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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암은 80년대나 현제나 달라진 것이 없다. 광산도시의 전성기였던 80년대 북적되던 도시 철암 수많은 사람들이 석탄사업의 사양화로 하나둘 떠나고 도시전체는 80년대 그시간 그대로 멈취 버려 마치 영화찰영 세트장을 보는 듯하다. 수년간 발전없이 시간이 멈취 버린도시 철암 이제 석탄에서 관광으로 새로운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오는 2003년까지 45억여원을 들여 절골과 함께 지역내 최고 경관지로 꼽히는 버들골 일대 33만여평을 계곡형 관광명소로 개발하는데
버들골에는 공사 기간중 7~24평형 산막 27채와 150평형 산림문화 휴양관 야외극장 1개소 다목적 운동장 1개소
극기훈련장 1개소등 시설이 조성도며 이처럼 고원 자연 휴양림이 조성되면 고원 농업시험장과 구문소 자연 학습장등 인근 관광명소와
연계, 강원탄광 폐광지인 철암동 일대 경제가 활기를 되찾을 전망이며 또한 구문소 철암간 도로확포장공사가 진행중이고 철암 5일장이 들어서 지역경제에 한몫하고 있으며 젊은 조형예술가들의 모임인 할아텍(팀장 유장복)은 철암역 내 92㎡ 규모의 휴게실을 미술품 전시장으로 개조해 상설 운영하여 삭막하기만하던 지역에 활기을 넘치게하는데 지난 2월 16일 개관한 철암역 갤러리는 철암 그리기전을 비롯해 지역 작가와 초대작가 개인전 등 특별 기획전시관과 윈도 갤러리 등 상설 전시관으로 운영된다.
철암동은 지난 93년 강원탄광이 폐광된 후 해가 갈수록 지역세가 위축되자 한낮에도 상가문을 닫아두는 점포가 늘어나는등 정주기반이 약화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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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동북쪽에 있는 백병산(白屛山)을 옛날에는 백산(白山)이라 하였으니《척주지》와
《여지도서》등에 기록되어 있다. 그 백산 아래에 자리한 마을이라 백산골(白山洞)이라 하였다. 한 때 사람들이 외자를 쓰면 외로워진다는 속설이
있어 그 외자 옆에 다른 글자를 붙여 쓰는 경향이 있었다. |
원터 ― 백산역 뒤쪽 백산초등학교 옆에 있다. 둘레 100여m의 돌담이 직사각형으로 둘러쳐져 있는 곳인데 고려때 원(院)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그곳에 무덤들이 많이 있다. 원은 교통의 요로에 설치하여 중앙에서 지방으로 출장 오는 관리들이 투숙하는 곳이다. 교통의 요로나 인가가 드문 곳에 설치하였다. 따라서 원터는 삼척과 울진, 봉 화, 영월로 이어지는 사거리에 위치하였다. |
고총등(古塚嶝) ― 원터 윗쪽의 산등에 있다. 삼국시대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횡혈식석곽묘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데 석곽은 자연석으로 쌓아 그 위에 장대석을 덮은 형식인데 내부에서 각종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총이 긴 숟가락 과 푸른 빛의 자기 등이 출토된 바 있고 봉분도 일반 묘지의 몇 배나 되는 거대한 것들이다. 지방에서는 속칭 고려 장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그것이 꼭 고려때 무덤은 아니고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되지 않을까 생각 된다. 고려 장(高麗葬)은 고래장(古來葬)이라고도 하며, 고총이 있는 산등이라고 해서 고총등이라고도 한다. |
장수굴[將帥窟:神靈窟] ― 백산역을 지나 북쪽으로 좀 더 가면 철로 가에 큰 석회동굴이 있는데
장수굴이다. 신령산 (神靈山) 밑에 있다고 신령굴(神靈窟)이라고도 하는데 장수굴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동굴 어귀의 암반에 사람의 발자 국이
5개 찍혀 있는데 그 발자국이 장수의 발자국이라는 것이다. 옛날 천하에서 가장 힘이 센 장수가 동굴속의 지하 왕국으로 들어 가려고 동굴어귀에
이르러 암반(岩盤)을 밟으니 바위가 흡사 진흙처럼 발이 쑥쑥 빠지는 것이었다. 더 이상 들어가봐야 계속 빠질 것 같아 장수는 지하왕국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장수가 몇 발자국 딛은 발자국 자리 만 바위에 남게 된 것이라 한다. 70여년 전 병자년(丙子年)에 장수굴에 큰 벼락이 떨어지고
그 벼락이 칠 때 신령산에서 큰 바위가 떨어져 동굴 입 구를 막았다. 지금 동굴 앞에 있는 큰 바위가 바로 그때 떨어진 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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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산(神靈山) ― 장수굴 윗쪽의 산이다. 해발 888m의 산으로 산 전체가 거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산꼭대기 에 우먹한 분지가 있는데 무덤이 하나 있어서 사자앙천형(獅子仰天形)의 명당이라 한다. 산 밑의 천제당골에 천제당 (天祭堂)이 있어 신령에 제사하는 산이기에 신령산이라 한다고 하며, 또는 신령골에 옛부터 산신령(山神靈)에 제사하 는 제당이 있어서 신령산이라 한다. 신령산을 시렁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산의 형상이 시렁처럼 높다랗게 생겨서 붙은 이름이라 한다. |
