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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아 들으라(잠4:1-9)-2023.5.7
히브리인들은 주로 가정에서 자녀들을 말씀으로 엄격하게 교육했습니다.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아버지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책이 드물었기 때문에 구술을 통해 전달되는 아버지의 말을 자녀들은 경청하여 들어야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도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라온 분이십니다. 그래서 3절에 보면, 자신도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아들이었었으며, 자신의 어머니 보기에는 유약한 아들이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처럼 히브리식 교육이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는 것은 쉐마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쉐마는 ‘들으라’ ‘경청하라’는 말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유대인 남자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단어가 쉐마요, 죽음직전 마지막까지 사용하는 단어가 쉐마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유명한 쉐마절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6장4-5절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쉐마는 유대인들의 국민교육헌장과 같은 것입니다. 여기에 가정교육이 들어 있고, 학교교육과 종교교육이 종합적으로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사실 예전의 우리 조상들도 아버지의 가르침을 최우선으로 여겼습니다. 아버지의 가르침을 최고로 여겼지요.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서 이런 추세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정말 안타까울 뿐이지요. 사실 우리는 지금 지식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하는 지식의 홍수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시대가 발달할수록 지식의 총량이 얼마나 많아지는지 모릅니다. 그로 말미암아 삶이 바뀌었습니다. 그래도 비교적 젊은 세대는 적응하기 쉬울지 모르지만, 나이 든 세대는 시대에 적응하여 따라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어쩔 때는 딴 세상을 살고 있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요즘 젊은 세대가 쓰는 단어자체가 너무나 생소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넘쳐납니다. 그래서 세대간의 소통이 어렵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주지 못하면 소통은 불가능한 것이지요. 세대간의 문화나 언어나 삶의 방식이 너무 다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하지 못하면 불통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를 이해해주어야 하고, 나이 든 세대도 젊은 세대를 이해해 주어야 합니다. 만일 세대간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꾸만 서로를 향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습니다. 보다 극단적으로 말씀드리면 서로를 향해 비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영향이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부모와 자식간의 벌어진 간극을 서로가 이해하지 않으면 소통이 너무나 어렵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겪는 아픔입니다. 예전에는 우리 사회가 대가족시대였습니다. 그때는 수상과 수하에 대한 위계질서가 분명했지요. 그러나 점점 우리 사회가 핵가족시대로 바뀌고, 이제는 핵분열시대로 바뀌고 있습니다. 혼자 원룸을 쓰다가 이제는 그것도 나누어 쓴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모든 삶이 각개전투식이지요. 수상과 수하를 모르게 되지요. 가슴 아픈 일입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젊은이들을 향해 세상이 말세라고 혀를 차고, 젊은이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향해 꼰대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리고 시대는 바뀌어갑니다. 언젠가 그들도 다음 세대에게 그런 대물림을 당하게 됩니다. 젊은 세대가 나이 든 세대를 향해 구박했던 그런 구박을 자신들이 받을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나마 우리 사회를 가장 건강하게 지탱해주는 중요한 기관이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입니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도 건강합니다. 가정과 교회는 우리 사회의 건강을 책임지는 기관입니다. 물론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기관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가정을 위한 말씀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아들들아 들으라’는 말씀입니다.
젊은 세대와 나이 든 세대의 가장 큰 갈등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식과 지혜의 갈등입니다. 젊은 세대는 지식을 무기로 나이 든 세대를 구박합니다. 그러나 나이 든 세대는 지혜를 무기로 젊은 세대를 방어하지요. 물론 무조건 젊은 세대가 지식이 많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문화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이른바 시대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지요. 세대간에 이런 갭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른바 젊은 사람들이 적응능력이 빠른 반면에 나이 든 세대는 적응력이 뒤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가 충돌하는 갭이 발생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젊은 세대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지식의 총량이 많아지고 지식이 넘쳐 난다해도 지혜를 앞설 수는 없습니다. 지식이 예리한 칼이라면 지혜는 칼을 사용하는 방법이거든요. 아무리 좋은 칼을 갖고 있을지라도, 칼을 제대로 쓸 줄 모르면 그 칼은 그냥 철붙이에 불과할 뿐이지요. 그래서 지식을 자랑하지 말고 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지식을 얻으려고만 하지 말고 지혜를 얻으려고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지식은 교육을 통해서 충분히 학습이 됩니다. 그러나 지혜는 경험을 통해 학습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식은 학교를 통해 습득하지만, 지혜는 삶의 현장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세월을 통해 경험적으로 배우는 것이지요. 엄격하게 말씀드리면 지식은 선생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지혜는 아버지를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세기의 정치가였던 윈스턴 처칠이 인기가 절정일 때 한 신문사에서 그의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그를 가르쳤던 선생님들을 조사해서 ‘위인을 만든 스승’이라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처칠은 자기의 기사를 읽고 나서 신문사에 이런 메모를 보냈답니다.
