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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전통정원 - 경기만 옹진군.,'선미도 해역'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으로 위치한
인천의 7 등대 중 하나.,선미도 등대.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하는.,무인도.
북두칠성 등대
①영흥도 등대
②소야도 등대
③선미도 등대
④팔미도 등대
⑤연안부두 연오랑 등대
⑥월미도 등대
⑦소청도 등대
④팔미도 등대
⑤연안부두 연오랑 등대
⑥월미도 등대
⑦소청도 등대
뉴욕타임즈’ 베스트셀러에 오른 소설
“바다 사이 등대”와 영화 “해운대”에서
남녀의 사랑이 등대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
잔잔한 서해와 뜨거운 낙조를
한 몸에 안은 인천의 등대에는
어떤 러브 스토리가 담겨있을까?
42개 등대 중 북두칠성 별자리 모양,
7개 등대에 담긴 7 빛깔의 사랑 이야기.
어린 시절, 한 번쯤 들어봤을 라푼젤 동화.
‘덕적도의 예쁜 꼬리’라
불리는.,선미도(善尾島)
높은 탑에 갇힌 라푼젤이
성밖에 까지 길게 머리카락을 길러
이를 타고 올라온 왕자와의 사랑 이야기.
동화 속 미지의 풍경이
중국과 북한으로 이어지는
해상 위 선미도에서 펼쳐진다.
선미도 입구에 내리면
무인도를 실감하게 하는
무성한 풀밭이 사람을 반긴다.
그위로 펼쳐진 1.6km 모노레일.
등탑까지 물자를 나르는데 사용.
라푼젤이 머리카락을 늘어뜨려
등대로 초대하듯, 모노레일 따라
30분쯤 걷다보면 해발 223m 등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위치.
높이19m 흰 등대.
선미도는 풍랑이 심해
많은 어선들이 침몰한 곳
임금님 총애를 받은 궁녀가
왕비의 질투를 유배되었다가
한을 품고 죽은 궁녀의 영혼이
섬에 저주를 내렸다는 악독한 섬.
그 궁녀의 한 맺힌
영혼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고 선을
베풀라는 뜻말 이름이
선미도(善尾島)라 한다.
이후로부터
오직 일 년에
한번 성난 파도가
찾아 든다는 이야기.
덕적도에서
배를 빌려야 만
갈 수 있는 선미도.
등대지기들 만이
거주하며 지킨다.
등대지기 외에는
철새들과 야생화 만
출입이 허락된.,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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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미도 영해는.,우리나라 바다의 국경선이다.
1983년 소련의 남진 저지를 위해 한국을 배제한채
비상시 대한해협 봉쇄를 협의했던 레이건 & 나카소네.
그당시, 전두환 정부는 일본의 가상 ‘적’.,소련을 자극하면
'북한, 소련' 동맹으로 남한의 안보 불이익 결과 초래를 우려.
한미 정상이 한국의 안보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강력 반발했다.
대한해협 & 쓰시마해협은 한일 간.,바다의 국경선.
쓰시마해협은 동해의 출입구이며 태평양 출입구이다.
'1904~1905' 러일전쟁 당시 쓰시마 해전이 벌어진 격전지.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 국토에서
'바다의 국경선' 영해는
'육지 국경선' 만큼 중요하다.
특히, '수도권 국경선' 경기만 해역에서
선미도 해역은 육지의 경계선보다 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해에 관한 국민 관심도는.,미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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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미도 해역은 기원 전부터 현재까지
서울로 들어오는.,경기만의 관문이었다.
우리나라 역대왕조 서해관문' 선미도 해역.
특히, 고려시대 개경(開京)의 서해관문,
조선시대 한양(漢陽)의 서해관문이었다.
즉, 한반도 국운을 좌우하던.,선미도해역.
현재, 남한의 수도(水都).,서울.
수도(水都) 서울의 관문.,경기만.
'서해~경기만' 큰물길.,선미도 해역.
경기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육해공' 수도권 방위군사 주둔지.
한반도 심장부를 지키는 군사 요충지.
덕적군도 본섬 덕적도는 북서에서 남동으로
길게 이어졌는데 양끝에 2개의 부속섬이 있다.
북서로는 선미도, 남동으로 소야도를 거느린다.
660년 나당연합군을 편성하기 위해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선미도 해역을 거쳐 소야리에 들어왔다.
이때 신라 왕세자 법민은 140척 배를 거느리고
덕적도로 나아가 소정방과 연합하였다고 전하며
백제를 공략할 작전계획을 수립 후, 돌아갔다는 곳.
그후, '백제 수호신' 용을
나당연합군이 잡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옹진군 '용바위전설'.
'소정방 대군이 40일간 머물렀다는.,덕적도.
덕적도는 원래의 이름이 덕물도(德勿島)로서
중국과 통교하는 해상교통의 중간거점이었다.
옛부터 중국과 직통항로.
'덕적도~산동반도' 장안.,동로(東路)
'흑산도~강남 명주'.,남로(南路,or明州航路).
'자월도·이작도·승봉도' 주변해역은
수심이 깊어 큰 선박이 접안할 수 있고,
'자월리 포구~ 인천 연안부두' 정기항로 개설.
덕적· 영흥 및 육지인 남양지역과도 교류가 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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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군도에 속한 소야도는
덕적도에서 동남쪽으로 0.6㎞,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46㎞ 지점.
인천에서 덕적도까지 뱃길은.,75km.
선미도는 덕적도 북서쪽에 동떨어진 섬.
덕적군도 북서쪽 끝에 위치한.,무인도 선미도.
선미도 북쪽으로는.,'대청면, 백력면, 연평면' 등.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한 선미도.
옹진군은 구석기시대 유적이 발굴된 바는 없지만
신석기시대 유적으로 일찌기 사람이 살았던.,흔적들.
한반도 최초 부족국가 중 진번(眞番)이 있었다는 기록.
고조선이 정복되고 '한나라 군현' 진번군이 설치.
그후, 낙랑군· 대방군 등에 예속 후, 고구려의 영역.
고구려시대에는 옹천(甕遷)이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현재, 강령(康翎)은.,고구려 부진이(付珍伊),
현재, 백령도는.,고구려 곡도(鵠島)라 하였다.
.
옹진군에는
동네 부녀자들을
바람이 나게 한다.는
'갓쓴비석전설'도 있다.
옹진군 주민들은 삶의 터전이 바다이므로
설화 배경으로 바다를 설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고장에 전승되고 있는 설화는 지명유래담이 많고,
임경업· 이성계· 도선대사. 무학대사.유성룡· 강감찬 등.
인물 전설이 있고, 근래 인물로.,'맥아더 장군' 해신(海神).
옹진군 연평면에서는 풍어제를 지낼때
배의 수호신을 받들고 영(靈)을 맞이하는
'배연신굿'을 거행하며, 해신 임경업장군을
'풍어신(豊魚神)'으로 모시고 치성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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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섬 덕적도' 북서쪽 끝에
동떨어져서 위치한.,선미도.
선미도는 인천항 여객선 항로가 없다.
인천항에서 덕적도까지 들어간 다음에
사선을 빌려 타야 들어갈 수 있는.,선미도.
사선 또는 바다낚시 배가
이따금 오고 가는.,무인도.
유인등대가 있는.,외딴 섬.
유인등대 근무자.,3인.
선미도 해역은 청일전쟁 격전지였다.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청나라와 일본 간에 벌어졌던.,청일전쟁.
그후, 청일전쟁 격전지 중심으로
유인등대와 무인등대가 설치된 섬들.
입파도, 부도, 도리도, 선미도 등이다.
선미도등대는 1937년 고종 때
무인도에 유인등대를 설치하였다.
그로부터, 2016년 현재까지 유인등대.
1937년 선미도등대가 들어서기 이전
선미도는 어떤 용도로 쓰였던 섬일까?
무인도로 남기에는 아까운 생각이 든다.
덕적군도 북서쪽 끝 위치한.,선미도.
옛날부터 선미도 해역은 풍랑이 심해
선미도 부근은 많은 어선들이 침몰한 곳.
'달의 인력'이
서해 항로 큰물길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쳐
풍랑이 극심한.,선미도해역.
옹진군 도서지역은 독우물현상 해역.
밀물때 들어왔다가 썰물때 빠져나가는
바다물이 서해 망망대해로 오고가는 길목.
마치, 여성의 '월경 생리현상' 감정 기복처럼
서해바다 큰물길도 변화가 극심한.,선미도 해역.
'고려 ~조선'시대 악명 높은 유배지였던.,선미도.
옛날에 착하고 아름다워 임금의 총애를 받던 궁녀가
왕비의 질투로 밀려나 이 외딴 섬으로 유배된채 덧없이
세월을 보내다가 결국,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곳이다.
그곳 궁녀의 한을 품은 영혼이
구천을 맴돌며 섬에 저주를 내려
산세를 더욱 악독하고 험하게 만들어
섬에 사람을 더욱 얼씬도 못하게 했단다.
그리하여, 뱃사람들이
명명한 지명이.,악험도.
백토 堊, 험할 險.,악험도.
그후, 선미도 해역을 오가는 뱃사람들은
그 궁녀의 영혼 만이라도 뭍으로 내보내어
그녀가 그리워하던 임금님 곁으로 보내기 위해
젊은 총각을 구해 제(祭)를 지내기에 이르렀던 곳.
그리하여, 궁녀의 혼이
선을 베풀라는 의미에서
명명한 지명이 선미도(善尾島)
선미도(善尾島)는
'본섬 덕적도' 꼬리 끝.
선미도는 본섬 덕적도와는
불과 500m해협을 사이에 두고
북서쪽 끝에 동떨어져 있는 무인도.
마치, 문명세계와는 동떨어져 있는
'전설의 고향' 용궁(龍宮) 같은 위치.
망망대해 서해바다가 애워싼.,외딴 섬.
그러나, 입지적인 여건으로 보면,
장차, 국운을 좌우할 만한.,요충지.
그 진가가 빛을 보지 못하는.,선미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강은 서해로 나간다.
인천앞바다를 거쳐 서해로 흘러나가는 한강 물길.
인천앞바다 세갈래 큰물길에 큰 영향을 끼친듯 하다 .
한강이 인천을 거쳐 서해로 빠져나가는 세갈래 큰물길.
인천(仁川) 지명이 실감나는.,인천앞바다.
'어질 仁' 어진 사람들 만이 드나드는.,큰물길.
덕을 쌓은 사람 만 출입 가능한.,덕적도(德積島)
.
'위로는.,'북한 연평면~ 백령면' 아래로 나가고
가운데로는 대청면과 덕적면 사이로 빠져나가고
아래로는 덕적군도와 태안반도 사이로 빠져나간다.'
'그중 덕적군도를 좌우로 품고
서해로 나가는.,두 갈래 큰물길.
'수도권 도서지역'의 허리를 관통.'
인천앞바다 세갈래 중
한가운데 가장 큰물길이
덕적군도를 위 아래로 품고
서해 망망대해로 빠져 나간다.
'옛부터 '큰물길 섬'이라 하여.,"큰물섬."
"덕물도(德勿島)"라고 불리웠던.,덕적도.
덕적군도는., 대표적인 수도권 도서지역.'
.
인천앞바다 수도권 도서지역은
배를 타고 섬 여행을 다니다 보면
마치, '서해의 그랜드 캐년'과 같다.
신석기시대 황해평야
패총 유적지.,덕적군도.
한강에 의해., 패인걸까?
황하강에 의해.,패인걸까?
언제 쯤 육지에서 분리된걸까?
.................황하강(黃河江)................
길이 5,463km, 면적 944,970km² .,황하강.
연간 16억톤 황하강 토사는 세계 최대 운반량.
하구 부근에 광대한 삼각주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상류, 중류에서 황토 고원을 통하여,
많은 지류가 대량의 황토를 쏟아낸 것.
역대 중국왕조 수도가 강가에 있었고
선사시대 황하문명의 발상지였던.,황하강.
황하강은 잦은 범람으로 물길이 수시로 바뀌어
인간 능력으로는 도저히 다스릴 수 없는 강이었다.
1854년 이전 물길은 산동반도 남쪽을 지나 황해로 유입.
1850년대 대홍수로 강 하구는 현재처럼 북으로 320km 이동.
그 이전에는 발해 북부 톈진 부근에 하구,
그 남쪽의 황해로도 흘러들었던 적도 있다.
옛부터 하류는 천정천의 범람으로,
황하강 물길을 크게 바꾸어 왔던 탓.
그러한 원유로는 황하 옛길로 불렸다.
1938년 중일 전쟁 중에는 일본군 침공을 저지하려고
국민당이 제방을 폭파하여 물길을 바꾼.,황하 홍수 사건.
1947년에야 제방의 수복이 완료되어, 하구가 현재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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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강원도·충청북도·경기도·서울특별시를
동서로 흘러, 황해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다.
한강의 길이는 514㎞
유역 면적은 2만 6,219㎢.
수도권 도서지역은 황하강, 한강에 의해 패였다면
미국의 '그랜드 캐년'은 콜로라도강에 의해 패였다.
매년, 약 500만 관광객들이 방문하는.,'그랜드 캐년'.
하루 평균 50만t 씩 그랜드캐년을 깎아내고
엄청난 진흙, ·모래·자갈 등을 하류로 운반한다.
'서해도 그랜드캐년 유사한
침식과정을 거친것 아닐까?'
.........................그랜드 캐년......................
애리조나주 북쪽 경계선 인근 파리아 강 어귀에서
네바다주 경계선 인근 그랜드위시 절벽까지 이어진
그랜드캐년은 콜로라도 강에 의해 패인.,거대한 계곡.
콜로라도 강의 계곡으로 들어가는 계곡 입구는
동쪽 글랜 캐니언댐 밑.,리스페리(Lees Ferry).
여기서 계곡으로 흘러드는 콜로라도 강은
서쪽으로 446km를 흘러 미드 호로 들어간다.
이구간 양편 계곡을 그랜드 캐년이라고 부른다.
대부분 지역이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으로 지정.
인디언 부족의 땅에 속한 지역도 상당 부분을 차지.
고무보트 배(Raft)를 타고 통과하는데 2주일 이상 소요.
콜로라도 강에 의해서 깎인 계곡의 깊이는
1,600m에 이르고 계곡의 폭은 넓은 곳이 30km.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국립공원.
2010년 그랜드캐년 국립공원 관광객은 439만 명.
미국 서부지역 국립공원 중 가장 높은 숫자를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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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그곳 관광객을 위한 소형비행기로
그곳 상공에서 내려다 본 기억이 인상 깊다.
그후, 요세미티 국립공원을 갈때도 다녀온 곳.
한강~ 인천앞바다~선미도 해역 ~서해.
서해바다 조수 간만의 차이가.,최대 10m.
한강물이 서해로 빠져나가는.,선미도 해역.
서해 상에서 선미도해역은
'양자강의 하류 & 한강의 하류'
두 하류 물줄기가 부딪쳐 만나는 곳.
'서해의 그랜드 캐년'
출입구.,선미도 해역.
동쪽으로는.,인천앞바다, 영흥도.
서쪽으로는.,중국 산동반도 직통항로
남쪽으로는.,덕적군도 태평양전진기지.
북쪽으로는.,소청도 대청도 백령도 요동반도.
사방팔방 중심 축에 위치한.,선미도.
장차, 선미도는 해상공원 개발의 중심 축.
'한려수도' 못지 않은.,선미도 해상공원 벨트.
섬 여행은 섬으로 들어가서
둘러보는 풍경도 아름답지만
배를 타고 섬과 섬을 돌며 보는
해안가 비경이 더욱 환상적이다.
한려수도
....................한려수도....................
'한려수도'는.,전남 여수시, 경남 사천시·
거제시통영시 하동군· 남해군에 걸쳐 있는
'한산도 ~ 여수' 해역의 물길과 섬을 뜻한다.
1968년 12월에 최초 해상 국립공원으로 지정.
총면적 510.32㎢ 중 바다면적이 344.76㎢이다.
거제해금강지구,
통영·한산지구, 사천지구,
남해대교지구, 상주·금산지구,
여수·오동도지구 등으로 구분된다
.
관광코스로는 부산에서 엔젤호를 타고
통영-여수, '통영-사천-부산-여수'코스.
여수항에서 남해-사천-사량도-통영-부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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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려수도
한려수도는 남해 나름대로 아름다운 관광지
덕적군도는 서해 나름대로 멋이 있는 비경지대.
특히, 백령도 두무진 인당수 해역 풍광은 신비롭다.
덕적군도 & 백령도 두무진.
백령도 해역은 '한려수도'보다 아름답지만
백령도 해상관광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 문제점.
뱃길이 먼데 기상이 악화되면, 뱃멀미도 고통스럽다.
위 속에서 아직 소화가 안된 음식물이
먹은 순서 반대로., 모두 토해낼 때까지
뱃멀미를 하다보면, 일행 보기도 민망하다.
소형 어선, 모터 보트 등을 타고
해상관광 겸 바다낚시를 나가면
생리현상 해소하기가 마땅치 않다.
옛부터 전통적으로 어선이 출항할때
어부들이 여성을 태우지 않는 큰 이유는
고깃배에서의 생리현상 해소 때문 아닐까?
선미(船尾) 바깥 끝 해상에 설치된.,파이프.
난간 끝 손잡이가.,곧, 남녀공용 화장실 용도.
일행과 마주보며 쪼그려 앉기 조차도 민망하다.
남녀를 불문하고
크고 작은 다급함도
쪼그려 안아야 만.,안전.
쾌속선 후미에서
자세를 잘못 잡으면
물고기밥이 되기 십상.
.
중심 잡기 힘든 쾌속선 후미에 난간을 부여잡고
위태롭게 매달려 앉아 볼일을 봐야하는.,아슬아슬함.
다급함을 참고 참다가, 못참고 해소하다가 보면.,황망함.
차라리
참고 참다가
바다물 속으로
뛰어들고픈.,심정.
1980년 초 여름, 부산항, 고흥반도 녹동항에서
작은 어선을 빌려타고 바다낚시를 나갔던 경험.
녹동항 해역 밤바다에서의 밤낚시는 인상 깊었다.
