지 ] = 고래 [고구려 부족이 사용한 난방형태 ] = 구리 [ 고구려 선조들중 장인무사 계급이 채광 단련한 금속] 구이=[불에 굽다] 우리[성 울타리]우리다[나쁜 독을 빼내다] 굴 = [굴 , 혈거지 . 무덤] 고구려는 단군 열국후 지배계급이 재규합 국가 변방의 성주는 국경을 수비하며 과세하되 성외의 송사에 관여안함. 고구려 주 거주지는 모두 수운이 가능한 지역에 있고 주 생산 계급의 하나인 말갈 = [물길 水路 로서 제염과 어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