‘귀 신문사의 조사에 치하를 보냅니다. 그러나 나의 가장 중요한 스승을 한 분 빠뜨리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이십니다. 나는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많은 선생님을 만났고, 많은 교수님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은 나에게 지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는 나에게 사람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선생님들은 자기 나름대로 뜻이 있어서 교육을 하셨지만, 나의 어머니는 나를 사랑으로 가르쳐주신 최고의 교육자이십니다’. 어머니는 비록 자기에게 지식은 가르쳐주시지 않았을지라도 지혜를 가르쳐주신 최고의 선생님이셨다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세상을 살려면 지식도 필요합니다. 많은 지식을 습득함이 좋습니다. 그러나 지식만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은 우리에게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고 주문하십니다(7절). 6절에서는, 지혜를 버리지 말라, 지혜를 사랑하라고 당부하고, 8절에서는 지혜를 높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은 아버지를 통해 유통되는 교훈이었던 것이지요. 아버지는 한 가정의 영적인 것을 책임지는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고 충고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믿음과 효에 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효도입니다. 효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고, 아무리 강조해도 만족함이 없습니다. 혹시 자신이 지나친 효도자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만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히 불효자일 것입니다. 효도는 절대 만족이 없습니다. 나름대로 효도한다고 하지만 항상 부족하고 부끄럽고 죄송할 뿐입니다.
어버이날을 상징하는 꽃이 카네이션입니다. 그런데 카네이션 꽃은 톱니바퀴처럼 되어 있지요. 누군가 그 이유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그것이 곧 어버이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자식 낳아 기르시는 어버이의 마음이 마치 찢기어진 톱니바퀴와 같다는 것입니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수고와 눈물로 키우셨던 부모의 마음이 그렇게 찢기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들어보니까 일리가 있지요?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때를 따라 주어지는 어버이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 시간이라도 어버이 은혜를 기억할 수 있잖아요.
어버이 살아계실 때 효를 실천하십시오. 혹시 효도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집안의 어르신들에게라도 효를 실천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센머리 앞에 일어서라는 말씀처럼 어르신들을 공경하십시오. 효는 백행지본입니다. 효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서고, 교회가 바로 서야 민족이 바로 섭니다. 효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집니다.
(1) 효도와 인간
인간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구실을 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효도입니다. 효도는 가장 인간다운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여러 가지나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효일 것입니다. 그래서 불효자식은 금수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물론 까마귀가 들으면 섭섭하겠지요. 여러분은 반포지효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까마귀는 어릴 때 어미가 먹이를 물어다가 키워주면 그 보답으로 어미가 나이 들어 힘이 없을 때 먹이를 구해다가 어미를 먹여 준다합니다. 까마귀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미의 둥지를 같이 쓰거나 멀리 떠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자성어로 반포효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잠언서30장17절은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말 못하는 미물에게 당하는 불효자의 저주인 것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모님이 안계셨으면 내가 어디로 왔겠습니까? 사람으로 태어나서 효도할 때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효도는 가장 사람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효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부모에게 ‘네 자녀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가르치지 않아도 부모는 본능처럼 자식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에게는 ‘네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유는 자녀들은 부모공경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성 속에 세 여인이 있는데 하나는 어머니요, 하나는 아내요, 다른 하나는 딸이랍니다. 그런데 그 세 여인의 특징이 다 다르답니다. 딸은 약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강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최고로 강합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홍시 이야기가 있습니다. 홍시를 좋아하시는 어머니가 시장에 나가서 가족 수대로 홍시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식구대로 두 개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게눈 감추듯이 먹고서 어머니 손에 든 홍시를 쳐다봅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너희들 더 먹어라’고 나누어줍니다. 그때 아이들이 묻습니다. ‘어머니는요?’.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 ‘응, 나는 원래 홍시를 안 좋아해서’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때마다 그렇게 둘러 대다보니까 나이 들어 할머니가 된 뒤에도 자식들은 자기들끼리 둘러앉아 홍시를 먹으면서 어머니 잡숴보시라고 말 한마디 안하더랍니다.
