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독자들에게 권하는 역사 추적 다큐의 진수
방대한 문헌 기록과 사진, 영상, 증언 망라 압도적
국내 친일매국 집단의 준동에 대한 경각심도 높여
전세금 빼 월세 단칸방으로 옮긴 감독의 4년 집념
일본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용기와 헌신 어우러져
학살 101주기 되는 9월1일 총 9회 무료 시사회도
시민언론 민들레에서 함께 일하는 후배 김성진 기자가 저한테 영화 관람권 2매를 선물해준 게 지난해 6월이었는데 1년이 넘도록 못 쓰고 있다가 일요일인 어제 마침내 아내와 함께 극장으로 향했습니다. 원래는 액션 블록버스터 <트위스터스>를 볼까, <에이리언: 로물루스>를 볼까 고민했지만 결국 막판에 아내가 제안한 <1923 간토대학살>로 급변경했죠. 제가 여름휴가 중이라 기분 전환도 할 겸 그냥 가볍고 재밌는 영화를 보고 싶었던 터라 아내가 관동대학살에 관한 다큐 얘기를 꺼냈을 때 처음엔 사실 떨떠름했습니다. 그러나 극장에서 나올 땐 역시 아내 뜻에 순종해서 손해 본 일이 없었던 경험칙을 재확인하며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가 거의 없던 상태에서 그간 일제 만행과 관련한 책들이나 이준익 감독 작품 <박열>을 통해 웬만큼 아는 내용일 거라고 짐작했는데 완전한 착각이었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문헌 기록과 사진, 영상, 증언 등 방대한 자료가 전해주는 당시의 참상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러닝타임 2시간(117분) 내내 잠시도 한눈을 팔 틈 없이 초집중해서 본 압도적 다큐멘터리였습니다. 다른 관객들도 심정이 비슷했는지 극장 안이 이렇게 조용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숨죽인 분위기였습니다. 배우 김의성 씨의 내레이션과 자막을 포함해 전반적인 편집은 비교적 차분하고 침착한 기조를 유지하지만 관객들은 저마다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교차하는 가운데 절로 눈시울이 붉어짐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1923 간토대학살' 포스터
대지진 바로 다음날 천황의 이름으로 선포된 계엄령을 시작으로 내각과 언론, 경찰, 군대, 각 지자체, 자경단이 조직적으로 연계해 힘없는 '불령선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도륙하는 증오범죄의 지옥도를 목도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10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간교하고 악독한 은폐 공작으로 일관하는 일본 정부와 거기에 장단을 맞추는 한국의 토착왜구 집단을 떠올리면 역사의 진실을 뼈에 새기는 결의를 새롭게 다지게 됩니다.
영화에서는 대도시 도쿄와 요코하마를 중심으로 도처에서 이뤄진 조선인 제노사이드의 실태를 미국‧영국‧독일 등 일본 주재 서방 특파원들이 자사에 기사로 타전했지만 일제가 이를 어떻게든 차단하기 위해 사전에 최대한 보도 통제를 하고 사후엔 각국 일본 대사관을 통해 무마 작업을 벌였던 증거들도 제시합니다. 이는 독일 베를린을 비롯해 미국, 호주, 캐나다, 필리핀 등 세계 각지에서 건립이 추진된 '평화의 소녀상'을 사전에 막거나 사후에 철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기를 쓰고 외교력과 자금력을 동원해온 작태와 그 본질이 똑같아 소름이 돋게 합니다.
일본 자민당 및 극우 세력의 혐한 내력과 역사 지우기 행각이 이토록 뿌리 깊은데도 오히려 갈수록 노골화하는 한국 내 친일매국 세력의 준동, 특히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100주기 추모 행사에 참석한 윤미향 의원을 '친북'으로 몰며 또 다시 난폭한 마녀사냥을 전개했던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 조선일보의 존재를 생각하면 일본 탓만 하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다수 언론이 윤미향 의원 공격에 가담했지만 민들레는 그들의 왜곡 보도를 타파하는 데 주력했음을 독자들은 잘 아실 겁니다). '내부의 적'이 가하는 현실적 위협에 관한 연상은 가령 윤석열 정권과 친일매국 집단이 야당과 촛불시민들을 '반국가세력' '공산전체주의 세력'으로 몰아 계엄령 선포, 나아가 독재정권 시절과 같은 백색테러와 학살극을 벌일 가능성에까지 생각이 미치게 합니다.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 일본인들 손에 학살당한 조선인 문제를 추적해 온 일본 시민단체 호센카 재단의 니시자키 마사오 이사가 조선인 학살 관련 사진을 들고 있다. 흑백사진 속의 검사가 가리키는 곳이 학살당한 조선인들을 집단매장한 도쿄 아라카와 강변이다. 2023.-06.21. AFP 연합뉴스
관동대학살 조선인 희생자를 추모하는 호센카(봉선화) 재단의 신민자 님. 학살이 이루어진 아라카와강 현장에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2023.8.30. 이호 사진작가
이 영화는 희생자 6661명(상해 임시정부 추정 수치인데 학살된 조선인 숫자가 그보다 훨씬 많다는 사료들도 존재합니다)을 위한 진혼곡으로서, 제작진이 4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불굴의 소명의식으로 마침내 개봉한 역사 추적 다큐멘터리의 진수입니다. 일본의 시민운동가들이 오랜 세월 치열한 현장 답사와 관계자 탐문 등을 통해 발굴‧수집한 자료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입니다. 저도 신문기자 시절 일제 강제동원 현장을 찾아다니며 취재할 때 느꼈습니다만, 일본 내 극우 세력의 겁박에 굴하지 않고 각지에서 활약하는 풀뿌리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열정과 끈기, 용기와 헌신, 그리고 대가를 바라지 않는 마니아적 몰입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이들과 연대해 싸울 수 있다는 점이 영화를 보는 내내 암울했던 심사를 밝히는 한 줄기 희망의 등불이었습니다.