낚시대 바늘에 걸린 장어와 도다리가
함께 수면 위 허공으로 솟아오른.,행운.
그런데, 큰 생리현상 해소가 가장.,문제점.
밤바다에 물고기밥을 주는 심정으로.,겨우 해소.
그러나, 김양식장 밧줄에 어선 스크류가 걸린 것.
다행스럽게 노련한 고깃배 선주라서 가까스로 탈출.
칠흙 같은 밤바다 어둠 속에서
바다 수면에 번쩍이는 발광물질.
저승사자 물귀신이 다가오는 느낌.
....................
....................
부산앞바다 주전자섬 해역에서.,칼치 낚시.
물살이 급해 온종일 배멀미를 참기 힘들었다.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죽다가 살아난 느낌.
기진맥진 온몸이 축 늘어져서
정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당초, 주전자섬에서 갯바위 낚시 일정이었지만
파도가 거세어 주전자섬에 배를 댈 수가 없었기에
주전자섬을 맴돌며 칼치낚시로 일정을 바꿨던 결과.
주전자섬에서 물때 맞춰 낚시줄 한번 드리우면
50마리씩 잡힌다는 바다낚시 매니아 유혹에 넘어가
긴가민가 하고 따라갔다가 죽을 고생만 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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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태종대 절벽 앞 50m 떨어진
'50평 남짓한 암초인 갯바위는 추웠다.
밀물때 들어갔는데, 썰물 때는 10평 남짓.
오륙도가 왜 오륙도인지
그곳에서야 알게 되었다.
썰물에는 5 , 밀물에는 6.
밀물에 2섬이 되는 암초 1.
그런데, 점점 기상이 악화되어
파도가 암초를 때리기 시작했다.
50m 앞 태종대 자살바위 아래
소용돌이 치는 물살을 바라보며
우럭을 낚아올릴 때만 해도 좋았다.
갓 잡은 물고기를 회 치지 않고
사과 껍질을 깍듯이 깍아 통째로
초고추장에 찍어 씹으면서 낙시질.
갯바위를 집어 삼킬듯한,
파도에 온몸이 흠뻑 젖어도
고기 잡는 맛에 기쁘기만 했다.
그런데 밀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파도가 거칠어지자., 상황이 달라졌다.
온몸이 바다물에 흠씬 젖어 몹시 추웠다.
추위를 견디다 못해 급기야
지갑 안 돈까지 모두 끄집어 내어
태워서 몸을 녹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중에는 일행이
1평 남짓한 암초 위에
서로 부둥켜 끌어안고 서서
파도에 휩쓸려 나가지 않으려고
죽기 살기로 버틸 수 밖에 없는 상황.
불과 50m 앞에.,태종대 절벽 해안가.
헤엄쳐 탈출하다가 갯바위 파도에 부딪쳐
온몸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두려움이 엄습.
만약 낚시배가 안오면.,어떻하나?
낚시배가 그곳에 일행을 오전에 내려놓고
해질 무렵 쯤에야.,다시 그곳으로 올 때까지
오도가도 못하고 그곳 갯바위에 갇혀 있었다.
백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느낌.
......................
......................
그후, 인천앞바다 해역
시간낚시배도.,마찬가지.
작은 배는 바다낚시에 적격이지만
파도와 풍랑에 약하고 고정이 잘난다.
큰배는 비교적 안전, 고기가 잘 안잡힌다.
큰 배나, 작은 배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
남해보다 훨씬 추운 서해.
파도가 심하고 물살도 빠르다.
그래서, 바다낚시는
다시 안하게 되었다.
서해가 무서운 탓이다.
돈 내고 사서 고생하는 격.
'수도권 도서지역 해상관광
문제점 해결 방법은 없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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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도서해역.,해상관광.
영흥도 도서해역.,해상관광.
덕적군도 도서해역.,해상관광.
수도권 해양관광 도서지역.,3 코스.
'해상관광 전용' 수륙양육 여객선 운항.
해수면 깊이에 구애받지 않아.,안전하다.
서해 '3 군데 해상관광' 연결고리.,선미도.
특히, 영흥도~이작도~소야도~ 덕적도~선미도.
'장차, 연육교와 해저터널로 잇는다면.,해결될 문제.
섬과 섬을 안으로 들어가서 돌아볼 수 있고
섬과 섬을 여객선에서도 돌아볼 수 있게 된다.
관광 여객선 운항거리도 줄어 요금 부담도 줄듯.
장차, 선미도는 빛을 발휘하지 않을까?'
선미도는 '3군데 해상관광 루트' 전망대.
3군데 해상관광 안전에 도움 될 선미도등대.
현재, 남북한교역 직통항로 관문.,선미도 해역.
수도권 도서지역 해상교통 항로 중심.,선미도 해역.
장차, 선미도에서 영흥도까지., 연육교로 연결이 가능.
뱃길이 멀면, 뱃멀미가 고통스러워
눈앞에 해금강이 있어도 보기 싫지만
뱃길이 단축된다면, 해상관광이 즐겁다.
남해 한려수도 해상관광은 활성화 되어 있지만
서해 수도권 해상관광은 활성화 되지 못한.,현실.
세계적인 해상관광자원이 빛을 보지 못해 안타깝다.
'특히, 선미도는 어떠한 까닭으로
지금껏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걸까?'
선미도해역은 조난사고 다발지역 때문인듯 여겨진다.
문제점 해결을 위해 선미도해역의 사건들을 되짚어 본다.
장차,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해결될 수 없는 문제일까?
인천 부근 해역은 NLL 월선 가능성이 높아
강화도 주변 해역은 수상 레저가 금지된 구역.
영종도 서쪽 '주문도, 석모도 ~ 선미도 서쪽'해역.
짙은 해무로 인하여
NLL 월선 잦은.,해역.
또한, 수심1m 바다가 넓게 분포되어 있고
'어로한계선'과 '특정해역'을 접하고 있기에
고도의 항해 기술과 주의가 필요한 해역이다.
자칫, 잘못 이곳 해역에 빠져들면
수심1m 미만 미로 속 해역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는 조난을 겪게 된다.
'수상레저활동 금지구역'
100만원 이하 과태료.,해역.
'인천항~ 백령도' 사이를 운항하는 쾌속선이
'선미도 해역~ 소청도~ 대청도~ 백령도.,운항.
육지에 길처럼 바다에도 큰물길, 작은물길이 있다.
서해바다에서
작은물길 해역은
소규모 어선의 항로.
'태평양어류' 산란장이
갯벌 암초군.,작은물길.
서해바다에서는
극심한 조류차가
큰물길을 빚어낸다.
큰물길은 작은물길에 비해
대형 어선들이 다니는 항로.
대형어선 선주들이 많은.,덕적도.
큰물길이 곧 황금어장.
큰물길이 곧 덕물(德勿)
덕적도가 곧 "덕물도"이다.
덕적군도는.,
황금어장 해역.
조금과 사리, 밀물과 썰물,
물때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어장 물길이 뒤바뀌는 해역.
조상 대대로 어부가 아니면,
풍어 어획량을 기대하기 어렵고
노련한 선주도 조난 겪기 쉬운.,어장.
선미도 해역을 휘돌아 직선거리 아닌 공해 상에서
남쪽 한계선을 타고 운항하는.,쾌속선의 곡선 뱃길.
'인천 ~백령도' 뱃길228km(직선 174km).,4시간 거리.
쾌속선이 선미도 해역을 휘돌아 가는 이유는
짙은 해무에 북한 영해 침범사고가 간혹 발생해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곡선 뱃길을 운항하는 것이다.
한강 물길은 인천을 거쳐 선미도 해역을 통과.
이때 서해 조류차 물길과 부딪치며 해무가 발생.
선미도 해역은 소용돌이 물살이 가장 거센 곳이다.
일교차가 극심하거나 해뜰 무렵에
짙은 해무는 한치 앞 시야도 가리는
소용돌이 물살 거센 해역이.,황금어장.
.
'황금어장 시즌'에는
해상사고는 잦게 마련.
2010년 9월25일 02시
인천해양경찰서에 따르면
그 전날 오후 3시쯤 대청도에서
꽃게 5t 가량 싣고 인천으로 향하던
금양호는 기관 고장으로 표류하다가
경비정에 의해 예인되던 도중 갑자기 침몰.
이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7명 중
5명은 구조, 선원 2명이 실종 사고.
.........................
.........................
백령도 공해 상에서는 중국 어선까지 얽혀
생존경쟁을 위한 대치상황이 반복되는 해상.
해마다 꽃게철이면, 삼국 어선들이 어획 각축전.
그로 인해, 남북간
군사적인 돌발 충돌이
예측 되기도 하는.,해역.
2014년 3월 28일 오전 11시 30분 경
'인천~백령도' 여객선이 짙은 해무 속
선미도 북서쪽 3.2km 해상에서 청해진해운
데모크라시5호(396t)가 낭장망 어선(7.93t)과 충돌.
여객선 승객 142명, 어선 선원 4명은 무사.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사고 후 여객선은
해경 경비정 호송 아래 인천 귀항, 어선은 덕적도 입항.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세월호.
청해진해운 다른 여객선이 3주 전
선박 충돌사고 이후 선박 충돌사고.
2014년 5월 17일 오전 10시48분 경에
인천 해경은 안산시 단원구 풍도 해상에서
Y호(9.77t․자망)를 타고 조업하던 중국 선원이
부상을 입어 헬기로 인천지역 대형병원으로 후송.
이날 오전 8시12분 경 선미도 북서쪽 해상에서
K호(7.93t․통발·승선원 4명)가 엔진 이상으로 표류.
경비함정을 이용, 선원과 어선을 안전한 곳으로 예인.
이어 오후 1시45분 경 옹진군 영흥도 인근 해상에서
낚시객 김모씨(43·서울 관악구) 등 2명이 탄 레저보트가
엔진 고장으로 표류하여 영흥도로 예인 조치한 해상 사고.
..............................
..............................
장차, '선미도 ~ 영흥도' 도서지역을
연육교로 잇거나, 해저터널로 잇는다면
해양 사고율이 줄고, 문제점도 해결될 해역.
해양사고 위험구간을 육로로 통과하기 때문.
아울러, 수도권 도서지역이 활성화 될 것 같다.
투자 건설비보다, 경제적 효율성이 훨씬 높을 곳.
'아울러, 수도권 도서지역 경제도 살아나
젊은이들이 섬을 지키려는 애향심이 늘어
해상관광도 지금보다 활성화 되지 않을까?'
장차, 젊은이들이 애향심을 갖게 되면
어장은 조상대대로 어민이 지키게 되고
전답은 조상대대로 농민이 지키게 되기에
분야 별, 전문성이 대대로 계승되지 않을까?
'산 위에서 고기잡는 어부'.,일본의 일화.
어장이 내려다보이는 섬의 높은 곳에 올라
깃발로 어선들을 '진두지휘'하는.,노인 어부.
젊은이들은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노인은 산 위에서 고기를 잡는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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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차, 태평양전진기지.,덕적군도.
'수산업, 해양관광산업, 국제해상무역'
영화산업, 요트 레저산업, 해상신도시 등.
덕적군도 12해리 밖 서해는 국제법 상.,영해.
영해는 바다 국경선이며 그 바깥으로는.,공해.
'덕적군도 서해 끝' 선미도 해역은.,영해 국경선.
공해(公海)는 공공의(公) 바다(海)라는 뜻으로
영유권, 배타권이 특정 국가에 속하지 않는 바다.
기선으로부터 200해리에 이르는 구간은
영해(12해리)와 배타적 경제 수역(188해리).
200해리 밖으로는 귀속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규정하는 근거는 UN의 국제 해양법.
그리고, 공해는 해수공간 만을 의미한다.
하여, 하층토와 해저 지면은 포함되지 않는다.
공해를 어떤 나라도 지배할 수 없다는 것은
공해 질서유지에 책임지는 나라가 없다는 뜻.
하여, 국제법에서는 선박에도 국적 부여.
각기 소속하는 나라의 국기를 달도록 하게 하고
공해 상 선박은 본국의 배타적 관할권에 따르게 한다.
즉, 공해의 선박은 본국의 법률이나 명령이 적용되고
선박 내 발생하는 사건에 대하여는 본국의 재판권 행사.
공해 상 선박은 본국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것과 꼭 같이
본국의 통제 하에 공해의 질서유지 책임을 각국에서 분담.
공해를 각국의 선박이 본국의 법령에 따르면
각 선박에 적용하는 항해규칙이 제각기 다를 경우
공해 상 불법행위 선박을 타국은 나포할 수 없게 되므로
각국에서 선박 적용규칙 통일성을 위해 수많은 계약을 체결.
국제법 상 군함에게 공해상 타국 상선에 대한 경찰권을 인정.
해적과 노예수송 선박을 혐의 조사, 나포할 권한을 예외로 허용.
그러나, 이 권한의 남용은 국제법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공해자유의 원칙’에 입각하여
공해 상에서의 어업은 자유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업 기술이 많이 발달하여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난획(亂獲)으로 말미암아
어업자원을 고갈시킬 우려가 있어 각국간 조약 체결.
그 지역 어업활동에 대하여 어구(漁具)를 제한하여
어획고를 규제하여 어업자원의 보존에 힘쓰고 있다.
이러한 어업조약으로 미·일 어업조약, 한·일 어업협정 등.
2014년 7월 30일 인천광역시 수산자원연구소는
참조기 치어 32만7천마리를 선미도 해역에 방류.
향후, 연구소는 연안 해역에 지속 방류할 예정이다.
...................영해..................
대한민국의 영해는 영해법에 따라
한반도와 부속도서에 접한.,12해리.
그 상공· 해상 및 해저 지하까지 영역.
다만, 영해법 시행령에 따라
대한해협은 일본과 관계를 고려.
3해리까지 한국의 영해로 잠정 합의.
................................................
한국의 영해에 대한 대한민국 국가권력은
국제법상 무해항행권 등에 제약 받기도 하나
한국 영토고권에 침해되지 않는 범위에만 허용.
.....................공해(公海)..................
공해는 어느 나라의 주권에도 속하지 않는
국제법 상 모든 국가에 개방되어 있는 해역.
공해는 해양국이 내륙국에게 해안접근 편의를 제공
내륙국이 국제법 상 선박을 항해 할 권리가 있는 해역.
국제법 상으로 공해에서는 자유롭게 어업을 할 수 있다.
모든 나라는 해저전선 및 송유관선을 부설할 수 있다.
공해에서 통신·운송수단을 자유롭게 확보할 수 있는 것.
모든 나라는 공해의 상공을 자유롭게 비행할 권리가 있다.
모든 국가는 공해 상에서 인공도(人工島)나
기타 시설을 건설할 수 있으며 대륙붕에서는
공해라도 연안국이 설정한 조건에 따라야 한다.
공해 상에서 과학적인 탐사 및 조사의 자유이다.
공해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로는
다음 네 가지 사항을 들 수 있다.
① 타국의 이익존중이다.
② 귀속으로부터의 자유제한.
공해는 어떠한 국가의 귀속으로부터라도 자유.
현재의 해양법은 접속수역· 보전수역·대륙붕(大陸棚) 및
배타적 경제수역을 연안국에 종속시키고 있어 자유가 제한된다.
③ 세계평화를 위한 사용의 제한이다.
공해는 평화적 목적을 위하여 유보되며,
공해상에서 핵실험이나 군사수역 설정은
1982년의 해양법에서 위법으로 규정하였다.
④ 전시(戰時)의 제한이다.
공해에서의 교전국(交戰國)의 항행·
통상·어로행위는 물론, 공해에 있는 모든
중립국의 항행이나 통상에 많은 제한을 받는다.
..............................................................
'선미도 해역 밖 영해와 공해는
향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좋을까?'
세게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영국 ~프랑스' 사이.,도버 해협.
도버 해협.
..............도버 해협...................
영국 해협 동쪽의 가장 좁은 부분으로
'영국 도버 ~ 프랑스 칼레' 사이.,34 km.
로마 율리우스 카이사르 (BC100~BC44)가
도버 해협을 건너, 잉글랜드에 상륙했을 때
대영 제국 역사는 시작되었다." - 윈스턴 처칠-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 - 카이사르 -
현재, 도버 해협 깊이는 35~55m 정도.
BC 5000년 경, 밖으로 드러난.,강의 유역.
이때 영국은 유럽 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다.
조류(潮流)는 북동쪽으로 흐르며,
부드러운 백악질로 구성되어 있는
영국의 해안절벽은 계속 침식작용 중.
세계에서 가장 통행량 많은 해상교통로.
정규 여객선은 호버크래프트(hovercraft)
즉, 고압공기로 물 위를 떠서 운행하는 쾌속정.
1991~1994년 해저터널.,완공.
......................................
영국 '도버'항에는 해저터널 완공 후에도
많은 여객선들이 드나들어 매우 분주하다.
선사시대 하나였던 대륙이 둘로 갈라져
양쪽의 해안절벽은.,석회암 지질로.,백색.
영국의 역사는 BC 2세기 경에 시작되었다.
황해에 면한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의 동해안.,저평지.
일찌기 인간생활의 중심지로서, 황해는 해안 연결 통로.
BC 3000년대 잡곡 재배 농업이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전래.
그무렵, 한반도 벼농사는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전래 되었을듯.
황해 통로를 통해 동아시아 각국의 문명은 상호 교류 되었으리라.
삼국시대에는 중국과의 내왕에 해로를 많이 이용.
백제는 수차에 걸쳐 해로로 서진(西晉)에 사신을 파견.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황해를 통하여
중국 당나라과 외교관계를 맺고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은 660년(의자왕 20) 수군을 이끌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공략하였고,
이듬해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고구려 평양성 공격.
고려시대에도 황해를 통하여 송나라 사신 및 상인의 내왕이 활발.
이때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碧瀾渡)는 국제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본디, 선미도는 본섬 덕적도와는 하나였던 섬.
660년 소정방 14만 대군이 소야도에 들어왔을때
선미도, 덕적도, 소야도는 하나의 섬이었을 것이다.
소야도는 14만 대군이 머물기에는 비좁은 섬.
660년 경, 덕적군도는 하나의 큰 섬이었을 것이다.
