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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의 영암 덕진포해전
대승공 33세 류재균
1. 서론
“류차달 대승공 탐구 시리즈” 중에서 왕건의 서남해안 나주전투에 덕진과 신북이 나오는 부분에 대하여 의문점을 제기하는 분을 위하여 덕진포해전에 대한 자료를 추가로 소개한다.
덕진포해전과 류차달이 어떤 관련이 있는가 하는 부분도 함께 알려드립니다. 왕건이 견훤과 싸울 때 왕건 군대가 주둔했던 신북면 모산(馬山)은 당시 나주였으며 왕건을 태조라 칭하지 않고 왕건이라 하는 것은 왕건이 서남해안 전투 때 고려왕이 아니고 태봉 궁예왕의 장수로 참전했기 때문이며 휘 류차달 대승공께서 흥률사꿈에 왕장군이 군량미가 없으니 도와달라는 현몽1)했던 시기를 흥률사 중건 때와 역산해 보면 903년 나주전투 때이다.
※주1) 죽은 사람이나 신령이 꿈에 나타나서 어떤 말을 하는 것으로 왕장군이 군량미가 없다고 알려준 청의동자는 대승공 할아버지이다.
고려 1등 개국공신 5명 전원과 2등 개국공신 12명중에 태조당질은 왕희순과 류차달을 제외하고 10명이 삼중대광(三重大匡) 또는 태사(太師), 시호(諡號)를 994년(성종 13)이후에 추증받았는데 “903년 궁예부하였던 왕건부터 918년 고려왕 태조에게 또 936년 삼국통일 때까지 모든 전투에 군량미를 지원했다”는 설정과 “류차달 할아버지가 흥률사 사해황제 중 한분이다”는 약간 무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며 대승공은 그 정도 대접 받을 인물이라는 것이다.
2. 덕진포해전(德津浦海戰)
김인창2)(철학박사)
※주2) 현 (주)인스나인 기업부설 디자인 연구소 책임연구원, 철학박사(미술사) : 1991. 2월 - 1995년 6월, 미학 & 미술사학과, M.S. University of Baroda, India
※ 김인창 박사님의 “2.덕진포 해전과 3. 남해용신과 왕건 설화”글에 “각주”는 없음.
※출처 : 영암문화원/문화마당/회원마당/26번글 : 김인창 덕진포해전--
http://yaculture.org/?c=3/19&uid=1095 김박사님 글을 발췌하였으니 원본을 보시려면 출처에서 확인바람.
덕진 사람들은 장보고의 오른팔 장수였던 정년 장군3)이 덕진포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선암마을에서 태어났다고 믿는다. 그래서 선암마을은 무장골이라고도 불린다.
※주3) 정년(鄭年, 경주정씨)은 신라말기의 무신으로 궁복(장보고)와 함께 청해진을 지켰다.
정년이 장보고를 兄으로 불렀으며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에서 와서 전남 완도 청해진(靑海鎭)을 근거로 해적들을 소탕하고 서해 · 남해항로의 무역권을 독점하게 되었고 장보고가 암살된 뒤 청해진을 지켰다.
청해진 당집(사적 제308호)에 중앙에 주신 송장장군, 우측에 정년장군, 좌측에 혜일대사를 모시다가 1982년 주신에 장보고를 추배하여 주신에 장보고 송장 포함하여 4분 위폐를 모시고 있다
846년 장보고가 사망하고 그를 추종하던 장수들이 대부분 송악(개성) 인근 정주해안4)으로 옮겨 활동한 반면, 정년 장군은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하고 인근지역은 물론 완도에 이르는 지역의 해상 호족들을 관리했다고 전한다.
※주4) 황해도 정주(貞州)는 황해도 개풍군(開豊郡)의 옛 지명이며 정주호족으로 류천궁 류덕영 등이고 정주 부근 신천강씨(궁예처가) 유주 류차달 등이 왕건 증조 강보육과 서로 패서해안호족으로 서남해안 호족과 해적으로부터 보호 동맹 연관이 있다.
