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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칠리아 왕국(Regno di Sicilia, 1130년∼1816년)
서기 1130년 교황 호노리우스 2세가 죽자 그 후계자리를 놓고 추기경단이 젊은층과 노년층으로 분열하여 각각 인노켄티우스와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를 지지하면서 대립하기 시작했다. 먼저 인노켄티우스가 젊은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아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로 선출되어 서둘러 교황 축성까지 받았지만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년층 추기경들이 인노켄티우스 2세를 인정하지 않고 별도로 피에트로 피에를레오니를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로 선출한 뒤 인노켄티우스 2세를 로마에서 축출했다. 그러나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각각 독일 교회와 프랑스 교회에 큰 영향력을 보유한 작센 마크데부르크의 대주교 노르베르와 샹파뉴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베르나르두스의 지지를 받아 서기 1130년 프랑스의 에탕프 공의회에서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받았다.
결정적으로 신성로마황제 로타르 2세가 작센 마크데부르크의 대주교 노르베르의 설득에 따라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를 지지하기로 결정하면서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의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는 유일하게 자신을 도와줄 만한 우호 세력인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장악하고 있던 노르만족의 루지에로 2세에게 도움을 청했고 루지에로 2세는 정식으로 왕호를 인정받는 대가로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를 지지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루지에로 2세는 서기 1130년 크리스마스에 팔레르모 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면서 시칠리아 왕으로 정식 즉위하였다.
이렇게 하여 비록 루지에로 2세는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를 통해서 그토록 원하던 왕위를 손에 넣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를 지지하던 샹파뉴 클레르보의 수도원장 베르나르두스가 프랑스 왕 루이 6세, 잉글랜드 왕 헨리 1세, 신성로마황제 로타르 2세의 연합을 이끌어내고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와 시칠리아의 왕 루지에로 2세를 적대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탈리아 남부의 곳곳에서 루지에로 2세의 지배에 항거하는 반란이 일어나면서 10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루지에로 2세는 서기 1130년 먼저 아말피 공작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듬해 육상과 해상에서 포위망을 형성하여 손쉽게 진압하였다. 서기 1132년에는 바리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둘째아들 탕크레드를 새로운 바리 공작으로 삼았다. 그렇지만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 2세를 지원하기 위해 카푸아 공작 로베르 2세와 알리페 공작 라눌프 2세를 로마로 보냈을 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그 사이 라눌프 2세의 아내이자 루지에로 2세의 여동생인 마틸다가 남편의 학대를 고발하자 화가 난 루지에로 2세가 라눌프 2세의 형제 영지인 아벨리노를 점령하는 사태가 일어났고 라눌프 2세는 즉각 항의하였으나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카푸아의 로베르 2세와 함께 로마를 떠나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 측에 가담해 버렸다. 라눌프 2세는 교황군을 이끌고 되돌아왔고 루지에로 2세는 서기 1132년 7월에 벌어진 노체라 전투에서 일생일대의 패배를 당하고 근거지인 살레르노로 퇴각해야만 했다.
이듬해 신성로마황제 로타르 2세가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자 라눌프 2세를 비롯한 반란군 수장들이 로타르 2세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로타르 2세는 자신이 직접 이끌고 온 군대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았고 독일에서 로타르 2세에게 맞서는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반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라눌프 2세의 요청을 거절했다. 이에 서기 1134년까지 루지에로 2세의 군대가 반란군을 다시 압박하여 카푸아를 점령하고 자신의 다른 아들인 알폰소를 새로운 카푸아의 공작으로 임명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장자인 동명의 루지에로에게 풀리아 공작 작위를 부여하였다. 하지만 서기 1135년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항복을 받아낸 로타르 2세가 루지에로 2세의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의 요청에 따라 본격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향하면서 전황이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로타르 2세가 본격적으로 개입하자 루지에로 2세와 적대적이었던 피사와 제노바, 동로마 제국도 반란군을 지원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루지에로 2세가 병을 얻어 시칠리아 섬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도 못했다. 이에 힘을 얻은 반란군은 카푸아를 공략하였고 아베르사를 점령하였으며 라눌프 2세의 근거지였던 알리페마저 탈환하였다. 그리고 서기 1136년 본격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합류하였으나 루지에로 2세가 여전히 시칠리아 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전황은 루지에로 2세에게 극도로 불리해져만 갔다. 로타르 2세는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인 살레르노를 함락시켰고 이듬해 바리마저 점령하면서 풀리아 전역을 거의 장악한 후 라눌프 2세를 풀리아의 공작으로 임명하고 일단 철군하였다. 그러나 로타르 2세가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던 중 사망하면서 루지에로 2세는 기사회생의 기회를 다시 얻게 되었다.