번지당골 ― 연화산 유원지 가는 골짜기를 올라가다가 왼쪽으로 번지당이 있는 곳으로 가는 골짜기를 말한다. 흔히 작은 번지당골이라 하는 것이 번지당골이며 대문다리골 어귀를 번지당골이라 하는 것은 번지당이 있는 골짜기로 가 는 어귀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번지당이란 말은 번제당(番祭堂)에서 온말로 번제(番祭)란 한 해 걸러 3년에 한번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몇 해에 한번씩 해를 돌아가며 지내는 제사를 번제 라 하는데, 번제당골 안쪽에 있는 천제당에서 번제를 올리기에 번제당이라 하고 그 골짜기를 번제당골이라 하였다. 번제당골이 번지당골로 변한 것이다. |
글금재 ― 박씨밭골 옆의 잘록한 산등에 있는 고개이다. 글금으로 넘어가는 고개라서 글금재이다. '글금'은 문곡을 이르는 말로 옛날엔 문곡을 글금 또는 글그미라 하였다. 옛날 연화산 유원지 부근에 의병들이 주둔하고 있을 때 글 금재와 질루메기 사이의 산등에 의병들의 감시 초소가 있었다고 한다. |
연당지 ― 연화산 유원지 윗쪽에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는 명당이 있는 곳에 있는 커다란 연못이다. 연못가에 는 박씨네 선대 묘가 있어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상의 명당이라 한다. 둘레 200m 정도의 좀 길게 생긴 연못으 로 아무리 추워도 잘 얼지를 않고 비가 온후 가 보면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처량히 들리는 곳이다. 주위에는 아름드 리 나무가 자라고 있어 풍치가 뛰어나고 산 중턱에 이만큼 큰 연못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이다. 연화부수는 연 못에 연꽃이 피어 떠 있는 형상인데, 그 연꽃이 피어 있는 연못이라고 이 연못을 연당지(蓮塘池)라 한다. 박씨네가 연못물을 트고 망한 전설이 있는 곳이다. |
개불네 밭골 ― 연화산 유원지 맞은 편 딴 연화산 기슭에 있는 골짜기로 경사가 좀 급하면서 우먹하게 생겼다. 옛날 골짜기 안에 '개불네'라는 택호(宅號)를 가진 사람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기에 개불네 밭골이라 한다. 개불네 밭골은 아래쪽에 작은 개불네 밭골도 있다. |
닭으실[酉谷] ― 백산역 건너편 저탄장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원터에서 서쪽에 있다고 유곡(酉谷)이라 하였는데 그 말을 풀어 닭으실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유(酉)'는 닭으로 십이지(十二支) 가운데 서쪽에 해당되는 것이다. 일 설에는 이곳 부근에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이 있어서 닭으실이라 한다고도 한다. 실은 골과 같은 말이다. |
봉화등(烽火嶝) ― 백산초등학교 맞은 편 개울 건너에 볼록한 산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꼭대기에 올라가 보면 커다란 돌담이 있다. 옛날 봉화불을 올리던 곳으로 돌무더기는 봉화대(烽火臺)에 사용되었던 돌들이다. 둘레 약 30m의 돌담 이 쳐져 있고 가운데에 돌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어느때 쌓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고려 때의 원터가 바로 아래에 있는 점으로 봐서 상당히 오래된 유적임에는 틀림 없다. 위치상으로 봐서 통리의 우보산[유령산]과 교신을 한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시대에도 왜란때 삼척 사람들이 이곳으로 피난와서 사용했던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그 후 봉화대터는 제단으로 변했는데 백산마을에서 서낭당으로 이용하였다. 50여년전 이곳 제단에 길이 약 35㎝, 높이 20㎝되는 무쇠말이 하나 안치되어 있었으며 옆에는 몇 아름되는 큰 피나무가 신당목으로 서 있었다. 40여년 전 강모씨가 봉화대 제단의 나무를 베어서 김치독을 만들었다가 동티가 나서 집안에 사람이 죽고 재패가 있었다. 제단 에 가서 빌고 푸닥거리를 하느라고 쌀섬이나 없앴다고 한다. |
옻다물 ― 백산의 3개 자연촌락 가운데 하나이다. 절골로 들어가 서낭굼과 범바우골 사이의 넓은 땅을 옻다물이라 한다. 옻다물 아래쪽에 큰 돌담이 있고 그 돌담에 큰 참옻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었기에 옻다물이라 하였다. 옻다물 을 한자로 '옻담[漆墻]'이라고 쓰기도 하였다. |
처녀폭포 ― 절골 안쪽 물푸레골 아래 개천에 있다. 높이 약 2m의 폭포가 있고 그 아래에 넓은 소가 있다. 실연을 한 처녀가 이 폭포에서 투신 자살하였다고 하여 처녀폭포로 부르게 되었다. 처녀폭포 부근에는 기암절벽과 나무가 어우러져 경치가 뛰어나고 폭포 윗쪽 개울에 크고 작은 폭포와 소가 여럿 있어서 백산에서는 가장 경치가 좋은 곳 이다. |
한 개고디 ― 백산에서 삼척시 동활리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이다. 옛날 백산에 살던 처녀가 시집을 가는데 고개가 어찌나 높고 가파르고 험한지 시댁에 줄 떡함지를 이고가던 사람이 고개에서 구르자 온통 떡이 고개 아래로 굴러가 고 딱 한 개가 남았다고 해서 한 개고디라 한다. 고디는 높고 가파른 고개를 이르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