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만권서 행만리로(得萬卷書 行萬里路)
만권 책을 읽고 만리 길을 걸으라. 그러면 군자가 될 수 있다. 인생의 의미를 깨칠 수 있다.
<득만권서 행만리로!> 간단하고 명료한 이 진리는 춘천의 빵집 <피스 오브 마인드> 김종헌 사장에게 들었다. 아니 어휘만 다르게 포장되었지 실은 철들면서부터 여러 경로로 숱하게 들어온 말이었다. 그런데 처음 들은 말인양 이 여덟글자가 올가을 이토록 내 가슴에 아프게 스미는 건 만권 책을 읽고 만리길을 걷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는 낭패감 때문일 것이다.
다시 젊어진다면 내 삶의 목표는 바로 저것에 두겠다. 그러나 다시 젊어질 일이 도대체 없다는 것은 이미 너무나도 명백하다. 이를 어쩌면 좋으냐.
매사 알고 나면 너무 늦다. 너무 늦게서야 저런 말에 공명하는 멍충이 나를 용서할 수 없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이란 글이 히트한 것은 제목의 가슴치는 회한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마구마구 제 가슴을 치며 지갑을 열어댔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더 늦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책을 읽고 길을 걷는데 집중하면 되지 않느냐고? 물론이다. 예순이 넘어 이스탄불에서 서안까지 실크로드 3만 킬로를 걸어서 횡단한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할아버지도 있으니까. 나는 그가 파주 출판단지에 왔을 때 동행해서 임진강변을 몇시간 같이 걸은 적도 있다. 얼굴이 밝은 분홍빛으로 빛나고 키가 자그마하고 둥근 눈속에 웃음이 가득한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올리비에 옹의 <나는 걷는다>란 글을 경이와 질투에 차서 읽으면서도 나는 , 아무래도 이건 특수한 삶의 천재만이 해낼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젊은 날의 시간과 쉰에 다다른 현재의 내 시간은 밀도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2 ,30대의 시간이 실크올처럼 촘촘하게 흘러갔다면 현재의 시간은 성글게 짠 삼베같이 허술하게 직조되어 있다. 같은 면적안에 들어갈수 있는 섬유의 올이 젊은 날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다.전에는 한시간 안에 100개의 씨줄을 직조할 수 있었다면 지금은 대략 5,60개 밖에 짜낼 수가 없다. 그러니 2-30대의 한 시간이 지금의 두 시간과 맞먹게 되고 시간의 속도가 두배쯤 빨라졌음을 황당하게 감각한다.
처음엔 똑같은 24시간이련만 왜 이렇게 허술하게 흘러가는지를 도대체 납득할 수 없었다. 채 꿰매지 못한 천조각을 손에 들고 쩔쩔매듯 저물어버린 하루를 손에 들고 난감해하는 날들이 2-3년 흐르고 나서야 나는 이게 일종의 노화란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두 손 번쩍 들어야 했다. 그래 항복이다! 나는 이제 더이상 젊지 않다! 순발력과 효율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책을 읽더라도 길을 걷더라도 두배의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내 마음은 내 몸처럼 쉽사리 늙어주지 않는다. 몸처럼 정직하지가 않다. 아니잖아? 난 아직 젊어. 퇴화한 건 아무것도 없어, 지금도 내 마음은 자꾸만 억울하다. 무언가 기만하려 한다. 마음이란 것이 이렇게 미련할 줄이야.
