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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종류도 몇 개 없는데..." 코스트코의 성공 비결
신뢰는 돈… 믿음을 주면 지갑을 연다
유커, 한국 면세점서 명품사는 이유는 싸서? 적어도 가짜 구입할 걱정 없어서
창업후 '마진 15%룰' 지키는 코스트코,
이익 커지면 값 낮춰 '최저가' 신뢰 쌓아
美기업중 최단기간 매출 30억달러 달성
#1. 한국 면세점에서 수천만원짜리 시계를
3~4개씩 사가는 중국인 관광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한국이 중국보다 값이 싸냐고 물어보면 아니란다.
그렇다면 왜?
"적어도 한국 면세점에선
가짜를 파는 일은 없지 않으냐"는 답이 돌아왔다.
#2. 실리콘밸리의 한국인
사업가 하형석 미미박스 대표에게 물었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투자자가 그 자리에서 수표를 쓴다는 거였다.
왜냐고 물어보니, 실리콘밸리에서는 한 번도
기업가가 투자자를 속인 적이 없다고 답하더라.
만약에 누가 그들을 속였다면,
어차피 그 사람은 다시는 그 땅에서 뭔가를 할 수 없다."
#3. 경쟁사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상품 종류를 갖춘
할인점이 있다.
그래도 고객들은 매년 30~50달러의 연회비를 내고 물건을 사간다.
그리고 고객의 90%는 매년 다시 연회비를 낸다.
미국 기업 역사상 가장 짧은 시기인 6년 만에
매출 30억달러를 달성한 코스트코 얘기다.
비결은 뭘까?
"뭐든지 여기서 사면 다른 곳에서 사는 것보다 싸다"는 게 회원들의 얘기다.
위의 세 가지 얘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신뢰'다.
중국인 관광객(유커)들은 한국 면세점을 믿기에 지갑을 연다.
실리콘밸리에서 '자발적 창조경제'가 가능한 이유는
'신뢰'라는 사회적 자본 덕분이다.
신뢰 자본은 거래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인다.
경제 주체들이 쓸데없는 의심과 불안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고
본질에 집중하게 되니 생산성이 높아진다.
코스트코 역시 신뢰를 파는 곳이다.
"좋은 품질의 제품을 최저가에 살 수 있다"는
믿음이 회원들을 북적이는 매장으로 이끈다.
'신뢰가 돈이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신뢰를 쌓을 것인가?
전통적인 방법 두 가지와 새로운 방법 한 가지가 있다.
전통적 방법은 일관성이다.
한마디로 예측 가능해야 한다.
술 한잔 후 아들의 형편없는 성적표를 보며
"아빠도 옛날에 그랬어!"라며 호방하게 웃던 대인배 아빠.
그 아빠가 맨정신에 아들의 형편없는 성적표를 보며 화를 낸다면?
아들은 아빠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
이 사람은, 이 회사는 이럴 때 한결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타인의 예상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기업으로 치면 핵심 가치(core values),
즉 '우리 회사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 할 원칙'이 살아 작동하는 회사가 신뢰를 얻는다.
두 번째 전통적 방법은 단기 이익보다는
장기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코스트코는 창업 때부터 '마진 15%룰'을 지킨다.
마진이 더 이상 생길 때는 오히려 판매 가격을 낮춰 버린다.
"15% 이상 이익을 남기면 기업의 규율이 사라지고 탐욕을 추구하게 된다.
당장은 좋을지 몰라도 길게 봤을 때 고객들이 떠나고
기업은 낙오한다"는 게 짐 시네갈 창업자의 철학이다.
신뢰를 얻는 새로운 방법은 '권력을 독점하지 않는 것'이다.
미국 노스이스턴 대학의 데스테노 교수는
"사람은 사회, 경제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고 말한다.
이유는 놀랄 만큼 단순하다.
누구든 권력을 독점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이 덜 필요해진다.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남들 앞에서 거칠 게 없어지고
굳이 남의 신뢰를 얻기 위한 수고로움을 덜하게 된다.
이는 마치 독점기업의 폐해와 같다.
견제 없는 권력이 부패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면 절대 권력이 없는 사람에겐 신뢰가 중요하다.
신뢰받아야만 다른 사람의 도움과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편하더라도 노력하게 된다.
