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사회, 공산주의 E :(빨치산과 좌파 이론가 김정강의 고백)
구국결사대의 맑은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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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대학 다닐 때 친구들과 겨울 지리산 등반을 한 기억이 난다. 좌와 우의 이념이 혼재 되어 있던 곳, 서로가 피 튀기며 싸우고 죽이고 죽임을 당했던 곳, 지리산.....그때나 지금이나 지리산은 좌익 사상과 이념과는 상관없이 사시사철 늘 산의 아름다운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지리산에 무슨 “빨치산 루트”가 만들어 지고 “지리산 빨치산 공비 인형”이 관광용으로 만들어 졌는데 눈요기는 커녕 그냥 쓰레기와 흉물로 방치되어 등산객의 눈쌀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더럽게 유치한 것은 좌파정권이 맞기는 맞는 것 같다.
어찌해서 국가를 전복하고 남침을 한 공산주의자들에게 노골적으로 동조하고 헌법을 유린, 파괴하는 작태가 그것도 지역행정자치에 의해서 “관광용 상품”으로 유치하게 등장한 것인가? 아무리 베껴무스 쓰레기 작태지만 그래 베낄 것이 없어서 저 남미의 삼류 양아치 쿠바 혁명가가 관광 상품이 된 것을 베끼는가? 어이가 없다. 각설하고, 조선공산당, 남로당, 여순반란사건에 이어 이제 당시의 지리산으로 가 보자....
----------------------------------- A. <빨치산이란 무엇인가?>
원래 “빨치산”이라는 말은 우리말이 아니다. 이는 파르티잔이라는 말에서 유래했으며, '파르티잔(partisan)'은 프랑스어의 '파르티(parti)'에서 비롯된 말이며,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말이나, 현재는 유격대원·편의대원(便衣隊員)을 가리킨다. 따라서 에스파냐어에서 나온 게릴라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된다.
빨치산은 정규군과는 별도로 적의 배후에서 그들의 통신·교통 수단을 파괴하거나 무기와 물자를 탈취 또는 파괴하고 인원을 살상한다. 빨치산은 일반주민의 협조나 지원이 없이는 수행할 수 없고, 그 지방의 지리나 지형에 밝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 되므로 아무 곳에서나 실행할 수 있는 전투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주로 6·25전쟁 전에 각지에 준동하였던 공산 게릴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은 빨치산 부대를 크게 활용했으며 독소전쟁(獨蘇戰爭)에서는 여단이나 연대급 규모의 대부대까지 있어서 그들에게 무기·탄약을 공수한 예가 있다. 핵무기가 출현한 오늘날에도 빨치산이 활약하는 기회는 많다.
순진하고 어린 학생들은 “6.25 당시의 지리산 빨치산, 남부군”이 남한에게는 적이고, 북에서도 김일성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현재 이를 미화하는데 여념이 없고, 그런 점에는 무슨 조정래니, 이태니 하는 빨갱이들의 음험한 작태에 놀아나는 것이지만, 남부군의 이현상이 국군에 의해 사살되고, 이들에게 지령했던 남로당의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숙청, 살해당했어도 그것은 공산주의자들, 좌파 내부의 노선 다툼과 위장술이지, 이들 모두가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의 폭력혁명, 체제전복을 절대로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에서의 빨치산은 일제침략기에도 있었으나, 합법적 정규군과 정치체제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게릴라 부대로써 그 보급이나 정비가 열악하여 지역의 자연이나 산악에 숨어 대항하는 특징으로 이때의 빨치산은 빨치산 이라기보다 일제에 맞선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는 해방이 되고 광복을 맞아 남한에 “대한민국”이라는 합법정부가 수립 되었는데, 사회,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여, 대한민국 헌법체제를 부정하고 국가의 전복과 변란을 목적으로 무력을 행사한 저항, 전투부대를 “빨치산”이라고 규정하면 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이 남한의 빨치산도 결국 그 진원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멀리 조선공산당, 그리고 이어 남로당으로 계승되고 결국 남로당이 남한의 체제전복을 목적으로 일으킨 “여순반란 사건” 과 “대구폭동” 때 도망하고 산속으로 몸을 피해 들어간 좌익 적색분자와 그에 동조한 남한 군인들 중 좌익 적색분자들이 그 시초가 된 것 같다.
다행히 이들에게 지리산은 군경의 적색분자 색출과 수사를 피해 찾아들어간 곳이며, 결국 지리산은 그래서 이들의 근거지가 된다. 아무리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접해도, 사상을 접한 것 만으로는 무장투쟁을 할 수가 없다. 결국 좌파라 하더라도 군사훈련을 받은 자, 체제하에서는 도저히 밝은면으로 살수 없는 자가 아니면 자연적으로 군사 게릴라 무력투쟁을 할 수 있는 빨치산이 되기도 힘든 것 아닌가?
그렇다면 만약, 우리도 우리 군에서 어떤 특수부대가 북에 침투하여 전쟁 중 작전을 한다면 저쪽 북한에서는 “게릴라 빨치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특수부대란 그 임무의 특수한 성격으로 보아서 전투부대 중 가장 강력하고 우수한 전투력을 보유해야 하며, 원래 모 부대와의 관계를 철저히 비밀리에 수행하고 철저히 은폐해야 하는 특성도 있다.
