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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븐 루시드(Ibn Rushd, 1126년∼1198년)
인간과 자연 세계에 대해 될 수 있는 한 합리적인 설명을 추구했던 유럽의 철학자들은 11∼12세기 무렵이 되자 기독교 신학의 가르침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들의 목마름을 축여준 것은 다름 아닌 이슬람 세계로부터 들어온 철학과 과학이었다. 그 가운데 유럽의 학자들이 이름만 들어왔을 뿐 실제로는 구경도 하지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322년)의 귀중한 원고들도 있었다. 그리고 이슬람 세계를 통해 들어온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의 모든 저작에는 이븐 루시드(Ibn Rushd, 1126년∼1198년), 라틴어로는 아베로에스(Averroes)라고 불리는 무슬림 학자의 꼼꼼한 주석과 해설이 달려 있었다.
이븐 루시드의 주해가 달린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이 유럽에 전해지자 유럽의 철학자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들은 루시드의 주해를 읽기 전까지는 아리스토텔레스를 그저 훌륭한 논리학자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 루시드의 학설이 옳은지 그른지 논쟁하는 것이 중세 서양 과학의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지경이었다. 이윽고 ‘아베로에스’의 학설을 따르는 이들은 ‘아베로에스주의자(Averroist)’로 불리게 되었고, 유럽의 대학 강단을 가득 메우게 되었다.
그런데 16세기가 되면서 스콜라 철학의 권위가 여기저기서 심각하게 도전받기 시작했다. 비판의 도마 위에 가장 자주 오른 이는 ‘바로 그 철학자’, 즉 ‘철학자의 대명사’라고 불렸던 아리스토텔레스였다.
15∼16세기는 유럽이 1천여 년의 은둔 생활을 끝내고 세계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시기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1백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포괄적이고도 꼼꼼한 자연철학을 완성한 이로 받들어졌지만, 이제는 정확하지도 않은 설명을 여기저기 남발하고 다닌 사람으로 그 격이 내려가 버렸다.
이들의 지적 욕구는 결국 15세기 ‘르네상스’를 꽃피웠고, 17세기에는 ‘과학혁명’을 낳았다.
단테는 ‘신곡(神曲, La Divina Commedia)’의 ‘지옥편’에서, 많은 고대의 위인들이 훌륭한 업적을 남겼지만 기독교의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천국으로 올라가지 못한 채 ‘림보’라고 불리는 지옥의 첫 번째 층에서 현세와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들은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 카이사르와 같은 정치가, 그리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인데, 이븐 루시드와 이븐 시나(980년∼1037년)는 무슬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자리를 나란히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16세기까지도 영향력을 잃지 않았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관은 빠른 속도로 잊혀져갔다. 앞 세대가 남긴 유산의 허점을 지적하고 그것을 개선하기는 쉬워 보이지만, 그 허점투성이 유산이 없었다면 뒤 세대가 빈손으로 새것을 만들어내기란 훨씬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이 점은 중세 유럽의 철학자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뉴턴은 이런 깨달음을 “내가 옛사람보다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것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이다”라는 경구로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과학의 역사를 다룬 책들은 대부분 기원전 700년 무렵의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어째서일까? 그것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생각이 앞선 문명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독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새로운 사고방식 중 가장 눈여겨볼 만한 것은, 자연현상을 설명할 때 신과 같은 초자연적인 원인을 배제하려는 움직임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터키와 그리스가 맞닿아 있는 곳에서 활동했던 철학자 탈레스(기원전 624년경∼546년경)는 지진의 원인을 생각한 끝에 “육지는 커다란 바다 위에 떠 있는데, 땅 아래의 바닷물이 출렁이게 되면 그 충격이 전해져 지진이 일어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리고 보편적 학설을 세우려면 ‘신의 분노’와 같은 우연적인 요인이 아니라, 인간의 합리적 사고를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요인을 찾아내야 했다.
합리적 설명의 세계에서는 논쟁을 거쳐 가장 조리 있다고 인정받는 것들이 살아남기 때문에, 뒤 세대의 학설이 앞 세대의 것보다 더 나아지는 것이 보통이다. 이와 같은 토론과 비판의 전통이 바로 그리스 자연철학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색이다.