왕건은 903년 수군을 이끌고 서남해안으로 진출한다. 송악 출신 왕건은 그곳에서 청해진에서 활동했던 장수의 후손들과 친분을 쌓고 연이어 영암의 해상세력과 연줄을 잡았다.
그는 집안에 내려온 도선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영암 상대포5)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을 터이다.
※주5) 영암 군서면 상대포는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건너간 항구로 후삼국시대 국제 무역항구이며 영암출신 최지몽 도선국사가 있고 형미스님은 궁예에게 왕건을 지지하다가 처형당한다. 이처럼 궁예 장수인 왕건에게 군량미를 제공한다는 것은 선조대대로 윗대관계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 윗대관계가 무자보 총목 113쪽의 사해황제이다.
후백제의 견훤은 이 지역을 명목상 지배하고 있었으나 토착 성주6)를 확실하게 포용하지 못했고, 강력한 연대의식을 가진 해상인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다. 왕건은 서남해에서 활동하던 해상인의 지원에 힘 얻어 이 지역 10개 군현7)과 연대하고, 금성을 점령하여 병력을 상주시키고 지명을 나주로 개칭한다.
※주6) 왕건이 나주 침투할 때 오다련이 금성태수 나종례에게 왕건을 도와주어야 하는 가를 문의하고 나종례가 허락한다.
※주7) 후삼국시대는 현에 군인수가 50~100명 정도이며 10개 현이라해도 동원 병력은 현을 지키는 필수 인원을 제외하면 천명 이내이다.
왕건은 909년 2차 출병하여 무안군 해제면에서 견훤의 배를 빼앗고, 신안군과 진도군을 차지한다.
왕건은 삼천여 수군 병력8)을 동원하여 견훤이 막고 있던 군사적 요충지 덕진포로 향했다.
※주8) 후삼국시대 전투 병력은 3~5천명으로 고려초에도 전국병력수와 대등한 3천이상 병력을 지원한 호족이 생겨나고 고창전투부터 만명 단위로 병력 수가 늘어난다.
① 덕진포 해전
912년, 밀물이 들기 시작하고 바람 방향이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된 갯바람을 타고 왕건의 수군은 덕진포를 향해 출발했다.
덕진포구를 향해 은밀히 항해하던 왕건의 수군은 영암천에 이르러 진을 짜고 기다리던 견훤의 공격을 받는다. 왕건은 공포에 질린 부하들을 독려하며 승리는 강한 의지와 단결력에 있다며 스스로 앞장서 싸웠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하여 불화살을 날리니 견훤의 군대는 불길에 싸여 혼비백산한다.
덕진포해전의 승리는 왕건의 지휘통솔력, 함선 운용술, 물때와 바람방향을 응용한 해전술, 그리고 이 지역 토착 해상세력의 지원을 통해 얻어졌다. 덕진포 해전의 승리로 왕건은 과거 장보고가 차지했던 서남해 연안의 제해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② 신북면 마산
왕건은 해전 승리의 기세를 몰아 병선을 덕진에서 서호, 목포에서 몽탄에 이르는 요충지에 배치하고, 자신은 신북면 마산에 진지를 구축한다.
마산은 덕진포에서 이십 리 거리9)이며, 견훤이 흩어진 병사를 모아 은거하고 있던 반남면 자미산성으로부터 또한 이십 리 거리에 있다. 왕건과 견훤 군사는 마산10)과 자미산성11) 사이에 있는 신북면 월평리를 중심12)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주9) 이십리 거리는 8km이며 십리는 4km이고 오리는 2km이다.
※주10) 馬山은 해발 159.2m 으로 영암군 신북면 모산앞 이목동에 있는 산으로 당시 이목동은 모산 12동네중 하나인 지역이다.
※주11) 자미산은 나주시 반남면(반남현) 자미산과 반남면사무소 사이 전남 나주시 반남면 신촌리 산 3-2에 있는 산성으로 성의 둘레는 약 740m로 규모는 작으며 조선시대까지 성각으로 사용하였다.
※주12) 후삼국시대부터 대한재국 때까지 영암군 북이종면 중심지는 현재 이천리 4구 부선장이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북면 이천리 부선(영암석제부근)로 월평리에서 분리 된다.
