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하계 박현 선생님 이야기마당
‘마음의 길 몸의 길’ 하숙생에서 자취생으로
2회 2부 - 마음이라는 표현의 주제
(2024.06.16 / 서해진)
마음에 어울리는 말이라면
그러면서도 우리는 마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내가 쓰고 있는 100개의 마음이라는 말 중에 정말 마음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건 몇 개였을까?'
마음은 연결도 됐다 안 됐다 하기도 해요. 마음을 잇기도 하고 마음을 끊기도 하고 그래요. 다시는 뭘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면, 그게 ‘마음을 끊다’거든요. 아직 구체적인 성과는 안 나오는데 왔다 갔다 하니까, 너 뭐 하러 왔다 갔다 해?
실질적인 성과는 아직 안 나타나지만 다음이라도 일단 먼저 이어야지! 이런 것도 ‘마음을 잇다’라고 그래요. 또 다르게 ‘마음을 잇다’라는 것이 뜻과 뜻을 통하게 하다 이런 의미도 있을 수 있겠죠. 다 다르다는 거예요.
마음이 훼손되거나 멀쩡한 경우도 있어요.마음이 찢어져요. 마음이 온전해요. 마음이 다치기도 해요. 마음이 아프기도 해요. 마음이 상하기도 해요.
마음이 상했겠어요? 자신의 욕구 조건에 흡족했으면 마음이 온전한 거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에 어울리지 않았으면 마음이 찢어지고, 약하면 마음이 아프고 심지어는 요즘에는 영어까지 살짝 쓰면서 마음에 기스도 나고 해요.
마음은 안정도도 있어요. 마음은 조마조마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편안하기도 하고 느긋하기도 해요. 그건 뭐겠어요? 자신이 갖고 있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판단을 마음에 맡겨버린 거잖아요.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무언가 지금 불안해서 어찌할 줄 모르는 상황을, 괜히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그래요. 내가 놓여 있는 상황과 내 앞에 놓여 있는 예측 가능한 일이 도대체 어찌 될지 알 수가 없고,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어서 조마조마할 때, 그렇게 표현해요.
‘마음이 조마조마하다’는 말은, 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럴 것이라 생각했는데! 저럴 것이라 여겼는데! 그런데 그 뜻대로 안 되고 예상밖의 결과가 나온 것을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크든 작든 간에요.
마음은 채우고 비우기도 해요. 마음을 채우는데 마음을 채우는 게 뭘까요? 알고 보면 욕망을 채우는 거죠. 마음을 비우는 것은 욕망을 조금 포기하는 거죠. 버리는 거죠. 그러면 그러죠. “이 산 속에 왜 왔습니까?” “마음을 좀 비우고자 해서 왔습니다.” 어떤 분이 이럽니다. 맨날 도박하는데 오늘은 1만 원짜리 도박하다 100원짜리로 하고 있어요.오늘은 100원짜리로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 비웠습니다!’누구는 도박장에서 마음 비우고, 누구는 절간에 마음 비우러 가고 그럽니다. 어쨌든 간에 사실은 욕망이죠.
마음은 출입도 해요. 들고 나기도 해요. 마음에 들다! 마음을 내다! 마음이 막 들락날락해요.마음은 합일도 있어요. ‘마음이 맞다!’ 이것은, 내 욕구와 너의 욕구, 내 의지와 너의 의지, 내 생각과 너의 생각이 일치하다! 그런 표현이죠. 그런데 ‘그 생각이 일치했다’ 그러면, 생각은 언제나 움직이는 거니까 묶어두려고 ‘마음이 맞는다’라고 해요.
어떤 경우에는 생각이 처음 맞는 걸 가지고 나중에는 그냥 따져 보기도 싫을 때, ‘저 사람하고 마음이 맞아!’ 그리고 그냥 안 따져보죠. 그랬다가 나중에 생각이 다른 걸 결과적으로 나타날 때 ‘뒤통수 맞았어!’라고 하죠.
마음이 통하다! 마음은 전도성도 높아요. 통하기도 해요. 구멍이 있어 통하는지 자사차호처럼 열전도성이 좋아서 통하는지는 몰라도 마음은 어긋나기도 해요. 마음은 방향성도 가지고 있어요. 돌아서기도 해요. 다가오기도 해요. 마음이 돌아섰다고 해요. 마음이 돌아선 건 뭐죠? 무슨 뜻으로 짐작되시죠? 이렇게 ‘마음이 뭐하다!’를 전부 이해하려면, 누구(who)인지를 봐야 돼요.