하지만 그리스의 초기 자연철학은 실질적인 과학의 발전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들의 야망은 원대했지만, 이들이 내놓은 학설은 그 야망에 부응하기에는 많이 모자란 것들이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관찰과 경험을 토대로 삼기보다는 머릿속에서 사색을 통해 학설을 세워나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론이 성공할 수 있는 조건도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과 얼마나 맞아떨어지느냐’보다는 오히려 ‘얼마나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있느냐’와 같은 것들이었다.
로마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따라서 철학에 큰 관심이 없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실용적인 기술은 높은 수준으로 발전했지만 자연철학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결국 395년 동로마와 서로마 제국으로 나뉘었고 476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고 말았다.
기독교가 가르친 종교적 신념에 지나치게 충실했던 이들은 ‘이교도의 철학’을 담은 책들을 불사르고, 그것을 가르치는 이들 또한 처단하기도 했다. 415년,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찬 한 무리의 기독교인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여성 학자 히파티아(Hypatia, 370년∼415년)를 살해하고 시신을 토막 내 불살랐다.
서기 30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믿는 것을 허락했고, 10년 후인 313년에는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자신이 교황을 겸하기에 이른다.
아우구스티누스 다만 말년에 마음이 바뀌었는지 죽기 몇 년 전에는 “과학과 기술은 기독교인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며 교양 과목을 권장했던 일을 후회하기도 했다.
이에 비해 이슬람 세계는 종교적 관용의 폭이 상당히 넓었다. 물론 이슬람 세계에서도 교리 해석의 차이가 있었고, 여러 학파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들 중 하나가 정치 권력화하여 다른 학파를 탄압하는 일은 없었다. ‘쿠란’은 이슬람교도 사이에 평등을 보장한 것은 물론 이교도에 대해서도 정해진 세금만 내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었다.
750년 무렵, 칼리프 자리를 세습하던 우마이야 왕조가 이슬람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아부 알아바스를 시조로 하는 아바스 왕조가 새로이 수립되었다.
아바스 조의 네 번째 칼리프인 알마문(al∼Mamun, 786년∼833년)은 813년 왕위에 올랐는데, 철학과 신학에 조예가 깊은 학구파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첫째는 마음에 좋은 것, 둘째는 법에 합당한 것, 셋째는 사람들이 선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꿈에서 깬 알마문은 고대의 철학자들의 저술을 찾아내어 아랍어로 번역하라는 명을 내렸다.” 아바스 조의 수도였던 바그다드에서는 ‘지혜의 집(바이트 알히크마Bayt al∼Hikma)’을 중심으로 활발한 번역 사업이 이루어졌다. 그리스의 철학과 과학 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비잔틴 제국에 대사를 파견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구해온 책은 여러 언어에 능통한 학자들이 아랍어로 옮겼다.
지식에 목말랐던 무슬림 학자들은 그리스 철학의 풍성한 과실을 뜨겁게 반겼다. 이슬람 철학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철학자 알킨디(al∼Kindi, 801년∼873년)는 무슬림들이 그리스의 철학자들에게 큰 빛을 졌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했다. 그는 “(그들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열의를 가졌을지라도, 살아 있는 동안 우리의 연구에 필요한 마지막 추리의 토대를 이루게 될 원리들을 통합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면서, “나아가 그리스 철학자들이 풀지 못한 숙제들을 이제 무슬림 학자들의 손으로 풀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내비쳤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책도 번역되어 그 결과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별자리 이름 가운데 많은 것들이 아랍어에서 비롯된 이름을 갖게 되었다.