③ 이천리 물통방죽13)
※주13) 현재 영암군 신북면 이목동저수지(냉천제) 자리에 저수지 만들기 전에 물통방죽이 있었다.
덕진포에서 신북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으로 마산이 보이고 그 아래 작은 방죽이 나온다. 이곳은 군사들이 말에게 물을 먹이는 곳으로 말물통이라 불렸다. 수백 년 세월동안 덕진다리를 건너 이곳을 지나던 길손들도 말에게 물을 먹이고 쉬어 갔다.
마산 아래 박굴14)이라는 곳은 옛날 군사들이 훈련했던 곳이라 전해진다. 이곳에서 좀 더 올라가면 옛날 원님이 지나다가 쉬었다 갔다는 원등이 나온다.
※주14) 박굴은 마산아래 떡고개와 이목동 저수지 위 끝 명동과 장산으로 가는 갈림길 떨국재 사이에 있는 왕건 군사훈련지이며 명동리 행군봉을 지내 자미산상과 만나는 부선장터(견훤군)와 월평리(왕건군)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④ 월평리 여석산15)
※주15) 영암군 신북면 월평리 평지 원형 야산의 정상에는 사방 30m 정도의 수심 2∼3m 연못인 지소(池沼)가 있는데, 이름이 여석산(礪石山) 천지(天池)이다.
왕건이 주둔했던 마산으로부터 북쪽으로 1킬로미터 정도 가다보면 신북면소재지가 나오고, 소재지 약간 지나 좌측에 나지막한 산이 있는데 숫돌이 나온다하여 숫돌뫼 또는 여석산(礪石山)이라 부른다.
왕건의 군대가 이곳에서 생산된 숫돌로 칼을 갈아 견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왕건에 대한 전설로 인해 이곳의 숫돌은 유명세를 탔고, 어찌나 많은 숫돌을 파냈던지 커다란 웅덩이가 생겼고, 그 깊이가 명주실 한 소쿠리가 다 들어갈 정도로 깊었다고 한다. 어쩐 이는 그 깊이가 중국까지 통했다고 말한다.
⑤ 여석산 쌍패놀이16)
※주16) 여석산 쌍패 농악은 1996년 사단 법인 고향을 생각하는 주부들의 모임 회원들이 결성하였다. 1997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초대 회장은 문미순(류부열교장부인)으로 농악 이외에 영암 문화원에서 입춤과 부채춤 등을 배운 이력이 있다. 남도 문화제에 총 3회 참가하여 장려상을 수상 하였다. 2010년 제37회 전남 민속 예술제 일반부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여석산 쌍패 농악은 현재 신북면의 대표적인 농악 단체이다.
여석산을 중심으로 왕건과 견훤은 밀고 당기는 싸움을 계속했다. 여석산 쌍패놀이는 당시 치열한 전투의 모습을 농악으로 재현한 것이라 전해진다. 여석산 쌍패놀이는 탐색, 진군, 접전, 화해로 통하는 구성을 통해 전쟁의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적장의 목을 따기 위한 군사적 전술을 농악에 이용한 것은 호남 우도농악의 특징이기도 하다. 실제 전쟁에서는 왕건과 견훤이 장소를 바꿔가며 십여 년의 지루한 싸움을 주고받는다.
3. 남해용신과 왕건 설화17) : 김인창(철학박사)
※주17) 영암문화원/문화마당/회원마당/29번글이며 “각주”는 없는데 본 필자가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해 달았음
912년 덕진포해전에서 왕건에게 패한 견훤은 반남면에 있는 자미산에 숨어 들어 진을 치고 흩어진 병사를 모았다.
이때 왕건은 덕진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가까운 신북면 모산에 모여 향후 전략을 짜고 있었다. 이후 견훤과 왕건의 군사는 신북면 호산18)과 여석산 일대에서 수차례 충돌했지만 전면전으로 어느 한편이 승리하기는 쉽지 않았다.
※주18) 호산은 신북면 월평리 산7(원월평길 28-1)이 있는 해발 155.2m로 반남면 자미산성에서 5km 거리임.
