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슈비츠 수용소
2012년 10월 17일 맑음
오늘은 아우슈비츠를 관람하였다.
인류사상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될 최대의 비극의 장소 아이슈비츠!
말로만 듣던 무시무시한 죽음의 수용소 아이비슈츠!
기아 중노둥 감금 생체실험 사형의 장소 아이슈비츠!
날씨가 맑은데도 불구하고 아이슈비츠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 정경이어서 그런지 이이슈비츠로 들어서는 마음은 어둡고 침울했다.
박물관 입구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되었던 나라들의 국민들에게 5년간이나 공포감을 안겨주었다.
1939년 9월 전쟁 발발 후, 오시비엥침 시를 포함해 그 일대는 독일 제3제국의 일부에 편성되었고, 동시에 이름을 아우슈비츠로 변경하였다
1940년에 설립된 이 수용소는 당초에는 폴란드인 학살 장소로 이용할 예정이었으나, 나치는 전 유럽인들, 특히 유럽 각국에서 각각의 국적을 얻은 유태인, 집시, 소련군 포로들을 이곳에 보내오기 시작하였다.
이 수용소는 도시의 인구밀집지역과 떨어져 있어서 증축과 격리가 용이했다. 게다가 오시비엥침은 철도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유럽 각지로부터 수송이 편리했다는 점도 작용했다.
이 수용소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감금, 굶주림, 중노동, 의학실험, 사형집행 등의 여러 가지 방법에 의해 학살당했다.
수감자수가 늘어감에 띠라 수용소의 크기도 확대되었고, 수용소는 거대한 살인공장으로 변해갔다. SS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는 인종말살이 계획되었던 유태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두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유태인 학살지로 선택했다.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KL Auschwitz Ⅰ)는 새로운 수용소 건설의 기본이 되었다. 1941년에는 오시비엥침시에서 3km 떨어진 브제진카(Brzezinka, 비르케나우의 폴란드 이름)라는 마을에 제2수용소(KL Auschwitz Ⅱ)세웠다.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제1수용소)과 브제진카(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의 수용소는 현재까지 특별히 보존되어 관람이 가능하다.
전쟁이후 그대로 보존되어온 오시비엥침의 ⌜죽음의 블록(Blok Śmierci)⌟과 제1화장터/가스실터, ⌜총살의 벽⌟, 수감자 수송을 위한 철도, 수감동, 감시탑 고압전류가 통했던 철조망, 정문 등은 잔혹했던 나치 범죄의 증거가 되고 있다.
아이슈비츠 (오시비엥침) 제1수용소
아우슈비츠 수용소 정문
독일어로 “ARBEIT MACHT FREI"(일바면 자유로워진다)라는 기만적인 문구가 쓰여 있다. 이 문을 통해서 매일 강제노동에 끌려나간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 이상 씩 을을 해야만 했다.
제1수용소
감시초소가 보인다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수감자들
사형집행과 가스실에 버금가는 효과적인 수감자 처형방법은 노동이었는데, 수감자들은 여러 가지 분야에 혹사당했다. 초창기에는 수용소 증축작업이 고작이었는데, 차츰 그들의 노동력은 독일 제3제국의 산업에 이용당하기 시작했다.
작업은 휴식도 없이 항상 뛰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너무 빠른 작업 속도와 음식부족, 그리고 혹심한 고문 등으로 인해 사망률이 굉장히 높았다. 노동반이 수용소에 돌아올 때, 손수레에는 수감자들의 시체가 쌓여있었고, 그 중에는 삽으로 구타당한 부상자도 섞여 있었다.
수용자들에게 사용하였던 사이클론 비(Cyklon B)라는 독약 통
사이클론(Cyklon B)라는 독약은 데게슈(Degesch)社가 생산해서,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약 30만 마르크의 이익을 내었다. 아우슈비츠에서만 1942년부터 1943년까지 2만kg의 사이클론 비가 사용되었는데,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증언에 따르면, 약 1,500을 죽이는데
6~7kg의 독가스가 필요했다고 한다. 개방 후 수용소 창고에는 사용된 사이클론 비의 빈 통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는데, 그 중에는 내용물이 들어있는 통도 있었다. 전시장의 진열대에는 사이클론 비의 결정 이외에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데사우(Dessau)市의 네게슈社에 보내졌던 사이클론 비 운반명령서 몇 장도 전시되어있다.