페르시아에서 태어난 알라지는 평생 2백여 권에 이르는 많은 책을 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천연두와 홍역에 대하여’와 무려 23권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의학 백과사전인 ‘총서’일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부하라에서 태어난 이븐 시나는 결핵이 전염되는 병이라는 것을 최초로 밝혀냈으며, 당시 이슬람 세계에 알려진 모든 의학 저서를 망라한 ‘의학정전’이라는 다섯 권짜리 책을 남겨 유명해졌다. 유럽에서도 이 책은 1650년대까지 의과 대학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 밖에도 무슬림 의사들은 모세혈관을 발견했고, 피가 심장에서 나와 온몸을 돌 뿐 아니라(혈액의 ‘대순환’) 심장으로 들어가는 길에 허파를 거쳐 한 번 더 돌아 들어간다는 것(혈액의 ‘소순환’)을 알아냈으며, 콜레라나 페스트 같은 유행성 전염병이 어떻게 퍼지는지에 대한 책을 남겼다. 이슬람 의학은 외과 수술에 특히 능하여 2백 가지가 넘는 수술 도구가 개발되었으며, 특히 안과 수술이 발달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인도 숫자를 받아들여 개량하고, 이를 다시 유럽에 전해주었다. 이런 계산을 하려면 미리 만들어둔 곱셈표에서 일일히 그 값을 찾아 대입해야 했던 것이 13세기 인도-아라비아 숫자가 전해지기 전까지 유럽의 실정이었다. 알콰리즈미는 인도-아라비아 숫자를 이용한 수학 책을 써서 이 숫자가 널리 보급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복원과 대비로 계산되는 법에 대한 개론서’ 이 책의 제목의 첫 단어인 ‘알자브르’가 잘못 전해져 생겨난 것이 대수학을 뜻하는 ‘알제브라(algebra)’라는 낱말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과학은 역사상 처음으로 ‘국제적 교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븐 루시드는 오늘날의 스페인 남부 코르도바에서 서기 1126년(이슬람력 520년)에 태어났다. 당시 코르도바는 다소 보수화되어, ‘쿠란’과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에 바탕을 둔 이슬람법을 언제나 문자 그대로 적용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븐 루시드의 조부는 이에 동조하지 않고 ‘판결을 내릴 때에는 증거를 중시하고 법관의 합리적인 해석의 여지를 보장해야 한다’는 요지의 법철학 책을 남겼다.
이븐 루시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다음과 같은 주해를 남겼다. “내가 젊었을 때는 이 연구(천문학)로 성공적인 결론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제 늙고 보니 몇 가지 장애물 때문에 희망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내가 천문학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마도 미래의 연구자들의 주의를 끌 수는 있으리라. 우리 시대의 천문학은 그것으로부터 실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어떤 정보도 주지 않는다. 우리 시대에 개발된 모형들은 계산과 일치할 뿐, 존재와는 일치하지 않는다.”
알가잘리는 ‘철학자의 오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이븐 시나를 비판하면서,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갖추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이 빚어낸 착각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슬람 제국은 전성기에는 기독교 사회에서 배척당한 학자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종교를 보장하는 관대함을 보여주었지만, 기독교 세력이 강성해지자 방어적인 입장으로 돌아서서 사상적 차이에 대해 점점 더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대선배였던 이븐 시나와 마찬가지로 이븐 루시드도 생의 막바지에 완고한 신학자들로부터 박해를 당했다. 이븐 루시드가 세상을 떠날 무렵을 전후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기독교 세계에 대한 이슬람 세계의 우위가 끝나가기 시작했고, 이슬람 철학의 전성기도
함께 저물어갔다. 그리고 1492년에 그라나다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국가가 멸망하면서 스페인과 포르투칼 지역에 5백 년 동안 쌓여온 이슬람 문화의 유산은 모두 기독교인의 손으로 넘어갔다.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Poetics)’을 찾는 윌리엄 수도사와 그 책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노 수도사 호르헤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제 기독교 수도사들이 배움의 신세계를 열어젖히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자명했다. 이것들을 모두 번역하자! 먼저 이베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아랍어 책들이 히브리어를 거쳐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주해서에서 드러난 이븐 루시드의 사상은 ‘아베로에스주의’라고 불렸고, 그에 공감하는 철학자들, 즉 ‘아베르에스주의자’들이 유럽의 지성계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아베르에스주의’의 전당이 된 곳은 대학이었다. 이후 카톨릭 교회에서는 이성만을 진리의 원천으로 강조한 아베로에스주의를 대신하기 위해, 이성과 신앙의 조화에 초점을 맞춘 ‘스콜라 철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븐 루시드는 피타고라스의 어깨 너머로 책을 엿보고 있다. 이 그림(아테네 학당)에서 라파엘로는 이븐 루시드를 고대 그리스의 현인들의 업적을 어깨 너머에서 훔쳐본 사람쯤으로 묘사하고 있다. 하지만 16세기 르네상스의 화가가 그리스의 기라성 같은 철학자들을 화폭에 옮기면서 ‘이교도 철학자’의 자리를 마련해두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븐 루시드가 ‘옛 현인들’과 나란히 존경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77년 이후 이븐 루시드의 사상은 교회에 의해 금지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