대상없는 원망도 쓸데없이 많아졌다. <어째서 전에 누구도 내게 이런 비밀을 일러주지 않았지?. 나이들기 전에 책을 읽어라. 나이들기 전에 먼길을 여행해라. 쉰이 넘으면 효율이 절반으로 떨어진다.그러니 그 이전에 생활화해라.>누군가 그렇게 귀에 쏙 들어오게 충고만 해줬더라도!. 그러나 그건 명백히 억지다. 내 귀에 대고 숱하게 경을 읽었던 사람들이 없었다고? 가만 꼽아보면 정다운 눈빛의 그들이 줄줄이 지나간다. 그들의 충고가 마이동풍으로 흘러간 건 내가 아직 시간을 감각하기엔 너무 젊었던 탓이렷다. 어느 재치있는 사람의 말대로 과연 청춘은 철없는 아이들에게 내주기엔 너무 아까운 보물이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나는 득만권서 행만리로 하기도 전에 젊음을 흘려보낸 어른이 돼버렸다. 어른이 됐다는 건 다른 게 아니다. 나의 실패를 교훈삼아 뒤에 오는 젊은 사람들에게 해줄 말이 자신도 모르는 새 줄줄이 생겨나있다는 뜻이다. 꼰대기질이란 것이 달리 생기는 게 아니다. 젊은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자꾸만 한말씀 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나를 느낀다.
어제 어머니 제사에 4촌 6촌 형제들이 여럿 모였길래 제사밥을 먹고 음복을 하면서 기어이 그런 말을 꺼냈다. 서른 중후반의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를 둔 공무원, 은행원, 판사, 항공기 조종사,식품회사 직원들이 고루 모인 자리였다. 책을 읽고 여행을 해라. 누나(언니)처럼 너무 늦기 전에 서둘러라.시간은 빠르더라! 그러나 그들은 젊음을 가진 사람들답게 내 말에 시큰둥했다.
<좋은 줄이야 알지만 당면한 일을 처리하는 게 다급한데 언제 인문학 책 따위를 읽겠느냐. 그러다간 어느 도끼에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줄이 잘려나갈지 모른다. 지금이 얼마나 무서운 경쟁의 시대인 줄 모르느냐. 업무 관련 이외의 일을 할 수 있을만한 여유를 주는 회사라면 그 회사는 경영 방만으로 몇 해 안가 쓰러질 거다. 직급이 높아지고 판공비가 많아진다는 건 개인시간을 그만큼 뺐긴다는 뜻이더라. 책은 커녕 잠잘 시간도 내기 어렵다. 월급을 주는 경영자는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위치하면 아랫 것들이 회사에 올인하기를 원한다. 그 올인 속에 책이니 여행이니는 끼일 자리가 절대 없다> 등등등.
/ 김서령
* 김서령
신문,잡지에 잡글을 쓰면서 20년을 흘려보냈다. 만난 사람도 많고 들은 풍월도 많다. 그러다보니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는 어리뻥한 사람이 돼버렸다. 그게 가장 대책없는 무식인 줄 이제야 알겠다. 안동-대구-서울을 20-10-20년씩 살았다. 안동에서의 어린 날이 몇백년 묵은 조선 중기의 기억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경북대학 국문과를 졸업했고 잠깐 교사노릇을 한 적 있다.
첫댓글 공감백배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습니다.
그런데 우짤까나! 김서령님은 오십 대에 나이듦을 통탄했는데
수 천 그릇 밥그릇 수를 더 쌓은 나는?
언니 오늘 잠시 나마 얼굴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ㅎㅎ
백배 공감하는 말입니다.
쓰기 전에 먼저 많이 읽자고 생각하고는
이것도 저것도 잘 안되는 실정입니다.
다섯수레의 책을 읽으라는 선현들의 말씀이 괜히 있는게 아닐테지요.
많이 읽어야 많은 생각이 글로 나오겠지요. ㅎㅎ
책 읽지 않고 글 쓰려는 사람은 투자 하지 않고 장사하려는 사람과 같다고
어느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많이 읽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ㅎㅎ
요즈음 경로당을 하루에 서너군데는 다닙니다.
업무상
오늘도 들른 경로당에서 한 말씀 들었습니다
많이보고 많이 다녀라고
지나보니 어른들이 왜 그랬든공 하고 생각이 나더랍니다
요즈음 좋은 말씀 많이 듣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