마음이 뭐뭐하다는 그 주체를 보면
마음이 뭐하다 할 때 주체가 뭐냐? 주체 치고 진짜 마음이라고 가정되거나 설정된 건 거의 없다는 거예요.
생각이든지, 외부의 시각이든지, 내부의 내 눈이든지, 내 눈이라 하더라도 이미 의식적으로 외부적인 어떤 판단력이 개입해서 추가된 것이든지, 다 이런 식이에요.
결국은 뭐냐? 내 생각, 내 판단력, 내 주관이라는 것 마저도 흔들리고 있는 거죠. 그러니 어찌 20~30대 젊은 사람들이 ‘뭐 한 것 같아요!’라는 표현을 안 쓸 수 있겠어요? 실제로 그렇게 느끼고 있을 수 있어요.
오늘 제가 기분이 좋은 것 같아요! 아픈 것 같아요! 아프다는 통(痛)이라는 게 남이 확인해줘야 아는 건 아니잖아요. 통의 원인은 남이 확인해 줄 수 있지만, 아픈 통증을 느끼는 것은 자기가 느끼잖아요. 근데 아픈 것 같아요! 그러거든요.
그때 의사가 옆에서 “너 아픈 거 맞아?””네 아픕니다!” 이렇게 뭔가 외부적인 인정이 필요해요. 모든 것을 외부적인 인정에 자신을 맡기고 가는 우리 다음 세대들이에요. 우리가 만들었어요. 마음이라는 말을 함부로 써가지고!
영향력도 행사해요. 마음을 썩이기도 하고, 마음은 쓰기도 하고,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마음 같지 않기도 하고, 마음을 떠보기도 하고, 마음을 훔치기도 하고, 심지어 그걸 사랑하는 용어 같은 데도 막 써먹고 그래요. ‘쟤가 내 마음을 훔쳤어!’ 자기가 스스로 빠진 거죠. 자기가 감각적으로 저 여자한테 홀랑 빠졌지, 저 여자가 뭘 자기 마음을 훔치긴 훔쳐요? 그 여자는 자기 이름도 모르는데 이렇게 마음을 막 써요.
언제 자기가 찾고 있었다고 ‘마음을 놓다’고 해요. 평상시에 열심히 잡고 계셨나 봐요? 밧줄인가요? 마음을 심지어 ‘사로잡다’고도 해요.
욕망 의지와 관련된 표현들도 많죠. 마음을 먹어요. 마음먹는데 국어학자들이 마음먹다 그럴 때 ‘먹다’를 뭐라고 그러는 줄 아세요?우리 ‘음식을 먹다’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에 어른들에게도 잡수신다고 하지 마라고 해요.
그러면 제가 여쭤볼 게요. ‘먹다’에 그 먹다 말고, ‘마음 먹다’의 ‘먹다’ 용법에 그 뜻이 머죠? 마음먹은 거예요. 음식 먹듯이 먹은 그 용법이에요. 그게 약간은 찜찜하니까 학자들이 표준말로는 어른이든 애든 다 마음은 먹는 거지 ‘마음 잡수신’이라는 거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요? 그렇게 하면 아닌 것 같은데요. 다 마음 드시고, 마음 잘 잡수시고 이죠. ‘먹다’의 용법에 그 먹다 맞아요. 다른 마음먹다의 다른 용례가 뭐 있는지 한번 보세요.
이러이러한 생각을 내 속에 가두고 담아두고 이런 뜻이거든요. 먹는 거나 담아두는 거나 같거든요. 그런데 마음을 먹다가 좀 이상한 것 같으니까 존칭으로 바꾸지 말라고 하는데, 굳이 한다면 ‘마음먹으시고’ ‘마음 잡수시고’라고 하죠. 마음은 식용인 거예요.
옛날에 인연 따라 사는 생활을 수연(隨緣) 생활이라고 그랬죠. 또는 수의(隨意)라고 그래요. ‘뜻을 따른다’ 즉 ‘수의’라고 그랬죠. 뜻을 따른다는 게 요즘은 ‘마음 가는 대로!’라고 그래요. 뜻하는 대로가 아니고, 내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니고, 내가 해야 된다고 권장되거나 인정하는 대로가 아니고, 그냥 ‘마음 가는 대로!’라고 하죠.