이런 전투는 적장의 목을 베면 적이 쉽게 무너지므로 전면전보다는 은밀한 작전을 통해 적장을 제거하는 것이 전략이었다.
이에 왕건은 수륙 양면 협공 작전을 계획하고 일부 군사는 모산에 그대로 주둔한 척하고 나머지 군사를 데리고 영암천을 통해 견훤이 있는 자미산 후방으로 진군했는데, 가는 도중 남해포19)에 들러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하룻밤 진을 쳤다.
※주19)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 남해포
그런데 이런 왕건의 작전을 미리 눈치 챈 견훤이 야간 급습을 위해 남해포 인근 야산에서 잠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자미성을 포위하여 견훤을 잡을 일을 꿈꾸며 왕건은 고단한 몸을 눕혔다.
견훤이 군사를 정비하고 공격을 준비하는 동안 왕건은 깊은 잠에 빠졌다.
이때 왕건이 꿈을 꾸었는데 바다용을 탄 백발노인20)이 나타나 당장 자신이 인도하는 바다를 건너라고 경고했다.
※주20) 왕건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잠을 자는데 꿈속에 백발수신(白髮水神)이 나타나 강 건너 무안 몽탄으로 피하라는 곳인 남해포(南海浦)에 남해신사가 있었다.
왕건은 본능적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군사를 이끌고 인근 남해포에 정박해 있던 배에 탔는데, 배는 무언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강한 물살에 떠내려갔다.
이때 어디에선가 수백발의 불화살이 왕건 군사가 떠난 막사에 날아들었다. 컴컴한 숲속에서 질풍처럼 달려 나온 견훤의 군사가 순식간에 막사일대를 장악하며 왕건의 군사를 찾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배 위에서 지켜보던 왕건의 군사는 견훤의 기습공격을 피할 수 있었던 아찔한 순간을 기억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왕건의 배를 발견한 견훤의 군사는 길길이 뛰며 화살을 쏘았으나 왕건의 배에 닿지 못했고, 왕건의 군사를 실은 배는 바람을 맞으며 유유히 흘러 강 건너 무안 청룡리에 닿았다.
왕건은 견훤의 군대가 쫒아올 것을 대비하여 그 곳에 군사를 매복하고 신북 마산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에게 견훤의 뒤를 공격하도록 명했다.
다 잡은 왕건을 놓친 견훤은 분해서 즉시 배를 모아 왕건을 추격했다.
견훤은 왕건의 군사를 좁은 파군천으로 몰아넣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왕건의 군사는 오히려 파군천 입구 좌우 산등성이에 매복하여 반격하니 견훤의 군사는 빠져나올 길 없이 살아남은 자는 뿔뿔이 흩어져 인근 산으로 도망가기에 바빴다.
왕건은 이 전투를 계기로 나주 영암21)을 확실하게 장악할 수 있었다.
※주21) 1350년 고려말 왜구의 노략질로 진도를 비우라는 국명으로 진도주민들은 관아를 따라 섬을 버리고 영상강 중류 지류인 금호강 지역 시종으로 이주한다. 당시 나주 땅으로 진도를 따뜻하게 맞아 땅을 떼어 내준 것은 삼한시대로부터 영산강 해외무역의 주역인 영암과 나주가 진도 무역상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인연이 깊었던 때문이다. 시종 만수리 내동리 월악리에 도착한 진도군민은 진도군을 세우고 고종 32년(1895년)까지 진도군 명산면으로 살았다.
이후 이곳을 파군천22)이라 하여 왕건이 견훤의 군사를 물리친 것을 기념했고, 왕건의 현몽을 꾸고 건너온 곳이라 하여 몽탄천이라 불렀다. 왕건은 덕진포 해전과 파군천 전투에서 승리한 것에 힘입어 918년 고려를 건국했다.
※주22) 왕건이 군사를 남해포에서 강을 건너 무안 청용리 두대산을 향하여 파군천 하류에 진을 치고 군사를 매복시켜 견훤군을 대파한 곳이다.