루지에로 2세는 시칠리아에서 모집한 기사 400명과 주로 이슬람 무슬림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칼라브리아 지방의 트로페아에 상륙하여 포추올리와 알리페, 카푸아, 아벨리노를 차례로 공격하고 캄파니아 지방을 수복하였으며 공포에 질린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 7세로부터 즉각 항복을 받아냈다. 그러나 풀리아 북부에서는 세력이 많이 꺾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사 1,500명을 보유한 라눌프 2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다. 이미 서기 1132년 노체라 전투에서 루지에로 2세에게 대승을 거둔 경험이 있던 라눌프 2세는 서기 1137년 리그나노 전투에서 다시 한 번 루지에로 2세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는 데 성공했다.
라눌프 2세에게 2번이나 대패를 경험하게 된 루지에로 2세는 작전을 바꿔 라눌프 2세 군대와의 전면전을 피한 채 군대를 분산시켜 지형을 따라 이동시킨 후 동시에 반란군의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라눌프 2세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기만 할 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그 사이 루지에로 2세가 반란군 성들을 모두 파괴하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는 데 성공하였다. 비록 라눌프 2세는 도망쳤으나 이듬해인 서기 1139년 고열로 사망하였고 같은 해에 나폴리 공작 세르기우스 7세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약 10년간 루지에로 2세를 괴롭혔던 반란이 모두 종식되었다.
서기 1138년 대립교황 아나클레투스가 죽었기 때문에 이제 루지에로 2세는 신임 로마교황인 인노켄티우스 2세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그러나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가 카푸아 공국을 시칠리아 왕국과 로마교황령 사이의 완충 지대로 독립시킬 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다시 분쟁이 발생했다. 결국 서기 1139년 다시 한 번 교황군과 노르만군이 격돌하였고 여기에서 루지에로 2세의 동명의 아들 루지에로가 이끄는 군대가 대승을 거두고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를 포로로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루지에로 2세의 위협에 굴복한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2세는 정식으로 루지에로 2세를 “시칠리아의 왕이자 풀리아의 백작이며 카푸아의 공작”으로 선포하였다. 이렇게 하여 시칠리아 왕국이 정식으로 공인받았고 이때 정해진 영토는 향후 500년 동안 유지된다.
이제 루지에로 2세는 지중해를 연한 나라를 건설한 만큼 해군 육성에도 힘을 써서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공국 출신의 조르주를 최초의 제독으로 임명하였다. 조르주는 시칠리아 해군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 이슬람의 무와히드 왕조(알모아데 왕조)이 지배하던 북아프리카의 튀니지 지방의 대부분을 점령하도록 하여 비공식적인 국가인 '아프리카 왕국(Kingdom of Africa)'을 건설하였다. 비록 시칠리아 왕국의 북아프리카 영토의 지배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시칠리아 왕국에 큰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밖에도 조르주의 해군은 코르푸 섬을 함락시켰고 그리스 해안을 공격했으며 대담하게도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명실상부한 유럽의 강력한 군주 중 한 명이 된 루지에로 2세는 서기 1140년에 이른바 아리아노 조례를 반포하여 자신만의 통치 철학을 성문화하였다. 그리고 노르만족, 프랑크족, 이슬람 무슬림이 모두 섞여 있는 다인종 국가였던 시칠리아 왕국을 통치하면서 모든 인종을 편견없이 중용하고 종교적으로 관용을 베풀며 학문을 장려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루지에로 2세의 치세 마지막 15년 동안 시칠리아의 팔레르모 궁정은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로 붐비게 되었고 시칠리아 왕국은 북유럽의 노르만 문화, 이탈리아의 라틴 문화뿐만 아니라 이슬람 문화,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 문화가 서로 어울려진 격조 높은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게 되었다.