신뢰받는 리더의 상당수가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힘을 절대화하지 않는 시스템을 만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떤 기업의 리더가 회사 돈 10억원을
한강물에 던져 버렸다고 가정하자.
그는 분명 횡령이나 배임으로
법적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신뢰라는 자본을 가벼이 여기지 말자.
신뢰를 깨뜨리는 리더는 회사 돈을
한강물에 던져 버리는 리더와 다를 바 없다.
신뢰는 곧 돈이기 때문이다.
한 번에 6개월이나 날아간다는 붕새를 등장시켰다.
참으로 엄청난 스케일이 아닌가. 지금의 점보 비행기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마 언젠가는 이루어질 우주관광시대가 도래해 은하계를 훌쩍 뛰어넘어
하늘의 신들을 올림포스산에 살게 한 고대인들,
신선이 되고 선녀가 되어 하늘을 날아다니던 고대인들의 웅장하면서도
꿈같은 상상력에 힘입어 오늘의 문명이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후예인
요즘 인간들은 오히려 그런 상상력을 발전시켜 나가기보다는
점점 옹색해지고 초라해져서 나날이 사는 걱정에 시달리고 있다.
이 때문에
나는 초심자들에게 시를 가르칠 때, 역발상을 권한다.
예컨대 삼천갑자를 살았다는 동방삭의 경우를 보자.
동방삭이 여행 중
어느 동네의 언덕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러자 그곳 사람들은 그 언덕에서 굴러 떨어지면
3년밖에 살지 못한다고 일러 주었다.
동방삭은 그 말을 듣자마자 언덕 위로
달려가
일부러 굴러 내려오기를 수없이 거듭했다고 한다.
그만큼 수명이 늘어난
것이다.
그 다음 나는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를 예로 든다.
그는 1분을 3분으로 늘여서 생각 했다고 한다.
30년의
삶을 90년으로 늘여서 생각하니
그만큼 넉넉하고 느긋하게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로 여름이면 겨울을 주제로
쓰고, 산에 다녀온 이야기를
강에다 풀어 쓰는 식의 역발상을 권한다.
곧이곧대로만 쓰면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을
볼 뿐 특별한 것을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무한대의 자유를 준다.
'금강산에 가 본 사람보다 안 가 본 사람이
금강산에 대해 더 잘 안다.'는 말이 있다.
가 본 사람은 실제 풍경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세상을 넓게 보는 방법 역시 별게 아니다.
자신이 아는 사람의 이름을 백지에 적어 보라.
그리고 그들의 특징을 적어 보라.
알고 있는 이름도 많지 않지만, 그 특징조차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 사실을 깨우 쳤다면 그대가 이제부터 할
일이
무엇인지는 너무나 자명하지 않겠는가.
"작은 차이에 민감하라"
왜 사람들이 저 집 짚신만 찾느냐 말이야.
더구나 저 집 주인과 나는 어려서부터
한 마을에 살아 짚신 꼬는 방법도 똑같지 않은가.'
장사가 안 되는 가게 주인은 수시로 사람을 시켜
건너편 가게 짚신을 사와 자기가 만든 것과 비교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똑같은 재질에 모양까지 같으니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어느 날, 그는 술을 한잔 걸치고 맞은편 가게 주인을
찾아갔다.
"이보게, 내 하나만 묻지.
도대체 자네가 만든 신발과 내가 만든 신발의 차이가 뭔가?
나는 암만 봐도 내 짚신의 하자가 뭔지 모르겠어."
그러자 가게 주인은 허허 웃으며 짚신 하나를
건넸다.
"한번 신어 보지 그러나.
하지만 그 전에 버선을 벗어야 하네."
술 취한 사내는 으아해 하며 짚신 안으로 맨발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맨살이 짚신
바닥에 닿았을 때, 그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짚신 안이 매우 부드러웠기 때문이다.
"나는 짚신 안쪽에 돋아 있는 보푸라기
하나하나를 모두 손본다네.
발뒤축이 닿는 안쪽 면은 몇 배나 공을 들이지.
까칠한 부분이 없으니 손님들 발이 편하지 않겠나.
그게 내 짚신의 인기
비결이라네."
차이를
만드는 건 큰 게 아니다.