하도 야속한 어머니가 용기를 내어 ‘야, 나도 홍시 좀 주라’고 하였더니 자식새끼 하는 말이 어미의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어머니는 원래 홍시를 안 좋아 하셨잖아요’하더랍니다. 이것이 부모와 자식의 차이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 왜 부모님은 식사를 저렇게 조금 잡수실까 궁금했습니다. 이제 나이 들고 철이 들어 생각하니 그분들을 알 것 같습니다. 그분들은 잡수시고 싶어도 당신들의 입을 막으시고 자녀들의 입을 채워주신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당신을 위해 투자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아낌없이 진액을 쏟으시면서 헌신하신 것이지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부모공경은 인륜이요 천륜입니다. 그래서 효도는 평생을 두고 갚아야 할 자식의 도리요, 책무입니다. 절대 나이 드신 부모님께 그것도 모르냐고 윽박지르지 마세요. 혹은 왜 어머니 요즘 음식이 전에만 못하냐고 타령하지 마세요. 음식이 왜 이리 짜냐고 투정하지 마세요. 어머니의 음식이 짜진 것이 아니라, 자식들의 입이 그만큼 사랑이 없고 감사가 없어진 것이랍니다. 다시는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잘났든지 못났든지 그분들이 안계셨으면 오늘의 당신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화상을 입어 얼굴이 일그러진 어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던 딸은 항상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혹시라도 친구들이 알까봐 불안했답니다. 세월이 흐르고 시집을 가기 전에 어머니는 딸에게 입을 여셨습니다. ‘네가 돌이 되기 전 우리 집에 불이 났단다, 다른 사람들은 다 피했지만 너는 그 속에 갇혀 있었어, 그때 너를 건지기 위해 나는 불속으로 뛰어들었지, 그리고 너를 치마에 감싸고 나오는데 순식간에 불이 내 얼굴에 붙은 거야, 딸아 미안하다’고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딸은 한 마디 말도 못한 채 뜨거운 눈물만 쏟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모릅니다. 그러나 부모의 마음을 알 듯 말 듯 할 때 이미 시간이 늦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2) 효도와 믿음
우리 생명은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님을 통해 주신 것입니다. 부모님은 우리 생명의 대리자이십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부모님을 동반자적인 개념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사실 나의 출생의 비밀을 가장 분명히 알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과 부모님이십니다. 때문에 인륜의 가장 큰 계명은 부모공경이요, 천륜의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공경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영육으로 만들어진 인간은 인륜과 천륜의 계명을 지켜야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효와 믿음을 강조하십니다.
기독교는 가장 휴머니즘적인 종교입니다. 인간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가장 휴머니즘적인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부모공경입니다. 효도입니다. 때로 우리가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효에 소극적인 종교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기독교만큼 효를 강조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교를 효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물론 유교의 경전 중에 효도하는 방법만을 다룬 효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의 효는 기독교의 효와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유교적인 효는 마치 전시장에 진열된 마네킹 같은 효입니다. 형식화된 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부모님 사후에 제사상의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차려놓으면 효심이 좋은 것입니까? 그래서 제사에 집중합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효도는 살아생전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후에 효도한다고 난리법석을 떠는 것은 효를 빙자한 자기 양심의 합리화입니다. 자기 양심을 합리화시키려는 포장된 전술입니다. 기독교의 효는 그렇지 않습니다. 형식보다는 내용과 내면적인 효를 강조합니다.