14만 대군의 군량미 확보 가능한.,농경지가 드넓은 섬.
덕적군도.,
남쪽으로는
수심이 깊은
율도 해역까지도
하나의 섬이었을듯..
덕적군도 섬들은
660년 경 산이었고
그 주변 해역은 모두
농경지가 아니었을까?
660년 그 무렵 풍도는
오늘날처럼 섬이 아니라
태안반도에서 돌출된 반도.
섬 형태의 "풍도골"이었으리라.
그무렵, 풍도는 서해 큰물길에 의해 패여
섬이 아닌 '태안반도 풍도골'이 아니었을까?
660년 그무렵, 덕적군도는
한강의 퇴적물이 쌓인 삼각주.
거대하고 비옥한 농경지였으리라.
1894년 청일전쟁 시발점이 된.,풍도해전.
'풍도앞바다 해전 요도'가 그 사실을 대변.
660년 덕적군도는 하나의 섬이었던 것 같다.
660년 소정방은 덕적도를
황해 뱃길에서 중간지점이라고
표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660년 조선기술과 항해술로 본다면
그당시, 산동반도 ~ 당진 직통항로는
지금처럼 넓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660년 경 한중 직통항로는 덕적도를 중간지점으로
산동반도는 오늘날보다 한반도 '당진'과 가까웠던듯.
.................................
.................................
1854년 이전까지만 해도 황하강의 물길은
산동반도 장안 남쪽을 지나 황해로 유입되었고
1850년경 대홍수로 강 하구는 북으로 320km 이동.
그 이전 황하강은 발해 북부 톈진 부근에 하구,
황하강은 그 남쪽 황해로 흘러들었던 적도 있다.
그후로도 일년에 몇번씩이나 하구가 뒤바뀐 황하강.
1938년 중일 전쟁 중에는 일본군 침공을 저지하려고
국민당이 제방을 폭파하여 물길을 바꾼.,황하 홍수 사건.
1947년에야 제방의 수복이 완료되어, 하구가 현재의 위치.
지금도 중국은 산에 나무가 적어
홍수 때마다 황하강이 범람하기에
연간 16억톤 이상 토사가 황해로 유입.
현재, 중국은 연안 항로 상으로
대형선박들이 다닐 수 없을 정도.
황해 큰물길 셋은 한반도에 가깝다.
............................
............................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간에
당 소정방과 외교 협상 경쟁을 벌린.,소야도.
결국, 소정방 대군과 손잡은 신라가.,삼국통일.
통일신라시대 당진(唐津)을 설치한 곳이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아있는.,충남 당진.
'한반도와 산동반도'를 잇는.,'한중 직통항로'
덕적도는
장안(長安)까지
가는 중간 기착점.
그곳 소야도는 썰물 때
가섬, 송곳여, 물푸레섬 등
4개 섬이 연결되는 장관이 연출.
본섬 덕적도와 선미도가
분리된 시기는 언제일까?
.....................
.....................
인천항에서 75㎞ 떨어진.,본섬 덕적도.
선미도는 무인도라 운항하는 배가 없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 북2리 선미도.
본섬 덕적도 서쪽 끝에서
500m 거리의 해협을 건너
서해 끝에 위치한.,외딴 섬.
굳이, 여행객이 선미도 안으로 들어가려면
덕적도에서 개인 소유의 배를 빌려타야 한다.
선미도에서 나올때도 전화로 배를 불러야 한다.
선미도등대는 선미도의 서쪽 끝에 위치.
서해 망망대해 항로 상에 불빛을 밝혀준다.
멀리, 인천항과 중국을 오가는 선박들이 왕래.
'등대지기' 노래 가사가
가슴에 와닿는 선미도등대.
인천 앞바다에는 유인등대 4기,
무인등대 31기를 포함하여 약 100여기.
유인등대는 소청도, 팔미도.부도, 선미도.
유인등대가 있는 무인도는
등대호가 순회 운항하고 있다.
등대 직원들의 교통수단.,등대호.
.
인천 앞바다에서 남아 있는 몇 개 안되는 유인등대.
'선미도등대'를 오가는 등대호는 등대 아래 해안을 끼고
항진해 등대 지점을 지나자 바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이어 닿은 곳은 선미도선착장.
땅콩처럼 생긴.,섬의 허리 부분.
'굴업도~선미도' 1시간 10분 뱃길.
'남북 해상교역 직통항로'가 개설된 이후로
2013년 12월 선미도 등대는 새로이 태어났다.
오랜 풍상에 낡아 훼손된 등대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등대가 더 크게 건립된 것.
등대 등탑은 19.4m로 기존등대보다 높게 건축.
해발 157m에 설치한 유인등대로 3인이 근무.
유인등대로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선미도등대.
선미도는 서해 선박의 안전 길잡이를 하는 무인도.
선미도등대는 서해 끝 어둠 속에서
망망대해에 멀리까지 불빛을 밝힌다.
37km거리 해상에서도 볼 수 있는.,불빛.
..............................
..............................
선미도해협은 본섬 덕적도와는
불과 500m정도로 거리 상 가깝지만
서해 조수차로 인해 소용돌이 급물살 해역.
1937년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선미도등대 및
섬에 갈매기 오른쪽 날개처럼 길게 뻗은 방조제.
등대 건설 때 많은 인력이 강제동원된 공사였으리라.
일제가 대륙 진출을 위해 건설한 것일까?
태평양전쟁(1941~1945)에 앞서 건설한걸까?
바다를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 격언 -
고대 동서양을 잇는 '실크 로드'가
육로 보다는 항로가 우위를 점하며
'동아시아 해상왕국'이었던.,"KOREY."
조선시대 일관된 해금정책과 공도정책으로
그 자리를 잃고 일제강점기를 겪었던.,구한 말.
그 뼈아픈 역사를 다시 되삭임 하게 하는.,선미도.
불과, 500m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선미도 촛대바위와 본섬 선돌바위는
마치, 남녀가 마주보고 서 있는 형상 같다.
선미도 촛대바위는 여자의 형상이고
본섬 덕적도의 선돌바위는 남자의 형상.
선미도 해협에 만남이 가로막힌 연인 같다.
선미도 해협 해안가.,촛대바위.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곳이다.
그 혼이 촛대바위로 환생한 것일까?
뱃사람들이 명명한 악험도 지명과
관련이 깊은 전설의 고향이 아닐까?
옛날에는 선미도 해협으로 배가 다닌듯.
선미도 해협과 마주보는
덕적도 능동자갈마당 끝
자갈마당 해안가.,선돌바위.
뱃사람들이 악험도에서 죽은
궁녀의 혼을 뭍으로 내보내기 위해서
총각을 구해 제를 올렸다는 전설의 고향.
옛날에 이곳 500m 해협을 통해서
궁녀가 선미도로 들어간 뱃길일까?
삼국시대까지
선미도와 덕적도는
하나의 섬이었으리라.
'오랜세월 동안에 파도가
두 섬을 갈라 놓았으리라.'
덕적군도 북서쪽 끝에 위치한.,선미도등대.
예전에는 덕적도 행정선이 선미도 선착장까지
운항하기도 했었지만, 기름값이 비싸.,운항을 중단.
현재, 등대 직원 3명은
사선(私船)을 빌려 타야
뭍으로 출입이 가능하단다.
선미도 앞바다는
망망대해 황해(黃海)
멀리 드물게 오가는 배뿐.
사선.
행정선
해경 함정.
바다낚시 배.
그러한, 선박들 정도가
선미도 앞바다를 오고갈 뿐.
'여객선, 도선' 뱃길은 없는 섬.
'중국 산동반도~ 덕적도 관문 선미도.'
동아시아 해상 실크로드.,고대 직통항로.
오늘날, 왜 이렇게 '무인고도'가 되었을까?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섬.,'無人孤島.'
착할 善, 꼬리 尾. 섬 島’.,선미도(善尾島).
역사적으로는 유서 깊은 섬이었던.,선미도.
천년고독(千年孤獨)
무인도가 된.,선미도.
1930년대 일제강점기까지
'한.중' 인조견 등 밀무역이
성행했던 한.중 직통항로 관문.
'산동반도 ~ 인천'.,한.중 직통항로.
660년 '산동반도 ~ 당진' 소정방 항로.
‘바다물이 어르고 휘감아 돌아 섞이는., 섬.’
아득한 옛날에 덕적도 본섬의 끝이었으리라.
서해 조수차가 본섬과 선미도를 갈라 놓은듯.
해협(海峽), 미(尾)가 들어가는 바다나 섬은
전국 어디나 물살이 휘감아 소용돌이 치는 곳.
임진왜란 격전지 '노량해협(鳴梁海峽)'., 울돌목.
노량해협은 길이 약 1.5km,
폭이 좁은 곳은 300m 정도.
밀물 때 남해 바닷물이 한꺼번에 명량해협을 통과해
서해로 빠져 나가 조류가 5m/s 이상으로 매우 빠르다.
이를 이용해 정유재란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이끈 이순신.
물길이 암초에 부딪혀 튕겨나오는 소리가
마치, 바다가 우는 것 같다고 하여.,울돌목.
유속은 약 10노트(10knot, 시속 20km 정도).
선미도는 하늘이 저주를 내려
'악독하고 험하게 만든 섬'이라
하여, 백토 堊, 험할 險.,'악험도'.
'서해.,선미도 해협
유속은 얼마나 될까?'
해마다 급해지는.,급물살.
본디, 미(尾) 자가 들어간 섬은
전국 어디나, 육속화 되는 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대변하는 지명이다.
선미도는 덕적도와
하나가 되는 과정일까?
떨어져 나가는 과정일까?
'선미도~덕적도~소야도~소이작도~
대이작도~ 승봉도~ 풍도 ~ 대난지도'
선미도에서 '당진'까지 일직선 상., 섬들.
신석기시대 유적지들을 품고있는.,섬들
황해평야가 바다와 섬으로 변한.,도서지역.
동아시아 고대항로에서 중간 기착점.,덕적도.
'모세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바다갈라짐 현상'이 장관인 해역.
서해가 품고있는 세계적인 관광자원.
이작도 풀등
육속화 과정도
볼 수 있는 해역.
오랜 세월 동안에
만나고 또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일까?
'바다갈라짐' 현상이 곧,
자연적으로 방조제 역활.
이때, 갯벌이 육속화 작용.
조석차 바다물의 흐름은
한섬을 둘로 갈라놓기도 하고
두 섬을 하나로 이어놓기도 한다.
망망대해 서해에 고립된.,선미도.
서해에서 해수면 깊은 '급물살' 물골.
옛부터 인천으로 들어오는 관문.,선미도.
'급한 물길이., 죽일 殺(살).'
화살 '矢(시)'와 같은.,급물살.
덕적군도는 제4빙하기 말,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급상승.
하나의 섬이 여러 개 섬들로 된 해역.
'덕적군도는
오랜세월 동안
물길에 조각 조각
패여나간 흔적 아닐까?'
해수면이 상승하여
육지가 가라앉은 현상이고
해퇴현상으로 솟기도 하는 곳.
덕적군도 일대는
참으로 신비한 해역.
마치, 살아 숨쉬는 생명체처럼
풀등 위치가 쉴새 없이 뒤바뀌며
항로를 위협할 만큼 물길이 변한다.
물길이 변하면
어장도 위협 받고
식수도 위협 받는다.
선미도는 식수가 귀해 무인도가 되었지만
몇해 전까지 유인도였던 흔적이 남아있는 섬.
'고려 말~조선 초.' 국영말목장 겸 귀양지였던 섬.
'고려 말 ~ 조선'시대에도
지금처럼 식수가 귀했을까?
'죄인을 고향이 아닌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 기간 제한된 곳에서 살게 하는 형벌'.,귀양지.
선미도(善尾島)는 귀양지 중에서 가장 악독한.,환경.
옛날 착하고 아름다워 임금의 총애를 받던
궁녀가 왕비의 질투로 밀려나, 외딴 섬에 유배된 채
덧없는 세월을 보내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곳.
본섬 덕적도와는 500m해역을
사이에 둔 선미도 동쪽 끝.,지점,
선미도 벼랑 아래 위치한.,촛대바위.
.
밀물이 들어오면, 바다에 갇히고
썰물에는 선미도와 하나 되는 바위.
'그때 한을 품은 궁녀의 영혼이
구천을 맴돌며 섬에다 저주를 내려
섬을 악독하고 만들었다는 전설의 고향.'
'또한, 궁녀의 한을 품은 영혼이
저주를 내려 악독하고 험하게 만든
섬이라 하여 백토 堊, 험할 險.,악험도.'
유럽의 날조된 전설들에 비하여
역사적인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현장감이 살아 있는.,전설의 고향.
고려시대 전설일까?
조선시대 전설일까?
'1274년 ~ 1351년' 동안에 '25대 충렬왕,
26대 충선왕, 27대 충숙왕, 28대 충혜왕 및
29대 충목왕, 30대 충정왕' 돌림 字., 충성 忠.
당시 고려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사위.
'1351년~1374년' 공민왕 재위 동안에도
왕비 노국공주가 왕보다 실권이 강력했다.
하여, 원나라 속국이었던
고려시대 약 80년 동안에는
왕이 몰래 바람을 피울 정도.
만약, 고려시대 전설이라면
'1274 ~1374년' 사이 아닐까?
.........................
.........................
'만약, 조선시대 전설이라면
'현종, 숙종, 고종' 3왕의 재위 중에
실화를 바탕으로 한.,전설이 아닐까?'
현종(1659~1674) 재위때 정비(正妃)이자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 행위 아닐까?
1651년 '세자빈'에 책봉,
1659년 현종 즉위 후 왕비.
지능이 비상하고 총명했으나 성격이 거칠고 사나워
남편 현종이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아들인 숙종이 즉위하자 왕대비.
숙종과 각별한 관계인 희빈 장씨를 궁밖으로 내쫓고
1683년 숙종이 사경을 헤매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였다.
무당이 '숙종에게 삼재(三災)가 있어 기질을 앓는 것이니
왕의 어머니가 삿갓 쓰고 홑치마만 입은채 물벌을 서야 한다'
명성왕후는 무당의 터무니없는 주장을 받아들여
혹독한 겨울 날씨에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은 채
물벼락 맞고 독감을 얻어 창경궁 저승전에서 훙서(薨逝).
1680년 조선 숙종 재위 초
인천 월미도에.,행궁을 건축.
원래, 투기가 악독했던.,장희빈.
'그녀가 중전일 때
소행이 아니었을까?'
.....................
.....................
'1831~1863년' 고종 재위 44년 190일 동안에
후궁에게 투기심이 유별났던.,명성황후 & 엄귀비.
명성왕후(1851~1895) 민비의 소행이 아니었을까?
민비 때 궐내에서 고종의 성은을 받은 궁녀는
그날 아침에 치마를 뒤집어 입고 나올 정도였다.
민비가 '고종의 바람기를 감시하라.' 명한.,엄 상궁.
그러나, 민비의 심복이던.,엄 상궁이
고종의 성은을 받고 난, 다음날 아침에
침소에서 보란듯 치마를 뒤집어 입고나와
민비에 의해 10년간 궐에서 멀리 쫓겨났다.
성은궁녀는 왕자를 생산할지도 모를 몸.
궁궐 내에 널리 알려서.,보호하기 위한.,관례.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형을 가하고 내쫓기 일쑤.
1895년(고종32) 일본 미우라 공사가 보낸
일본 자객들의 칼에 비참하게 숨진 명성황후.
그때, 10년만에 궐로 돌아온 엄귀비도 그러했다.
'고려왕조' 역사 기록 사료들은
조선 개국 때 상당 부분이 멸실되고
'조선왕조' 역사는 일제강점기에 변질.
선미도 촛대바위 전설의 시대적인 배경을
좀 더 확실하게, 밝혀내기 어려운 점이.,아쉽다.
아무튼, 선미도는 여인들의 맺힌 한이 많은 곳 같다.
우리나라 전설들은 전국 어느 곳을 가나
그 지역에 이미 묻혀진 역사와 유래를 품고있다.
그래서, 지명과 전설 속에는 그 시대 역사가 담겨있다.
...........................
...........................
현재, '남한'과 '북한' 간 교역항로
해상무역 직통항로 관문.,선미도 해역.
남한과 북한 간 경제협력 상품교역 항로.
남북한교역 항로 중 하나.,'인천 ~ 나진'
남북한교역 물동량의 85%가 나가는.,인천
남북한교역 항구들 중에서 대표적인.,인천항.
..........북한 무역 교역망.........
1.북한 나진항은 순환철도망이 있다.
'청진~ 남양 ~ 아오지~ 나진~ 창진'
아울러, '나진~두만강 ~러시아' 도로망.
2.청진항은 나진항 남쪽으로 80㎞에 위치하며
하얼빈 - 투먼 - 북한을 연결하는 교역의 관문.
청진항은 무역화물 전용의 동항, 김책제철소
전용의 서항 및 어항인 중앙항으로 구분된다.
동항에서는 광석, 철재, 곡물, 일반잡화 등 처리.
일본, 러시아 등지에 취항하는 만경봉호 전용부두.
동항에는 3개 부두에 5개 선석이 있으며,
부두 전면 수심은 12m로 2만톤급 선박 접안.
동항의 연간 화물취급능력은 90만 톤,
실제 취급량은 20만톤 정도에 불과하다.
항만 내 14,339㎡ 창고 및 16,300㎡ 야적장.
서항은 6개 부두에 10개 선석이 있으며
부두 전면 수심 9m로 2만톤 선박접안 가능.
연간 취급능력 520만톤, 실제 취급실적 50만톤.
주요 취급화물 종류는 잡화, 석탄이다.
14,070㎡ 창고와 85,400㎡ 야적장이 있다.
청진항은 나진항과 함께
중국 동북 3성의 동해태평양
관문으로 개발될 가능성이 높은 곳.
3,선봉항은 원유 가공정제 전용항만
연간 취급능력 300만톤, 실제 200만톤.
국내무역항 웅상항은 주로 목재를 취급.
4. 남포항은 북한의 수도인 평양의 관문항.
북한 최대공업지구인 평양공업지구가 있어
원자재 및 제품의 취급을 위한 무역항으로 기능.