서기 1154년 루지에로 2세가 향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 굴리엘모 1세가 시칠리아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굴리엘모 1세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굴리엘모 1세가 로마교황령인 베네벤토로 진군했으나 패배한 채 오히려 파문만 당하고 말았다. 여기에 서기 1155년 풀리아 귀족들이 더 이상의 오트빌 가문의 지배에 반대하여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노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이에 이탈리아 남부로 파견된 동로마 제국의 장군인 미카일 팔라이올로구스가 바리, 트라니, 지오비나초, 안드리아, 타란토를 삽시간에 장악했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와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면서 굴리엘모 1세에게 반격의 기회가 찾아왔다. 서기 1156년 굴리엘모 1세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서 이탈리아 남부의 대부분을 회복했고 로마교황령인 베네벤토로 다시 한 번 진격하여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를 압박하였다. 이제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도 어쩔 수 없이 굴리엘모 1세를 시칠리아 섬 및 이탈리아 남부의 카푸아와 나폴리의 통치자로 인정했고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도 굴리엘모 1세와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서기 1159년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가 선종하고 추기경단이 다시 둘로 나뉘어 대다수는 알렉산데르 3세를 로마교황으로 선출했지만 일부에서는 대립교황 빅토리우스 4세를 내세우는 일이 벌어졌다.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빅토리우스 4세를 지지하자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어쩔 수 없이 세력 균형을 위해 굴리엘모 1세의 지지를 요청해야만 했다. 이후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비록 프리드리히 1세에게 밀려 프랑스로 도피해야 했지만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지지를 받아내면서 합법적인 교황으로 인정받았다. 그리고 서기 1164년 대립교황 빅토리우스 4세가 죽자 서기 1165년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새로운 대립교황 파스칼리스 3세를 몰아내고 로마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굴리엘모 1세가 로마교황청의 내분에 개입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탄탄히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서기 1066년 사망하였기 때문에 11살에 불과한 그의 아들 굴리엘모 2세가 즉위하게 되었다.
서기 1066년 즉위 당시 굴리엘모 2세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의 모후인 마르가레토가 섭정이 되었고 서기 1171년 16세가 되어서야 직접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서기 1152년 독일 왕으로 선출되어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창건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가 4차례나 북이탈리아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여 북이탈리아의 자치 도시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1세가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와 대립하자 밀라노, 베네치아, 만토바, 파도바, 브레시아, 로디 등의 북이탈리아 자치 도시들이 서기 1167년 12월 1일 롬바르디아 동맹(Lega Lombarda)을 결성하여 프리드리히 1세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3세도 롬바르디아 동맹과 연대하였고 굴리엘모 2세도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를 견제하기 위해 롬바르디아 동맹을 지원하였다.
롬바르디아 동맹은 세력을 계속해서 확장시켜 가맹도시를 20개까지 늘렸고 굴리엘모 2세는 서기 1174년 제노바와, 서기 1175년 베네치아와 각각 동맹을 맺었다. 이후 롬바르디아 동맹은 서기 1174년 프리드리히 1세의 5번째 북이탈리아 원정을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고 여세를 몰아 서기 1176년 단행된 프리드리히 1세의 6번째 북이탈리아 원정을 상대로 레냐노 전투에서 완승을 거뒀다. 그동안 프리드리히 1세가 북이탈리아와 로마교황령에 대한 영향력을 넘어서 남이탈리아까지 넘보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제 굴리엘모 2세는 외교 정책만으로 프리드리히 1세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더욱이 굴리엘모 2세는 서기 1177년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딸인 조안나와 결혼하면서 유럽 왕가에 대한 자신의 입지를 더욱 높이게 되었다.