1010년, 고려의 8대 왕 현종이 1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왕위계승 문제를 트집 잡아 거란오랑캐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다. 그해 12월 28일, 현종은 거란의 공격을 받고 개경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고, 이듬해 1월 13일 현종 일행은 나주에 도착한다.
여기서 현종은 고려 건국 당시 나주와 영암 일대에서 있었던 태조 왕건의 일화를 듣는다. 덕진포 전투에서의 화려한 승리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남해포 꿈 이야기를 듣고 감복한 현종은 남해포를 방문하여 태조가 꿈을 꾸었던 자리에 제단을 차려 남해신께 감사드리고 아울러 거란오랑캐를 물리쳐 줄 것을 비는 제사를 올렸다. 이때가 1011년 정월 보름이다.
남해신의 영험한 기운 때문이었는지 개경까지 침입했던 거란 오랑캐는 이후 연패를 거듭한다. 1월 17일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사를 요격하여 1만 여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다음날 흥화진에서 거란군 2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포로가 된 남녀 3천여 명을 구출했다. 1월 19일에는 이수에서 거란군 2,5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1월 22일 어리참에서 거란군 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수많은 포로를 구출했다. 마침내 거란군은 1월 29일 압록강을 건너 패퇴하였다. 현종이 남해신께 제사 지낸지 불과 2주 만에 거란오랑캐가 물러간 것이다. 현종은 나주에 내려온 지 8일째 되는 1월 21일 나주를 떠나 광산의 복룡역에서 묵고 상경 길에 올랐다. 그는 불과 19세의 나이에 가장 험난한 몽진의 길을 걸어야 했고, 힘이 약한 나라의 운명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태조 왕건의 용맹을 배우고자 힘썼다.
이후 국가의 안녕을 위해 바다 용신에 제사 지날 때마다 서해의 풍천, 동해의 양양과 더불어 영암 남해포는 중요한 제사터23)가 되었다.
※주23) “남해신사는 동해의 동해묘(강원도 양양)와 서해의 서해단(황해도 풍천)와 남해신사(당시 나주 종남면)는 우리나라 3대 해신제를 지내던 장소이다.
현종과 관련된 남해신사 설화는 1993년에 발행된 『영암군시종면지』 부록에 등장한다. 하지만 현종과 관련된 설화는 역사성이 떨어진다. 현종이 피난하게 된 거란족은 개경 이남으로 온 사실이 없다. 그러므로 현종이 몽탄으로 대피했다는 설화는 근거가 약하다. 이에 비해 후백제 시대에 왕건과 견훤의 치열한 전투가 이 지역에서 있었다.
고려시대 『증보문헌비고-예고』편에 고려 현종 19년(1028)에 남해 신을 사전(祀典)에 올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현종이 1011년 나주에 와서 왕건에 대한 일화를 듣고 친히 나주 남쪽 45리 지점에 와서 제사를 지낸 후 17년 만인 1028년에 이르러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중사(中祀)로 제사를 올렸다고 볼 수 있다.
이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서,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남해신사의 제례는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국 여지지』,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에는 봄과 가을에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중사로 모셨던 것으로 확인된다. 남해신사는 조선 시대에 간행된 각종 지리지와 17세기 이후의 각종 고지도에 등장한다.
4. 덕진포해전과 군량미
김인창 박사의 덕진포 해전과 남해용신과 왕건 설화에서 군량미 언급은 없다. 다만 왕건이 영암 남해포에서 백발노인 도움으로 무안 청룡리에 도착하여 파군천 전투에서 오다련이 현지 주민들에게 밀가루를 징발24)했다는 기록만 있는데 문화류씨 족보에 대승공께서 현지에서 군량미를 조잘하지 말라는 것과 위배되지만 오다련이 밀가루를 징발한 것은 군량미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군수품으로 사용하였다.
※주24) 국가나 단체가 사람이나 물자를 강제로 모으거나 거두어들이는 것으로 대승공은 현지에서 군량미를 징발하면 천심을 잃으니 징발하지 말라며 수레와 군량미를 제공한다. 대동사원지에 의하면 대승공을 안동3태사+대승공=4태사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문화류씨는 대승공을 太師라 하지 않는다.
