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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애민(愛民) 제2조 자유(慈幼)
2. 백성들이 곤궁하게 되면 자식을 낳아도 거두지 못하니, 이들을 타이르고 길러서 내 자식처럼 보호해야 한다.
후한(後漢)의 종경(宗慶)(주1)이 장사 태수(長沙太守)가 되어, 백성들에게 자식 죽이는 일을 금하니, 백성이 자식을 기르는 자가 3천여 명이었는데, 모두 종(宗)을 이름으로 삼았다.
정혼(鄭渾)(주2)이 백성들에게 자식 죽이는 일을 금하고, 전곡을 주어 기르는데 방편이 있으니, 남녀간에 모두 정(鄭) 자를 따서 자(字)로 삼았다. - 《삼국지(三國志)》 -
임방(任昉)(주3)이 의흥 태수(義興太守)가 되었는데, 흉년이 들자 자식을 낳은 자가 기르지 않으므로 제도를 엄중히 하여 살인죄와 같이 다스렸다. 아이를 잉태하면 비용을 제공해 주어서 구제된 자가 1천 호나 되었다.
가표(賈彪)(주4)가 신식장(新息長)이 되었는데, 백성들이 가난하여 자식을 기르지 않는 자가 많으므로, 그는 그 제도를 엄중히 하여 살인죄와 같이 다스렸다. 성의 남쪽에는 강도가 살인한 자가 있었고, 북쪽에는 부인이 자식을 죽인 자가 있었는데, 그가 나가서 조사하여 다스리려 하자, 아전들이 남으로 인도하려 하였다. 그는 노하여 말하기를,
“도적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통상 있는 일이지만, 어미와 자식이 서로 죽이는 것은 하늘을 거역하고 도를 어기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수레를 달려 북으로 가서 그 자식 죽인 어미를 치죄하였다. 도적도 제 손을 뒤로 묶고 자수하였다. 수년간에 자식을 기르는 자가 천 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은 말하기를,
“이는 가부(賈父)가 낳아 준 것이다.”
하고 모두 이름을 가(賈)라 하였다.
송(宋)나라 유위 중관(俞偉仲寬)(주5)이 검주(劍州)의 순창지현(順昌知縣)이 되었다. 앞서 백성들이 자식을 낳아서 3~4명이 넘으면 모두 기르지 않았는데, 그것은 재산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혹 아이를 낳을 때 그릇에 물을 담아 두었다가 낳자마자 물에 넣어 죽이니, 이를 일러 ‘세아(洗兒)’라 하였다. 중관(仲寬)이 자식 죽이는 일을 경계하는 글〔戒殺子文〕을 지어서 깨우쳐 주었더니, 온전히 살아나게 된 자가 1천 명이나 되었고, 자식을 낳으면 흔히 유(兪)를 아명〔小字〕으로 삼았다. 중관이 그만두고 떠났다가 뒤에 그 고을을 지나는데 어린이 수백 명이 교외(郊外)로 나와서 영접하였다.
소식(蘇軾)(주6)이 주악주(朱鄂州)(주7)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악주(岳州)ㆍ악주(鄂州) 지방의 들녘 백성들은 으레 2남 1녀를 기르는데, 이 수가 넘으면 곧 죽입니다. 처음 낳을 때에 곧 냉수 속에 넣어 죽이는데, 그 부모도 차마하지 못하여, 항상 눈을 감고 등을 돌리고서 손으로 물동이 속에 넣으면, ‘응애 응애 ’ 한참 동안 울다가 죽습니다.
악주(鄂州) 지방 사람으로 진광형(秦光亨)이란 자가 있는데, 이제는 이미 급제까지 한 처지입니다. 그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그의 외삼촌 진준(陳遵)(주8)의 꿈에 한 어린애가 그에게 옷을 당기면서 무엇인가 호소하는 듯하였고, 그것이 이틀 밤이나 보였는데 그의 정상이 매우 급박한 것 같았습니다. 혼자 생각해 보니 그의 누이가 임신하였는데 출산할 시기였습니다. 달려가 살펴보니 어린애는 이미 물동이 속에 들어 있었는데 구출하여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법률에 비추어 보면, 고의로 자손을 죽인 죄는 도(徒)(주9) 2년에 해당하니, 이것은 장리(長吏)(주10)가 조사하여 집행하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공(公)은 법률로써 알리고 화복(禍福)으로써 깨우쳐 주며, 법대로 시행하면 이런 풍습은 저절로 고쳐질 것입니다.”