머리카락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구 소련군에 의해 개방되던 당시, 창고에서 자루에 넣어진 약 7통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본래 수용소 당국이 독일 본국에 있는 공장에 보내기 위해 모아놓은 것이었다.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머리카락에서 사이클론 화홥물의 독성 원소가 발견되었다. 독일의 공장에서는 그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매트리스의 천 등을 제조하였다.
희생자들의 의족
희생자들의 식기
희생자들의 신발
희생자들의 가방
(제5블럭)에는 개방 후 발견된 희생자들의 소지품이 전시되어 있다. 브러시 종류, 신발, 소유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 적혀 있는 트령크, 식기, 신체장애자의 의수족 등이다. 특히 전시되어 있는 어린이들의 옷과 신발, 우윳병 등이 관람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수용소의 주거상황은 언제나 비참했다
초창기의 수감자들은 콘크리트 위에 놓여진 지푸라기 위에서 잠을 잤는데, 후에는 매트리스를 지급받았다.
40~50인용 방에는 통상 200명의 수감자가 생활했는데, 후에 제작된 3단 침대도 주거생활 개선에는 별 도움을 지지 못해서, 대게 침대 한 층에 2명의 수감자가 잠을 잤다. 게다가 덮고 자는 이불이라고는 더럽고 구멍 난 모포가 고작이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SS는 수감자들을 범죄적인 의학실험에 사용하였는데, 예를 들어 제10블록에서는 카를 를라우베르그 교수(Prof. Carl Clauberg)와 호스트슈만 박사가 슬라브 민족을 생물학적으로 전멸시킬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남녀 단종실험(성기절단 실험)을 자행하였다.
요셉 멩겔레 박사(Dr. Joseph Mengele)는 유전학과 인류학 연구라 하여, 쌍둥이와 신체장애자를 이용해 잔인한 실험을 자행하였다.
▶지하 감옥 이곳에서는 1941년 9월 사이클론 비(Cyklom B)를 사용한 최초의 집단학살 실험이 자행되었는데, 600명의 소련군 포로와 병원에 입원 중이던 폴란드인 정치범 환자 250명이 살해 당했다.
지하에 있는 감방에는 죄인, 수감자를 도왔던 수용소 부근의 일반시민, 탈주하다가 체포된 수감자, 탈주자를 도운 죄로 아사를 선고받은 탈주자의 동료, 수용소의 규칙을 위반했다고 SS에 의해 간주된 수감자 등이 수감되었다. 현재 3종류의 감방을 볼 수 잇는데, 그 대부분은 심문 당하던 죄수들이 감금당했던 감방이다.
지하 감방에서는 “지하실 청소”라고 불리던 죄수 선별이 정기적으로 실시되어서, 선별된 죄수들은 징벌 반에 보내졌거나 총살당했다.
18호실은 아사(餓死)를 선고받은 죄수가 감금되었던 감방의 하나인데, 다른 사람을 대신해 죽은 폴란드 인 막시밀리안 콜베(Maksymilian Kolbe) 神父도 1941년 이곳에 가두어졌었다.
어두운 20호실 감방에서는 한꺼번에 많은 죄수들을 가두어 질식사 시킨 일도 있었다. 21호의 벽에서는 죄수들이 남긴 벽화 낙서들을 볼 수 있고 22호실에는 90✕90cm의 빛도 안 들어오는 좁은 공간에 4명을 한꺼번에 밀어 넣어 세워놓는 벌을 주었다.