무자보 총목 113쪽 흥률사 상량문에 왕장군 군량미를 도와주어라는 청의동자 현몽처럼 덕진포 해전을 포함하여 모든 전투의 군량미는 대승공이 지원한다.
왕건에게 군량미를 지원한 호족은 여러명 있으나 이도와 류차달만 개국공신이 되는데 이도25)는 왕건이 錦江을 건너 견훤과 전투할 때 배(船)와 군량미를 제공했지만 더 큰 공은 3천명 정도의 군대를 지원한 장군이지만 류차달은 장군이 아니며 오직 군량미와 수레를 지원한다.
※주25) 전의이씨 시조 이도(李棹)는 고려의 개국공신이다. 시호는 성절(聖節)로 삼한개국(三韓開國) 익찬이등공신(翊贊二等功臣)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에 책록되었고 전산후(全山侯)에 봉해졌다.
5. 결론
① 일부 종원들이 말하는 대승공 아버지는 누구인가?에서 그렇다고 대승공을 알이나 금궤에서 태어 낳았다든지 하는 것은 더 큰 불효이며 후삼국시대 신흥 호족들이 선종인 불교를 신봉 했지만 유명한 스님이 없고 폐허된 흥률사에 대승공이 찾아간 이유와 현몽한 사람을 대승공 할아버지라는 것과 또 왕건이 나주에 올때 적국인 태봉국 장수를 도와준 해안호족들과 정주부근 포구에서 무역으로 재산을 축적한 대승공 선조가 사해왕제 일원이라는 것과 왕건을 도와준 서남해안 호족들과 연관이 있다는 것은 무리한 설정이지만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기에 대승공에 대한 저의 주장을 허구라 하지 말기 바란다.
국문학은 학습한 분이라면 알겠지만 견훤아버지가 지렁이다. 김알지는 알에서 태어 낳았다, 윤신달을 잉어가 구해주었다는 것처럼 흥률사로 류차달을 오게하여 현몽한 청의동자가 류차달 할아버지다. 그 할아버지는 사해황제 일원이다는 것은 가능한 이야기이다.
문화류씨들은 다른 고려개국공신들처럼 류차달이 諡號가 없고 관직도 대승에서 太師나 三重大匡 추증 받지 않았기에 祠堂이 없다가 1946년 大東祠를 마련한다. 그러나 후손들은 7세손 公權이후 4세 5공의 시호가 있고 10세손 추밀원사 淳 아들 6명이 一家六封君26)으로 三韓甲族으로 발전한다.
※주26) 1. 문화류씨 一家六封君 : 高麗後期 1200年代 大丞公 9世 樞密院事 諱 淳 一家는 모두 封君을 받았으며 우리나라 歷史上 前無後無한 光榮이다.(대승공 10세분들)
※ 1남 諱 旱雲은 无后
① 2남 諱 成比 文山君 諡號 忠誠 正憲大夫左右衛上將軍判禮賓寺事
② 3남 諱 資成 文山君 贊成
③ 4남 諱 成澗 瑞寧君 卿相
④ 5남 諱 元庇 文平君 左贊成
⑤ 6남 諱 良梓 全城君
⑥ 7남 諱 仁庇 晉山君
2. 대승공12세에 諱 鎭 文化君, 諱 仁琦 文化君이 계십니다.
3. 안동권씨 一家九封君 : 高麗後期 1300年代 樞密公派 13世 菊齋公(權簿, 永嘉君, 대승공10세 柳陞 정신공 사위) 一家는 모두 封君을 받았다.