마음을 심지어 드러내기도 해요. 옛날 어느 사람이 마음 생각이 막 꼬이고 어찌 살아야 될지 모르고 답답해서 “큰 스님 제 마음이 너무 힘듭니다. 제 마음을 어떻게 하면 편하게 할 수 있을 지요?” 그러자 “그러면 그 마음을 꺼내 놔 봐라. 그러면 내가 편안하게 해주마.” 이렇게 이야기하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충격을 받아요. 그런데 요즘은 충격도 안 받아요. 마음을 드러내는데요. 마음이 이미 예전에 쓰던 그 마음이 아니잖아요.
마음은 쌀도 아닌데 담아두기도 해요. 마음이 항아리가 됐어요.마음은 심지어 유무(有無),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해요. 마음이 있어? 뭐 할 생각 있어? 마음이 있어! 뭐 할 생각 없어? 마음이 없어! 할 마음이 없어! 이렇게 써요.
104가지 마음으로 하는 표현들
제가 여기 뽑아온 것은 제가 뽑을 수 있는 일부예요. 안 세어봤는데, 숫자 한번 헤아려볼 게요. 104개네요.
이렇게 우리가 써왔어요. 만일 이렇게 쓰는 자리를 없애지 않잖아요. 몸을 전부 마음으로 만들어버렸잖아요.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걸 다 마음으로 만들었잖아요.그러니까 그만큼 몸에 대해서 모호해졌다는 거죠.
저 사람은 생각을 아주 빠르게 해! 저 사람은 한 번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을 오래 유지해! 저 사람은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해! 나는 이런 경우에 이렇게 해! 이럴 땐 내 몸이 이렇게 반응을 해! 이럴 땐 내 몸의 어느 부분이 어떻게 반응해!
이 모든 것을 마음으로 쓸어 담아버렸잖아요. 우리 몸에 대한 이해를 그만큼 없앴죠. 마음이라는 용례를 없애는 만큼 몸에 대한 이해가 많아져요.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은 태어나면서 생존법부터 배우죠. 그런데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생존 되어지고 있는 상황에 가까워요. 동물은 살아가고 있어요.
동물 중에서 인간에게 포획, 순화된 동물만 사육을 당해요. 돼지는 치죠. 근데 어느 순간부터 사람도 치는 경우가 있긴 있었죠.하숙은 쳤죠. 하숙 친다는 게 맞기도 해요. 그냥 때 되면 해주는 밥 먹고, 빨래도 가끔 해주기도 하고, 학교 갔다 오면 또 밥 주고, 밥 먹고 나면 자리에 들어가서 자고! 뭐 돼지 랑 별반 다를 바는 없어요.
현재 인간은 이 사회라는 거대한 외부적 환경과 조건에 의해서 사실 하숙당하고 있죠. 자기가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죠.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 없죠. 내가 이것을 어떻게 구해서 어디서 먹어야 되는지 그걸 먹는 몸은 무엇인지 모르죠. 그냥 먹으면 사육되는 거죠.
현대인들은 기본적으로 외부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 자신은 열심히 살고 진지하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상당한 부분에서 사육 당하고 있고 치임을 당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걸 벗으려면 자기 몸이라도 알아야 되죠.
그래서 마음으로 몰아버렸던 자신의 몸을 다시 마음에서 떼어내 몸과 관련된 용어로 써 나가야 돼요. 그것의 주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작용이 왜 그렇게 일어나는지 알아야 돼요. 그래야 사육 당하는 게 아니라 사는 거예요.
사육 당하면서 사육 당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것이 현대인이에요. 왜? 진짜 사육당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사육은 당하고 있는 만큼 자존심이 있어서 마음이라는 말로 전부 퉁 치는 인간이 어떻게 자신이 사육된다는 상황을 긍정할 수 있고 수긍할 수 있겠어요?
비행기 타고 와도 사육 당하죠. 얼마나 사육을 많이 당했는지 앞에서 밥 냄새만 나면 쓱 펴죠. 그래서 외국 승무원들이 한국인이 많이 탄 비행기는 그런 면에서 제일 쉽다고 하잖아요. 시끄럽고 너무 빨리 가긴 하는데, 알아서 밥상도 펴주고 심지어 1등석 비즈니스 타도 밥상 다 펴준 대요. 밥상 펴주고 그리고 다 먹고 나면 알아서 딱 가져갈 것 준비해놓고 한대요.
