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허겸(李許謙)을 시조로 하는 '인천 이씨' 후손들이
언제 진해에 들어와 세거하였는지 경위는 불분명하다.
'창원시 진해구'에 위치한 망산도는 허황후가 입도한 곳.
인주 이씨는 원래 허씨(許氏)인데
당나라 왕이 내린 사성(賜姓)이며
'인주 이씨'는.,당나라 왕실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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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 618년 ~ 907년)은 수나라 멸망 뒤 건국된 중국의 정통왕조.
한족과 선비족의 혼혈로 추측하는 가설이 있는 이연에 의해 건국.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력을 자랑할 정도로 매우 번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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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경제와 문화 등 다방면적으로 완벽히 발달된 제국.
당은 현재까지도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대제국으로 평가.
당나라는 반란으로 인해 국력이 약해져 907년에 멸망했다.
'중국 역사 상 가장 걸출한 여성 정치인'.,측전무후.
중국 역사 상 550 여 황제 중에서 유일한.,여제(女帝).
당 개국공신 무사확(武士彠)의 2녀, 원래 이름은 조(照).
무사확은 개국공신이라고는 하지만 원래는 목재상이었다가
수 양제 때 대규모 운하공사로 돈을 많이 벌어 관직을 산 사람.
당 고조(高組) 이연(李淵) 휘하에서 무기보급 및 관리하는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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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씨 시조' 이허겸(李許謙, ? - ?)...........
고려의 외척으로 고려 문종의 장인 이자연의 할아버지이다.
현종비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의
외할아버지이며 인예태후, 인경현비, 인절현비의 증조부이다.
김수로왕· 허황옥의 후손이다.
비는 경순왕의 아들인 신라 대안군 김은열의 딸이다.
이자연(李子淵)과 이자상(李子祥), 이자겸(李資謙) 등의 선조이다.
본관은 인천(仁川) 또는 경원(慶源,仁州).
그의 선대는 본래 허씨(許氏)였으나
그의 선조 중에 허기(許奇)는 경덕왕 때
병마사대광(兵馬使大匡)을 지내다가 당에 입조.
관료생활을 하면서 당나라 현종 천보 14년 겨울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이듬해 2월에 使臣의 명을 받들고
파촉(巴蜀)을 수행하자 당 현종은 그 노고(勞苦)를 가상히 여겨
그에게 오언절구 고시(古詩) 1편을 선물로 주고, 다음해 정유년에
당 현종을 따라 환도하자 현종은 그에게 자신의 성인 이씨(李氏) 성을 하사
그 후손 중 일부는 이허(李許)의 복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가계가 실전되었으며 이허기 이후, 이검, 이파,이귀(李貴),
이준(李浚)으로 이어지나, 이들과의 관계는 실전되어 미상이다.
부모에 대한 기록 역시 미상이며
그는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 손녀이자
대안군 김은열의 딸 경주 김씨와 결혼하였다.
아들은 이한으로 이자연의 아버지이고,
딸은 김은부에게 출가했는데, 3외손녀가 현종 비.
그 뒤 그의 증손녀 세명 역시 문종 비로 입궐하게 된다.
손자 이자연은 문하시중을 지냈고 문종의 장인이 되었으며,
손자 이자상(李子祥)의 아들 이예는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이예의 딸' 정신현비 이씨는 선종의 비가 되었다.
고손자 이자겸의 둘째 딸은 예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연덕궁주가 되었다가 아들 인종을 낳고 왕비로 책봉되었다.
뒤에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인종의 비로 들이기도 하였다.
1022년 세 명의 외손녀 원성왕후(元成王后),
원혜왕후(元惠王后), 원평 왕후(元平王后)가
모두 고려 현종의 후비로 들어가면서 특별히
증 상서좌복야 겸 상주국(上柱國)에 추증되었다.
하여, 소성현개국후(邵城縣開國侯) 봉작 &
인천 식읍(食邑) 1,500호(戶)가 추서되었다.
이로써 인천을 중심으로 한 해상 무역을 통해
기반을 다진 인주 이씨는 고려 왕실과의 외척으로
고려시대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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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선종 6년(1089) 과거에 급제했던 이자현은
관직을 버리고 청평산에 들어와 은둔생활을 했다.
그는 청평사 주변에 대규모의 정원을 가꾸며 즐겼다.
이자현은 28세에 벼슬을 버리고
춘천의 청평사(오봉산)에 들어가
승려가 아닌 자연인으로 평생 살았다.
"'물고기가 물을 좋아한다.'고 하여
새까지 깊은 못으로 가서는 안된다."
"새는 새로서 새를 길러
숲속의 즐거움에 내맡겨 두고
물고기는 물고기를 보고 물고기를 알아
강호의 즐거움을 제멋대로 즐기게 놓아두자."
"한물건이라도 있어야 할 곳을 잃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제각기 마땅함을 얻도록 해야 한다."
"새의 즐거움은 깊은 숲속에 있고
물고기의 즐거움은 깊은 물속에 있다."
- 이자현(1061~1125) -
'이자겸(?~1126)의 난'을 일으킨.,사촌 형.
이자겸은 당대에 막강한 외척을 형성하였던
인주(인천)이씨 가문의 한때 중심인물이었다.
이자겸과 이자현은
'사촌형제' 사이지만
각각 가는 길이 달랐다.
.............이자겸...........
'그의 할아버지'인 이자연은
딸 셋을 문종에게 시집보냈다.
첫째딸 인예왕후는 순종, 선종, 숙종의 어머니.
고려 12대왕, 13대왕 14대왕을 생산한 국모였다.
이자겸의 누이동생 장경궁주는 순종(제 12대왕)의 부인.
이자겸은 '숙종의 아들' 예종(제 15대왕)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사위 예종과 딸 문경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제 17대왕 인종.
이자겸은 두 딸을 인종에게 시집보냈다.
이자겸은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다.
이자겸이 권력을 좇기 위한., 정략결혼이었다.
그 결과, 이자겸은 인종 위에 군림할 수 있었으나,
그 권세가 지나쳐 정적들에게 쫓겨나 영광에 유배되고
두 딸은 폐비가 되고 말았다. 이자겸이 영광에서 맛본 조기.
머리에 돌처럼 딱딱한게 있어
석수어(石首魚)라 부르던 조기.
이자겸은 말린 석수어 맛에 반해,
이를 굴비라 이름짓고 왕에게 진상.
굴비는 '굴복하지 않는다.'는 뜻말.
이자겸은 유배당한 1126년 그해 겨울
유배지 영광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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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부귀영화를 쫓았던.,이자겸.
그래서, 상반된 삶은 살았던.,이자현.
첫댓글 선경님 덕분에 오봉산및 청평사의 얽힌 역사적 사실을 잘 알게 되었네요..
산행에 앞서 이런 사연들을 알고 접하면 더 우리들의 마음에 와닿는 면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세세한 정보에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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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는
'조선왕조 519년 국가 브랜드'.
하여, 덧말로 역사를 좀 더 보완.
인천이씨는 허씨, 김해 김씨와 더불어
가락종친회에 속한 국내 최대 종친회.
'인주이씨'는 당나라 왕실의 성씨입니다.
그렇다면, 당나라는 한반도 출신 한족.
인천을 거점으로 하는., "인주이씨" 세력.
곧, '소서노 장남' 비루백제 후손이 당 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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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동아시아 역사는 풀어야 할
베일 속 수수께끼가 너무나 많은듯..
그 베일 속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초를 간직한.,오봉산 청평사 문수원.
'인천이씨' 당나라 황실과도 관련 깊은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