또 재미있는 것은 전쟁, 전투시 “자유주의 군대”는 일개 부대의 사단장이나 지휘관이 문제가 있으면 바꾸어 다른 지휘관이 와서 지휘를 해도 별 무리가 없지만, 사회,공산주의의 사상의 특성상 “붉은 군대”는 모두 점조직의 독립부대 성격이 강해서 예를들면 북한 인민군 부대의 어느 사단장이 유고시, 다른 사단장이 지휘를 하는데 엄청난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이는 순진한 좌파는 모르지만 “일인 통제독재 지배 하의 군대”를 생각해 보면 당장 드러나는 사실이고, 필자에게 어느 탈북자가 증언해 주었다. 그렇다고 본다면, 안보와 군대의 특성을 좀 아는 입장에서는 무슨 지리산 빨치산이 남한에게도 적이고, 북에게도 버림 받았다는 위장좌파 편향으로 미화된 이야기는 유치하기 짝이 없으며, 세밀하고 깊이 있는 연구로 앞으로도 “대한민국 헌법의 정통성 아래”에서 반드시 좀 더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비밀 해제된 “미 국방성의 6.25당시의 문서”와 “구소련 당시의 해제된 정보”를 토대로 하면, 박헌영의 남로당과 이현상의 남부군은 북한 김일성이 남침하도록 남한에서 무장봉기를 하거나 남침했을 때에도 계속 협조,협력 무장봉기를 하게끔 거의 남부군과 남로당이 김일성 종속 독립부대와 정치세력이었음을 확인해 주고 있고, 남로당의 박헌영이 탈출하여 북에 가서 외상, 부수상 자리에 올랐지만 김일성은 박헌영을 6.25당시 남한 내 무장봉기의 시기가 어그러지고, 무장봉기가 미약했다는 책임을 물어 그를 숙청해 버린 사실로 보아서 “지리산 빨치산”은 분명히 “대한민국을 폭력, 무력 투쟁으로 전복하려는 목적”의 당시 남한 내의 적색분자들과 남로당의 지령을 받아 반란 사건을 일으킨 적색분자들, 남한 군부 내의 적색분자 색출에 도망한 일부 군인들이 모여 이루어진 “적색 파르티쟌”이 맞다.
다음은 지리산 빨치산에 대하여 대단한 동경을 가지고 있는 어느 한 얼치기 좌파 청년이 쓴 빨치산 김용택의 자서전 기록이다. --------------------------------------------------------------------------------------------
B. <한 얼치기 좌파 청년이 수집한 자료를 보면......>
지리산 남부군 402연대 정찰참모 김용택 자서전 본적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 479번지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 477번지 현주소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 477번지 성명 : 김용택 생년월일 : 1930년 12월 5일생.
22세 본인은 상기 출생지에서 1930년 12월 5일에 김필두의 3남으로 태여나 빈한한 가정환경 속에서 근근히 자라다가 1940년 4월 1일 팔덕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945년 3월 25일에 본학교를 졸업하였다. 그중 5, 6학년에는 우등생으로 부모의 위안을 덜어준 때도 있었다. 1945년 7월 3일 순창공립농업중학교에 입학시험을 쳤으나 불행히도 락제가 되였다.
그리하여 일년간은 가정농업에 혹은 서당에 또는 국민학교 제학에 해를 바꾸고 1946년. 9. 1일에 또다시 순창농림중학교에 시험쳐 입학하게 되였읍니다마는 당시 가정환경이야말로 말할 수 없이 곤란할뿐더러 더욱 큰형께서 패병에 죽을때까지 살림만 줄어 들었었다. 그때 부모님게서는 년세도 많고 죽을날이 가찹다고 내가 막동이라고 미누리꼴이나 보고 죽겠다고 나의 결혼준비에 모우고 모왔든 돈으로 겨우 입하게 되였었다. 그리하여 3학년때 부친과 큰형을 잃고 여론까지 내가 학교를 계속하기에는 가망도 없었다.
그러나 한숨 쉴 새 없이 밤낮으로 로력하여 가정호주로 가정 농업을 계속하며 역시 학교도 계속했다. 1950년 7월에 소위 학도병에 가지 않을 수 없게 되여 사흘만에 도주하여 집에 도라오니 때는 영용한 인민군대의 진격에 소위 대한민국은 파죽지새로 망하는 판이여서 리사람에게도 크게 환영바닸다. 그래 리세포에서 민청책으로 있다 완전 해방과 함께 개몽운동에 강사로 10일간 판정서기로 10일간 있다 그후 1950년 10월 1일까지 팔덕국민학교 교원으로 재미없게 사업하다가 젼약상 후퇴와 함께 본년 10월 30일에 입산하여 면대 선전책으로 5일간 있었고 그후 순창군당 선전중대에 소대장으로 있다가 전북도당 회문산 로령학원에 45일간 훈련에 연마하고 1950년 12월 4일에는 전북도당 보위병단에 기동대원으로 편입하여 전북도당 보위병단이 775로 변하고 775가 사단에 편입될 때까지 보위병단에 있었다.
1951.3.6에 회문산을 떠나 천안봉으로 용골산으로 성수산으로 팔공산으로 덕대산으로 삼각산으로 백운산으로 장안산으로 지리산으로 덕유산 등지로 전북도당을 보위하면서 그 중에 가지각색으로 파란곡조를 격고 또 분대장, 소대장 혹은 중대선전원으로 초급정치지도원을 하여 입산해가지고 ?윱처?까지 군사기관에만 있었다. 1951년9.3일에는 운장산으로 와서 45사단 402년대 일대대에 환입하여 초급정치지도원으로 저에게 맞겨진 임무완수에 전극 노력한 결과 오늘에는 402연대 정찰참로 있읍니다. 그 중 대대 부정치지도원으로도 있었다. 나에 간단한 경력은 이상과 같으나 앞으로도 나는 더욱 새로운 각오 밑에 책임성 있는 사업작품을 계속 하겠습니다. 보증인 성명 : 박남재(대대정치지도원) 1951. 11. 23 김용택 출처 : [빨치산 자료집] 제2권, 한림대학교, 1996, pp525~526
------------------------- (*다음은 좌파 청년의 기록)
김용택은 본적지와 출생지, 현주소가 모두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월곡리로 되어 있다. 순창은 전라북도의 남부 중앙에 위치하며 노령산맥 줄기의 산간지대에 있다. 서쪽과 북쪽은 회문산・여분산・강천산 등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솟아 있고, 남쪽과 동쪽은 섬진강・적성강 등의 하천과 평야가 펼쳐져 있다. 순창은 이러한 지형적 여건 때문에 한국전쟁 당시 빨찌산들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었다. 순창군 팔덕면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팔등면(八等面)과 덕진면(德進面)이 합해져서 생겼다.