북한에서의 무역화물 처리비중은 29%에 달한다.
남포항은 향후 확장 가능성이 큰 곳으로 판단된다.
.
남포항은 1990년대 이후 남북교역의 증대에 따라
남북한 거래 및 비상업용 거래(인도적 물자 지원)
반출입 항으로서의 역할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연간 하역능력은 약 1,070만 톤으로 북한 최대 규모.
남포항 주요 취급화물은 석탄, 시멘트, 흑연, 석고 등.
함경남도에서 산출되는 지하자원이며 철도연계망으로
평남선(평양 - 남포) 및 평안선(남포 - 온천)이 있으며,
'남포~평양' 고속도로 및 대동강을 통한 수운도 발달.
5. 흥남항은 북한 최대 화학공업지구
함흥공업지구 관문 역할을 수행한다.
흥남항은 최대수심 6.7∼13m로 깊은 편.
향후 대규모 항만 개발 잠재력이 매우 크다.
북한 동해안 항만 중 남북교역 기능을 담당할 곳.
6. 원산항은 동해 영흥만 최남단 무역항.
동시에 군사항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
원산공업지구는 기계, 조선, 섬유 공업 발전.
금강산 관광과 연계된 관광항으로
발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원산항은 평양 및 고성과 고속도로로 연결.
철도망으로는 함흥 - 장진, 부전선과 연결된다.
'원산항~일본 니가타항' 사이
북한의 만경봉호와 삼지연호가
월 3∼4회 정기운항되고 있는 곳.
7. 해주항은 남한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
북한측 서해안 주요 군사항, 상업항은 미약.
해주항 외항화물 운송은 공해로 우회해야 한다.
북한은 근래 해주항 직항을 요구하고 있는바,
직항이 실현되면 북한 선박은 해주항을 출발해
연평도와 인천앞바다 사이 서해로 나갈 수 있다.
해주항 직항이 실현되면
남북 경제협력의 활성화와
긴장완화에 기여할 수 있으나
북방한계선(North Limit Line NLL)
무력화 수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해주항은 개성공단과 가장 가까이 위치
공단 개발 및 운영에 필요한 원부자재 및
제품 취급을 위한 항만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해주항은 극심한 조수간만의 차.
이를 극복할 준설 공사가 필요하며,
북한의 군사적 목적도 제한해야 할 곳.
해주항은 연결 철도노선으로 황해청년선이 있으며,
50번 및 51번 도로에 의하여 재령, 벽성 등지와 연결.
8. 송림항은 '북한 최대' 황해제철소 전용항.
동시에 남포항의 보조항으로 기능하고 있다.
철광석, 유연탄, 철강류 제철관련 화물을 취급.
황주와 연결되는 철도 연계망과
황주, 흑교 등과 연결되는 도로망.
.............................................
1930년 일제는 자국의 상품을 소비시킬 목적으로
한국과 중국 간 인조견 등 무역거래를 금지시켰다.
일제는 이 운반 책임자들을 ‘노비노리’라고 불렀다.
압록강패, 켈로부대 출신이자
'전설적인 주먹'이던.,시라소니.
일제 소탕령 후 신의주 압록강으로 건너간 '노비노리'.
'압록강패' 한국의 상인들은 압록강을 넘나들며 밀무역.
선미도 해역은 일제강점기 밀무역이 성행한 항로였던 곳.
.......................남북한교역..............................
여기서 상품이란 1차산품·제조가공품·서비스를 포함.
남북한교역은 1945년 8·15해방부터 6·25전쟁까지.,전기,
남북교역을 공식적으로 재개한 1988년 7·7선언 이후.,후기.
이 교역은 한반도 분단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의 기점은 1945년 8·15해방으로 잡아야 한다.
8·15해방 이후, 한동안 남북한을 단일 정치·경제권.
남북한에 대한 미·소 군정실시 후 약 1년까지
남북한을 가르는 지역경계선인 38선을 넘어서
국내거래가 이루어졌는데, '38무역'이라 불렀다.
그후, 미군정은 38무역을 국내거래가 아닌
지역간거래로 취급, '연안(沿岸)무역' 양성화.
남북한거래의 공식화는 필연적으로 교역의 절차와
대상품목 등에 관한 규제를 수반했는데 이때 규제의
범위를 벗어난 민간차원의 불법교역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를 '38밀(密)무역'이라 불렀다.
당시 밀무역은 합법적 무역을 상회.
거래된 상품 품종도 합법적 무역과 달라
합법무역, 밀무역 두 형태 무역이 상호보완.
합법적 교역품목은 북한의 금속·화공품,
남한의 기계·식품류가 각각 선택되었다.
밀무역을 통해
남한의 약품·주류,
북한의 생필품·원자재
등이 남북으로 반출되었다.
.
밀무역이 이렇게 성행했던 이유는
당시 남북한 모두 물자난에 허덕였고,
밀무역을 단속할 행정력을 갖추지 못한 탓.
이 시기의 거래로 특기할 만한 것은
남북 간 전력(電力)의 수수(授受)였다.
북한은 발전된 전기를 남한에 송전하였고,
남한은 대상물자(代償物資)를 북한에 보냈다.
미·소 군정하 남북한 교역은 1949년 4월로 끝났다.
이듬해 6·25전쟁 발발을 계기로
이후 40년간 남북한 간의 교역은
단 2건 예외가 있었을 뿐 완전 단절.
첫번째 예외는 1978년말 경 영국상사의 중계무역.
석탄 1만t을 남포항에서 부산으로 직반입한 것이다.
그러나, 남한 측 교섭에도 불구하고 석탄교역은 중단.
2번째 예외는 1984년 9월 북한의 조선적십자회가
남한의 수재민을 위해 구호물자를 보내겠다는 제의.
'1984. 9. 29~10.4'일 판문점· 인천· 북평에서 이뤄졌다.
남북한무역의 가능성을 연 본격적인 노력은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선언).
이 선언은 남북한간 문호를 개방할 것과 무엇보다도
남북한교역을 민족내부교역으로 간주하려는 의도였다.
1988년 77 선언의 후속조치로 10·17조치가 발표되었는데,
이 발표로 민간기업에 의한 북한물자 반입이 가능해졌다.
경제인 상호교류도 허용된 일련의 정부조치가 있은 직후.
선경· 현대 그룹 등이 대 북한교역을 서둘렀는데 앞장섰다.
현대가 북한산 모시조개를 간접무역의 형식으로 반입한 것.
40년의 긴 교역단절을 타파하는 최초의 가시적인 사건이었다.
이어 1989년 현대 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북한을 방문하고
금강산 개발, 시베리아 개발 참여, 원산조선소 합작경영을 논의.
같은 해 2월 효성물산이 무연탄을 들여왔고,
6월 코오롱이 북한 대성은행과 신용장을 개설.
그러나, 모처럼 활기를 띠고 추진되던 남북한교역은
1989년 3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다시 냉각.
이 시기의 남북한교역.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지금까지 실현된 교역 내용은
남북간 물자교역 수준을 넘지 못했으며,
경제협력 폭넓은 차원의 교류가 없었다.
둘째, 교역의 형식은 8·15해방 직후
미·소 군정하에서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제3국을 통한 간접무역이 있었을 뿐이었고
안정된 직접교역을 성립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셋째, 교역의 의도가 지극히 정치적· 선전적.
안정적인 직접교역 진전에 어려움을 겪었다.
넷째, 북한은 교역정책에 대해
일관성이 있는 천명을 유보했다.
남북경제교류에 대한 역사적인 합의.
남북경제협력 새로운 전망이 제시된다.
단순한 물자교역 차원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경제협력,
즉 남한과 북한의 합작투자사업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남포경공업단지합작사업 추진이 이뤄지는 등 활발한 시작.
1992년 10월 조선노동당 간첩사건.
정부는 기업인의 방북을 다시 금지했고,
이어 북한 핵문제와 관련하여 금지조치 지속.
1994년 10월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 제네바 회담.
남한 정부는 대북경협활성화조치 발표 등 남북경제협력 모색.
...................................................................................
660년 삼국시대 당 소정방이 이끈 14만 대군이
백제를 치려고 산동반도에서 들어온.,직통항로.
해상왕국 고려가 "KOREY" 명성을 날리던.,항로.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지형의 특성 상으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해양 정책'에 달려 있다.
수도권 섬들은 미래 도약을 위한.,활주로(活走路).
'중국 산동반도 ~ 인천'
'해상 고속도로'가 열릴 경우.
인천광역시의 관문이 될.,선미도.
'덕적도 ~ 백령도 ~ 영종도'
서해 삼각벨트 국제관광 해역에서
'선미도 ~ 백령도 ~ 무의도' 삼각 거점.
한편, '선미도 ~ 영흥도'
연육교로 이어질.,경우에는
'한.중 산업도로' 관문.,선미도.
지리적으로
전략적으로
경제적으로
중요한 위치.
선미도(善尾島).
지금은 무인도에 불과한.,선미도.
만약. 이곳이 북한에게 점령 당하면,
대한민국 경제가 마비될., 군사요충지.
지금 당장이라도
한.중 해상 고속도로와
'선미도~영흥도'산업도로가
건설되면, 비용보다 국익이 많을 곳.
장차, 대한민국의 미래를
좌우할 만한 위치.,선미도.
지리상으로 제주도 보다
더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다.
'유럽~ 중국'을 가로지르는 위치.
대만, 홍콩보다
국제무역 위치 상
훨씬 유리한 직통항로.
산동반도,
요동반도,
한반도를 오가는
국제무역 선박들이
인천항을 거치지 않아도
최단거리 직통 항로가 가능.
덕적군도는 그 중심에 위치.
세계적인 해상무역 관광지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될.,최적지.
한중 해상 고속도로까지 개통된다면
덕적군도는 비약적인 발전을 할 곳이며
북한 지역을 통과하지 않아도 왕래가 가능.
북한이 핵무기를 고집할 경우에
국제적, 경제적으로 고립될 것이므로
남북통일 주도권은 대한민국이 갖게 될 것.
중국이 북한에 투자한 비용은
이미 100억불 이상을 상회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상황인.,현실.
'산동반도~ 선미도'
한.중 해상고속도로는
중국이 적극 앞장 설.,플랜.
한국이 외교정책 만 잘 펴면
투자 비용 없이도 해결이 가능.
장차, 남북통일에 큰 도움이 될 것.
우리나라도 남북통일을 위해
북한 개성공단을 건설했지만
북한은 년간 1천억 수익금으로
핵무기, 미사일 등 개발비에 투자.
차라리, 남북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한중 해상 고속도로' 건설이 지름길일듯.
아울러, 덕적도 해상무역항 도시개발도 병행.
'덕적도 국제무역항'의
관문이 될 곳은.,선미도.
장차, '제2 인천국제무역항' 덕적도.
영흥도 배후의 안산 당진 산업단지들은
유럽, 중국으로 진출할.,국제무역 산업단지.
현재, 우리나라 첨단 건설 장비 및
토목 기술로도 충분히 준공이 가능.
우리나라 건설업은 활기를 띄게 될 것.
'선미도 해역은
남북 평화통일의
초석이 되지 않을까?'
故 박정희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산업혁명을 일으킨 지도자.
"하면, 된다."
당시,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
국내 건설장비가 열악할 때라
누구나 그건 "불가능하다" 할때
건설 현장을 독려하며 남긴.,명언.
"하면. 된다구."
"당신, 해 봤어?"
"안되면, 되게 해."
'오이도 ~대부도'
12.7km동양 최대 방조제.
'1896년 ~1994년'.,공사기간.
시화방조제 난구간 건설현장에서
폐 유조선을 침몰시켜 직접 둑을 막던
故 정주영 회장이 남긴 말들이 떠오른다.
서해안 조수 간만의 차.,최고 10.3m.
최대 유속이 초당 7.5m인 난구간 공사.
6시간마다 9얼6천만톤 바다물이 드나들고
파도가 7~8톤 크기 바위들을 휩쓸어가는 상황.
1994년 마침내 방조제 끝물막이 공사 마감.
거대한 담수호인 시화호가 탄생한 공사 일화.
1998년 6월 16일 소떼 500마리를 몰고.,1차 방북.
소들을 실은 트럭이
파주시 통일대교를 건너
남북 간에 막힌 길을 연.,일화.
그당시 83세 노구였던 정주영 회장은
4개월 후, 소떼 501 마리를 몰고 2차 방북.
그로부터, '개성공단 및 남북 직통항로' 재개.
...............
.................
덕적군도에 속한.,선미도.
덕적도에서 500m거리에 위치.
장차, 서해안 시대를 이끌.,선미도.
'선미도 ~영흥도' 구간은
일직선 상에 있는 도서지역.
건설에 필요한 자갈 모래 충분.
옛 동아시아 고대 해상 실크로드가
육로로 이어져 옛 영화가 부활할 것.
장차, '한중 해상고독도로 길목.,선미도.
선미도는 땅콩, 꽈배기 형태.
면적 0.801㎢, 해안선 길이 7km.
이 섬, 해발 223m 고지에 유인등대.
현재, 서해 항로를 밝히는.,등대지기 섬.
'서해안 시대' 희망의 불빛.,'선미도등대'.
선미도는 월미도와 비슷한 여건을 갖고있다.
월미도는 면적 0.7㎦로
월미산 정상이 해발 105m.
옛날에는 아주 작은 섬이었다.
그러나, 월미도 제물포는
조선 개항기 최초의 무역항.
장차, 선미도는.,국제무역항
대형선박의 기항지가 될 위치.
서해가 품고있는 한반도 보물섬.
장차, 덕적군도는 동양의 지중해로 변모,
그 관문 선미도는 동양의 나폴리가 될 곳.
서해의 모든 섬을 잇는 항로에 위치한 때문.
지난, 반세기 동안에 침체되었던
수도권 도서지역도 활기를 찾을듯.
'1933년~1936년' 미국의 뉴딜 정책.
미국 제32대 대통령 루스벨트가 추진.
당시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고,
미국 내 침체된 경제 구조와 관행을 개혁'
대공황 미국의 경제를 되살렸던.,뉴딜 정책.
'한국 경제도 활성화되지 않을까?'
현재, 선미도는 해양수산부 국유지.
무인도로 등록되어 있다는.,외딴 섬.
일제강점기부터 등대지기 섬이었던 곳.
1934년 석유 백열등으로 첫불을 밝혔던 섬.
1987년 12월부터 모터를 돌려서 불을 밝혔고
등대 불빛이 나오는 등명기는 국내 가장 큰 것.
무려, 31마일 해상까지 그 불빛이 가 닿는단다.
서해 5도와 황해를 운항하는.,'선박들의 길잡이'
유인등대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
이 등대 불빛은 12초마다 한번씩 반짝인다.
콘크리트 원통형 건축 기술을 적용한 이 등대는
등탑 하부에 사각형 사무실을 함께 구축한 것이 특징.
다른 등대는 사무실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있지만
이곳 등대원들은 사무실에서 등대를 오르내리며 산다.
일제 강점기 등대들은 모두 등대 사무실, 숙소 통합구조.
일제강점기
업무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건설.
2003년 8월 등대원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일제강점기 과거의 형태를 그대로 살리면서
사무실과 등대를 새로 신축하였던.,선미도 등대.
어업전진기지이자 중국과 인천항의 관문
높은 절벽에 등대가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치러 들어올 때
산둥반도에서 선미도 앞바다 뱃길을 타고
들어왔을 정도로 인천으로 들어오는.,관문.
660년 6월 18일 산동 내주(來州)에서 출발.
3일만에 황해를 건너 덕물도(덕적도)에 도착.
신라 무열왕 때부터 '산동반도~경기만' 직통항로.
서해의 이곳 직통항로는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뱃길.
통일신라때 산동반도로 끌려간.,백제 유민들.
당나라에서 비참한 노예 생활을 했다고 전한다.
왕건도 이 뱃길을 통해 당나라 노예로 팔려 갔다.
통일신라 말, 국제 노예상인들과
왜구들의 만행이 잦았었던.,서해안.
'고려 말~ 조선'시대에도 그러했을까?
통일신라 장보고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산동반도~완도 ~왜' 항로 상 해적을 소탕.
'완도'를 거점으로.,한.중.일 해상무역을 주도.
아직도 해신(海神)이라 추앙받는 장보고.
고려 말, 권신들의 사유지.,서해 도서지역.
그후, 서해 도서지역은 암흑 세계로 돌아간다.
1394년(태조 1) 조선 개국 원년에
고려왕조 王씨 일가친척과 척신들을
강화도, 거제도, 삼척 일대에 집단수용.
살기 좋은 섬에 보내준다면서 바다에 수장.
숭유억불 정책을 구실로
고려 추종세력을 모두 제거.
그들을 용궁(龍宮)으로 보낸 것.
강화도 앞바다에서
살기 좋다고 하던 섬은
용유도(龍遊島)가 아닐까?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와 하나가 된.,용유도(龍遊島)
용유도 을왕리해수욕장은 여름 피서지.
왕이 낳은 아들이 묻혔다는 을왕리(乙旺里).
고려 말, 새 왕조를 설계하던 이성계의 세력은
1388년 우왕 폐위후, 8살 아들을 창왕으로 옹립.
창왕은 재위 1년 만에 유배되었고
유배지 용유도 을왕리 왕산에서 살해.
"왕씨가 아니라
중 신돈의 아들이니
고려 사직을 더럽힌 죄"
고려 권신들이 어린 돼지에게 산모들의 젖을 물려
키운 돼지를 잡아 신선놀음 하느라 굶어죽는 유아들.
이에 분개하여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했다고 한다.
조선왕조 519년 역사 상에서
고려 말과 유사한 만행은 없었을까?
영흥도 길목 선재도에는 신선놀음 흔적들.
젖소가 아예 없었던.,조선시대
선재도는 송아지.,국영 소목장 터.
어미소 젖을 보양식으로 즐긴 흔적.
그 탓에 굶어죽은 송아지도 있었을듯.
당시 영흥도는 국영말목장 또는 소목장.
조선 말, 조정의 권신들이 호사를 누린 곳.
'선녀가 내려와 춤추던 섬'이라 하여 선재도.
원래, '소우도(小牛島)' 또는 '독우도(犢牛島)'.