중국에서 수입해 온 유교문화가 한국에 건너와서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아십니까? 유교의 한계점을 인식하고 이미 중국이나 일본은 유교의 문화를 버렸는데 우리는 버리지 못하고 있어요. 대표적인 예를 들어볼까요?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내용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을 꼭 장남이 모셔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중국인들의 80%는 ‘아니다’라고 대답한 반면, 한국인들의 80%는 ‘그렇다’고 대답했다합니다. 의식이 많이 다르지요. 그래서 아직도 우리 사회의 장남들은 어깨가 무겁고 은근한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결혼할 때도 장남을 피하려는 의식이 은근히 존재합니다.
언젠가 성균관의 유림들이 위기에 빠진 유교의 효를 기독교에 완전히 빼앗겼다는 글을 신문에 기고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자기들의 트레이드마크인 효를 기독교가 효행법을 개정하며 선도해 나간다는 자성론의 글이었지요.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효도대학이 있습니다. 인천시 남동구에 있는 성산효대학원대학교입니다. 인천순복음교회가 세운 효도전문대학교입니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효박사도 탄생했습니다. 물론 효박사는 학문적으로는 가능하겠지만 실천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요. 감히 어떤 사람이 효에 박사일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모님 살아생전에 효도를 실천하라는 것이지요.
부모님 돌아가신 다음에 눈물을 흘리며 후회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때 가서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풍성한 제사음식을 차려놓고 심리적인 위로를 받으려하지 말고 지금 살아계실 때 따뜻한 마음과 정성스런 인사 한 마디 드리시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믿음과 효도는 같이 갑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효도도 잘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은 효도도 못합니다. 물론 믿음이 없어도 부모공경 잘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효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효도가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네 부모를 주안에서 공경하라고 말입니다.
어떤 책에 효도십계명이라는 글이 있어 소개할까 합니다. 그냥 참고로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의 상황에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부모님과 가능한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부모님은 자식과의 대화시간을 즐거워하십니다. 오늘날 세대와 코드, 컨셉이 안 맞는다고 부모님을 무시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분들의 소리를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가장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여쭤보세요. 아는 일이라도 한번 여쭤보세요. 본문 1절을 보세요. 아무리 자식들이 풍성한 지식을 갖고 있을지라도 부모님들이 경험적으로 터득한 지혜를 앞설 수 없습니다.
둘째, 부모님께 일감을 드리십시오. 효도는 부모님을 방안에 모셔놓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탈무드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께 살진 고기를 사드리고도 지옥 가는 자가 있고,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게 하고서도 천국 가는 자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지요? 셋째, 부모님도 취미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 드리십시오. 사회나 교회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즐기시도록 도와드리라는 것입니다. 넷째, 여행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노인은 새로운 분위기와 경험을 좋아합니다.
다섯째,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부모님을 인정해 드리라는 말입니다. 그분들의 세대를 인정해드리라는 것이지요. 연세가 드시면 기억력도 약해지고, 마음도 소심해지며, 잔소리도 늘어난답니다. 때로는 공연한 고집을 부리기도 하십니다. 눈높이 효도를 하시라는 말이지요. 여섯째, 가족끼리 외출할 때 부모님도 가급적 모시고 가도록 노력하십시오. 어린 자녀들만 데리고 나가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섭섭함을 가질 때가 있답니다. 그리고 외식할 때도 아이들 눈에만 맞추지 말고 부모님 마음을 헤아려 드리라는 말입니다.
일곱 번째, 집에 손님이 오면 부모님께 먼저 인사를 드리도록 하십시오. 이런 예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출필곡 반필면’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른바 드나들 때 반드시 인사를 드리고 외출하고 다녀와서는 반드시 얼굴을 먼저 뵈라는 말입니다. 부모님이 보시는 나는 여전히 어린 아이입니다. 그래서 90세 잡수신 어머니가 70세 된 아들에게 ‘애야, 길조심해라’고 당부하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사소한 병이라도 나시면 꼭 병원에 모시고 가십시오. ‘노인들은 다 그래’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사실 나이가 들수록 생명에 대한 애착과 건강에 대한 조바심이 많아지는 법이랍니다.