아무튼 우리는 지금 사육 당한다는 사실! 내 사회와 내 시대가 나를 사육하고 있는 상황에 가까워왔다! 어쩌면 사회라는 주인집에 의해서 하숙을 지금 살고 있는 상황이죠. 그러고 보니 인생은 하숙생이었네요. 하숙생을 벗어나자는 얘기를 드리는 거예요. 해보자! 그래도 내가 내로 살다가 가자! 마음! 알려고 하지 말자. 몸 둘 바와 생각할 바를 먼저 알아보자.
그 얘기를 가장 일찍 외친 분 가운데 유명한 분이 공자예요.공자가 한 얘기는 그 얘기예요.
“하숙생으로 살지마! 노예여도 너는 하숙생이고, 왕족이어도 하숙생이고, 너는 귀족이어도 하숙생으로 살았어! 마음 같은 것은 나 얘기 안 할래! 몰라서 안 하는 것 아니니까 묻지 마. 다만 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될 몸가짐, 몸 쓰임, 생각 쓰임, 생각을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능과 과정들! 그것에 대해서 얘기할 거야. 나머지 2층 이야기는 네가 2층에 가서 알아서 해!” 이게 공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면에서 제가 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그 분하고 좀 비슷한 경향성을 띠죠. 제가 그분하고 비교하겠습니까 마는, 그분처럼 여기저기 나라에 불려 다니면서 재상을 해본 적도 없고, 그분처럼 상갓집 개처럼 돌아다녀본 적도 없고, 자기를 알아가는 그 고난한 세월의 무게야 옛날 분들과 비교하겠습니까 마는…
아무튼 공자 이전에도 춘추시대 때 사람들이 마음이라는 말을 참 많이 썼어요. 공자가 <예기>와 <주역>과 <춘추> 등을 쓰면서 마음이라는 심(心) 자의 의미를 다 바꿨고, 그리고 최소화시켰죠. 옛날 사람들이 효심(孝心)이라고 그랬는데, 그게 효(孝)는 행위이고, 판단이고요. 하지만 효심은 마음이잖아요. 공자는 이것을 싹 바꿔버렸죠.
그런데 이걸 다시 끄집어내는 시대가 와요. 당나라 송나라 때, 현학과 사변에 빠진 학자들이 성질이라도 할 때 성(性)이 뭔 지, 이치할 때 이(理)가 뭔 지, 정기신(精氣神)할 때 신이 뭐고, 기가 뭔 지! 이런 얘기를 철학적으로 꺼내면서 또 학문을 만들어요. 성리학이라는 걸 만들어요. 성리학이라 불리는 건 나중이겠지만요.
우리는 위대한 학자로 알고 있습니다. 퇴계 이황 이런 분들을요. 퇴계 이황이 그린 그림이 ‘심성합일도’예요. 심(心)과 성(性)의 합일도예요. 이건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얘기죠. 마음 한자락이라는 것 붙잡고 공자로부터 도망 나온 얘기예요.
자신의 학문적 타락을 극도로 이끌어 놓고 나서, 그 극도의 타락을 완벽하게 정당화시킬 학문적 논리적 근거를 세운 사람이에요. 학문적 근거를 세웠다는 것으로 보면 위대한 학자이죠. 그러나 과연 그런 학문을 할 필요가 있었느냐? 그 학문이 우리를 하숙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더 양산시키는 데 기여했지 않았느냐? 하숙생들을 자취생으로 바꾸지 않았지 않았느냐? 하는 거예요.
자취하다 보면 뭘 해먹어야 될지도 고민되고요. 내가 뭘 소화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고요. 뭘 소화 못하는지도 알게 되고요. 뭐가 비싼 지도 알게 되고 뭐가 싼 지도 알게 되죠. 뭘 어떻게 요리하는지도 알게 되고요. 또 그거 사러 갈 때 내가 힘든 것도 알게 되고요. 힘들 때 다리에 근육 뭉치는 것도 알게 되고요. 하나씩 하나씩 알게 돼요. 물론 자취를 너무 과장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마음이라는 관용어를 한 달만 안 써보기
굳이 비교하자면 오늘 주제는 이것입니다. 하숙생에서 자취생으로! 마음이라는 용어 관용구를 많이 내려놓고, 한 달만 마음이라는 관용어를 안 써보잖아요. 말이 콱콱 막히고 내가 이런 표현을 그냥 이렇게 대충 쓰고 있었구나 하실 겁니다.