조선 후기부터는 선재도(仙才島)로 개칭되었다.
'소우'나 '독우'는 모두 송아지를 뜻하는 것.
‘영흥도를 어미소처럼 따라다니는 송아지 섬’
그리하여, 조선왕조는 519년 동안이나
해금정책, 공도정책을 고집했던 것일까?
그 결과, 조선시대 도서지역은 폐허화된듯.
고려시대 동아시아 해상왕국.,"korey"
조선시대 하멜 표류기에는.,폐쇄된 나라.
결국, 조선왕조는 519년 역사를 마감한다.
도서지역을 공도정책 해금정책으로
폐허화 시키고 만 폐쇠적인 해양정책이
조선왕조의 마감에 한몫 단단히 했으리라.
조선 말, 고종 재위 당시에
서방 강대국들이 조선으로 진출
선진문명 유입으로 개화기 급물결.
그러나, 고종의 외교정책 실패로
일제강점기를 겪게 된 결과를 초래.
그당시 서방문명 유입 항로가
대한제국 관문이던.,선미도 해역.
그 대표적 유적지였던.,인천 월미도.
월미도는 월미도(月尾島), 어을미도(漁乙未島· 於乙味島),
어미도(於味島), 얼미도(突尾島)·얼도(突島)· 월성(月星) 등.
지명이 바뀔 때마다 그 시대의 역사적인 흔적들이 담긴.,월미도.
어우동을 연상케 하는.,월미도 지명의 별칭들.
(於乙宇同 : 1430? ~1480.10. 18)은 조선전기 왕족.
시인, 서예가, 작가, 기생, 무희였고 이혼당한 후 기녀.
일찌기 은장이(銀匠)을 불러 은기(銀器)를 만드는데
어우동이 은장이를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 행세하고
나가 서로 가까이 하다가 친정으로 쫓겨났다는 자유부인.
1480년(성종 11) 성문란 행태가 발각되어
의금부에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던 어우동.
어을미도는 성풍속과 관련이 깊은 지명이 아닐까?
월성은 1653년(효종 4) 용종진에 편입된 월미도.
조선 후기에 임금 임시 거처인 행궁이 설치되었고,
행궁은 존속기간 내내 영종진(영종도 용종진) 관할.
병자호란 때 한양 도성을 버리고
강화도 행궁으로 피신하려한 인조.
청군이 미리 알고 그 길목을 장악해
결국, 남한산성에 40일간 고립된 인조.
효종 재위 당시에는 그 전철이
다시 되풀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월미도에 임시 거처 행궁을 설치한 것.
조선시대 월미도 행궁은
18세기 전반까지 유지된듯.
월성(月星)이 그 사실을 대변.
조선 말, 섬이었던 월미도.
1920년대 돌축대를 통해 연육.
한때 제물도(濟物島)라 불렀던 섬.
개화기 시대적 배경 상황이
물씬 배어 있는 지명.,제물포.
‘얼’이라는 글자는 ‘얼다’ 곧 ‘사랑하다’, ‘어르다’의 의미이고,
‘미’는 물을 의미하기에 ‘물이 어르고 휘감아 돌아 섞이는., 섬.’
구한 말에는 ‘Rose Island’ 지명으로 외국에 알려지기도 하였다.
1902년, 인천 중구 신흥동 시장 일대에
들어선 부도 유곽(敷島遊廓)이 전신이며
1922년 석축제도 축조로 월미도는 육속화.
일제강점기에는 한때 군사기지로,
6·25 때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로,
그 뒤 미군용지로 이용된 일도 있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5년간 전성기를 누리던 월미도.
태평양전쟁, 6.25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설이 초토화.
1960년대 외항선 선원들에게 각광받았던 '옐로우 하우스'
'달 月, 꼬리 尾, 섬 島.,월미도.'
'태평양전쟁과 관련이 깊은.,지명.'
'선미도 지명과도 관련 깊은.,월미도.'
'월미도는 태평양전쟁과
어떤 관련이 있었던걸까?'
...............태평양전쟁......................
'1941~1945' 연합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은 동아시아에 있는
유럽 식민지 강탈 후, 태평양 지배세력을 시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 미국 해군기지를
기습공격하면서부터 시작된.,태평양전쟁.
미국은 12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
초반에는 일본이 기선을 잡았으나
미드웨이 해전을 전환점으로.,반전.
1945년 미국은 일본 오키나와 섬을 점령했으며,
도쿄 야간공습 시작으로 일본의 대도시들을 공습.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
일주일 뒤 일본 천왕은 무조건 항복 선언.
일본의 항복문서는 1945년 9월 2일에 조인.
1945년 9월 9일 일본은 중국에 대해서도 항복.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은 끝이 났다.
1940년 말까지 일본 전략가들은 국제전이 일어나도
일본이 상대할 만한 적은 미국 하나 뿐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1941년 12월 7~8일에 하와이 진주만과
필리핀에 있는 미국의 군사시설을 공격했던 것.
.
야마모토 계획에 따라 일본의 항공모함 기동 타격대는
미국 정찰대에 포착되지 않고 하와이 북쪽에 이르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미국 항공모함에서 급강하 폭격.
360 대 전투기가 새벽 공기를 뚫고 2패로 나눠
진주만 거대한 미국 해군 기지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이 기지에는 미국 전투함 70척과
보조함정 24척, 300대 항공기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완전히 기습당했고,
정박 중 전함 8척이 공격받았다.
순양함 3척, 구축함 3척, 기뢰 부설함 1척을 비롯
많은 함정이 파손되고, 180대가 넘는 항공기가 파괴.
2,000명 넘는 장병이 죽었고, 부상자도 1,000명 넘었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1가지 중요한 점에서 실패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 당시 태평양 함대의 항공모함 3척은
바다에 나가 있어서 피해를 면했고, 이 항공모함들은 그후에
미국 해군의 초기 태평양 방위체제에서 일본공격 핵심이 된 것.
진주만 군사시설과 유류 저장 설비도 피해를 모면.
일본이 진주만 기습공격은 미국국민을 단결시켰고,
미국이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말끔히 없앴다.
12월 8일 미국 의회는 일본에 선전포고.
이에 반대한 미국 의원은 단 1명뿐이었다.
진주만을 공격한 바로 그날,
타이완에 기지를 둔 일본 폭격기들은
필리핀 '클라크 & 이바' 군용 비행장을 공격.
미국 극동군이 보유하고 있던
항공기 50% 이상이 파괴되었다.
2일 뒤, 일본은 다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미국 전투기를 더 많이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역시 필리핀에 있는 카비테 해군기지도 파괴했다.
그러나 미국 아시아 함대 일부는
11월에 이미 남쪽으로 내려갔었고,
미국의 살아남은 주요함정과 폭격기는
보호해 줄 전투기가 없어서 공격당할 위험.
그후 2주간 더 남쪽에 있는 안전한 기지로 철수했다.
필리핀에는 지상군 이외 전투기 몇 대와 잠수함 30여 척,
그리고 몇 척의 소형 선박이 필리핀을 방어하기 위해 남았다.
마닐라는 1942년 1월 2일 일본군에 함락되었지만,
그때 이미 더글러스 맥아더 휘하의 미군과 필리핀군은
바타안 반도와 코레히도르 섬(마닐라 만.,섬) 방어태세 구축.
이들은 바타안 반도 일본군 공격을 저지,
일본은 그후 8주간 계속 병력을 증강했다.
맥아더는 3월 11일 오스트레일리아로 전속 명령.
웨인라이트 중장과 그의 부하들은 4월 9일에 일본에 항복.
코레히도르 섬은 5월 5~6일 밤에 함락
그리고 필리핀 남부는 3일 뒤에 항복했다.
정확한 사상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양쪽의 전사자는 각각 5,000명 정도에 불과.
일본 폭격기들은 1941년 12월 8일에
이미 홍콩에 있는 영국 공군력을 파괴,
영국과 캐나다 수비대는 크리스마스 날
광둥반도에서 건너온 일본군 공격에 항복.
일본군은 남쪽의 말레이 반도로 진격하는 동안
측면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12월 9일 방콕을 점령.
12월 16일 미얀마 남쪽 끝에 있는 빅토리아 곶을 점령.
12월 8일부터 일본군은 여느 때처럼 공습과 더불어
말레이반도 상륙후,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군을 압도.
영국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호와 순양함 리펄스호는
12월 10일 일본군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고 말았다.
1942년 1월말 일본군 2개 사단은
공군 폭격과 기갑부대의 지원을 얻어
싱가포르 섬을 제외한 말레이 반도 점령.
일본은 순식간에 필리핀을 점령했고,
동남아시아와 미얀마의 대부분 지역,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태평양 섬들 점령.
1941년, 영국· 네덜란드· 미국도 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침략행위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으려 했지만
1942년 2월 25일 일본에 점령되지 않은 곳은 자바 섬뿐.
연합군은 자바 섬을 침략하는
일본 함대를 차단하려 필사적으로 항전.
2월 27일 자바 해에서 7시간의 전투에서 패배.
연합군은 전함 5척을 잃었고,
일본군은 구축함 1척 만 손상.
3월 9일 자바 섬에 주둔해 있던
연합군 2만 명이 항복하고 말았다.
그 직후 태평양 지역에는
미국 합동참모본부 전략지시를 받는
미국·영국 통합 참모부가 설치되었던 것.
맥아더는 남서태평양 지역의 최고사령관이 된다.
임무는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을 잇는 병참선을 지키고,
일본군을 태평양 안에 가두어놓고, 북아메리카 방위를 지원,
육해공군 합동 작전에 따른 대규모 반격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당초 계획은 자바 섬 점령으로 실현되었지만,
미국 태평양 함대는 1942년 2월 1일에 마셜 제도를 공격.
2월 23일 웨이크 제도를 공격, 3월 1일에는 마커스 섬을 공격.
이와 함께 2월 23일 라바울 폭격,
오스트레일리아에 군사기지를 세워
남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병참선을 확립.
그러자 일본은 계획을 확대,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이어진
연합군의 병참선 차단을 결정.
일본인들은 누벨칼레도니, 피지 제도
및 사모아 섬을 점령할 계획을 세웠고,
뉴기니 동부도 차지하여 포트모르즈비에
비행기지 건설로 오스트레일리아를 위협 플랜.
또한 일본은 북태평양의 미드웨이 섬을 점령
알류샨 열도에 비행기지를 만들 계획도 세웠다.
1942년 4월 18일에 미군 폭격기 16대가 도쿄를 공격.
일본정부 위신을 떨어뜨려 연합군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5월 7일 일 항공모함 전투기가 미국 구축함. 유조선 2척 격침
미군 전투기들도 일본 항공모함과 순양함 1척을 침몰.
이튿날 일본 전투기들은 미국 항공모함 렉싱턴호를 격침.
미국의 항공모함 요크타운호에 손상을 주었지만,
일본군 대형 항공모함 쇼카쿠호는 손상을 입고 도망.
결국 일본군은 전투에서
너무 많은 항공기를 잃었기에
포트모르즈비 점령 계획을 포기.
태평양전쟁 전환점.
일본군은 결말을 내기 위해 대형 항공모함 4척과
소형 항공모함 3척, 수상비행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2척,
전함 11척, 순양함 15척, 구축함 44척, 잠수함 15척 등을 집결.
미국 태평양함대는 대형 항공모함 3척과
순양함 8척, 구축함 18척, 잠수함 19척 보유.
연합군 함대를 지원할 항공기 115대 가량 보유.
일본 전함들이 목표지점 800km 전, 해상에 이르자,
미국 폭격기들이 일본 전함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
일본군은 6월 4일 새벽 전투기로 미드웨이 섬을 공격.
그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 대형 항공모함 4척을 모두 격침.
일본군은 대형 순양함 1척도 침몰되자 6월 4~5일 밤 후퇴 시작
그 전에 이미 손상을 입었던
미국 항공모함 요크타운호는
6월 6일 어뢰를 맞고 침몰했지만,
미드웨이 섬 미군기지는 안전했다.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항공모함을 잃고
우수한 해군 조종사를 다 잃었다.
그후 일본과 연합국의 해군력은 대등해졌다.
일본은 전략의 주도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누벨칼레도니, 피지 제도, 사모아 섬의 침략 취소.
일본군이 서방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쟁 참여로 중국에 영향을 주었다.
1941년 12월 9일 장개석 정부는 일본에 선전포고.
일본의 연합국인 독일과 이탈리아에게도 선전포고.
이것은 군사적 의도보다 정치적 의도가 담긴 선전포고.
이어서 중국의 3개 야전군은 미얀마 국경으로 몰려갔다.
미얀마는 서방 연합국이 중국에 보급품을 보낼 유일한 육로.
1942년 1월 3일 장개석은 중국 전투지역의 연합군 최고 사령관.
장개석 총통 참모장으로 파견되었다.
장개석과 스틸웰은
일본군의 미얀마 진격을
저지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
'1941~1945' 태평양전쟁 당시
대한제국 청년들은 학도병으로 징집
여학생, 처녀들은 종군위안부로 강제동원.
태평양전쟁터에 군함을 타고
끌려나간 항로가.,선미도 해역.
일제강점기 비극을 품고있는 항로.
그당시 얼마나 많은 종군위안부들이
선미도 해역을 통해 조국을 떠났을까?
그후, 얼마나 많은 학도병과
종군 위안부들이 이국만리에서
혼백이 되어 돌아오지 못한 것일까?
........................
........................
1950년 9월 15일.,인천상륙작전.
서해 루트가 선미도 해역의 항로.
1950년 6.25 북한이 남침한 이후에
북한군의 병참선과 배후를 공격하여
6.25 전쟁을 반전시킨 상륙작전이었다.
인천 상륙작전 구상은 비밀리에 사전부터 추진되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가능한 모든 해안지역을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었던.,작전.
결국, '크로마이트(CHROMITE) 작전계획' 초안이
7월 23일 완성되어 극동군사령부 관계자들에게 회람.
맥아더 사령관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
극동군사령부는 작전 100-B, 작전 100-C,
작전 100-D의 세 가지 안(案)을 제출하였다.
작전 100-B는 인천에 상륙하는 것이고,
작전 100-C는 군산에, 그리고 작전 100-D는
한반도 동해안 주문진 근처에 상륙하는 것이었다.
결국, 이 세 가지 작전에서
최종적으로 작전 100-B가 채택.
잠정적인 D-Day는 9월 15일이었다.
.
1950년 가을 인천 해안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 15일, 10월 11일, 11월 3일' 전후 2~3일 뿐이었다.
10월은 기후 상 상륙하기 늦은 시기라 9월 15일로 결정.
인천상륙작전 항로 역시
인천앞바다.,선미도 해역.
선미도 앞바다는 밤낮으로 파시가 열릴 정도로
서해 덕적군도 해역 도서어장 어부들.,'삶의 터전'.
현재, 동북아 물류 요충지, 군사요충지, 어업전진기지.
선미도등대가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당집 터가 있었으리라.
해신제, 당제를 지내거나
물고기밥이 된 뱃사람들이나
한 맺힌 영혼들의 명복을 비는
당집이 있었을 것으로.,여겨진다.
선미도는 오랜 동안 풍화되어 굳어진
퇴적암층이 바다 깊숙하게 뿌리박은 섬.
등대 보급선이 오가는 선착장 주변은.,역암.
'본섬' 덕적도와 500m 거리.,선미도.
두 섬 사이에는 소용돌이 급물살 물길 해협.
이 때문에 선박과 낚시꾼들의 사고가 많은.,항로.
산세가 험하고 풍랑이 심하다 하여.,악험도(堊險島).
하여, 등대의 필요성은 어느 섬보다도 절실했던.,해협.
그후 “아름답고 착한 섬이 되라”는 뜻에서 선미도(善尾島).
'원래, 선미도(善尾島)는
선미도등대 건설 이전부터
병자호란 당시 지명이 아닐까?'
1627년 후금이 정묘호란 1차 침입.
'형제지맹'을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금 100냥, 은 1,000냥, 직물 1만 2,000필,
말 3,000필 정병(正兵) 3만 명 등을 요구.
그 다음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강압적으로., 요구.
1636년 12월 청 태종이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에 항복하는 굴욕적인 의식을 치루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40일간 버티는 동안
20만 청군들은 한양 도성 안의 여인들을 유린.
남산 송림에 목매 자살한 소복여인 시신들이 즐비.
그당시 울창한 소나무숲 남산이
멀리서도 하얗게 보일 정도였단다.
통혼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을 명분으로
조선 8도 수많은 규수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가
훗날, 속전을 물고 돌아온 환향녀 숫자만 3만5천명.
조선의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속환(贖還)할 수 있다.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등.
1차 침입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
조선의 여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간 직통항로.
소, 말, 등 전리품과 함께 배에 실려간 규수들.
그 항로 관문이 선미도(善尾島)가 아니었을까?
조선의 여인들을 병자호란 전리품으로 여긴 청군들.
결국, 청군들의 성노리개로 몸 버린 후, 돌아온 환향녀.
통혼으로 화호(和好)를 굳힌다는 명분은 지켜지지 않았다.
내외제신과 혼인을 맺어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
청나라 명문가에서 애첩으로
호사를 누린 여인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정절을 잃어버렸던.,환향녀.
청나라로 끌려가기 전까지
창끝으로 위협을 받기 전까지는
순결한 조선의 딸과 규수들이었다.
중도에 도망치면 조선이 속환(贖還)할 것.
속죄하며 되돌려 보낸다는 뜻말.,속환(贖還).
그도 못하면, 그 숫자 만큼 채워 보낸다는 의미.
자매 중 언니를 대신하여
자원하여 갔던, 어린 규수들.
중도에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은 규수들이 대부분.
착하고 순결한 조선의 딸들이
국력이 약해 죄없이 끌려간 것.
조선왕조실록에서 지워진.,사실들.
육로로 끌려간 규수들도 많았지만
직통항로로 끌려간 규수들도 많았다.
중도에 도망칠 수 없는.,외딴 섬 선미도.
조선 중기에 국력이 약해
애환을 겪어야만 했던 흔적이
담긴듯한.,선미도(善尾島) 지명.