김용택은 전형적인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빨치산 대원들 중 빈농출신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제1지대 제3여단 윤혁칠 대대의 경우 전체 빨찌산 178명 중에서 빈농출신이 140명이었고, 제1지대 공주대의 경우 전체 빨찌산 184명 중에서 빈농 출신이 149명이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일제 식민지 지배의 가장 큰 희생자들이었다. 45사단 후방과장이었던 유광식의 경우는 소작 3두락을 경영하는 전라북도 완주군 동상면 신월리의 극빈 가정에서 1916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더욱이 소작 3두락도 화전답이었으며, 숯도 굽고 품팔이도 했다고 한다.
게다가 일찍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밥동냥을 하며 살기도 했다. 심지어는 눈 내리고 바람찬 겨울에 알몸으로 길거리에서 떨면서 울기도 했다. 45사단 402연대 1대대 정치일꾼이었던 강철석의 경우도 1927년 전라북도 옥구군 회현면 원우리의 빈한한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다닐 때 50전이라는 수업료를 2~3개월이나 밀려서 학교에서 쫓겨 오기도 했으며, 초등학교 5학년말에 경제적 타격이 막심하여 학교를 중퇴하고 함경북도 철도사무소 건축구 연락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을 때,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일제의 식민지 잔재를 일소하고 반제반봉건의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 시대 득세하였던 친일・부일 반민족 세력은 친미・반공이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여전히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자서전에 나타난 유격대원들의 경우 빈농출신에 항일의식이 강하긴 하였으나 입산 이전에 사회주의・공산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거나 그러한 신념을 내면화한 사람은 드물었던 것 같다. 오히려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이후 반제반봉건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망한 민족주의 성향의 농민들이 많았던 것 같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당시 스물 한 살이었던 김용택은 학도병으로 갔다. 그러나 3일 만에 도주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그의 인생역정이 시작되었다. 월곡리 리세포에서 민청책, 계몽운동 강사, 판정서기, 팔덕국민학교 교원 등을 하다가 인민군 후퇴시기인 1950년 10월에 입산하여 빨찌산이 되었다. 9월 15일 한국군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의 퇴로가 차단되었다. 10월 15일에는 국군 제11사단이 광주에 진주해서 ‘공비 소탕’ 작전을 수행했다.
인민군 후퇴시기에 지방당은 당을 비합법적인 지하당으로 개편하고, 지방당 조직을 규합하여 빨찌산 투쟁을 시작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전남도당, 전북도당, 충남도당은 입산자들을 규합하여 유격대를 편성했다.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은 회문산을 근거지로 하고 전북도당 유격대를 조직했다. 김남식의 『남로당 연구』 1(돌베개, 1984)에 의하면 조선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 조직은 사령관 방준표, 부사령관 조병화, 이택부대・보위부대・백학부대・돌진부대・기대부대 등 의 직속부대, 전주시당유격대・김제군당유격대・임실군당유격대・순창군당유격대・완주군당유격대・익산군당유격대・진안군당유격대・무주군당유격대・장수군당유격대・남원군당유격대・고창군당유격대・부안군당유격대가 있었다. 전북도당 유격대는 지역의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여 전북 북부 지도부와 전북 남부 지도부로 나뉘었다.
45사단 후방과장이었던 유광식은 자서전에 자신이 1950년 10월 20일 전북 북부지도부 후방부 부장으로 임명되었다고 기술했다. 1950년 11월경에는 남로당 출신의 이승엽이 강원도 평강군 후평에서 후퇴해 오는 인민군과 당 간부, 입산자들을 유격부대로 편제하여 남하시키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현상의 지리산 빨찌산 부대도 북으로 후퇴하다가 후평에서 조선인민유격대 독립4지대로 부대를 정비하여 다시 남하하였다. 독립4지대는 남하를 하는 도중인 1950년 12월부터 부대명칭을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으로 바꾸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현상 부대가 남부군으로 부대 명칭을 바꾼 시기에 각 도당 유격대는 병단체제에서 사단체제로 개편을 했다. 김용택의 자서전을 통하여 1950년 12월 4일에 보위병단이 존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보위병단이 775부대로 명칭을 변경했다가 사단으로 편입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다. 전북 빨찌산 출신의 이성근은 “나는 1951년 1월 회문산에서 특공대(박정일 대장, 김규락 문화부장)를 출발점으로 하여 1951년 4월 말 덕유산에서의 51병단(적성 병단장)으로 개편, 그리고 1951년 6월 초에 지리산에서 부대해산과 남원군 유격대로 편입 등 당시의 정세와 결성서에 따른 변화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산중에서 상황에 따라 1950년 말에 병단체제로 개편된 빨찌산 부대도 있었고, 1951년 봄에 병단체제로 개편된 부대도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김용택의 자서전을 통하여 1950년 10월에 전북도당에서 빨찌산을 교육시키기 위한 당학교인 ‘노령학원’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노령학원에서 45일간 유격전술과 정치학강좌를 교육받았다. 김용택의 자서전 내용으로 미루어 1951년 초에 당학교인 노령학원을 설립하여 1기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리지 못했다는 최태환의『젊은 혁명가의 초상 : 인민군장교 최태환 중좌의 한국전쟁 참전기』(공동체, 1989)라는 수기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현상과 여운철은 1951년 5월 중순 덕유산 송치골에서 6개도당회의를 열어 병단을 통합하여 사단제로 개편했다. 남부군은 사령관 이현상, 부사령관 이영회를 중심으로 전북 북부와 충남의 제1전구와 전북 남부의 제2전구로 나뉘었다. 제1전구에는 68사단(충남)과 45사단(전북 북부)이 있었고, 제2전구(전북 남부)에는 46사단과 53사단이 있었다. 남부군 직속부대로는 81사단, 92사단, 602사단이 있었다. 김용택은 1951년 9월 3일 운장산에서 45사단 402연대 1대대에 편입되었으며, 자서전을 작성한 시점인 1951년 11월 21일에는 402연대 1대대 정찰참모의 직책에 있었다.