서기 1180년 동로마 황제 마누엘 1세가 사망하고 10살에 불과한 그의 아들인 알렉시우스 2세가 황제가 되었으나 서기 1183년 마누엘 1세의 친척인 안드로니쿠스 콤네누스가 서기 1182년 반란을 일으켜 알렉시우스 2세를 살해하고 동로마 황제 안드로니쿠스 1세로 즉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안드로니쿠스 1세가 공포 정치를 자행하면서 헝가리가 침공하고 세르비아가 독립하였으며 키프로스 섬과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다. 이에 굴리엘모 2세는 서기 1185년 사촌인 탕크레드에게 200여척의 함대를 이끌고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두라초를 점령하도록 했다.
이제 두라초에 상륙한 노르만 군 8만명이 테살로니키 일대를 약탈한 뒤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거침없이 진군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부터 불과 300km 떨어진 모시노폴리스까지 접근하였다. 그 사이 동로마 제국에서 반란이 일어나 무능한 안드로니쿠스 1세가 처형되고 대신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의 군사 귀족인 앙겔루스 가문 출신인 이사키우스 2세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이사키오스 2세가 보낸 장군 알렉시우스 브라나스가 시칠리아 왕국의 군대를 물리치면서 동로마 제국은 위기에서 벗어났고 굴리엘모 2세도 어쩔 수 없이 강화조약을 체결해야만 하였다. 오히려 서기 1189년 굴리엘모 2세가 34세의 젊은 나이에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시칠리아 왕국의 앞날이 불투명해졌다.
굴리엘모 2세가 사망한 뒤 동로마 제국의 침공군을 이끌었던 사촌 탕크레드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탕크레드는 굴리엘모 2세의 미망인인 조안나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감옥에 투옥시키고 모든 재산을 몰수해버렸지만 서기 1190년 9월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기 위해 항해 중이던 조안나의 오빠이자 잉글랜드 왕인 리처드 1세가 시칠리아 섬에 정박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리처드 1세는 조안나의 투옥에 항의하며 서기 1190년 10월 시칠리아 섬의 메시나를 함락시켜 버렸고 이후 메시나에 머무르며 탕크레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탕크레드가 굴복하여 이듬해 4월 조안나를 석방하고 그녀의 재산을 모두 돌려줬으며 자신의 딸을 리처드 1세의 조카인 브르타뉴의 아서와 결혼시키기로 합의하는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탕크레드의 2번째 위기는 신성로마제국의 공격이었다.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였다가 익사한 프리드리히 1세의 뒤를 이어 새로운 신성로마황제가 된 하인리히 6세가 자신의 황후가 바로 루지에로 2세의 딸인 콘스탄차인 점을 내세워 시칠리아 왕위에 대한 상속권을 요구하고 나섰고 이탈리아 남부를 침공하여 나폴리를 포위했다. 하지만 시칠리아 왕국의 귀족들은 탕크레드를 왕으로 인정했고 독일 내부에서도 사자공 하인리히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6세도 일단 물러났다. 그러나 이후로도 하인리히 6세는 계속해서 시칠리아 왕국을 포기하지 않았고 공동왕으로 임명되었던 탕크레드의 장남인 루지에로 3세가 서기 1193년 사망하고 이듬해 탕크레드도 세상을 떠나면서 7살에 불과한 탕크레드의 차남인 굴리엘모 3세가 즉위하게 되자 다시 한 번 시칠리아 왕국을 노리기 시작했다.