병자호란때 국력이 피폐해
전쟁배상금을 치룰 수 없어
조선의 규수들을 보냈던 곳.
군마 한마리 값을
규수 한 명의 값으로
전쟁배상금을 치뤘던 것.
"환향녀의 정절을
논하지 말라." - 인조.
착할 ‘善’
꼬리 ‘尾.
꼬리 ‘尾'는 꼬리 끝.,의미.
엉덩이를 나타내는 尸(시)와
엉덩이에 붙어 있는 털 ‘모’(毛).
‘尾'는 또한, 물(水)을 의미하는 한자.
‘물이 어르고 휘감아 돌아 섞이는., 섬.’
‘尾'는 사랑의 섬(Rose Island) 뜻말일까?
미국 해군 로즈 제독의
이름을 본딴 지명.,월미도.
일제 개항기 유곽이 있던 곳.
병자호란 후 조선통신사 시절에
일본에 담배를 팔아 받은 돈으로
청나라에 밀렸던 전쟁배상금 조로
속전을 지불하고야 돌아왔던.,환향녀.
속죄할 贖.,돈 錢.,속전(贖錢).
일본이 조선과 담배 통상을 확대한 이유는
중국대륙 진출을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니었을까?
임진왜란 직후 조선통신사 교류에 적극적이던 일본.
그 이후에도, 1934년 일제강점기 건설되었던 선미도등대.
1894~1895년 조선의 지배를 둘러싸고
중국(청)과 일본 간에 벌어진.,청일전쟁.
1904∼1905년 만주와 한국의 지배권을 두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벌어졌던.,러일전쟁.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벌어졌던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태평양전쟁.
태평양전쟁 종군위안부는 얼마나될까?
.
섬 끝자락에는
잘 다듬어놓은 듯한
'소나무'와 '소사나무' 숲.
소사나무는 해풍에 강한 나무로 분재처럼 성장한다.
자작나무과로 달걀 모양 잎의 털복숭아처럼 몰려 있어
바람에 나부끼는 모양이 애처로우며 선미도 인근 백아도와
남쪽의 섬 거문도와 제주도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수종이다.
야생 사슴과 염소가 뛰노는 구릉을 낀 섬.
이와 함께 섬 정상 8개 능선에 혼합활엽수림.
해풍이 불어올 때마다
섬의 소사나무 잎사귀들이
배때기를 뒤집으며 흔들어댄다.
소사나무 잎사귀의 흔들림은
부서지는 파도의 물거품과 더불어
선미도 풍경을 까닭없이 애달프게 한다.
또한 섬 가장자리와
해안가에는 목장 초지.
조선시대 국영말목장 흔적.
'영흥도~덕적군도'사이
점점이 이어진.,도서지역.
국영말목장 & 국영소목장.
고려가 원나라 속국이 된 80년간
원나라로 공출된 군마는 얼마나될까?
제주도에서만 원나라로 간 군마 10만 마리.
징기스칸 군사는 말안장 밑에
3개월분 비상식량 육포를 깔고
당시 전세계를 정복했다고 한다.
고려에서 원나라에 공출된 군마, 소. 군선.
원나라의 중국 통일에 단단히 한몫 했으리라.
조선시대 '명, 청'에 공출된 군마는 얼마나 될까?
'고려 말~조선'시대 '명.청'에 보낸
공녀(貢女)의 숫자는.,얼마나 될까?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역사라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지워진듯.
그러나, 지명 속에 남아있는 흔적들.
'조선시대 사관들이 지명에 남긴걸까?'
이미 묻혀지고 잊혀진 역사이긴 하지만
더 이상은 되풀이 되어서도 안될.,사실들.
'자주국방' 교훈을 주는 지명.,선미도(善尾島).
.
일제강점기까지 선미도는 군마를 길렀던 곳.
그후, 섬 주민들이 약초와 각종 숲을 이용하여.
몇해 전까지도 가축과 야생동물을 길렀다는.,선미도.
현재 서식하는 식물은 279종.
참취, 큰까치수영, 방아풀, 제비쑥,
고사리, 꼬리풀, 큰천남성 군락지가 있고
중국에서 바람에 실려온 외래종 식물도 있다.
덕적도에서 배로 10분 운항거리인.,선미도.
이 섬에 몇년 전까지 홀아비와 딸이 살았단다.
덕적군도 일대에는 무인도가 많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물이 없다는 점.
그러나, 선미도는 물 사정이 좋은 편.
이는 퇴적암으로 형성된
섬의 지질학적인 특징 탓.
오랜 세월 모진 파도와 비바람을 맞으며
구멍이 숭숭 뚫린 퇴적암들은 섬 정상에서
흘러내린 빗물을 층층이 받아 안으로 축적하는
풍화층을 형성하고 있기에 빗물이 샘물이 되는 것.
섬에서 물을 구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빗물이나 바닷물을 걸러 마시는 일이요,
두번째는 수맥을 찾아 그것을 저장하여 마시는 방식.
섬에 가면 바위 위에 시멘트를 쌓아
옹달샘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바닷물이 아니라 수맥 끝을 찾아
거기에서 터져나온 물을 저장할 줄 아는
섬사람들의 대대 손손 지혜의 결과물인 것.
외딴 섬에서
산다는 것은
생활 자체가
지독한 외로움.
문화적으로 고립감,
경제적으로도 소외감.
마음 속으로는 고독감.
토종돼지, 염소, 꽃사슴, 토끼를 가족의 일원으로 삼아
살던 선미도 가족들 중에 홀아버지는 이미 이승을 떠났고
그 아들과 딸은 뭍으로 나와 살고 있으며 가끔 섬이 그리우면
홀로 남은 집과 짐승들을 돌아본 후, 홀연히 섬을 뜨곤 한단다.
짐승들 만이 그 빈집을 지키면서
결국 야생짐승이 되어 그들끼리 만
종족 보전의 길을 걷고 있다는.,선미도.
벼랑 끝 바위 위에 올라
먼 바다를 응시하는 염소와
사슴들을 보면 그들도 무엇인가
그리움과 기다림 세월이 있다는듯.
이젠 사람의 손길로 부를 수도
길들일 수도 없을 만큼 민첩하고
전투적인 기질로 변한 야생 짐승들은
그들끼리 섬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외딴 섬.
섬에는 가마우지, 까치, 노랑할미새,
흰뺨검둥오리가 살고 특히 겨울철이면
멸종위기야생동물로 천연기념물 제243호
참수리 여섯 마리가 겨울나기 한다는.,선미도.
선미도 해안가에는 손으로 한번 휩쓸면
한주먹씩 잡힐 정도로 고동이 나붙어 있고
해안가 게들이 기어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단다.
청각과 다시마 미역이 무더기로 서식하는.,선미도.
갯바위 낚시꾼들이 우럭과 노래미를 수없이 잡는 섬.
선미도 바다낚시 애호가들의 입소문이 흥미로운 곳이다.
선미도는 그렇게 적막하고 외로움과 그리움이 물결치고
야생 동물 눈빛들이 등대 불빛과 함께 깜박인다는 섬이다.
'이곳 해역은 인천앞바다 서해 상에서 공해 경계선 아닐까?'
인천앞바다 초지도, 선미도
바다낚시 애호가들의 이야기.
위 사진은 2012년 6월 7일(목)
음력 4월18일, 날씨 맑음, 물때 9물.
바다낚시 포인트 - 대초지도, 선미도.
영종도 덕교선착장 출발 07:15~도착19:40
바다낚시 어종 - 농어 광어 우럭
보트에서 자며 일박2일 예정이나
바다에 짙은 해무로 인해 중도 귀항.
선미도 해역은 해무 풍랑이 심해
항로 상 많은 어선들이 침몰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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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말~ 조선'시대
국영말목장이었던 섬.
원나라에 80년간
속국이었던 고려 말부터,
'명, 청'을 사대로 섬긴 조선시대.
'원, 명, 청' 중국의 중원통일에 일조한.,공출 군마.
'고려 말~조선'시대 얼마나 많은 군마가 보내졌을까'
한반도 서해안의 섬들은 물론 제주도까지 국영말목장.
'이 섬에 귀양 온 궁녀는
말을 돌보는 일을 한걸까?'
결국, 한을 품고 운명한 궁녀.
선미도 귀양지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 나올 수 없었던 섬이었을까?
입소문으로 알려진
선미도.,비박 야영지.
야영지 능선 넘어.,등대.
인천앞바다에서 57㎞ 지점.,선미도등대.
인천항과 중국 간을 운항하는 선박들과
남북 해상교역 선박들이 이용하고 있다.
2003년 12월에 새롭게 태어난.,선미도등대.
기존 등대 철거 후 그 자리에 새 등대를 건립.
등대 탑은 19.4m로 당초보다 더 높게 지었단다.
인천앞바다 37km 거리에서도 볼 수 있는 등대 불빛.
등대 불빛을 전달하는 등명기는 우리나라에 몇대 없는
프리즘렌즈 3등대형 등명기로 12초에 한번씩 반짝인다.
최초점등일 : 1934년 10월 1일
구조 : 백원형콘크리트 (19.4m)
등질 : 백섬광 12초 1섬광(FI W 12s).
현재, 선미도 유인등대에는
직원 3명이 근무하며 오간다.
그렇게만, 쓰이기에는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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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미도는 덕적군도에 속한 섬.
덕적군도는 파도막이 3개 섬이
애워싸며 감싸안은 '서해의 지중해'.
파도막이 섬.,울도.
파도막이 섬.,백아도.
파도막이 섬.,굴업도.
'서해의 해금강'.
비경지.,덕적군도.
'세계적인 관광명소'라는
이탈리아 나폴리 해역보다
훨씬 더 환상적인 경관이다.
통영 한려수도 해금강 관광 항로처럼
덕적군도의 해상 크루즈 뱃길이 열리면
인천 수도권과 가까워 각광받을 관광명소.
'지중해 크루즈' 뱃길 관광 여행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볼거리가 많은.,덕적군도.
전세계 관광객들이 몰려 올 만한.,환상의 해역.
'서해에 잠긴 황해평야 유적지이며
신석기시대 패총 토기 발굴 유적지 등
수많은 전설과 역사를 품은.,고대 항로.'
인천앞바다에서 멀지 않은 해역이라
수도권역 여행객 관광지로 인기가 높아
장차, 국제적인 해양 관광지로 급부상할 곳.
'덕적군도 & 대청군도'
연결고리 위치.,선미도.
장차, 크루즈 여행 여객선이 운항되면
덕적군도 1코스 & 대청면, 백령면 2코스.
'1코스와 2코스' 거점이 될 곳은 선미도 뿐.
'당진 ~ 선미도'는 연육교 및
해상 일직선 도로 연결이 가능.
'최소 투자로 최대 경제효과' 가능.
'얼마나 많은 일자리가 창출될까?'
건설업, 해운업, 조선업, 관광산업.등
대한민국 미래의 '꿈과 희망' 파라다이스.
대한민국의 국력과 경제력을
북한 황해도에서도 볼 수 있도록
덕적군도가 개발되어야 할 것 같다.
덕적군도 개발이
남북통일을 앞당기는
효과를 갖어오지 않을까?
덕적군도 해상 관광지역 불빛이
비무장지대에서의 '대북방송'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효과가 클듯.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게 하는.,덕적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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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앞바다 등대지기섬.,선미도.
2015년 11월25일에 쓴 따끈한 기록.
다음 카페 '달뫼' 글이 현실감이 있다.
하여, 필자가 편집 발췌 후 아래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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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앞바다에는 유인등대 4기,
무인등대 31기를 포함하여 약 100여기.
유인등대는 소청도, 팔미도.부도, 선미도.
인천 앞바다에서 남아 있는 몇 개 안되는 유인등대.
'선미도등대'를 오가는 등대호는 등대 아래 해안을 끼고
항진해 등대 지점을 지나자 바로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이어 닿은 곳은 선미도선착장.
시계를 보니 오후 3시 15분이다.
'굴업도~선미도' 1시간 10분 뱃길.
.
선착장은 섬의 중간 위치에 있다.
땅콩 혹은 아령 같이 생긴 섬의 중간.
선착장은 섬의 북쪽 가장 중앙에 위치.
덕적도에서 500m 해협을 건너면.,선미도.
덕적군도에는 7개 유인도, 34개 무인도가 있다.
덕적도, 소야도, 문갑도, 지도,
울도, 굴업도, 백아도.,7개 유인도.
무인도 34곳 주인은 야생동물과 갈매기.
'덕적군도 본섬'인 덕적도에서
가장 가까운 섬., 선미도(善尾島).
'인천항에서 56km'덕적도 곁.,500m.
섬의 움푹 들어간 곳에 방파제는
길이는 짧지만 상당히 넓은 편이다.
철제로 된, 배 걸이대가 양쪽에 수십 개.
.
선착장에 배를 대고 밧줄을 꺼내 고정시킨다.
그리고, 먼저 둘이 내린다. 방파제 위에서 왼쪽으로
특이하게 생긴 바위 하나가 보이는데 ‘촛대바위’라 한다.
생김새 대로 붙여진 이름이다.
방파제에서 나오면 바로 물양장.
물양장 옆으로., 모노레일이 있다.
사용하지 않는 모노레일이려니 했는데
알고보니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시설물.
'선착장 ~ 등대'까지 물자를 운반하는 시설.
등대 오르는 길이 따로 없어
모노레일을 이용해야만 한다.
인천지방해양수산청 행정선이 월 3차례
섬에 와 쌀과 부식, 기름을 내려놓고 가면
등대원들은 이것들을 짊어지고 등대로 오른다.
이 표지선(행정선)을 타고 휴가를 나가고
집에서 귀가할때 김치 등 부식도 싣고 온다.
물양장 옆으로는 컨테이너 한 동이 놓여 있다.
왼쪽 언덕 아래에 하얀 건물 한 채가 있다.
물양장을 나오니 일행이 등대 가는 것을 포기.
예전에 올라가 본적이 있어 또 가고 싶지 않은듯.
.
어차피 그간 혼자 다녔기에
혼자서 올라가기 시작한다.
물양장을 나오면 바로 길은 오르막인데
잔돌 비포장도로로 잡초 무성한 산길 같다.
그만큼 사람이 다니지 않은 사실을 말하는듯.
폭이 넓긴 하지만
걷기 힘든 오르막길.
경사 급하고 제법 높다.
왼쪽으로 모노레일이 이어진다.
그 왼쪽으로 포장도로가 보인다.
하얀 건물로 이어지는., 포장도로.
어느 정도 올라가니, 평지 비슷한 쉼터 공간.
아마도 이런 곳은 예전에 집이 있었을 것이다.
쉼터 공간 그 왼쪽으로 컨테이너 한 동이 있다.
그 주변에는 배수로가 있지만
갈증을 해소할만한 샘터가 없다.
비포장도로는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모노레일은 직진하면서 도로와는 떨어져 있다.
주변을 보니 집터로 보이는 공간이 제법 보이고
땅 속에 묻힌 물통인듯 FRP통들이 여러 개 있다.
물론 뚜껑이 닫혀져 있는 상태이고
그 오른쪽으로 폐가 몇채와 길이 있다.
길은 곧 끊기고 잡초만 무성한 공터가 있다.
주변에는 방치된.,태양광 집적판.
그곳부터는 더 이상 갈 수 없는.,공간.
억지로 담을 넘어서니 모노레일이 이어진다.
그런데 아까부터 봤던 이상한 것이 있는데
모노레일 옆에 발을 딛을만한 구조물이 있다.
가만히 보니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배려한 시설.
그래서, 그것을 밟고 오른다.
모노레일은 능선 아래로 이어진다.
그만큼 이미 높은 곳까지.,올라온 것.
나중에 내려갈 때는
능선을 타고 내려갈까?
능선 주변에 숲은 찾기 힘들다.
마치 민둥산 같은.,'바람의 언덕'.
집터가 능선 바로 아래까지 잡혔다.
옛 섬 주민들이 남긴 모진 삶의 흔적.
해안에서 등대로 가는 길은 비탈길이다.
모노레일 곁길은 평평하다가도 급경사.
나무가 없는 뙤얕볕 길에 온몸이 땀투성.
거기에다 목마른 갈증에 시달리며 걷는 길.
선착장에서 출발한지 20분 남짓 지났다.
어느새 모노레일 곁길로 산 능선에 올랐다.
모노레일은 산허리에 만든 산책로인듯 보인다.
.
능선 길가에 갯바람에 찰랑거리며
동행하는 토끼풀, 쑥부쟁이, 강아지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의 얼굴을 닮은듯.
.
힘들게 걷다보니 저 아래 등대가 보인다.
오후 3시 47분. 선착장에서 30분쯤 걸린 셈.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등대일까?
‘선미도등대’는 해발 157m
해수면에서부터의 높이니까
뭍에 비해 보통 높이가 아니다.
마침 모노레일 종점에서 한분이
웃통을 벗은 채 일을 하고 있기에
인사하니 어떻게 왔나 궁굼해 한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손님을 맞이하는 배려.
선미도등대는 인천항과 중국 간을 오가는 선박들과
남북을 왕래하는 해상교역 선박들이 이용하고 있단다.
선미도등대가 처음 불을 밝힌 시기는
1934년 10월 1일 일제강점기라고 한다.
지금의 등대는 2003년 오랜 풍상에 낡아
기존 등대를 철거 후 새로 건립된 것으로
등탑은 19.4m로 당초보다 더 높게 지었단다.
37km 밖에서 불빛을 볼 수 있고
구조는 백원형콘크리트(19.4m)에
등질은 백섬광 12초 1섬광(FI W 12s).
세계사 ‘등대’의 역사는 길다.
기원 전 280년에 이미 만들어져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항.,파로스 등대.
나무와 송진을 태워 빛을 밝혔다는
파로스 등대의 높이는 135m라 한다.
국내에서도 예로부터 항로변의 산이나 섬에
봉화를 올려 등대 역할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국내에 근대식 등대가 등장한 것은 1903년.
인천시 팔미도 등대를 효시로 1910년대까지
일제강점기에 집중적으로 세워져 현재 전국에
43 곳 유인등대와 519 곳의 무인등대가 있단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등대는
해발 175m에 위치한.,선미도등대.