402연대 1대대 정치지도원 박남재가 이 자서전의 보증인으로 서명하였다.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1950년 12월, 51년 1월과 3월 등 몇 차례에 걸쳐 유격지대로 개편에 관한 지령문을 각 빨찌산부대에 보냈다. 예를 들면, 1951년 1월 2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부 명령 제2호로 ‘적후에 있는 유격대들의 활동을 확대발전하는데 대한 명령’으로 제6지대를 결성하여, ‘적의 조직적 후퇴를 불허할 것’을 지시하였다. 빨찌산들이 사단체제로 개편을 하고 있었던 1951년 중반 무렵부터는 38선 부근에서 전선이 교착되고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조선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는 1951년 8월 31일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 당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94호 결정서를 채택하여 빨찌산부대를 유격지대 체제에서 당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빨찌산 부대는 김용택의 자서전 작성 시점인 1951년 11월 23일에도 여전히 사단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최고사령부의 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이 현대사에서 빨찌산의 역사에 대한 미시적 접근이 미약했던 원인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남한에서는 이데올로기적인 제약으로 미시적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북한에서는 사실적 정보가 부족하고 공간적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미시적 접근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자서전 문건을 소지하고 있던 빨치산은 1952년 2월 18일 14시에 수박골(CQ663.693)에서 토벌대에 의해 체포되거나 사살되었을 것이다. 이 시기는 백야전사령부의 빨찌산 토벌작전인 '쥐잡기 작전(Operation Rat Killer, 1951년 12월 초~1952년 1월 말)'의 제 3기에 해당된다. 대한민국 국회는 1951년 10월 31일에 비공개회의를 열어 ‘공비소탕’을 결의하였다. 토벌부대의 사령관은 백선엽이 임명되었고, 토벌부대는 그의 이름을 따서 ‘백야전사령부’라 불렀다.
백야전사령부는 수도사단(사단장 송요찬)과 제8사단(사단장 최영희)을 비롯하여 서남지구 전투 사령부, 태백산지구 전투사령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 등의 3개 사단과 태백산 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지리산 지구 전투경찰 사령부 등의 4개 전투경찰 연대 및 7개 전투경찰 대대등 전체적으로 4개 사단 규모였다. 그리고 미군은 60여명의 고문단을 파견하여 통신・연락 및 심리전을 지원하였다.
백야전사령관 백선엽은 1941년 12월 만주군관학교를 제9기로 졸업하고 ‘간도특설대’의 조선인부대에서 안창길(安昌吉), 양정우(楊靖宇), 진한장(陳翰章), 최현(崔賢) 등 항일빨찌산 부대를 토벌하는 ‘황국신민’으로 복무했다. 백선엽은 일제의 패망으로 만주에서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평양으로 가서 조만식의 경호대로 변신했다. 그러나 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김일성 등의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귀국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는 만주군관학교 선배 정일권(봉천 1기), 일본군 항공병 소위 출신의 친동생 백인엽과 함께 38선 이남으로 월남하였다.
월남 후 백선엽은 국방경비대에 들어가 중위로 임관하여 부산에서 제5연대를 창설했다. 제5연대 창설 주역은 백선엽과 함께 이후락(李厚洛), 백남권(白南權), 김익렬(金益烈), 박병권(朴炳權), 이치업(李致業), 오덕준(吳德俊) 등이 맡았다. 그리고 노재현(盧載鉉), 박진경(朴珍景), 김창룡(金昌龍) 등이 부산지구 5연대에 모병되었다. 특무대장으로 악명이 높은 김창룡을 휘하에 둔 백선엽은 1948년 여순사건 이후의 숙군과정에서 남로당 군사총책 박정희를 구명해주기도 했다. 백선엽은 육군참모총장, 중화민국 대사, 교통부장관, 충주비료주식회사 사장, 호남 비료주식회사 사장, 한국종합화학공업주식회사 사장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했다. 그는『군과 나』(대륙연구소 출판부, 1989),『실록 지리산』(고려원, 1992) 등 자서전류의 책을 펴내서 친일의 매국에서 반공의 애국으로 눈부신 변신을 자신의 삶을 미화하기도 했다.
8사단장 최영희는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제12대 육군참모총장, 제16대 국방부장관, 유정회 의장 등을 지냈다. 2005년 8월 26일 외교통상부가 공개한 1965~74년 베트남 파병과 관련된 외교문서 총 49권 7400쪽 가운데 최영희 관련 내용이 들어 있다. 당시 국방부장관 최영희는 베트남전이 진행되는 가운데 열린 1968년 제1차 한미 국방각료회담에서 미군기지의 제주도 유치를 시도했다.