제3차 십자군에 참여하였던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가 회군 중에 풍랑을 만나 베네치아 근처에 난파하고 제3차 십자군 당시 불화를 겪었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에게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리처드 1세의 신변을 넘겨받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6세는 석방의 조건으로 리처드 1세에게 봉신 서약을 받았고 막대한 석방 보상금도 지급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하인리히 6세는 재정적으로 풍족해졌고 북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동맹도시들과도 베르첼리 조약을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거침없이 이탈리아를 관통하며 내려왔다. 그리고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여 서기 1194년 11월 팔레르모를 점령한 후 굴리엘모 3세의 눈을 멀게 하고 수많은 시칠리아 왕국의 귀족들도 살해하였다. 이제 하인리히 3세가 황후 콘스탄차와 함께 시칠리아의 공동왕으로 즉위하면서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노르만족의 지배가 끝나고 신성로마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새로운 지배를 받게 되었다.
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한 하인리히 6세가 서기 1197년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의 3살짜리 어린 아들인 프리드리히 2세(이탈리아 이름은 페데리코 2세)가 모후인 콘스탄차와 함께 시칠리아 왕국의 공동왕이 되었다. 하지만 독일 제후들의 반대로 인해 독일 왕위를 이어받지는 못했고 대신하여 벨프 가문의 오토 4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오토 4세는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시칠리아 왕국을 넘보지 않기로 약속하고 서기 1209년 황제의 대관식까지 치뤘으나 곧바로 약속을 어기고 이탈리아 남부로 진군하여 서기 1210년 11월 이탈리아 남부를 모두 점령해 버렸기 때문에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파문을 당해야 했다.
이제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독일 왕으로 오토 4세가 아닌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한다고 선언하였고 본래부터 호엔슈타우펜 왕가를 지지하던 독일 남부의 제후들이 프리드리히 2세의 편으로 돌아서면서 독일은 내전에 돌입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오토 4세가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 및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대립하던 잉글랜드 왕 존과 연합하여 서기 1214년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를 계기로 오토 4세의 세력이 크게 축소되면서 서기 1215년 폐위되었고 프리드리히 2세가 정식으로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가 서기 1220년에는 대관식을 치르고 신성로마황제가 되면서 시칠리아 왕국은 다시 신성로마제국에 편입되었다.
한편 프리드리히 2세는 황제 대관식의 조건으로 로마교황 호노리우스 3세에게 십자군 원정을 약속했지만 막상 대관식을 치른 이후에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결국 로마교황 호노리우스 3세의 파문 위협을 받은 후인 서기 1228년 6월이 되어서야 브린디시 항구를 떠나 십자군 원정에 나섰지만 군사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예루살렘을 영유하고 있던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과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요새화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넘겨받고 귀환하였다. 독일로 돌아온 프리드리히 2세는 서기 1237년 북이탈리아를 공격하면서 로마교황청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프리드리히 2세의 위협을 피해 프랑스의 리옹으로 피신한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서기 1245년 프리드리히 2세를 파문하였다.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한 파문을 계기로 독일에서 튀링겐 백작 하인리히 라스페가 대립왕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오스트리아 공작령을 비롯한 독일 남부와 시칠리아 왕국은 여전히 그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로마교황 및 독일의 대립왕과의 분쟁을 해결하지 못한 채 서기 1250년 12월 프리드리히 2세가 향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하면서 그의 신성로마황제와 시칠리아 및 이탈리아의 왕위는 적장자인 콘라트 4세에게 상속되었다. 다만 프리드리히 2세는 콘라트 4세가 독일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또다른 아들인 만프레디를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으로 지명했다.