빛이 닿는 광달거리가 가장 긴 등대는
포항 호미곶등대로 빛은 43㎞ 달한단다.
높은 곳에 등대가 있는 것은 사연이 있단다.
당나라 소정방이 백제를 치려고
덕적군도에 들어올 때 산둥반도에서
이곳 뱃길을 통해 들어왔을 정도로 옛부터
선미도는 인천으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한다.
또한 선미도 앞바다는
밤낮으로 파시가 열릴 만큼
어부들에게 삶의 터전이었단다.
그 분과 이야기 도중에 내 뒤를 따라온 연구원이 들어온다.
이어 또 다른 직원이 나왔다. 이 등대에 세 명이 근무하는데
한 명은 육지로 나가 나중에 온 등대원이 물한통을 갖고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물을 부탁하려고 했는데
무인도가 되어버린 선미도등대 직원들 역시
무인도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등대의 불빛이 잘 보이도록
유리 안쪽을 닦거나 안개가 끼었을 때
‘붕~ 붕~’소리를 내는 무신호가 30초에
한 번씩 울리도록 기계를 조작한다고 한다.
또 배들이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는 전파표지를 관리한단다.
일몰, 일출 때 등명기를 켜고 끄는 일 말고도
태양열발전시설 등을 관리하고 등대 주위에 떠있는
부표들의 점등 상태도 등대 직원들이 확인해야 한단다.
기상측정
그 결과는
1시간에 1번
기상청에 통보.
한시라도 한 눈을 팔 수 없다.
등대 주변에서 주변 바다를 보니
망망대해가 따로 없다는 실감이 난다.
비록 주변 섬들이
보이기는 하지만,
희미하게 보일 뿐.,
푸른 잔디밭에
태양열발전시설.
등대는 물이 귀한 곳.
모노레일 옆으로 호스가 있는데
이 호스를 통해 선착장 주변 물통에서
물을 뿜어 올린 후 등대까지 갖고 온단다.
옛날에는 등대 바로 옆에 선착장이 따로 있었단다.
워낙이 경사가 심해 옮겼다는데 내가 왔던 그 길이다.
실제 바로 옆에 계단이 있긴 하지만 사용하지 않는단다.
예전에는 행정선이 왕래했지만
요즘은 사선을 이용한다고 한다.
기름값이 부담이 되어서라 말한다.
시간은 오후 4시 10분을 넘겼다.
그분과 이런 저런 이야기 도중에
연구원이 등대 사무실로 들어간다.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해서다.
그새 나는 등대 주변을 돌아본다.
혹, 온 길 말고 다른 하산길은 없을까?
.
산 정상을 통해 내려가는 길은 없단다.
온길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오후 4시 17분쯤 등대를 떠나기 시작한다.
내려갈 때는 이미 경험해서 그리 힘들지 않았다.
외길이라 올때와 갈때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기껏 해야 5분 정도 차이가 나는 정도라고 할까?
내려가면서 마을 입구 가까이 닿았을 때.,급경사 지점
여기에서 섬 전체를 바라보니 오른쪽 낮은산이 소등 같아
능선이 부드럽게 이어져 있어 한번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려가면서 보이는 컨테이너에 가본다.
신발도 있고 수돗물도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사람이 사는 곳 같은 느낌이 든다.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놓았다.
콘테이너 안이 잘 보이지 않는다.
등대지기에 말에 의하면
이곳은 등대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사유지라 한다.
예전에는 사람이 살았던 유인도였으나
지금은 등대지기만 지키는 섬이 되었다.
몇년전에 한 사람이 이곳에 염소와 노루를 방목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뭍에 나가 잡일을 하고 지낸다고 한다.
선미도를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의 이야기.
아마도 그 사람이 이 컨테이너 주인이 아닐까?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시 험한 길을 타고 내려오니
함께 왔던 일행인 효웅 씨가 길바닥에서 자고 있었다.
이어 선착장에 닿으니
오후 4시 50분이 넘었다.
이어 연구원이 뒤따라온다.
선착장에서 정면을 바라보니 망망대해.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외 아무 것도 없는 바다.
몇분후 몇척 배가 지나가는데 그중 하나가 해경 함정.
오후 4시 55분에
선미도 선착장을 뜬다.
간조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덕적도 북리항을 기준으로
간조시간이 5시 42분이란다.
뱃머리가 동남쪽으로 돌아간다.
선미도에서 덕적도로 가면서
주변 해안을 보기 위해서인데
'능동자갈마당'부터 시작해서
서쪽 ‘서포리해변’ 앞을 지난다.
이어 덕적도 앞 남쪽에서 동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밭지름해변’ 앞을 통과.
북쪽으로 가면 왼쪽에 ‘진래해변’이 있다.
여기에서 좀 더 올라가면
목적지인 '진리도우선착장'.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깔렸다.
토요일에 비가 온다는 말도 있었고
바람도 많이 분다는 예보도 있었단다.
이미 시간은 5시를 훌쩍 넘었다./ 달뫼.
경기만 옹진군
우리나라 '서해 국경선' 선미도 해역.
일본 최남단 '오키노토리시마' 섬 해역.
그 가치로 보면.,유사한 지리적 여건이다.
무인도 하나가 얼마나
큰 잠재적 가치가 있는지
알게 하는 사례(事例)이다.
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무인도.
만조 때 해면 아래 환초(環礁)지만,
200해리 경제수역 확보를 위한.,암초군.
..........오키노토리시마 섬.........
히가시코 섬 (東小島. 면적: 1.6m²)
기타코 섬 (北小島. 면적: 6.4m²)
미나미코 섬 (南小島, 인공 환초)
............................................
오키노토리시마 섬은 16세기 유럽인이 최초 발견.
최초 발견자 이름을 따라 '더글라스 암초'라고 명명.
1931년, 세계 2차 대전 중 일본은 자국 영토라고 선언.
북위 20° 25′ 동경 136° 05′
북위 20.417° 동경 136.083., 136.083 환초.
스페인어로 ‘돛처럼 보인다’.,파레스 벨라.
겉보기에는 암초군에 불과하지만
해수면으로부터 암초군 정상까지는
일본의 후지산(3776m)보다 크고 넓다.
환초 보강 공사를 1987년부터 시작하여,
'히가시코 섬 & 기타코 섬'은 콘크리트로
가장자리 보강 공사, 보수 공사가 이뤄졌다.
또한, '히가시코 섬 & 미나미코 섬' 사이
산호초 지대에 헬기착륙장 구조물을 설치.
일본의 최남단이나, 섬으로서 인정 여부와
그에 따른 대륙붕 영역에 대해 논란이 있다.
.
도쿄 남쪽 1740km에 위치하며,
일본 정부는 오키노토리시마 섬을
도쿄 도 오가사와라 촌에 소속시켰다.
일본은 오키노토리시마를 영토 섬이라고 주장.
430,000m² 이상의 배타적 경제 수역을 주장한다.
중국은 암초라고 주장하며, EEZ의 기선을 부정한다.
일본이 2008년 11월 UN '대륙붕 한계 위원회'에
이곳 4개 도서지역에 대륙붕 한계 연장을 신청하며
중국의 반발은 더욱 거세져, 양국 간에 분쟁 중에 있다.
일본은 1931년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고 주장.
2차 세계대전 이후, 1968년 미국 신탁 통치 해역.
그후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이를 계승했다고 주장.
일본이 이곳 주변에 배타적 경제수역을 설정할 경우,
중국은 섬 사슬 고리가 끊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반대.
한반도와 타이완 해협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할 경우에는
미국의 개입을 확보하는데 일조.
한국이 일본을 지지해주길 바란다.
본래는 섬이 아닌 바다 위에 떠 있는.,암초.
1980년대 중후반 콘크리트 막과 방파제 설치.
1988년에는 인근 섬에 해양과학기술 센터를 건설.
2013년 5월 이곳 제도로 드나들기 위한 항만건설 시작.
일본은 1987년부터 시작해서 3억 달러 이상을 투자.
덧 말.
인천광역시 옹진군은
장차, 어떻게 개발되는 것이
국가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할까?'
......옹진군.........
인천광역시에 속한
황해의 경기만에 도서로
이뤄진 인천광역시 옹진군.
독 甕,
나루 津.
고을 郡
'독 나루 고을'
옹진군(甕津郡).
옹진군 동쪽과 북쪽은 벽성군,
서북쪽은 장연군, 남서쪽은 황해.
동경 124°40'∼126°33',
북위 36°55'∼37°58'.
면적은 170.14㎢,
인구 1만 7,376명(2008년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7개 면, 75개 리.
군청은 인천 남구 용현동 627· 608.
백령도(白領島)·
대청도(大靑島)·
연평도(延坪島)·
덕적도(德積島)·
영흥도(靈興島) 등
25개 유인도(有人島)
75개의 무인도(無人島).
대부분의 섬들은 산세가 험하여
산지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다.
대청도 삼각산,
선갑도 선갑산·
덕적도 국수봉 등.
해발 300m가 넘는 봉우리들이며,
이외 200m가 넘지 않는 산들이 산재.
계곡과 해안에만 평지가 매우 좁게 형성.
계곡을 흐르는 하천의 유로가 짧아
넓은 평야를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영흥도·백령도 등 큰 섬의 해안에는
갯벌 매립 간척지가 조성되어 농경지로 활용.
이 간석지는 경기도와 인천광역시 전면의
서해안 일대에서 매우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내륙 간석지에는 염생습지(salt marsh)가 발달.
'염생습지는
해수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이다.
간석지 배후에는
바람에 의해 운반되어 온
풍성퇴적물이 쌓여 형성된 해안사구.
덕적도 서포리해안,
대청도 북안,
영흥도 북서부,
용유도 서남안,
무의도 동안 등
곳곳에 산재해 있다.
기반암은 대부분 편암 및 화강암질 편마암.
반상변정질 편마암과 석영편암도 나타난다.
주변해역은 평균 수심이 44m.,대륙붕.
어장으로서의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조수간만(潮水干滿) 차도 심해 넓은 갯벌.
따라서, 양식업, 천일제염에 유리한 조건.
최근, 갯벌 매립이 활발하여 위축되고 있다.
평균조차는 6.2∼6.5m
최대조차는 11m 이상으로
용유도 부근에서 주로 나타난다.
일부 섬에는 독특한 해안지형 해식애가 형성.
바다 영향으로 온화한 기후
한겨울에 평균기온이 1.7℃
한여름에는 평균기온 25.7℃,
연평균 11.7℃, 연강수량 1,090㎜.
청천일수(晴天日數)는 연평균 100일.
1953년 휴전협정으로 인하여
북한 옹진군 본토는 미수복지구.
남한 일부 도서지역 만 군을 유지.
그래서, 유물·유적이 비교적 적은 편.
백령면 진촌리에는 패총이 있다.
연평면 연평리 임경업 장군.,충민사.
병자호란 후, 임경업이 명나라와 내통하여
청나라를 치려다 탄로되어 명나라로 피신할 때
연평도에 머무르면서 바람이 자기를 기다렸는데,
이때 선원 식량을 마련하기 위해 물고기를 잡았단다.
이것이 조기잡이의 시초였다고 하는데,
그뒤 주민들이 임경업 장군의 선견지명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건립하고 그 시호를 따서
충민사 이름을 삼아 봄마다 풍어제를 지내었단다.
백령도사곶천연비행장(천연기념물 제391호)·
백령도남포리콩돌해안(천연기념물 제392호)
백령도진촌리현무암분포지(천연기념물 제393호)
대청면대청리동백나무자생북한지(천연기념물 제66호)
북도면 장봉리 신도노랑부리백로(천연기념물 제360호)
괭이갈매기 번식지(천연기념물 제360호) 등이 유명하다.
덕적면 진리.,3·1운동기념비가 있고,
백령면 진촌리에는 반공유격전적비.
옹진군은 섬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로
조선시대 뚜렷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1921년, 대청면.,대청초등학교이 최초.
그뒤 각 면마다 초등학교.
1922년 대부면 대부초등학교,
1933년 덕적면에 덕적초등학교
1933년 대부면에 풍도초등학교 설립.
1934년영흥면에 영흥초등학교가 설립되고,
1935년송림면에 송림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뒤 각급 학교가 설립되어
2008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개 교(분교 7개 교),
중학교 5개 교, 고등학교 4개 교.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배연신굿.
배의 수호신을 받들고 영(靈)을 맞이하는
풍어굿의 일종으로, 굿을 거행할 때는 으레
이 고장의 해신(海神) 임경업장군을 함께 받든다.
원래, 이굿은 옹진반도지방과
서해안 도서에 전래되어오던 것.
6·25사변 이후 한때 사라졌지만
옹진에서 피난온 굿의 전승보유자
김금화(金錦花)에 의해 재연되었다.
배영신굿은 경우에 따라서 다르지만
대개 음력 정월· 3월· 9월· 10월로 나누어서
행하며, 목욕재계 등 엄격한 금기사항 후 거행.
굿은 신청올림· 당산맞이 부정풀이 초부정.
초잠홍· 영정물림· 소당제석·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굿· 영산할아범 & 할멈굿· 쑹기준다·
다리발용신굿· 강변놀이굿 등 12거리 굿으로 구성.
굿을 할 때는 배에 성황기를 비롯하여
장군기· 소당기· 오색기· 봉죽· 설이화 등의
깃대를 앞세우고 모두 25∼30명 가량이 어우러져
풍물을 치며 놀이를 벌이는 것이 옹진군 배영신굿 특징.
이때 풍물과 함께 「뱃치기」(뱃노래)를 부르며,
남편을 바다에 내보낸 아낙네들은 남편의 건강과
아무 사고 없이 배가 만선이 되어 돌아오기를 기원하는
'니나나타령'을 부르면서 춤을 춘며 노래를 부를 때에는
물이 가득 담긴 동이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물장구 치며 장단.
연평면 연평리 뒷산에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당집이 있다.
조선 인조 때 의주부윤이었던
'임경업 사당'인 충민사(忠民祠)도
이곳에 있어 매년 음력 정월 초하루부터
보름 사이에 길일을 택해 연평도풍어제 거행.
제물로는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바치며
시루떡 등 음식을 진설하고 엄격한 관례에 따라
제례가 집행되며 제는 으레 당할머니가 모든 것을 주관.
제관은 그때 그때 따로 선출한다.
제를 지내는 목적은 마을의 안녕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려는 데도 있지만 도서지방이라는
특수여건 때문에 배의 무사함과 풍어기원이 큰 비중.
제가 끝나면 무당들의
12거리 굿으로 이어지고
마을은 축제분위기에 휩싸인다.
이 풍어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중단된 일이 없기에
마을사람들의 자랑거리.
이 고장 사람들의 생활은
많은 부분 바다와 관계하고 있기에
설화의 배경 설정이 바다인 경우가 많다.
이 고장에 전승되고 있는 설화는 지명유래담이 많고,
임경업·이성계(李成桂)·도선대사(道詵大師)·무학대사.
·유성룡· 강감찬(姜邯贊) 등이 등장하는 인물전설이 있다.
그 밖으로는., 효행전설· 아기장수설화·
고수레유래담· 도깨비이야기 등이 있다.
지명 유래담으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신라가 당과 동맹을 맺기 위하여
사신을 보낸 출발점이.,'덕적도'였다.
이곳에서 출발한 배는
당나라 서울 장안까지
왕래하였다고 전해온다.
나당연합군을 편성하기 위해
당나라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덕적면 소야리에 들어왔다고 한다.
이때, 신라왕은 왕세자 법민에게
140여 척 배를 거느리고 덕적도로 나가
소정방과 연합하도록 명하였다고 전해온다.
소야리는 소정방이 도래한 곳
그뜻에서 지은 지명이라고 한다.
.
임경업에 얽힌 일화가 이 지역에 널리 전하고있는데,
임경업이 배를 타고 연평도 옆을 지나갈 때의.,이야기.
같은 배를 탄 선원들이 식량이 떨어졌다 하자,
임경업은 연평도에서 보리수 가지를 꺾어다가
그 잎사귀를 뿌리라 하였랬더니 그 잎사귀마다
모두 조기로 변하여 식량을 얻을 수 있었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에서 풍어제를 지낼 때
임경업장군을 모시고 치성을 드린다고 한다.
이 밖에 백제 수호신 용을
나당연합군이 잡았을 당시의
흔적이 남아있다는.,'용바위전설'.
동네 부녀자들을
바람나게 한다는
'갓쓴비석전설.'
장수가 손으로 짚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장수바위전설.
단종이 영월로 유배당하자
관직을 버리고 백령도에 정착한
어떤 선비가 꿈에서 계시를 얻어
평양까지 가서 가져다 심었다는.,
'진촌리느티나무전설' 등.
구비전승되는 노래로는.,뱃노래.
방아소리 시집살이노래 타령요 등.
'뱃노래'가 많은 것은 이 고장 사람들이
생활의 많은 부분을 바다에 의지하기 때문.
타령요가 많은 것은 경기도지방의 일반적 특징.
덕적도에는 인근
섬 사정을 소재로 한
'아리랑'이 불리고 있다.
“덕적산 넓이는 사방오리/
그너머 동리는 여덟일세/
문갑소야리 승황빼알/
굴업울도 못섬일세/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뱃노래'는 가락이
단조롭고 구성지며,
후렴은 노를 젓는 데에
힘을 돋우는 것이라 힘차다.
가사의 내용은 거친 파도와 싸우며
고기를 잡는 모습과 고기를 많이 잡아서
즐겁게 살아보자는 소망 등을 담겨져 있다.
“……암해 수로를 맛마쳐 노니
밋띄 미암이 신작로로다 지화자 좋다/
에헤 이에와요 이어차디요/
달둘러 이마도 바다로 조기 잡으러 가자/
연평 칠산 다 뒤져 먹고 어영도 바다로 돈 실러가세…….”
'방아소리'는 김매기할 때
경기도에서 널리 불리는 노래.
방아찧을 때도 불리우는 노래이다.
김매기에 '방아타령'· '방아호'
'방호'· '방개소리'와 같이
「방아소리」계통 소리를
널리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다.
중남부지방에서는 「상사소리」를 널리 부르고
또, '에헤요·' '어후양' '아용' 「에헤야」계통 소리.