그는 한미 국방각료회담에서 "현재 공작원을 북한에 보내지 않고 있으나 앞으로 해야 할지 모른다"며 "북한에 첩자를 보내는 것은 가능하고 한국은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영희도 백선엽・송요찬・정일권 등과 함께 친일의 매국에서 반공의 애국으로 눈부신 변신을 한 대표적인 친일파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당시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관은 신상묵이었다.
신상묵은 1916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1933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40년 일본군에 지원하여 일본군 헌병 오장이 되었다. 해방 후 경찰이 되어 1950년에 경북도경 보안과장으로 반공의 최전선에서 활약했다.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관으로 빨찌산 출신 포로들을 대상으로 ‘보아라부대’를 운영하기도 했다. 빨찌산 토벌의 공로를 인정받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전남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국립공원내에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신상묵 아들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은 부친의 친일행적이 폭로되어 집권 여당 의장직을 사퇴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을 형성한 사람들은 여당이나 야당, 군, 검찰, 법원, 국회, 경제, 학계, 문화계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은 일제시대 친일매국의 길을 걸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해방 이후 친미반공으로 옷을 갈아입고 ‘애국자’로 변신하였다. 어찌 보면 일본 천황이나 미국이라는 세계유일의 권력, 군부출신의 독재자 등 절대 권력의 명령에 충실히 복종을 하고 극우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일관되게 고수한 사람들에게 변신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애국과 매국, 민족과 반민족이라는 구분은 무의미하고 절대 권력에 대한 복종과 충성이 군인정신의 본분이라는 가치가 내면화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삶을 통해 식민지와 분단이 얼마나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치분열과 혼란을 야기했는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한편 이 자서전의 주인공 남부군 402연대 정찰참모 김용택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토벌대에 발각되어 총격을 받고 사망했을까? 아니면 토벌대에 체포되어 징역을 살았을까?
그것도 아니면 토벌대의 포위망을 뚫고 월북하여 북한의 영웅이 되었을까? 혹시 남과 북 어딘가에서 아직까지 살아남아 분단과 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노년의 자서전을 쓰고 있지는 않을까? 그가 살아있다면 아마 올해 일흔 여섯의 노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당시 총부리를 겨누었던 국군, 인민군, 빨찌산, 미군, 중국군 병사들의 나이도 이 자서전의 주인공과 비슷할 것이다. 이념과 체제를 떠나서 전쟁에 참여한 당사자들은 모두 엄청난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당했으며,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냉전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 서로를 적대시하며 살았다.
남과 북은 2000년 6월 15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서로에게 겨누었던 총부리를 거두고 평화와 화해의 길을 가고 있다. 2005년 8월에는 해방 60주년을 맞이하여 8.15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표단이 남한(대한민국)의 국립묘지인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기도 했다. 언젠가는 남부군 402연대 정찰참모 김용택의 자서전도『공비토벌사』(육군본부, 1954),『공비연혁』(육군본부, 1971),『대비정규전사』(국방부, 1988),『한국전쟁사』(국방부, 1967~) 등과 화해의 악수를 할 수 있는 날이 도래하기를 고대한다. --------------------------------- 이것이 바로 현재의 “자유민주주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사상” “명확한 국가 정체성” 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악랄하게 알면서도 좌파들의 꾐에 빠진 한 어린 젊은 좌파 청년의 시각이다. 하나같이 국가변란을 목적으로 무력투쟁한 빨치산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이 아닌 “미화”일색이지 않은가? -------------------------------------------------------------------------------------- B. (자칭, 빨갱이 이론가이며, 인텔리인 김정강의 고백과 빨치산과 좌파에 대한 시각: 4.19세대의 붉은 반역의 요소)
(*다음은 김정강의 글)
▼ <골수 사회주의자가 되다> 1957년 12월 말, 진주고등학교 3학년생이던 나는 유난히 심한 그해 겨울의 추위를 뚫고 부산 발 야간열차에 무임승차해 서울에 도착했다.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눈이 나빠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신체검사 현장 지휘를 하던 장교는 어떻게든 신체검사를 통과해보려고 통사정을 하는 나에게 “학생이 합격하려면 ‘특별 예외 입학’밖에 방법이 없다. 육사 교장 각하가 특별히 허가하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고민 끝에 육사 교장을 만나 탄원키로 결심을 굳히고, 육사를 찾게 된 것이다.
어떻게 하든 초병 몰래 육사 구내로 들어가 직접 교장실을 찾아야겠는데,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때 한 무리의 가족이 누군가를 면회하려고 육사 정문 초소 앞에서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나는 그 가족의 무리에 끼어들어 정문을 통과했다. 구내에도 여러 개의 검문초소가 있었다. 나는 초병의 눈길을 피해 첫 번째 검문 초소를 우회, 교장실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중앙 쪽으로 나아갔는데, 두 번째 초소에서 그만 발각돼 초소 안으로 연행됐다.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陸士> 초소장은 군용 야전 침대봉을 들고 서서 엄한 표정으로 무단침입의 이유를 물었다.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곧바로 “교장각하는 절대로 만날 수 없으니까 돌아가라! 뒤로 돌아! 고향 앞으로 가!”라고 군대식으로 명령했다. 그러나 내가 “여기까지 와서 죽었으면 죽었지, 그냥은 못 갑니다” 하고 떼를 쓰자, 그는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마음을 바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로 상황을 보고하고 난 뒤, 초소장은 뜻밖에도 “교장실에서 데려오라고 한다”고 했다. 철테 안경을 쓴, 정한(精悍)한 인상의 대령이 들어왔다. 내가 육사 불법침입의 목적과 경위를 말하자, 그는 “육군 장교가 되면 최하급의 소위도 50명의 군인을 지휘하는데 그 50명의 생사는 그 소위에게 달렸다.
