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6일 저주받은 백성 편에 서신 예수님 고해소는 진짜 세상 사는 이야기와 교우들의 속내를 듣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거룩한 장소다. 죄는 나쁘고 더러운 게 아니라 실패와 아픔이다. 때로는 고해자가 내가 고백한 걸 다 들은 거 같아 긴장되기도 한다. 평신도 수도자 사제 모두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다. 혹시 고해소 대화가 밖에서 들릴까 봐 방음 장치에 음악도 틀어 놓지만 그 사람의 죄 중 절반은 내 죄고 나머지는 너의 것이다. 그런데도 안 들리게 하는 건 오직 하느님만 내 죄를 들으신다는 뜻이겠고, 죽음 앞에서도 고해 비밀이 지켜진다는 믿음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의 표지일 거다.
저 두꺼운 교리서를 다 알아야 세례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과연 몇이나 될까? 성직자나 설교가를 통해서 듣는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실제 우리 삶은 거리가 꽤 멀다. 교황님과 교황청에서 모든 교우에게 보내는 편지나 문서는 읽고 이해하기 쉽지 않다. 우리 실제 삶은 교회가 제시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상과 다른 거 같다.
예수님은 철저히 살아가는 바리사이들과 율법을 연구하는 율법 학자들을 크게 나무라셨다. 바리사이는 회칠한 무덤, 즉 겉으로는 하얗게 깨끗해 보이지만 그 안은 썩어 가는 시체가 있는 그런 이들이고, 율법 학자들은 사람들에게 자유와 해방이 아니라 무거운 짐을 자꾸 얹어 놓기만 하고 그들을 도와줄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는 이들이다. 예수님이 당신의 신적 신통력으로 그들의 속내를 알아내신 게 아니라 그분의 목수 생활 30년이 가르쳐준 진실, 진짜 세상살이를 아신 덕분이었을 거다. 일반 백성은 모든 율법을 다 알지 못하고 안다고 해도 먹고 사느라 다 지킬 수 없으며, 바리사이처럼 철저하게 살지 못했다. 그들과 만나고 이야기를 들어보면 율법을 잘 모른다고 저주받은 이들(요한 7,49)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도 하느님을 섬기고, 나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율법을 못 지키면 저주받은 이들이라고 하니 바리사이 율법 학자 사제들 앞에서는 늘 주눅 들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마음이 차갑고, 딱딱하고, 고집스럽고 때로는 교만하기까지 한 거 같다. 하얀 회칠을 한 무덤 같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사랑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열려 있고 겸손하다. 예수님은 일반 백성,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은 백성 편에 서셨다. 하느님은 법대로 심판하는 재판관이 아니라 죄를 없애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편한 멍에를 지게 하시는 분이다. 하느님이 법대로 심판하신다면 누가 그 법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나.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는 여기서 다 말할 수 없다. 그저 믿기만 할 뿐이다. 사랑은 생각하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만나고 그 마음으로 행동하는 거다. 하느님 사랑도 마찬가지다. 생각이 아니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기뻐하시라고 그분이 원하실 거라고 생각되는 걸 행하는 거다. 그렇게 하면 교리나 교회법을 몰라도 잘못될 일은 없을 거다. 설령 잘못이어도 하느님은 우리 마음을 보시는 분이니 걱정하지 않는다.
예수님, 주님이 좋습니다. 쑥스럽고 오글거려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하지만 마음은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니 이런 제가 얼마나 저주스러운지 모릅니다. 주님이 왜 성찬례를 제정하시고, 그 안에서 왜 매일 희생되시는지 알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보다 엄마를 훨씬 일찍 알았습니다. 어머니를 통해서 하느님이 제게 아주 가까이 계심을 알게 됐습니다. 엄마보다 더 가깝고 편하고 특히 완전히 신뢰해도 된다고 믿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