극장이 텅 비었으면 어쩌나 좀 걱정했는데 분당 CGV 야탑점에는 다행히 관람객이 20명 넘게 자리했습니다. 영화 상영 전 한창 광고 타임 중에 예고 없이 최규석 공동감독이 스크린 앞에 나오더니 감사 인사를 하면서 "오는 9월 1일 관동대학살 101주기가 되는 날까지 저희 영화가 계속 상영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다"며 응원을 부탁하곤 상영이 끝난 뒤에도 출구 앞에 서 있다가 관객들에게 일일이 영화 소개 팸플릿을 나눠줬습니다. 답례로 몇 마디 격려 말씀은 드렸는데 사진이라도 한 장 같이 찍을 걸 그랬습니다. 나중에 알았지만 공동감독 두 사람 중 김태영 감독은 전세금을 빼느라 월세 단칸방으로 옮겼으며 최규석 감독은 친구들에게 사정해 3000만 원을 빌리는 등 제작비와 홍보비 마련을 위해 수없이 '앵벌이'를 했다고 합니다.
'1923 간토대학살' 최규석 감독이 관객들에게 건네준 팸플릿. 2024.8.25. 김호경 에디터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영화 소개 기사도 별로 없고(아니나 다를까 조선일보는 한 줄도 안 썼습니다), 심지어 네이버 영화 코너의 '평론가' 관람평에도 박평식의 한 줄짜리 리뷰("기억하라 일제 만행, 경계하라 친일 좀비") 하나만 달랑 올라와 있더군요. 오늘 누적 관객수를 확인해 보니 주말이 지났음에도 7000명밖에 안 되네요. 소위 뉴라이트 세력이 옹호하는 일제 강점기 시대의 실태가 과연 어땠는지, 당시 '일본 국적'이었다는 조선인들이 얼마나 참혹한 민족적 차별을 겪었는지를 알기 위해 누구보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여당 인사들이 앞장서 봐야 할 영화지만 저들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일 양국에 역사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려는 제작진의 피땀이 어린 노작이자 완성도 높은 명품 다큐라는 입소문이 퍼져 민주 시민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습니다.
간토대학살 101주기가 되는 오는 9월 1일 일요일에는 '메모리얼 시사회'가 열려 CGV 용산아이파크몰,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메가박스 코엑스점 셋 곳에서 무료 상영을 한다고 합니다.
일시 : 2024년 9월 1일 13:30 / 16:00 / 18:30 3회차 (총 9회차)
장소 : CGV 용산아이파크몰 / 롯데시네마 월드타워 / 메가박스 코엑스
대상 : 1700명
참가비 : 무료
☞ 메모리얼 시사회 신청하기
☞ 1923 간토대학살 메인 예고편
일본 작가 가와메 데이지(1889~1958)의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스케치'. 국립역사민속박물관
제작진은 일본 시인 쓰보이 시게지가 관동대학살을 고발한 시 <쥬고엔 고쥬센(十五円五十錢, 15엔 50전)>에서 호소했던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습니다. 이 시의 제목은 관동대지진 때 검문에 걸린 조선인들이 '쥬고엔 고짓센'이라는 일본어 탁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살해당했던 비극을 상징합니다. 시의 한 구절을 소개하는 것으로 민들레 독자들에게 영화 한 편 추천하는 글을 마칩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 말을 빼앗기고 / 최후에 생명까지 빼앗긴 조선의 희생자여 / 나는 그 수를 셀 수가 없구나. (…)
그대들 자신의 입으로 / 그대들 자신이 생전에 받았던 잔학을 증언할 수 없다면 / 그대들 대신 말할 수 있는 자에게 말하게 하오."
첫댓글 쥬고엔 고짓센..
십볼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