인천 옹진군에서는 “……에헤 에라 방호/
에헤 에라 방호/뻘구당 쿵쿵 열듯이……
얼럴럴 상사디여/일락서산에 해는 지고/... ”
옹진군 '시집살이노래'.
“시집간지 삼일만에 놋덩어리 하나를 깨뜨렸네/
시어머니 알으시면 노발대발 어이하나/
시어머니 나오신다 시어머니 나오신다/
아가아가 며늘아가 너의집에를 가거들랑/
앞뒤전답 다팔아가지구 놋덩이 하나를 사오너라/
아이구어머님 그말씀마오…….”
그 밖에 노랫가락 초한가 산염불 및
시조창 '친구가' 등이 불리우고 있다.
인천광역시 옹진군은 도서지역인 관계로
수산업이 발달되어 있고 대부분 반농반어.
상대적으로 농업에 비해 어업 비중이 약하다.
또한, 수산업 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있는 중.
덕적도와 영흥도 어장에서
꽃게· 새우· 민어· 피조개 등과
대청도· 연평도 등 서해5도 일대에서
조기·홍어·까나리·우럭·복어·꽃게 등 어획.
.
특히, 연평도 근해 조기어장은 예로부터 유명한데,
1967년에는 약 5만 톤이 어획되는 등 30년 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히는 곳이었다.
주항 연평항에는 4∼6월이 되면
우리나라 전역에서 어부와 상인들을
태운 어선들이 몰려들어 ‘조기파시’ 형성.
그러나 현재 어족 고갈로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단, 꽃게는 현재까지 자역특산물.
많은 양이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
이 외 굴· 바지락· 김 양식도 이루어져
이 지역어민 소득에 큰 기여를 하고있다.
또한 서해바다 특성을 살려
천일제염도 과거에 활발했으나
현재 염전들이 점점 자취를 감춘다.
농업은 산지가 많아 경지율은 낮지만
토지가 비옥하여 쌀·맥류·서류·채소류 등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고 있으며, 산지에서도
밤·대추·도토리·표고버섯과 각종 약초류 등 채취.
임야 면적은 123.52㎢,
총 경지면적은 28.54㎢.
경지가 총면적의 17.4%.
경지면적 중 논과 밭의 비율은
각각 42%, 58%로 밭의 비중이 높다.
가축은 산양·염소·토끼 등 소규모 축산업.
광산도 비교적 활발하여 23개소의 광산에서
철· 규석· 석회석 등의 광물이 채굴되어 왔으나
2007년 이후 중단, 상업은 인구가 작아 발달이 미약.
포구 중심 소규모 상점 뿐,
대부분은 인천에 의존한다.
백령면 진촌장은
백령도 유일한 시장.
교통은 인천과의 해상교통을 통해 이루어지나
군내 도서들간의 자체 연결망은 미약하고 따라서
각 도서내 육상교통망의 발달도 미약한 실정이다.
인천∼백령도 간에는 쾌속선이 운항 중,
이외에도 주요 도서인 연평도· 대청도·소청도·
영흥도 덕적도·자월도·북도 등 인천연안부두에서
출항하는 정기여객선과 행정선이 운항되고 있다.
옹진군 곳곳에는 피서관광지
여러 해수욕장들이 산재하여 있다.
해안지역 기암괴석, 희귀한 식생 등이 절경
덕적면 서포리해수욕장은 1.5km 해안선 백사장.
노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외에 북도면 시도리에 해수욕장이 있으며,
영흥도· 자월도에도 해수욕장이 개장되어 있다.
수도권에 인접한 이곳 해수욕장들은
해상교통의 발달로 인해 최근에 들어
여름 피서지로서 뿐만 아니라 바다낚시터.
'서해 해금강' 백령도 두무진(頭武津)
해안절경과 넓은 모래사장도 유명하다.
이 밖에 크고 작은 아름다운 빛깔.,콩돌해안.
단단한 모래로 이뤄진 사곶천연비행장 등 볼거리
백령면 진촌리
반공유격전적비,
무명용사전적비 등
한국전쟁 관련기념물.
특히, 1992년부터
인천 대형괘속선 운항.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두무진에서는
눈앞에 바라보이는 장산곶.
심청이가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
대청도와 소청도 해안의
암석경관도 뛰어난 절경지.
천연기념물 동백나무도 있다.
1. 대청면(大靑面)
옹진군 북서부,
황해도옹진반도 서쪽.
면적 15.56㎢,
인구 1,490명(2008).
면소재지는 대청리이다.
본래, 장연군 백령면 지역으로
황해도 장연군에 속해 있었으나
1945년 위도상 38도선 이남 위치.
남한 경기도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대청도(大靑島)와 소청도(小靑島)
등 2개 유인도와 1개 무인도로 이뤄져
각각 대청리와 소청리로 분리 관할되었다.
1974년 백령면에서 분리되어 대청면이 되었다.
중남부에는 삼각산(三角山, 343m)이 솟아 있어
대부분 구릉지, 해안에 인접한 좁은 평지가 있다.
구릉지에는 주로 맥류와 서류 등 밭작물 재배
해안평지에는 벼농사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주요 수산물은 해조류, 조기· 홍어· 복어·가자미 등
인천연안부두로 이어지는 정기항로가 있다.
대청도는 동백나무의 북한계로 대청리 일대의
동백나무군락지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교육기관으로
초등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 등.
대청(大靑) 1∼7리·
소청(小靑) 1∼2리 등
'대청면'은., 9개 행정리.
2. 덕적면(德積面)
옹진군 남부,
경기만 남부.
면적 36.01㎢,
인구 1,765명(2008년).
덕적면 소재지는 진리이다.
본래 남양도호부 지역으로 덕적도라 했는데
1486년(성종 17)에 인천부로 옮겨져.,덕적면.
덕적면은.,진리· 울도· 익포 등 10개 리를 관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부천군으로 편입되었고,
1973년 부천군 폐지로.,옹진군 속.
덕적도(德積島)
소야도(蘇爺島)·
문갑도(文甲島)·
백아도(白牙島)·
울도(蔚島)·
굴업도(掘業島)·
선미도(善尾島)
8개 유인도와
33개의 무인도
모두 41개의 섬.
덕적도 북서부.,국수봉(國壽峰, 國師峰, 314m).
남동부에 비조봉(飛鳥峰)이 이어져 산세 험하다.
땅이 척박하고 경지가 적어 농업 발달에 불리하다.
구릉지 사이와 해안가 좁은 농경지.
쌀· 맥류· 서류 등의 농산물이 생산되며,
산세가 험하여 임야가 많이 조성되어 있고
덕적도 임산물은 밤나무·감나무 등이 생산된다.
수산업은 민어·꽃게 등 어류와
조개·굴·미역·피조개 등 패류와
해조류가 많이 어획되는.,덕적면.
덕적도 국수봉 정상에는 고대 제천단(祭天檀),
진리에는 3·1운동기념비 등 역사유적들이 있으며,
서포리해수욕장은 백사장이 완만해 피서 관광객 명소.
덕적도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 고등학교 1개 교.
진(鎭) 1∼3리·
북(北) 1∼2리·
서포(西浦) 1∼3리·
소야(蘇야)·
문갑(文甲)·
백아(白牙)·
울도(蔚島) 등
12개 행정리가 있다.
3. 백령면(白翎面)
군 최북부
면적 50.98㎢,
인구 4,826명(2008년).
면소재지는 진촌리이다.
본래 황해도 장연군의 섬으로
모양이 고니섬 또는 곡도(鵠島).
1018년(현종 9)에 백령도라고 개칭.
고려시대 초, 그무렵 진이 설치되었다.
1427년(세종 9)에 장연현에 속하게 되었다.
1895년 백령면
진촌· 사곶· 연지
등 17개 리를 관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촌·가을 등 7개 리로 개편,
1945년 38선이
남북으로 갈라질 때
옹진군에 속하게 되었다.
1974년대청면이 분리되었다.
면의 동부에 용기원산(龍機院山, 136m)과
그 외에는 100m 내외 구릉지가 발달해 있다.
동부 진촌리 일대에는 평지가 비교적 넓게 발달.
농업이 활발하며 가장 큰 취락이 입지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맥류·서류 등 비교적 많이 생산.
백령도 백령면 수산물로는 특히 홍어가 많이 어획된다.
인천 연안부두와의 사이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어
대형쾌속선이 운항되고 있다.
북서부 해안은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이루는 두무진이 있어
관광객들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연화리 백령중화동교회.
사곶 천연비행장, 진촌리 조개무지.
진촌리 느티나무 등도 백령도의 관광명소.
이 외에 한국전쟁 관련 군사유적들도 유명.
한국전쟁 당시 반공청년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반공유격전적비가 백령면(백령도) 진촌리에 있다.
백령도에는 한국전쟁 당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한 제 8240부대 소속 무명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무명용사전적비가 진촌리에 있다.
백령면 교육기관.
초등학교 2, 중학교 1,
고등학교 2., 등이 있다.
진촌(鎭村) 1∼7리·
북포(北浦) 1∼3리·
가을(加乙) 1∼3리·
연화(蓮和) 1∼3리·
남포(南浦) 1∼2리
등 18개 리가 있다.
4. 북도면(北島面)
옹진군 북부,
옹진반도 섬들.
면적 17.63㎢,
인구 1,952명(2008).
면소재지는 시도리이다.
본래, 강화군 지역으로
북도면이라 하여 장봉도(長峰島)·
신도(信島)·시도(矢島)·모도(茅島)
등 4개 섬을 관할했던.,옹진군 북도면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설된 부천군에 편입되었다.
1973년 행정구역 개편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유인도.,4.
무인도.,10.
아염도·사염도·
선염도·오도·말못도·
날가지도·동만도·만도 등.
신도 중앙에는.,구봉산(九峰山, 178m)
대부분 지역이 100m 내외 구릉지로 구성.
옹진군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구릉지 농경지에서 맥류·서류 등
'해안 간석지' 농경지에서.,벼농사.
수산업도 활발하여
다양한 어류 및 패류·
해조류 등이 생산된다.
'시도리' 시도해수욕장은 깨끗한 모래사장.
장봉도를 동서로 길게 뻗어내리고있는 낮은
산의 맥은 풍경이 옛부터 아름다워.,장봉팔경.
섬마다 자연포구가 있어
선박의 접안이 용이하며
과거에는 이들 포구에서
강화·교동·해주 등지와 연결.
근래에는 인천과의 연결이 가장 많으며
인천연안부두 사이에., 정기항로가 개설.
교육기관은 초등학교 분교 2개 교가 있다.
.
시도(矢島)·
신도(信島) 1∼4리·
모도(茅島)·
장봉(長峰) 1∼4리
등 10개 행정리가 있다.
5. 연평면(延坪面)
옹진군 북부,
옹진반도 남쪽.
면적 7.28㎢,
인구 1,536명(2008).
면 소재지는 연평리이다.
본래, 황해도 해주군 송림면
일리·이리·삼리 등 7개 리 관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옹진군 용연면 이리 일부가 병합.
인천시 옹진군 7개 리로 개편되었다.
1945년 38선 이남 대연평도와 소연평도 일대.
섬지역 만 옹진군 편입 후, 송림면이 되었다가
1999년 이후 오늘날까지 지금의 이름으로 개편.
유인도 2.
그 사이에는
작은 무인도 4.
구지도(求池島)·
모윤도(毛伊島)·
당도(堂島) 등.
높은 산은 없으나
대부분 지역이 해발 100m
내외의 구릉지로 구성되어 있고
해안가에 좁게 평지가 형성되어 있다.
낮은 구릉지 주요 농산물은
'맥류·서류 등 밭작물'을 생산.
벼농사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은 이 지역 주민들의 중요한 자원으로
해조류와 조기·홍어·가자미 등 어류가 많이 생산
특히, 조기는 오랫동안 이 지역 대표특산물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년 전까지 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조기가 가장 많이 잡힌 곳.
'연평도 주항' 연평항에는 해마다 4∼6월에
조기의 어획량이 가장 많아 파시(波市)가 형성.
여기에서 거래된 조기들이.,전국에 공급되었다.
소연평도에는 양질의 철광이 매장되어 있는데,
1987년부터 연간 약 25만 톤이 생산, 수출되었다.
교통은 인천 연안부두와의 사이에 정기항로가 개설.
문화유적은 연평리 충민사.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 있다.
교육기관
초등학교 1,
중학교 1,
고등학교 1.
동부(東部),
중부(中部),
서부(西部),
남부(南部),
소연평(小延坪)
5개 행정리가 있다.
6. 영흥면(靈興面)
옹진군 중부,
'대부도와 덕적군도'
그 사이에 위치한.,영흥면.
면적 25.39㎢,
인구 4,552명(2008).
면 소재지는 내리이다.
본래, 남양부 지역으로
'고려~조선'시대 국영목장.
조선시대에는 영흥면이 되어
선재· 안도· 호도 등 22섬 관할.
1914년 행정구역 개편.,부천군
1973년 옹진군으로 편입되었다.
영흥도 중심으로
선재도· 측도· 부도 등
4개의 유인도가 속해 있고
18개 무인도가 합쳐져 22개 섬.
무인도는.,자암도·소암도·
섬업벌도· 외항도 등 18개.
본섬 영흥도에 위치한., 국사봉(國思峰, 128m).
선재도에는 낮은 야산들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다.
대체로 1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로 이루어져 있고,
토양층이 두껍고 비옥하여 농경지로서 적합한 곳이다.
각종 밭작물 재배와 더불어
해안 간척지 위에 조성된 농경지
벼농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수산업도 활발하나
대부분 농작물 재배와
겸업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꽃게가 많이 어획되고 김· 굴·
백합· 새우 등의 양식업 매우 활발.
인근 시화매립지에 조성되고 있는 공업단지와
신도시 전력 공급원 영흥도에 화력발전소 건립.
영종도 '내리'에는 십리포해수욕장이 있다.
교통은 인천과 정기항로 개설.,여객선 운항.
.
교육기관
초등 분교 1
중학교 1개 있다.
내(內) 1∼7리·
외(外) 1∼3리·
선재(仙才) 1∼3리
등 13개 행정동이 있다.
7. 자월면(紫月面)
옹진군 남부,
'영흥도와 덕적군도'
그 사이에 위치한 자월면.
면적 16.14㎢,
인구 1,078명(2008년).
면 소재지는 자월리이다.
본래 이 지역은
1975년 영흥면 자월도에
자월출장소가 설치되어 자월·이작
등 2개 리를 관할하다가 덕적면 승봉리가
합해져 1983년에 영흥면에서 자월면이 되었다.
자월도(紫月島)·
대이작도(大伊作島)·
소이작도(小伊作島)·
승봉도(昇鳳島) 등
4개의 유인도.
9개 무인도.
선갑도·대초지도·
소초지도·벌섬·동백도·
하공경도·사승봉도·금도 등
자월면은
유인도 4개
무인도 9개와
13 섬으로 구성.
자월도 남부에는 국사봉(國思峰, 126m),
선갑도에는 선갑산(仙甲山, 351m)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맥류· 서류 등의 농산물이 생산.
아울러 벼농사도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다양한 어류 및 패류·해조류 등이 생산된다.
자월도· 이작도· 승봉도 주변해역은
수심이 깊어 큰선박 접안이 가능하다.
교통은 자월리 포구와
'인천 연안부두' 사이에
정기항로가 개설되어 있다.
덕적· 영흥 및 육지인
남양지역과도 교류 활발.
자월면(紫月面)은
자월(紫月) 1∼3리·
이작(伊作) 1∼2리·
승봉(昇鳳) 등
6개 행정리.
...............
경기만 옹진군.,에코 뮤지엄(Eco Museum).
경기만(灣) 일대는 지붕이 없는 역사 박물관이다.
경기만은 인천과 경기 서쪽 한강의 하구를 중심으로
북쪽 장산곶과 남쪽 태안반도 사이에 있는 반원형의 만.
경기만은 해안선 길이 만 528 km에 이른다.
경기도는 7일 경기도청에서 안산ㆍ화성ㆍ시흥 등
3개 지자체와 경기만을 '에코뮤지엄'으로 조성하는 협약 계획.
에코뮤지엄은 기존 생태 및 문화, 역사 등을 활용.
자연 생태 교육과 체험 관광지로 만드는 사업이다.
▲안산 풍도(청일전쟁 유적지)
▲화성 당성(옛 대중 교역로)
▲화성 매향리(미군 사격장)
▲안산 선감도(인권유린) 등.
이러한 사실에 입각하여
역사자원 스토리텔링 사업.
또 경기만이 갖고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인
갯벌과 염전, 야생화, 철새도래지 등을 묶는
생태환경 조성과 어촌체험, 문화를 묶는 프로젝트.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통한
경기만 명소화 작업도 추진.
예술가와 주민이 참여해 경기만 주변 섬 및
주요 거점지역을 생태아트와 조형물, 그래피티.
이를 통해 경기만 비엔날레를 개최한다는 구상이다.
이외에도 경기만 자연생태 투어리즘을 통한 관광 활성화.
투어 코스는 해양, 도보, 자전거 등 3가지로 나눠 진행된다.
경기도와 3개 지자체는 2018년까지 총 71억2000만원을 투입.
'지자체별 투입 예산'
경기도 29억5000만원,
안산시 11억2500만원,
화성시 19억2000만원,
시흥시 11억3000만원 등.
지자체별 구체적 사업을 보면 안산시는
대부면사무소에 에코뮤지엄 센터를 구축.
이를 거점으로 마을 축제 시범사업, 거리정비,
해솔 6길 정비 및 명소화, 대부도 생태마을 조성,
누에섬 생태ㆍ예술 체험교육 프로그램 등을 진행.
화성시는 제부도를 단장해 관광명소로 꾸미고,
매향리 평화생태 콘텐츠 발굴 및 스토리텔링 개발
시흥시는 갯골생태 공원 생태예술 체험 교육프로그램 개발.
어린이 생태놀이터 조성ㆍ운영, 독자적 에코뮤지엄 조성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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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경기도는 서해안 관광 활성화를 위해
국내 최초로 경기만의 해양ㆍ레저ㆍ관광 자원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경기 해양레저관광지도'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