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일본에서 제작된 애니메이션 [동경 Godfather]가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이라는 제목으로 뒤늦게 국내 게봉된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언제나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흔하게 만날 수 있는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 배경의 영화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런 영화가 그렇듯이 어떻게 시작되었든지 결말은, 갈등 관계에 있었던 가족간의 갈등이 치유되고 사랑이 회복되는, 가슴이 따뜻하고 훈훈해지는 이야기로 끝난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이 영화, 쫌 다르다.
일단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삐까번쩍 선남선녀가 아니고, 화려한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 장식과는 너무나 어울리지도 않는다. 거리에서 노숙하는 3명의 노숙자들이 주인공이다. 수염이 더부룩한 중년의 노숙자 긴은, 도박에 빠져서 가산을 탕진하고 아내와 딸 곁을 도망친 과거가 있다. 하나는 남성이지만 여성으로 성전환을 하고 싶어 한다. 어머니 얼굴도 모르고 태어난 그는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기르는 게 꿈이다. 그러나 여성으로의 성전환은 가능하지만 아이를 낳는 것은 불가능하다. 10대 소녀 미유키는, 겉모습만 봐서는 사내 아이같다. 아버지와 갈등하다가 집을 뛰쳐 나온 그는 형사인 아버지가 자신을 찾아 다닐까 봐 항상 불안하다.
추운 겨울밤, 이들에게 찾아온 첫번째 기적은, 도심의 빌딩 두시편 공터의 쓰레기 더미에서 버려진 아이를 발견하는 것이다. 당연히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만, 평소 어머니가 되는 게 꿈이었던 하나는, 길 모퉁이에 있는 그들의 천막으로 아이를 데려간다. 길에서 주운 아이는, 파편처럼 흩어진 이 영화의 등장 인물이나 다양한 소재들에게 결정적 동기을 부여하는 하나의 중심요소다. 아이를 버린 진짜 어머니를 찾아 주기 위해 3명의 노숙자들은 추운 밤거리를 헤맨다. 그리고 기적처럼, 그들 마음에 따뜻한 빛이 비추기 시작한다.
하나는 진짜 어머니가 되지는 못하지만 아이를 기르는 어머니의 따뜻한 모성을 느낄 수 있다. 긴은 자신의 가족들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상처로부터 치유될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아버지와 다투다 충동적으로 칼을 집어 아버지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망친 미유키 역시, 가족의 따뜻함에 다시 눈뜨게 된다. 크리스마스에 이루어진 이 모든 기적의 핵심은, 오래 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아기 예수가 이 땅에 찾아왔듯 빈터의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된 아이에 의해 이루어진다.
크리스마스라는 낯익은 시간적 배경, 그리고 상처 받은 가족들이 다시 화해하고, 또 사랑했지만 멀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는다는 익숙한 주제가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에서는 신선한 시각으로 다루어져 있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인 노숙자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노숙자 세 남자도, 각각 성적 소수자와 미성년자, 그리고 사회의 루저로 다양하게 구성되었고, 그들은 이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대표하는 전형성을 띄고 있으면서도 개별적으로 특수한 사정을 만들어서 공감대를 확대시킨다.
상투성을 극복한 발상의 참신함과 삶에 대한 진정성이 과장되지 않게 배어 있는 것이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오시이 마모루의 환상성이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지브리 스튜디오만이 저패니메이션의 전부는 아니다.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 실사와는 다른 상상력으로 독특한 화면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개별적인 특수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보편적 공감대를 획득하는 내러티브, 가식과 과장 없이 캐릭터에 생기를 불어 넣는 연출이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을 기억에 남는 영화로 만든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빼놓을 수 없는 눈 내리는 장면에서도, 상투성을 벗어나 참신한 영상을 만들려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거대한 세계 속의 왜소한 인간을 묘사하기 위해 도심의 빌딩으로 내리는 눈을 익스트림 롱샷으로 잡은 씬은, 거대도시가 만들어내는 고독과 소외를 강한 울림으로 전달해준다. 눈은 세상의 모든 어둠 위로 내려 과거의 상처를 잊게 만들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수평적 질서를 회복하게 해주는 위대한 상징이다. 상징이 아름다운 울림을 간직할 수 있으려면, 일상적 현실 속에 그것이 뿌리 내려야 한다.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에서 우리는, 우리의 공허한 내면 속으로 서서히 뿌리 내리는 어떤 힘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