우윤문(虞允文)(주11)이 태평 지주(太平知州)가 되었는데, 주(州)의 백성들이 매년 바치는 신정전(身丁錢)ㆍ신정견(身丁絹)(주12)을 가난하여 납부하지 못하는 자는 자식을 낳으면 모두 버리고, 좀 자라면 바로 죽여 버리기도 하였다. 우윤문이 이를 가엾게 여겼는데, 강가에 갈대밭이 있어 그 이익이 막대한데도 세력가나 중들이 모두 사유(私有)하고 있음을 탐문해 알았다. 그는 그 수량을 장부에 기록하게 하여 정전(丁錢)ㆍ정견(丁絹)으로 대납하게 하니, 돈 꾸러미로 계산한 것이 13만 7천 전 남짓이요 비단으로 계산한 것이 16만 3천 필 남짓이었다. 신정전(身丁錢)ㆍ신정견(身丁絹) 면제의 영이 내리던 날, 온 주의 백성들이 기뻐 날뛰었으니 비로소 부자(父子)가 모여 사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장순(張淳)(주13)이 영강지현(永康知縣)이 되었는데, 영강 백성은 가난하여 딸을 낳으면 대부분 키우지 않았다. 장순이 권하고 경계하기를 갖추 극진히 하고, 가난하여 기를 힘이 없는 자에게는 자기의 봉록을 덜어 내어 헤아려 주니 온전히 살아난 자가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주14)》에는 이런 말이 있다.
“숙종(肅宗) 7년(1687)에 명천(明川) 사람으로 구걸하는 자가 자식을 낳아 죽이려고 하였다. 감사 윤계(尹堦)(주15)가 조정에 아뢰자, 해조(該曹)가 복주(覆奏)하여 율문(律文)에는 장(杖) 60, 도(徒) 1년에 해당된다 했더니, 임금이 사죄(死罪)로 결단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주16)이, ‘북도 지방에는 부역이 과중하여 부자가 서로 보존하지 못하니, 불쌍하게 여길 일이요 미워할 일이 아닙니다. 또 이미 자식을 죽인 것과는 같지 않으니, 차율(次律)을 쓰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역주]
[주-D001] 종경(宗慶) : 미상이다.
[주-D002] 정혼(鄭渾) : 삼국(三國) 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자는 문공(文公)이다. 무제(武帝) 때에 하채장(下蔡長)ㆍ소릉령(邵陵令)을 지내면서 거자(去子)의 법을 엄중히 다스렸고, 문제(文帝) 때에는 패군 태수(沛郡太守)ㆍ위군 태수(魏郡太守) 등을 지내면서 많은 선정(善政)을 베풀고 장작대장(將作大匠)에 이르렀다. 《三國志 卷16》
[주-D003] 임방(任昉) : 양(梁)나라 박창(博昌) 사람으로 자는 언승(彦昇)이다. 맨 처음 제(齊)에 벼슬하여 태학박사(太學博士)로 있었는데, 왕검(王儉)ㆍ심약(沈約) 등에게 매우 칭예(稱譽)되었고, 뒤에는 양나라에 벼슬하여 의흥(義興)ㆍ신안(新安)의 태수를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저서에 《문장연기(文章緣起)》ㆍ《술이기(述異記)》 등이 있다. 《梁書 卷14 任昉列傳》 《南史 卷59》 《昨非菴日纂 3集 氷操》 참조.
[주-D004] 가표(賈彪) : 후한(後漢) 정릉(定陵) 사람으로 자는 위절(偉節)이다. 그의 형제 세 사람이 모두 고명(高名)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들을 가씨(賈氏)의 삼호(三虎)라 하였다. 가표는 환제(桓帝) 때에 신식장(新息長)을 지내면서 많은 치적을 올렸다. 《後漢書 卷97 賈彪列傳》
[주-D005] 유위 중관(兪偉仲寬) : 유위는 송(宋)나라 사명(四明) 사람으로 자가 중관이다. 그는 원우(元祐 철종(哲宗)의 연호, 1086~1093) 초기에 순창지현(順昌知縣)으로 있으면서, 자식을 낳아 죽이는 백성들의 악습을 바로잡는 데에 공이 많았다. 《宋元學案 6》
[주-D006] 소식(蘇軾) : 송(宋)나라 때의 문장가.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東坡)이다. 벼슬은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거쳐 병부 상서(兵部尙書)에 이르렀고, 저서에는 《소동파집(蘇東坡集)》 등이 있다.
[주-D007] 주악주(朱鄂州) : 악주지주(鄂州知州)나 악주지현(鄂州知縣)을 지낸 주씨(朱氏)라는 뜻이나, 누구인지는 자세하지 않다.
[주-D008] 진준(陳遵) : 전한(前漢) 때 두릉(杜陵) 사람으로 자는 맹공(孟公)이고, 애제(哀帝) 말엽에 가위후(嘉威侯)에 봉해졌다. 벼슬은 왕망(王莽) 때에 하남 태수(河南太守)ㆍ하내도위(河內都尉) 등을 거쳐 유현(劉玄)의 경시(更始 회양왕(淮陽王)의 연호, 23~24) 연간에 대사마호군(大司馬護軍)을 지냈다. 《漢書 卷92 陳遵傳》
[주-D009] 도(徒) : 도형(徒刑)의 준말로 오형(五刑)의 하나이다. 복역(服役) 기한을 1년으로부터 3년까지로 하고, 이를 다시 5등급으로 나누어 곤장 10대 및 부역 반 년을 한 등급으로 하였다.