작은 부분 하나까지 살피는 세심함,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꼼꼼한 배려,
“명색이 박사인데… 벨연구소 갔더니 허드렛일만”
[오뚜기와 함께하는 오뚜기 인생]반도체 세계권위자 유회준 KAIST 교수
유회준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55)는 반도체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한국 토종 반도체 전문가인 그에게는 늘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1994년 256메가SD램 개발, 1999년 휴대전화용 게임 칩 개발,
2008년 의복형 웨어러블 컴퓨터 개발이 모두 세계 최초다.
시대의 변화를 선도한 굵직한 업적들이다.
회로분야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제고체회로설계학회(ISSCC)도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
거기서 아시아위원장을 거쳐 회장까지 지냈다. 아시아 최초였다.
공학자로서 화려한 이력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숱하게 실패해 온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16메가D램을 개발할 때도 수없이 실패했고, 교수 임용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연구를 하다보면 실패는 다반사라고 한다.
하나의 성공작이 나온 이면에는 9개의 실패작이 있다는 것.
그 실패가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서울 올림픽 직후인 1988년 9월,
그는 미국 벨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벨연구소는 공학도라면 누구나 몸담고 싶어 하는 최고의 민간연구기관.
노벨상 수상자를 여러 명 배출했으며 수만 건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꿈꾸던 곳에 포스닥 과정으로 갔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거쳐 KAIST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수재였지만 그곳에서는 알아주질 않았다.
MIT와 버클리, 케임브리지 출신의 연구원들은 “KAIST가 뭐하는 곳이냐”며 대놓고 홀대했다.
“처음에 하는 일이라고는 허드렛일뿐이었다”는 게 그의 회고.
그러다 3개월쯤 지나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왔다.
그의 팀장은 초고속트랜지스터 문제로 2년째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 과제를 실험을 통해 풀어낸 뒤 논문으로 만들어 팀장 책상위에 올려놓고 퇴근했다.
다음 날 팀장은 물론 주변 연구원들이 먼저 알은 체를 해왔다. 이후 대접이 달라졌다.
그제야 자신의 전공분야를 찾을 수
있었다.
석박사 학위 전공인 수직캐비티 표면 광방출 레이저(vertical-cavity surface-emitting laser·VCSEL) 쪽인
이른바 ‘레이저’ 팀으로 발령받은 것. 그곳에서 그는 여러 가지를 발명했다.
미국 신문도 그의 활약을 기사화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분야는 성장 가능성은 컸지만 당장 돈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입대를 더이상 미루기가 힘들어 1991년 귀국했다.
대체복무의 일환으로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에 들어갔다.
당연히 레이저 팀에 배속될 줄 알았는데 16메가D램 설계팀장을 맡아달라는 게 회사의 주문이었다.
반도체 설계란 트랜지스터 수백만 개를 엮어 의미 있게 기능하도록 만드는 어려운 작업.
더구나 세계 각국의 메이저 반도체
업체들이
메모리 칩 개발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를 비롯한 미국 기업과 일본의 11개 반도체 기업,
그리고 한국에서도 삼성과 LG가 경쟁 상대였다.
현대전자는 후발주자였다.
그만큼 힘들었다.
다른 나라 아이디어를 베끼기도 하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16메가D램을 개발했다.
선발업체를 겨우 따라가는 수준이었다.
이후 욕심을 부린 게 256메가SD램 개발.
“세계를 제패해보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드물었다.
그동안 베끼기만 했으니….
새로운 아이디어를 넣어보자고 연구원들을 독려했다.
웨이브파이프라이닝 등 몇 개의 아이디어를 넣고
세계 처음으로 256메가SD램을 개발해냈다.
2년 반에 걸친 작업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천의 현대전자 연구실에서 일을 하다가 밤이 늦어지면
종이 상자를 찢어 바닥에 깔고 잘 때가 많았다.
기숙사도 멀지 않은 곳에 있었는데, 일에 미쳐 있었다고 봐야지요(웃음).
그 뒤 세계에서 가장 큰 반도체학회인 ISSCC에서
256메가SD램을 발표해 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이 학회에서 삼성 반도체 고위 임원을 만났는데
‘당신 때문에 회사에서 혼쭐이 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희열을 느꼈다.”
하지만 회사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자신을 아껴주던 상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주변 친구들도 “전공이 레이저 제작인데 웬 D램 설계냐”
“학교에 갈 사람인데…”라며 흔들어댔다.
결국 학계를 택했다.
강원대 교수로 임용된 뒤 현업에서 배웠던 것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쓰기 시작한 게 ‘D램 설계’.