그런데 지휘관이 눈이 나빠 관측을 잘못하면 어떻게 되겠나”라고 했다. 내가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지휘력은 애국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국심과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최대의 노력으로 눈에서 오는 약점을 극복해내겠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대령은 육군 규정을 내세워 말을 끊었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이치를 따져도 소용없다. 육사 입학은 무조건 육군 규정을 만족시켜야 한다.” 나도 나름대로 대응했다. “육사에 육군 규정이 있으면 제게는 죽음이 있습니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단식하겠습니다.” 그러자 대령은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며 “자네가 그런 각오라면 육군 규정의 예외를 적용해야 하는데, 교장 각하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한림(李翰林) 교장 각하는 지금 미국에 가셨다. 교장 각하가 오시면 말씀드리겠다. 그러니 회답이 갈 때까지 기다려라”고 했다. 진주로 귀가한 후 오로지 육사에서 편지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그해 일반 대학의 입학시험은 응시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58년 5월이 지나도 회답은 없었다. 나는 육사 진학의 희망을 접고 다음해에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응시하기로 생각을 바꾸었다.
<실존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로> 1959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합격한 나는, 자취방을 얻고 입학식을 마치자, 곧바로 수련할 공수도(空手道) 도장을 정했다. 비록 육사에는 못 가고, 민간의 평복을 입고 살지만, 삶의 자세와 정신의 본원은 무사로 지낼 생각이었다. 문리대 입학 당시 공수도는 초단이었고, 검도는 죽도(竹刀)를 몇 번 잡아본 정도였다. 유도도 초단이었다. 그때가 빌미가 돼 간헐적으로 수련한 결과, 현재 나는 태권도 4단, 검도 2단이다.
정치학의 핵은 정치철학인데, 그 기초인 철학과 중요한 관련이 있었다. 원래 정치학은 철학에서 분과된 학문이다. 그런데 당시 문리대 철학과를 중심으로 한국 철학계를 풍미하던 철학 조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였다. 따라서 회자되던 사상가는 장 폴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등이었다.
나도 사르트르, 퐁티, 야스퍼스, 하이데거, 카뮈, 말로 등에 빠져들었는데, 그중에서도 사르트르, 퐁티, 말로의 저술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사르트르는 그의 저서 ‘정치에 관한 대담’에서 “나의 근본 전제는 공산당이 제시하는 근본 전제와 같다. 공산주의자와 마찬가지로 나도 자본주의에 반대하며, 파시즘에 반대하며, 오늘날에는 프랑스 극우파에 반대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퐁티는 ‘의미와 무의미’에서 “자세히 고찰하면 마르크스주의는 내일이 되면 다른 것으로 교체될 가설(假說)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것이 없이는, 인간 상호 간의 관계라는 의미에서, 인간성도 없고 역사에서 합리성도 없게 될 모든 조건의 단순한 표명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역사철학의 하나가 아니라 역사철학 그 자체이며, 이를 포기하는 것은 역사 이성을 말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말로의 소설로는 ‘인간조건’ ‘정복자’가 감명 깊었다. 모두 실존적 휴머니즘의 시각에서 중국 혁명을 그린 것이었다.
당시 정치학과의 주임교수는 민병태(閔丙台) 교수였는데, 그는 페이비언 사회주의 이론가 해럴드 라스키를 중점적으로 강의했다. 민 교수는 라스키의 주저 ‘정치학 요강(A Grammer of Politics)’을 꼭 원서로 읽어볼 것을 우리에게 권했다. 나는 사르트르, 퐁티, 라스키를 읽다가 그들이 인용한 마르크스주의 문헌을 구해 그 원문을 읽게 됐는데, <그 과정에서 의식전이가 일어나면서 점차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됐다.> 마르크스주의로 의식이 경도되기 시작하자 원전 탐독에 매달렸다.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의 ‘경제학 대강’ ‘경제 학설사’,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자본론’ 레닌의 ‘국가와 혁명’ ‘제국주의론’ ‘무엇을 할 것인가’ ‘일보전진 이보후퇴’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부하린의 ‘공산주의 입문’,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소련과학아카데미의 ‘철학 교정’ ‘세계철학사’ ‘세계사 교정’, 소련공산당의 ‘볼셰비키 당사’, 마오쩌둥(毛澤東)의 ‘모순론’ ‘실천론’ ‘신민주주의론’, 류사오치(劉少奇)의 ‘공산주의자의 수양을 논함’ ‘당내 투쟁을 논함’ ‘白區에서의 군중공작을 논함’등을 읽은 기억이 새롭다. 마르크스주의에 침잠하면서 공수도, 검도를 비롯한 무도는 ‘아시아적 신비주의’의 일종으로 비쳤기에 수련을 유보키로 했다.
<좌파의 뿌리, 신진회와 정문회> 1학년 2학기에 이르러, 2학년 이수정(李秀正·전 문화부 장관)에게서 “정치학과 1학년 중에 똘똘한 친구 몇 명 데리고 신진회(新進會)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나는 동기생인 박한수(朴漢洙)와 배춘실(裵春實)을 “똘똘한 정도가 아니라 나보다 훨씬 윗길에 있는 수재들”이라고 소개하고, 함께 신진회(1950년대 중반에 태동된 서울대 문리대의 진보적 학생서클)에 들어갔다.