아홉째, 매월 일정액의 용돈을 드리십시오. 열 번째, 신앙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천국의 안내자가 될 때 가장 큰 효도입니다. 믿음은 노년에 정신적인 위안과 안정을 찾는데 최고의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3) 효도와 축복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육신의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하면 우리들의 믿음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효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6장1절은,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옳다는 의미는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효도는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황이 되고 안되고의 차이도 아닙니다. 분명히 효도는 생각과 마음의 차이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당신의 자녀의 형편과 입장과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분들이 더 가슴 졸이고 아파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분들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리고 구차한 가운데 효도하는 자식들의 마음을 가장 잘 아십니다. 그분들은 절대 큰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을 원하는 것도 아닙니다. 작은 효도라도 마음으로 하시면 됩니다. 굳이 특정한 날을 선택하여 한번에 큰 감동을 드리고 끝내려고 하지 마시라는 말입니다. 효도는 이벤트가 아니거든요. 물론 효도는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효도를 결코 잊지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하나님은 효도하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6장2-3절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입니다. 다시 본문8절과 9절을 읽어보십시다. 본문에 나오는 지혜는 인격화된 하나님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소시켜보면, 1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아비의 훈계와 명철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비의 명철을 지키면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4절). 그리고 보호를 받습니다(6절). 존귀함을 얻습니다(8절). 그리고 영화롭게 될 것이요,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9절).
마지막으로 저는 조지 워싱톤의 효도를 예로 들고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워싱톤은 어려서부터 바다를 벗삼아 항해하는 멋진 마도로스를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선원으로 취직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배를 타고 멀리 떠나기로 하고 어머니와 작별인사를 하기로 했습니다. 아들과 이별해야하는 어머니는 아쉬움에 슬피 우십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워싱톤은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을 바늘이 찌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워싱톤은 자기 생각을 접었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나의 꿈을 바꿀 수 없다’고 말입니다.
워싱톤은 자기가 그렇게 소망하던 항해를 포기한 것이지요. 그때 어머니가 아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이런 축복기도를 해주셨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사람의 앞길은 평탄하리라, 그리고 하나님이 반드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다’고 말입니다. 어머니의 기도대로 워싱톤은 선장대신 미국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초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성도여러분! 잠언서의 기자가 자기 아들들에게 권면하는 것처럼 아비의 훈계를 들으십시오. 아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십시오. 그리고 그 명령을 지키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영혼이 살게 될 것입니다(4절).
오늘 전체적인 본문의 내용을 요약합니다. ‘아들들아, 아비의 훈계를 들으라’는 말씀은 표면적으로는 육신의 아비가 아들들에게 훈계하는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솔로몬이 자기 아들들에게 권면하는 말이지요.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영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아들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내 아비의 훈계는 아비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아버지의 아버지를 통해,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통해 계대를 이어 전해진 말씀입니다. 그렇게 당부하는 아버지도 당신의 아버지를 통해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아비의 입에서 나오는 훈계는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계대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으로서 아버지의 훈계도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훈계이기 때문에 더욱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외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마땅히 들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3장16절의 말씀처럼,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규범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효도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효도의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효도하는 것도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법이라는 것이지요. 때문에 하나님을 법을 무시하지 말고 반드시 살아생전에 효를 실천하는 믿음의 종들이 되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간혹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믿음을 빙자하여 효를 등한히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른바 효도를 악용하는 사례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마가복음7장에 나오는 고르반제도입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헌물이라는 뜻입니다. 고르반으로 선언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제도를 악용하여 인간이 해야 할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지요. 공식적으로 자기 재산이라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부모에 대한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었거든요. 그런 식으로 자식들이 해야 할 의무를 다하지 않으려고 고르반제도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거예요.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부모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가 이 땅에서 부모는 아닐 수 있습니다. 아니 부모를 못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아닌 사람은 없습니다. 이른바 자식이 안되어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누군가의 부모는 아닐지라도 모든 사람은 분명히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지금도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효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효도는 절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지금이 효도하기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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