① 菊齋公 權溥 永嘉府院君 諡號文正 都僉議政丞 大提學
② 1남 權準 吉昌府院君 諡號 昌和 號 松齋
③ 2남 權宗頂 廣福君 大禪師 兩街都摠攝
④ 3남 權臯 永嘉府院君 諡號 忠靖 檢校門下侍中
⑤ 4남 權煦 충선왕 양자로 가서 왕후(王煦) 이름이 하사받아 王煦 鷄林府院大君 諡號 正獻 都僉議政丞
⑥ 5남 權謙 福安府院君 贊成事 判三司事
※ 사위1 安惟忠 密直右副代言
⑦ 사위2 婿李齊賢 鷄林府院君 號 益齋 侍中 諡號 文忠
⑧ 사위3 王璹 順正大君 翰林學士
⑨ 사위4 王珣 淮安大君 諡號 莊順
고려 개국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한 광주전남지역 1세대 박선홍교수 이종범교수 시대를 지나 목포대 강봉룡교수는 목포무안 진도를 주로 연구했고 무등일보 남도일보에서 왕건 서해안 자료를 기사화했으며 영암신문 영암문화원과 김인창박사 등이 무안 영암지역 해전을 발표하는데 제가 어려서 구전으로 들은 이야기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
사학과 교수나 향토사학자들 글에서 문화류씨 족보 내용과 겹치는 부분을 추적하다 보면 고려말 몽고에 저항한 삼벌초가 없어지고 국방력을 상실해버린 고려가 아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을 때 해양호족들은 연합하여 왜구와 해적으로 부터 스스로 보호하고 영암호족들이 진도호족들에게 땅을 내어 준 것처럼 장보고 이후에도 패서호족과 서남해 해양호족들27)이 연합하여 정주지역 해양호족 작제건 손자 왕건에게 힘을 실어 주는데 그 시작이 흥률사 상량문에 나오는 사해황제가 모이는 장소가 흥률사이고 四海皇帝 주역이 작제건 류차달이라는 것이다.
※주27) 장보고(張保皐)는 통일신라 후기인 9세기경 서남해안 출신으로, 20대에 당나라로 건너가 서주(徐州) 지역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을 지냈고 불순한 해상 세력의 활동이 신라, 당나라, 일본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그들 척결을 위해 청해진을 설치하여 패서지역 서남해안지역 해상무역상들이 장보고의 보호를 20여년동안 받으며 재산을 축적했는데 851년(문성왕13) 청해진이 해체되고 890년 경에 해상호족들이 해적으로부터 보호해줄 세력이 없어졌는데 해상호족들끼리 스스로 동맹을 맺어 보호하기로 하였고 그 주도적 역할을 한 호족이 흥률사에 모인 사해황제(四海皇帝)이며 4명중 한분이 류차달 할아버지(청의동자)라는 것이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했다가 892년 양길 부하가 되어 양길이 준 100명 기병으로 여러 현과 성을 정복했는데 894년 양길과 결별하고 장군을 자처하며 독자적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송악의 왕건 부자가 투항을 했고 898년 평안도와 한산주의 30여 성을 공략하는 한편 양길군을 격파한후 899년(효공왕 3) 왕건을 시켜 양주·견주를 복속케 하고 900년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체를 지배하고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후고구려라 한다.
② 이번 글은 저의 “류차달 대승공 탐구” 글과 중복되는 글이기에 공유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2.덕진포 해전과 3. 남해용신과 왕건 설화”글이 철학박사 김인창님의 글이기에 대승공에 대하여 관심이 없거나 허구라는 분을 위해 공유한다.
③ 이번 글처럼 각주를 달면 글을 쓸 때 편하고 글에 흐름이 부드러운데 글이 나온 후에 글 내용에 대하여 지인들과 이야기해보면 대부분 종원들(A, 90%정도)이 어떤 단어에 숫자가 써진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페이지 끝에 줄 처진 아래 숫자가 써지고 다른 글이 나오는 것관 연관지어 이해를 못하는 분이 있어 고민끝에 분문사이에 각주를 달았더니 나이드신 분들이 이해를 쉽게 하셨고 A를 제외한 분들(B)도 전달하려는 글 의미를 알기에 종원이 읽는 글은 본문 사이 사이에 각주를 달았지만 젊은이들은 이번글처럼 각주를 달아야 이해하기 쉽다는 것을 알기에 이번에는 보통 논문처럼 각주28)를 달았다.
※주28) 주석에서 “각주”의 단점은 한글파일에서는 유효한데 SNS에서는 볼 수 없어 본문중간에 각주를 달아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