하숙집에서 하는 말은, 밥 먹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 밖에 없어요. 돼지와 동급이 되지 말자. 하숙생은 돼지와 동급이다! 그런 말씀을 좀 극단적으로 오늘 드렸습니다.
마음이라는 말을 몸으로 되돌아보기
다음 시간에는 몸이라는 것과 관련해서 몸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좀 보겠습니다. 몸이라는 말이 지금은 ‘몸 상태’라는 말로 거의 다 바뀌었어요. ‘몸이 안 좋았어!’는 ‘몸 상태가 안 좋았어!’ 정도가 되었죠. 아플 때나 아니면 특별히 좋을 때 쓰지 마음이라는 말보다 적게 써요. 몸으로 살면서도 말이죠.
우리가 얼마나 착륙 후 상태로 살지 않고 비행기 위에 있는가! 현재 우리 삶에서 마음이라는 말을 어떻게 더 많이 쓸 수가 있어요? 마음이 말로 그렇게 써먹고 있는 것이 사실은 다 몸이었는데요. 몸을 이해하기 싫다는 뜻도 될 수 있고 몸에 대한 이해를 포기한 것도 될 수 있어요.
의사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의사하고 5분만 얘기하면 의사들이 그냥 저 죽여버리려고 그럽니다. 그럴 때 더 좋은 거 뭐 그렇죠. 뭐 이런 말도 하지 말자고요. 그거 다 몸이 시키거나 몸에서 나오는 말이니까 이제 몸이 어떤 작용을 거쳐서 도대체 이런 걸 했는지! 그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오늘 쓴 이 단어들과 용어들이 또 나옵니다. 그렇게 다시 나옵니다. 완전히 몸과 관련 지어서 ‘마음이 무겁다’라는 상태가 몸과 관련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나오게 됩니다. 그냥 심리적이지 않아요. 굉장히 물질적이고 육체적이에요. 그리고 처신(處身)에 해당되요.
동양에서 정기신(精氣神)이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여기서 기(氣)는 상형시대부터 이 글자예요. 이 신(神)은 상형 시대부터 없었고, 이 신(申)에 추가됐을 뿐 원래 이 신(神)예요.여기 정기신(精氣神)에 해당되는 표현은 인간의 육체적 상황을 이야기해요.
이 정기신(精氣神)이 어디에 다 담겨 있느냐? 이것 다 담겨 있는 것을 심(心)이라고 하죠. 원래 심(心)은 심장이라는 뜻인데요. 또는 성(性)이라고 불렀던 거예요.근데 이 심(心)과 성(性) 안에 이 정기신(精氣神)이 다 작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 정기신이 결합돼 가지고 하나의 구조를 가져요.구조를 가지는 것을 우리는 뭐라고 그러죠? 우체국 우편이 머물러 있는 곳이죠. 체(遞)하다 그럴 때 같은 거죠. 그 다음에 뭔가 구조를 만들 때 '체결(締結)하다' 그러죠.이 정(精)은 물질이니까 이 물질이 응결돼 있는 상태, 이것을 옛날 발음으로 체(體)라고 했던 거죠. 당나라 때 발음으로 표준화합니다.
이 기(氣)는 당나라때 발음으로 기죠. 지금 중국어는 ‘치(qi)’지만요. 이 신(神)은 지금 선(shen)이지만, 당나라 때 발음으로는 ‘신’입니다.이 발음과 관련해서 이 응결돼 있을 때 이것들은 각각 어떤 작용을 할까? 이 정기신(精氣神)이 응결되어 있는 것, 그것을 몸(體)이라고 본 거예요.
몸이라는 체(體)의 의미는, 무엇인가가 응결해서 하나의 구조를 가지고 있고 잠시 머물러 있고, 덩어리 지어져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거예요. 영어의 바디(body)죠. 우리 말의 ‘몸’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응결해서 멈추어서 구조화되어 있는 게 바디라는 거예요.이 바디는 움직일 거잖아요. 바디 가운데 내 몸 안에 있는 신(神)이 움직이는 것, 신(神)이 움직이는 상태를 신(身)이라 그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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