내가 문리대에 입학하기 이태 전인 1957년, 신진회 멤버인 류근일(柳根一·전 ‘조선일보’ 주필)이 문리대 기관지 ‘우리의 구상’에 ‘모색-무산대중을 위한 체제에로의 지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가 구속 기소됐는데, 이 필화(筆禍) 사건으로 신진회도 표면적으로 일시 해체됐다. 그러나 곧 반(半)합법적인 형태로 재건됐고 내가 문리대에 입학한 1959년에는 합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정치학과에서 신진회와 쌍벽을 이루던 또 하나의 진보적 학생 동아리는 ‘정문회(政文會)’였다. 진보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념은 신진회와 같았지만, ‘정치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발해보자는 취지에서 정치학과의 ‘진보적 문학 애호가’들이 모여 만든 모임이었다. 나는 정문회 회장이자 4학년 선배이던 김질락(金瓆洛·1968년 김종태 이문규 등과 함께 통일혁명당 결성 혐의로 구속된 후 사형)의 권고를 받고 이번에도 박한수, 배춘실과 함께 정문회에도 들어갔다. 정문회에는 노재봉(盧在鳳·전 국무총리), 송복(宋復·연세대 명예교수), 그 외 다른 선배들도 있었다.
<흡혈의 식인사회> 1960년 4·19혁명 전 어느 날, 나는 문리대 맞은편에 있던 의과대학 구내 함춘원(含春園) 언덕에 홀로 앉아 나름대로 사색적인 한가로움을 맛보고 있었는데, 우연히 건너편 건물 아래를 바라보니 적지 않은 무리가 건물 앞 잔디밭에 늘어져 있었다. 왜 그러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가까이 다가섰는데, 이상 한 점은 공통의 일에 종사하는 한통속처럼 보이는 인상에도 불구, 서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멍한 시선으로 멀뚱멀뚱 하늘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외부의 틈입자(闖入者)가 자신들의 무리 속으로 들어와도 신경 쓰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 후 며칠간 그들 사이에서 실체를 알아본 결과, 그들은 서울대 부속 대학병원에 피를 팔려고 온 매혈자(賣血者)들이었다. 피를 빼주고 나면 기운이 없고 현기증이 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안정을 찾아 집으로 가려면 눕거나 쭈그려 앉아 어지럼증을 참는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피를 판 후 움직일 힘을 얻기 위해 ‘운기조식(運氣調息)’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대병원의 규칙상 2~3개월에 한 번만 매혈을 해야 함에도 그들은 1개월에 한 번, 심하면 1주일에 2~3회씩 살인적으로 피를 뽑아내고 있었다.
▼ <4·19와 민통학련, 인혁당의 태동> 그런데 이렇게 비참한 매혈자들에게 기생해 그들의 돈을 뜯어먹는 ‘매혈 브로커’ 집단이 있었다. 대학병원 규정상 매혈을 하려면 엄격한 신체검사를 통과해야 했는데 매혈 브로커들은 매혈액에 따라 일정한 비율의 ‘와리(割)’를 취하고 ‘매혈의 문’을 통과시켜주고 있었다. ‘매혈업계’의 이런 속사정을 들은 후 나는 흘러내리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신식민지 반봉건 매판자본주의는 흡혈하는 식인사회’라고 울부짖으며 ‘강물처럼 넘쳐흐르는 빈곤과 착취를 삼제(芟除)하기 위해서는 개벽봉기(開闢蜂起)해야 한다’고 다짐하면서 소리 죽여 아우성쳤다.
1960년 4·19혁명의 전야인 3·15부정선거 당시, 나는 아현동 고개 비탈에 있던 사회학과 조봉계(전 한림정보산업대 학장)의 판잣집 단칸방에서, 조봉계를 포함한 몇몇 친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그 집에 인접한 집이 동네 반장 네 집이었는데, 반장의 평소 생업은 가짜 꿀 제조였다. 3·15 선거일이 되자 아침부터 자유당 후보를 찍으러 가는 동네 반원들로 득시글거렸다. 반장은 반원들을 3명 내지 6명씩 묶어 조를 편성했고, 그중의 일부 인솔자는 자유당 완장까지 차고 반원들을 투표장으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격분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는 선거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교체는 불가능하며, 대중의 폭력적 봉기에 의한 타도만이, 이승만을 하야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다시 한번 단정하게 됐다.
신진회 멤버들 사이에서 ‘반(反)이승만 봉기’의 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1960년 신학기 준비를 위해 학생들이 서울대 중앙도서관을 출입하던 그해 2월 중순부터 시작됐다. 신진회는 먼저 문리대 정치학과 안에서 부정선거 반대 데모를 일으켜야 할 당위성에 대해 토론했고, 이는 곧 선전(宣傳)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이 공감대를 전 문리대, 전 서울대로 확산시켜갔다. 나아가 서울 시내 각 대학에 데모를 일으킬 수 있는 공감인자(共感因子)를 포섭했고, 각 대학가 봉기일을 같은 날로 조정해 나갔다. 그 결과 3월 말경에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동국대, 경희대, 건국대, 외국어대, 중앙대 등 서울 시내 주요 대학 간에 봉기일을 일치할 것과 봉기의 전략전술을 함께 의논할 것에 합의했다.
그 후 각 대학 사이의 회합이 거듭됨에 따라 4월 초순에는 구체적인 봉기 일자를 4월21로 정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터졌다. 고려대가 4월21일이 아닌 4월18일로 앞당겨 데모를 결행한 것이다.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 고대 데모에 호응해 즉시 전체 대학이 데모를 결행하기로 전술을 통일했다. 이에 따라 즉시 4월19일로 앞당겨 데모를 결행하기로 결정했는데, 총 주동자로는 당시 신진회 회장과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과회장을 겸하고 있던 윤식(尹埴·전 국회의원, 대학교수)이 중의(衆意)에 의해 이미 추대돼 있었다. 동시에 신진회의 이수정, 서정복(서울대 철학과 58학번, 경북고 출신, 4월혁명회), 유세희(전 한양대 교수) 등이 선언문을 작성했다. 박한수, 배춘실, 기타 여러 학우와 더불어 나는 데모 군중 집결을 위한 일선의 선동과 연락을 맡았다.