콘라트 4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가 만프레디를 시칠리아 왕국의 섭정으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서기 1252년 나폴리를 무력으로 점령하며 만프레디의 힘을 약화시켰지만 서기 1254년 갑자기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 및 콘라트 4세와 대립하던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만프레디에서 시칠리아 왕국을 로마교황령으로 넘기도록 요구했으나 만프레디는 콘라트 4세의 유일한 자식으로 독일에 머물고 있던 2살짜리 콘라딘을 시칠리아 왕으로 선언하고 스스로 섭정이 되어 시칠리아 왕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 그리고 풀리아를 로마교황령으로 넘기는 조건으로 화해를 추진하였으나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이를 인정하지 않은 채 오히려 만프레디를 파문했고 교황군을 파견하여 무력으로 시칠리아 왕국을 점령하고자 했다.
본래 시칠리아는 노르만족의 지배 이전까지 이슬람 세력이 장악했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이슬람 세력이 상당수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만프레디에 대한 로마교황의 파문이 이슬람 세력에게는 효력이 없었다. 오히려 만프레디는 교황군을 피해 루체라의 이슬람 세력으로 피신한 후 이슬람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서서 서기 1254년 12월 2일 포자 전투에서 교황군을 물리치고 시칠리아 왕국을 수복하는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5일뒤 로마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선종하고 후임 로마교황으로 선출된 알렉산데르 4세 역시 만프레디를 적대했으나 무력으로 시칠리아 왕국을 병합하기보다는 다른 우호적인 세력을 끌어들이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처음에는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동생인 콘월 공작 윌리엄에게 접근했으나 거절당하자 헨리 2세와 직접 협상을 벌여 그의 차남인 에드먼드를 시칠리아 왕으로 임명하는 대신에 막대한 지원금을 받아 내었다.
그렇지만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4세와 잉글랜드왕 헨리 2세 사이의 협상과 무관하게 만프레디의 시칠리아 왕국에 대한 지배권은 흔들림이 없었다. 더욱이 서기 1258년 8월 콘라딘이 사망했다는 거짓 소문이 돌자 만프레디는 팔레르모에서 정식으로 시칠리아 왕위에 올랐고 이후 콘라딘이 살아있음이 밝혀졌지만 번복되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4세를 견제하기 위해 북이탈리아의 상업도시 중 교황권에 대한 황제권의 우위를 인정하는 토스카나, 스폴레토, 로마냐 등의 일명 기벨린 도시들과 연합하여 오히려 롬바르디아 동맹의 맹주가 되었다. 또한 만프레디는 서기 1262년 자신의 딸인 콘스탄차를 아라곤 왕국의 페드로 3세와 약혼시켜 우호 세력으로 삼았다.
그 사이 로마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서기 1261년 5월에 선종했고 우르바누스 4세가 새롭게 로마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4세는 선대 교황과 잉글랜드 사이의 약속을 파기하고 대신에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동생인 샤를 드 앙주에게 시칠리아 왕위를 넘기기로 결심하였다. 비록 샤를 드 앙주가 시칠리아 원정군을 조직하는 동안 서기 1264년에 로마교황 우르바누스 4세가 선종하고 후임 교황으로 클레멘스 4세가 선출되었지만 샤를 드 앙주를 시칠리아 왕으로 임명하는 전대의 계획을 계속해서 이어가면서 서기 1265년 샤를 드 앙주가 약 3만명의 시칠리아 원정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샤를 드 앙주는 북이탈리아의 기벨린파 도시들을 손쉽게 격파했고 만프레디도 서둘러 이에 맞서고자 했지만 서기 1266년 2월에 벌어진 베네벤토 전투에서 패배한 채 그 자신은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 뒤 본래 시칠리아 왕이었던 콘라딘이 시칠리아 왕국을 탈환하기 위해 서기 1268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진군하였지만 그 역시 탈리아코초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샤를 드 앙주에게 사로잡혀 나폴리에서 공개처형을 당했다. 이렇게 하여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가 무너지고 대신해서 샤를 드 앙주가 정식으로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하여 카를로 1세가 되었다.