반도체 설계가 생각보다 복잡했고 알아야 할 게
많은 분야라는 게 그의 생각. 1997년 초판이 나왔다.
전자공학과 학생의 필독서가 됐다.
삼성 LG 현대전자 연구원에 갈 때면
연구원들의 서가에 꽂힌 자신의 책을 볼 수 있었다.
그 분야의 베스트셀러였다.
1998년 초 KAIST 전기전자공학과 교수가 됐다.
그때 결심한 게 있다. 메모리 설계는 돈이 많이 드니
메모리를 바탕으로 한 응용 분야를 개척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론과 실기를 겸한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컴퓨터게임, 지능형 반도체, 웨어러블 컴퓨터 등이 머리에 떠올랐다.
먼저 달려든 게 휴대전화용 게임용 칩 개발.
당시만 해도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문자 정도나
전송하던 시절이어서 주위는 못미더워 했다.
산업부 국책과제로 선정돼 하이닉스, LG와 함께 개발에 나서
1999년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용 게임 칩을 개발했다.
게임용 칩 이름을 RAMP로 지었다.
한국이 강한 램(RAM)과 프로세서(P)를 결합했다는 뜻이었다.
결국 상용화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유 교수는 2001년 특허청 주관으로 반도체를 설계하는 틀인
SIPAC 사업을 펼치면서 젊은이들을 인재로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구상한 게 로봇과 웨어러블 컴퓨터였다.
“‘태권로봇 대회’로 알려진 ‘지능형 시스템온칩(SoC)
로봇 워 대회’를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로봇이라 하면 속에 노트북을 넣은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소프트웨어를 두뇌로 채택한 방식이었다.
그 대신 로봇 속에 컴퓨터 메인보드를 설계해 넣는 방식을 택했다.
메인보드를 두뇌로 삼은 것이다.
학생들이 보드를 직접 설계해 그 보드를 꽂으면
로봇이 눈을 뜨고 움직이고, 상대 로봇을 먼저 쓰러뜨리면 이기는 대회였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올해로 14회째다.”
유 교수가 가장 힘을 쏟은 분야는 웨어러블 컴퓨터 분야.
입거나 몸에 장착하는 컴퓨터가 웨어러블 컴퓨터.
1995년 MIT 랩에서 처음 제시한 개념이다.
일반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소해했다.
때마침 그에게 기회가 왔다.
2003년 정보통신부에서 정보기술 SoC 및
차세대컴퓨터 프로젝트 매니저(PM)를 맡아달라는 제의가 왔다.
웨어러블 컴퓨터를 일반에 알리고 구체화할 기회였다.
2004년 진대제 장관 시절 코엑스에서 패션쇼 형태로
웨어러블 컴퓨터를 일반에 소개했다.
요즘 구글글라스 같은 것을 끼고 모델들이 나와
시연하는 모습이었다. 언론의 관심도 컸고 성공적이었다.
2006년부터 학교에서 웨어러블 컴퓨터를 본격적으로 연구했다.
평범한 헝겊에 직접 전자회로를 인쇄해보자는 아이디어로 시작했다.
스승 권영세 교수의 연구실을 빌려 이 작업에 매진해 성공했다.
이후 헝겊 기판에 반도체 칩을 붙이는 기술도 개발했다.
2008년에는 셔츠 위에 입력장치와 CPU, 출력장치를
집적한 의복형 웨어러블 컴퓨터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였다.
기존에는 전자장치를 분해해
부품을 호주머니에 넣고 전선으로 연결하는 정도였다.
웬만큼 자신이 붙으면서 의료 분야에 접목하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반창고만 한 헝겊에 반도체칩과 센서를 달아 심장박동을 잰 뒤
이를 무선으로 병원에 보낼 수 있는 ‘무선 심전도 계측기’를 개발했다.
이어 수면장애 진단기, 지능형 한방 침, 지능형 약제 투입기,
머리띠 형 정신건강 측정기도 개발했다.
현재 웨어러블 헬스케어분야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
제자들은 직접 ‘K헬스’라는 회사를 차렸다.
유 교수의 연구 분야 중 가장 걱정스러운 쪽이 뇌 모방 프로세서다.
요즘은 자동차 자율주행과 빅데이터 부문에서 프로세서를 활용한 경쟁이 치열하다.