⌜죽음의 블록⌟(BLOK ŚMIERCI)
제10블록과 제11블록 사이의 공간은 양쪽에서 높은 벽으로 막혀 있다. 제10블록으 창문에 붙어 있는 나무판은 그곳에서 자행된 사형 집행을 볼 수 없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죽음의 벽⌟ 앞에서 SS대원이 수천명의 수감자들(주로 폴란드인)을 총살했다. 제11블록은 수용소에서 격리된 형무소였다. 1층과 지하실은 당시 그대로 남아 수감자들이 겪었던 비극을 전해준다.
점호광장
점호 시에는 SS가 수감자들의 수를 확인했고, 移動 絞首臺 또는 집단 교수대(점호광장에 복해 놓았다)가 설치되어,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사형 집행도 거행되었다. 집단 교수대에서는 1943년7월19일 3명의 탈주자를 돕고, 수용소 주변의 일반시민과 내통해 왔다고 의심을 받은 12명의 폴란드인이 처형되었다.
점호광장에서 본보기로 처형된 12명의 폴란드인
화장터, 가스실
화장터는 수용소를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 바깥에 있다.
입구로 들어가서 첫 번째로 나오는 커다란 방은 초창기에 시체 안치소였던 것을, 후에 가스실로 개조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1941년부너 1942년 말까지 소련군 포로와 살레지아 지방의 게토(Getto, 유태인지구)에서 연행되어온 유태인들이 독살되었다.
화장터 입구 앞에는 1947년 4월 16일에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스의 사형을 집행한 교수대가 있다.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 브졔진카
(KL AUSCHWITZ Ⅱ, BORKENAU, BRZEZINKA)
브졔진카(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정문을 통하여 수용소로 들어오는 철로
제1수용소에서 3km 정도 떨어진 “브졔진카”라는 마을에는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 비르케나우(브졔진카의 독일식 명칭)가 설립되었다.
이 수용소의 면적은 약 175ha(약 53만평)로, 300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들 중 지금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45동의 벽돌건물과 22동의 목조건물뿐이다. 타버리거나 파손된 건물들에는 벽돌로 된 굴뚝만이 앙상하게 남아있는데 그 수는 수용소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말해 주고 있다.
수용소로 죄수들을 운반했던 철로의 종착지
1967년에 제막된, 나치정권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희생자자들을 위한 국제위령비가 서 있다
위령비 옆에 바닥에 언어별로 이런 동판을 만들어 놓았다
"이곳에서 나치가 유럽의 각처로부터 데리고 온 약 백오십만의 대부분 유대인 남녀성인들과 어린이들을 학살하였다."
폭파된 가스실/ 화장터
후퇴하는 SS대원들이 범죄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폭파한 2동의 화장터/ 가스실이 무너진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자리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이 죽음을 예고 당한 사람들이 옷을 벗었던 지하 탈의실과, 가스실임을 알 수 있다.
동족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던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고 있는 유대인들
학생들로 보이는 이젊은이들은 안내자의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엇다. 그들의 표정은 모두 한결같이 굳어 있었으며 이르는 곳마다 꽃바구니를 놓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였다.
제2수용소의 목조건물
철로 오른쪽의 목조 건물들은 말 52마리를 수용하던 마구간이었으나, 개조해서 약 1,000명의 수감자들을 수용하는데 사용되었다.
1944년 8월 점호시 수감자의 수는 남녀 합해서 10만 명에 달했다. 가뜩이나 식수 부족과 비위생적인 수용소에 쥐의 대량 발생은 수감자들의 생활환경을 심하게 악화시켰다. 수감자들은 영하 20도의 추위와 강한 바람에도, 얇은 죄수복과, 건물 한 가운데로 가로지르는 허술한 난방용 굴뚝에 의존한 채 겨울을 날 수 밖에 없었다.
300동 이상의 건물이 거의 파손되고 지금은 굴뚝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는 모습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의 면적은 약 175ha(약 53만평)로, 300동 이상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들 중 지금까지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45동의 벽돌건물과 22동의 목조건물뿐이다. 타버리거나 파손된 건물들에는 벽돌로 된 굴뚝만이 앙상하게 남아있는데 그 수는 수용소가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말해 주고 있다.
-<글의 출처 : 오시비엥침 박물관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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