이제 명실상부하게 시칠리아 왕국을 차지한 카를로 1세는 서기 1270년 형인 프랑스 왕 루이 9세가 조직한 제8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카를로 1세가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기도 전에 루이 9세가 십자군 원정 도중 병사했기 때문에 그가 십자군의 수장이 되어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철군해야 했다. 하지만 돌아오던 중 폭풍우를 만나 18척의 함선을 잃어 버리는 피해만 입었다. 이듬해 잉글랜드의 왕자인 에드워드(훗날 에드워드 1세)와 함께 제9차 십자군을 조직하여 다시 십자군 원정을 떠났지만 이번에도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사실 카를로 1세가 진정으로 노리는 것은 성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동로마 제국을 정복하여 지중해를 재패하는 것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미카엘 8세 팔라이올로구스가 제4차 십자군에게 빼앗겼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재건된 상태였다. 이에 카를로 1세는 이미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으면서 동로마 제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켰고 심지어는 이교도인 동방의 룸 술탄국과 몽골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이에 동로마 황제 미카엘 8세는 만프레디의 사위 자격으로 시칠리아 왕위를 요구하고 있던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와 동맹을 맺었고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와 화해를 추진하여 서기 1274년 동서교회의 통합을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방 교회에서 반대하면서 오히려 종교적인 혼란만 발생했고 프랑스 출신으로 서기 1281년 새로운 로마교황이 된 마르티누스 4세가 오히려 카를로 1세를 지원하여 미카엘 8세와 페드로 3세를 파문했다.
이에 카를로 1세의 동로마 제국 정벌이 탄력을 받게 되었으나 그동안 카를로 1세가 계속해서 십자군 원정과 동로마 제국 공격을 위한 군비 마련을 위해 시칠리아 섬에 중과세를 부과했기 때문에 이에 불만을 품은 시칠리아 섬의 주민들이 서기 1282년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3월 30일 부활절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하여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고 불린다. 반란군은 삽시간에 시칠리아 섬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메시나의 카를로 1세의 함대를 모두 불태웠다. 이후 시칠리아 사람들은 베네치아나 제노바와 같은 자치 도시를 건설하기를 희망하며 로마교황 마르티누스 4세에게 접근하여 로마교황의 명목상 지배권을 인정할 테니 자신들의 자유민 지위를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렇지만 로마교황 마르티누스 4세는 여전히 카를로 1세를 지지할 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시칠리아 사람들에게 카를로 1세를 군주로 다시 받아들이도록 요구했다. 이에 실망한 시칠리아 사람들은 카를로 1세의 보복을 우려하여 자신의 군주가 되어 줄 사람을 찾던 중 만프레디의 사위인 아라곤 왕 페드로 3세에게 왕위를 제안했다. 본래부터 호시탐탐 시칠리아 왕위를 노리던 페드로 3세는 즉각 함대를 이끌고 시칠리아 섬에 상륙하여 9월 2일 팔레르모에 입성했고 서기 1282년 9월 4일 팔레르모 성당에서 시칠리아의 왕 피에트로 1세로 즉위했다.