모두 미리 알 수 없는 상황에 대처할 능력을 갖춘 지능형 프로세서가 필요한 분야다.
그는 감성적인 우뇌와 지성적인 좌뇌를 닮은 개념을 하나의 반도체 칩으로
만들자고 세계 최초로 제안해 2008년부터 발표해오고 있다.
“요즘 IBM과 애플은 물론이고 구글과 페이스북
소프트뱅크 등도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고 있다.
빅데이터나 딥 러닝용 CPU 개발이 시대의 화두가 됐다.
이 분야의 투자가 절실한데 정부나 기업이 손을 놓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된다.”
유 교수는 학생들이 한국의 미래라고 생각한다.
대학생들을 위한 로봇 워 대회나 웨어러블 컴퓨터 대회를
지금까지 이끌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다.
올해로 11회째인 웨어러블 컴퓨터 경진대회를 통해
장갑을 끼고 수화하면 목소리가 나오는 기기나,
시각장애인에게 안내견의 위치와 기분을 알려주는 기기 등
대학생들의 참신한 아이디어가 많이 나왔다.
유 교수는 학생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 주체적으로 할 수 있다.
뭐든지 20년만 열심히 하면 세계적인 권위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토종 과학자로 반도체 분야의 권위자로 우뚝 선 그가 할 수 있는 말이다.
그에게 좌우명이 있을 법했다. 뭐냐고 묻자
머뭇거리더니
“연구실에 ‘인본(人本)설계’ ‘홍익인간’이란 글을 붙여 놓았다”고 말했다.
“내 연구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반도체, 널리 인간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반도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유회준 연구실은 수재 집합소
유회준 교수의 반도체시스템연구실은 수재들의 집합소다.
실전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생산해내는 아이디어 뱅크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저전력 스마트 안경인 ‘K글라스2’를 개발해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음성으로 가동되는 구글글라스와는 달리 적외선이
동공을 추적하는 방식이어서 주위의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 안경을 끼고 특정 건물이나 제품을 바라보다
윙크를 하면 그에 관한 정보가 나타난다.
윙크가 컴퓨터의 엔터 키다. 윙크와 눈 깜빡임을 구별한다.
게다가 반도체칩을 이용해 전력을 적게 소모해 자주 충전할 필요도 없다.
현재 연구실에는 19명이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전공분야는 웨어러블 컴퓨터와 뇌 모방 프로세서, 인체통신 등.
지금까지 박사 30명과 석사 44명을 배출했다.
대부분 세계적인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일부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기 위해 회사를 차린 경우도 있다.
LG에 입사해 지난해 최연소 임원이 된 우람찬 상무는 이
연구실 박사 출신.
LG의 최신 휴대전화 G4를 개발한 공로였다.
KAIST 최연소 박사로 벨기에의 IMEC 연구소에서 일하는 이슬기 박사도 그의 제자.
또 외국인 학생 1호로 조선족인 얀 롱도 IMEC에 들어갔다가 지금은 삼성에서 근무하고 있다.
세계적인 컴퓨터 기업인 퀄컴과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에도 지금까지 4명씩 취업했다.
유 교수는 한 학회에서 텍사스오스틴대 교수를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우연히 졸업생들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에
학생 여러 명을 보냈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삐뚜름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고쳐 앉더라는 것.
그는 제자 자랑을 하면서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갔다.
IBM에 특급 대우로 입사한 제자도 소개했다.
그 제자는 그토록 어렵다는 특수재능비자(O 비자)를 받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일반적으로 미국대학 출신들도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는데, 제자는 당당히
정규직 직원으로, 그것도 프로젝트 리더가 됐다는 것.
세계적인 기업에서 제자들을 데려가는 이유는 학생들이
반도체 설계에 기초한 통합적인 교육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있으면 반도체 칩을 설계하고 나아가
시스템화하는 데 교육의 중점을 두고 있다.
외국은 어느 한 분야만 가르친다. 우리 학생들은
전체 시스템을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있다.”
유 교수는 제자들을 보면서 스승인 KAIST 권영세 교수를
떠올린다.
권 교수는 서울대 전자공학과 4학년으로 전공조차 다른 자신을 제자로 받아
진로를 상담해주고 케어까지 해줬다는 것.
그는 “누군가 ‘선생은 학교에 있는 아버지(school father)다’라고 한 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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