[주-D010] 장리(長吏) : 현(縣)의 벼슬아치의 우두머리. 곧 현리(縣吏)의 장관을 가리킨다.
[주-D011] 우윤문(虞允文) : 송(宋)나라 때 인수(仁壽) 사람으로 자는 빈보(彬甫),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고종(高宗) 때에 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지내고 효종(孝宗) 때에 태평 지주(太平知州)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좌승상(左丞相)에 이르고 옹국공(雍國公)에 봉해졌다. 저서에는 《당서(唐書)》ㆍ《오대사(五代史)》의 주(注)와 《춘추강의(春秋講義)》ㆍ《주의시문(奏議詩文)》 등의 문집이 있다. 《宋史 卷382 虞允文列傳》
[주-D012] 신정전(身丁錢)ㆍ신정견(身丁絹) : 20세부터 59세까지의 남자에게 부과하던 세금이다. 곧 정세(丁稅)와 같은 말인데, 돈으로 바치는 것을 신정전, 비단으로 바치는 것을 신정견이라 하였다. 이 제도는 오대(五代) 때부터 시작되어 송(宋) 일대(一代)를 계속하였다.
[주-D013] 장순(張淳) : 명(明)나라 동성(桐城) 사람으로 자는 희고(希古)이다. 융경(隆慶 목종(穆宗)의 연호, 1567~1572) 2년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영강지현(永康知縣)에 제수되어 다방면으로 크게 선정을 베풀었으며, 뒤에 여러 관직을 거쳐 섬서 포정사(陝西布政使)에 이르렀다. 《明史 卷281 循吏列傳 張淳》
[주-D014] 국조보감(國朝寶鑑) : 조선왕조 역대의 사적을 적은 편년체(編年體)의 역사책. 모두 90권이다.
[주-D015] 윤계(尹堦) : 1622~1692. 숙종 때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태승(泰昇), 호는 하곡(霞谷),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현종(顯宗) 3년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내고, 숙종 때에 함경도 관찰사ㆍ형조 판서(刑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저서에는 《동사(東史)》ㆍ《제의(祭儀)》 등이 있다.
[주-D016] 김수항(金壽恒) : 1629~1689. 조선 시대 문신으로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23세 때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장원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44세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고, 숙종 초기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民旣困窮。生子不擧。誘之育之。保我男女。
後漢宗慶。爲長沙太守。禁民殺子。民養子者。三千餘人。皆以宗爲名。
〇鄭渾禁民殺子。贍養有法。男女皆以鄭爲字。三國志。
任昉爲義興太守。歲荒。産子者不擧。昉嚴其制。罪同殺人。孕者供其貨費。濟者千室。
賈彪爲新息長。小民困貧。多不養子。彪嚴爲其制。與殺人同罪。城南有盜劫害人者。北有婦人殺子者。彪出按驗。掾吏欲引南。彪怒曰。寇賦害人。此則常理。母子相殘。逆天違道。遂驅車北行。按治其罪。賊亦面縛自首。數年間。人養子者千數曰。此賈父所生也。皆名之爲賈。
宋兪偉仲寬。宰劍之順昌。先是。民人生子。多至三四者。率皆不擧。爲其貲産不足也。往往臨蓐。以器貯水。纔産卽溺之。謂之洗兒。仲寬作戒殺子文以諭之。全活者以千計。生子多以兪爲小字。仲寬罷去。後過邑。有小兒數百。迎於郊。
蘇軾與朱鄂州書云。岳鄂間田野小。人例養二男一女。過此輒殺之。初生。輒以冷水浸殺。其父母亦不忍。率常閉目背面。以手按之。水盆中咿嚶。良久乃死。鄂人有秦光亨者。今已及第。方其在母也。其舅陳遵。夢一小兒授其衣。若有所訴。比兩夕。輒見之。其狀甚急。獨念其姊有娠。將産。馳往省之。則已在水盆中矣。救之得免。準律故殺子孫。徒二年。此長吏所得按擧。願公告以法律。諭以禍福。依律行遣。此風便革。
虞允文知太平州。州民歲輸身丁錢絹。貧不能納者。生子皆棄之。稍長卽殺之。允文惻然。訪知江渚有荻場。其利甚博。而爲勢家及浮屠所私。公令籍其數。以代輸丁錢絹。以緡計者。一十三萬七千有奇。以疋計者。一十六萬三千有奇。免符下日。一州之民。歡呼鼓舞。始知有父毋生聚之樂。
張淳知永康縣。永人貧者生女。多不擧。淳勸戒備至。貧無力者。捐俸量給。全活無數。
國朝寶鑑。肅宗七年。明川民丐乞者産子欲殺。監司尹堦以聞。該曹覆奏言。律文杖六十徒一年。上斷以一罪。領議政金壽恒曰。北路賦役重。父子不相保。可哀而不可惡。且與已殺者不同。請用欠律。上允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