이제 카를로 1세가 시칠리아 섬을 탈환하기 위해 메시나를 공격했으나 페드로 3세의 함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카를로 1세는 로마교황 마르티누스 4세에게 페드로 3세(피에트로 1세)를 파문하도록 하였고 나폴리를 아들인 카를로 2세에게 맡긴 채 자신의 조카이자 프랑스 왕인 필리프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직접 프랑스로 향했다. 그러나 서기 1284년 6월 카를로 2세가 아라곤 함대의 나폴리 봉쇄를 뚫기 위해 나섰다가 아라곤 왕국의 제독인 루지에로 디 라우리아에게 참패를 당하고 카를로 2세 자신도 사로잡히고 말았다. 결국 카를로 1세가 이탈리아 남부로 되돌아와야 했으나 이듬해 1월 여전히 포로가 되어 있는 카를로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망하였다. 또한 같은해 3월 로마교황 마르티누스 4세도 선종했기 때문에 앙주 가문이 시칠리아 섬을 되찾을 동력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서기 1285년 프랑스 왕 필리프 3세가 단독으로 아라곤 왕국을 침공하여 헤로나를 점령했으나 이번에도 아라곤 왕국의 제독인 루지에로가 활약하여 프랑스 함대를 격파하고 프랑스 해안을 공격하여 보급로를 차단하면서 프랑스군을 퇴각시켰다. 그리고 얼마 뒤에 페드로 3세가 사망하면서 장남인 알폰소 3세에게 아라곤 왕국을 물려주고 차남인 하이메는 시칠리아 왕 자코모 1세가 되도록 하였다. 이후 포로가 된 카를로 2세는 서기 1288년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1세의 중재 덕분에 시칠리아 섬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겨우 석방되어 나폴리로 돌아와 아버지의 남은 영지인 나폴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상속받았다. 그러나 일단 풀려나자 로마교황 니콜라우스 4세로부터 약속 철회에 대한 사면을 받고 시칠리아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였다.
더욱이 서기 1291년 아라곤의 알폰소 3세가 사망하자 자코모 1세가 동생인 페데리코를 시칠리아의 섭정으로 임명한 후 아라곤 왕국으로 향하여 하이메 2세로 즉위했다. 이후 하이메 2세는 로마 교황청 및 나폴리 왕국과 화해하기 위해 서기 1295년 아냐니 조약을 체결하고 카를로 2세로부터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을 양도받는 조건으로 시칠리아 섬을 넘기기로 합의하며 카를로 2세의 딸인 비앙카와 결혼하였다. 하지만 시칠리아 섬의 주민들은 하이메 2세의 결정에 반발하여 섭정인 페데리코를 정식으로 시칠리아 왕으로 옹립했다. 비록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시칠리아 왕으로 즉위한 적이 없었지만 페데리코는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프리드리히 1세(페데리코 1세)와 프리드리히 2세(페데리코 2세)에 이은 페데리코 3세를 표방했다.
페데리코 3세는 카를로 2세와 계속된 대결 끝에 서기 1302년 칼타벨로타 조약을 체결하고 카를로 2세로부터 페데리코 3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시칠리아 섬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다. 대신하여 페데리코 3세가 죽은 뒤 시칠리아 섬을 카를로 2세의 앙주 가문에게 넘기기로 했으나 서기 1309년 카를로 2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로베르토가 남부 이탈리아를 계승하자 이 약속은 파기되었다. 서기 1310년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7세가 북이탈리아를 침공하자 페데리코 3세는 하인리히 7세와 동맹을 맺었고 로베르토는 하인리히 7세와 맞섰기 때문이었다. 양 측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결국 서기 1337년 페데리코 3세가 사망할 때 칼타벨로타 조약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아들인 피에트로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며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이렇게 하여 시칠리아 왕국의 분열이 완전히 고착화되었고 이제 이탈리아 남부만을 지배한 앙주 왕가와 시칠리아 섬을 차지한 아라곤 왕가로 분할되었고 두 왕가는 모두 계속해서 시칠리아 왕위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였다. 이렇게 분할된 두 나라는 서기 1442년 아라곤 왕 알폰소 5세가 재통합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아라곤 왕가를 시칠리아 왕국의 합법적인 계승자들로 인정하고 앙주 왕가는 나폴리 왕국이라는 비공식 국가로 구분한다. 아라곤 왕가는 스스로 시칠리아의 라틴어명인 ‘트리나크리아(Trinacria) 왕국’을 사용하였으나 알폰소 5세 이후 하나로 통합된 나라의 명칭으로 “양 시칠리아 왕국(Kingdom of the Two Sicilies)”를 비공식적으로 사용하였고 서기 1816년에 부르봉 왕가의 페르디난도 1세에 의해 정식 국명으로 확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