4월19일 아침 문리대 교정에서 데모 군중을 집결시키기 위해 플래카드를 들고 최초로 “부정선거 무효! 자유민주 결사 수호!”를 외친 자는 박한수였다. 교정에 집결한 학생은 200여 명. 우리는 오전 9시10분경 미리 제작한 4·19선언문을 배포하고 데모를 시작했다. 당시 선언문의 내용은 이러했다.
“한국의 일천한 대학사(大學史)가 적색 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에 거획(巨劃)을 장(掌)하고 있는 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고 있는 것과 똑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김주열의 참시(慘屍)를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專橫)의 발가벗은 나상(裸像)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써 우리를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학창의 양심을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중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원임을 자랑한다.” 이 선언문 중 ‘캄캄한 밤중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는 임화(林和·1908~53, 시인, 문학평론가, 카프 소속)의 시에서 나온 것이다.
“부정선거 다시 하라!” “자유민주 사수하자!”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진하던 최전열은, 함성과 함께 무장 진압 경찰대와 충돌했다. 맨 앞줄에 있던 나는 충돌시 경관과 격렬하게 완력을 교환했다. 그러나 문리대 데모 대열 전체는 무장한 진압경찰의 ‘전문적인 폭력’에 견디지 못하고 흩어져 도주했다. 도주했던 데모대는 얼마 후 다시 대오를 정비해 더욱 늘어난 인원으로 돌팔매를 우박처럼 퍼부으면서 돌진했다. 이번에는 경찰의 대오가 무너지고 데모대는 종로5가 쪽으로 전진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신진회의 대학 내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특히 신진회 내부에서는 진보파의 세(勢)가 크게 신장했다. 나아가 신진회 진보파는 학내 진보파라는 협소한 범주를 넘어 학생운동 진보파로 발전했고, 그 세력이 문리대나 서울대뿐 아니라 전국의 대학가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는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民族統一全國學生聯盟)’, 즉 민통전학련으로 결집됐다.
1960년 11월18일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 결성대회’가 열렸다. 신진회 회장 겸 문리대 정치학과 과회장으로 4·19혁명의 상징이던 윤식이 서울대 민통전학련 회장으로 추대됐다. 나는 한편으로 서울대 민통전학련 결성에 조력하면서 타 대학의 민통전학련 조직 결성을 도왔다. 특히 김승균(‘사상계’ 3대 편집장, 1970년 김지하에게 시 ‘오적’을 청탁했다가 수감, 전 일월서각 대표, 남북민간교류협의회 이사장)의 성균관대 민족통일연구회 선언문과, 연현배(전 ‘내일신문’ 편집국장)의 외국어대 민족통일연맹 선언문 작성을 도왔던 것이 기억난다.
민통전학련을 조직하면서 한편으론 안병규(11·12·13대 국회의원)를 위원장으로 하는 ‘한미경제원조협정반대투쟁위원회’를 만들고 반미투쟁을 전개했다. 이런 투쟁 속에서 각 대학의 통일운동 세력을 속속 규합해 1961년 5월6일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결성준비대회’를 열었다.
<‘민자통’ 이종률이 쓴 4·19 제2선언문> 민통전학련 창립 며칠 전인 4·19혁명 1주기(1961년 4월19일)에 서울대에서 학생 명의로 발표한 ‘4·19 제2선언문’은, 지금까지 학생운동 지도부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1961년 2월 창립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의 이론적 기조를 쥐고 있던 이종률(李鍾律·1905~89, 전 부산대 교수) 선생이 직접 쓴 것이었다.
이 선언문이 채택된 경위에는 약간의 사연이 있다. 4·19혁명 1주년 기념식을 준비하던 학생운동 지도부가, 아직 4·19 제2선언문의 초안을 만들기 전이었는데, 이종률 선생이 나를 만나자고 한다는 연락이 와 찾아갔더니, 그는 “4·19를 쟁취한 한국 학생운동은 앞으로의 변혁운동에서 중심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학생운동에 있어서 과학적 이론의 지표를 바르게 세워야 한다”며 가르침을 줬다. 그러면서 “4·19 제1선언문은 미문(美文)이지만, 과학적인 지표라는 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제2선언문은 부족하나마 내가 초안을 써 보내겠으니, 김형이 고견(高見)으로 수정해서 학생 지도부에 채택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에 이종률이 쓴 초안을 사학과의 김상립(金相立)이 받아 와서 “초안을 읽어보고 수정해 꼭 채택시키라”는 이종률의 지시가 있었다고 전했다.
이종률은 4·19혁명 당시 55세였는데, 경북 영일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 와세다대를 졸업한 후 신간회 도쿄지회에 가담해 지회의 주동분자로 활동했고, 귀국한 후에는 형평사(衡平社) 운동(1923년부터 시작된 천민계급의 지위향상을 위한 사회운동)에도 깊이 관여했다. 광복 후 백남운·이극로 등과 함께 조선학술원, 민주주의 독립전선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했다. 4·19혁명 직전에는 부산대 정치학과 교수였고, 4·19혁명 뒤에는 자신의 ‘민족혁명론’에 입각해 혁신계 및 학생운동을 지도했으며, 도예종(都禮鍾·1924~75, 2차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집행)과 더불어 민자통의 양대 실권자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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