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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H2O인가?/ 장하석
3장 HO일까, H2O일까?: 원자의 개수를 세는 법을 터득하기까지
- 1808년에 발표된 돌튼의 원조 원자론에서 물은 HO로 제시 : <새로운 화학철학 시스템>
- 아보가드로가 처음 제안한 H2O라는 분자식이 옳다는 합의는 원자가라는 개념에 기초를 둔 유기 구조 이론이 19세기 중반에 확립된 다음에야 이루어졌다.
* 원자가 Valency or Valence : 한 원자가 몇 개의 다른 원자를 결합할 수 있는가 / 호프만의 막대기 수나 케귤레의 소시지 길이는 이 원자가의 표현(수소1, 산소 2, 질소 3, 탄소 4)
- 인식론적 주요 난점은 관찰 불가능성이었다. 원자량을 알아야만 분자식을 알 수 있고, 거꾸로 분자식을 확실히 알아야만 원자량을 알 수 있었다. 일관된 분자식들과 원자량의 체계가 여럿 존재했으며, 그 체계들은 19세기에 번창한 최소 다섯 가지의 원자화학 시스템들에서 사용되었다.
- 그 원자화학 시스템들 각각의 핵심에는 원자 개념을 활용 가능하게 만드는(원자들의 무게를 재고, 개수를 세고, 유형을 분류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놓여 있었다. 그런 활용 가능하게 만들기 덕분에 원자론들은 관찰된 현상과 정합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한낱 가설에 머물지 않고 그 이상으로 될 수 있었다.
- H2O가 옳다는 합의가 이뤄진 결정적 시점을 보면, 치환반응을 이용하여 원자의 개수를 세는 좋은 방법들이 확립된 것이었다.
- H2O에 대한 합의가 모든 원자화학 시스템들의 간단명료한 통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해당 분야의 재구성이었으며, 그 결과로 새로운 다원적 발전 단계가 도래했다.
3.1 볼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셀까?
- 원자화학에서 처음 채택된 물의 분자식은 HO였다. 게다가 유럽 최고의 화학자들이 물은 H2O라는 합의에 이르기까지 50여 년이 걸렸다. H2O가 물의 분자식으로 안착할 수 있기 위하여 먼저 유기화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온갖 열정적 토론과 복잡한 발전 과정이 필요했다.
당시도 지금도 개별 원자들을 직접 관찰할 길은 없다. 그럼 어떻게 원자를 셀 수 있었을까?
- 존 돌튼(1766~1844) : ‘화학적 원자학의 아버지’, 노동계급의 퀘이커교도의 자식, 초등교육 학력, 잉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의 교사, 런던 왕립학회 회원, 왕 알현, 맨체스터 문학 철학 협회 회장, 장례는 사회장
- 업적 : 익숙하고 오래된 원자 개념을 18세기 합성주의 화학과 융합하여 19세기 원자화학으로 이어지는 필수 연결고리를 창조한 것. 그는 다양한 화학물질들이 서로 결합할 때 따르는 비율의 놀라운 규칙성을, 화학결합이란 명확히 정해진 무게를 지닌 원자들의 결집이라고 전제함으로써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많은 화학자들이 돌튼의 원자를 그대로 믿기를 꺼렸지만, 곧 기본 물질들(원소들)을 이루는 원자적 단위들의 결집과 재결집을 통해 화학반응을 개념화하는 것은 통상적인 실천으로 자리잡았다.
1) 관찰 불가능성과 순환성
- 지금 우리가 아는 원자와 유사한 무언가를 돌튼이 생각한 건 아니다. 돌튼이 생각한 원자의 크기와 무게는 다 틀렸다. 1808년까지 원소 20개의 원자량을 측정했는데, 현대의 값과 일치하는 것은 하나(은) 뿐이다.
몇몇 불일치는 돌튼의 실험 기술이 부정확하거나 잘못된 분자식들과 연결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물은 HO라는 분자식을 부여했다. 그가 아는 한에서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화합물은 물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물 분자를 HO라고 추측했다. 그는 동일한 원소의 원자들이 서로를 밀쳐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자들의 단순한 조합을 좋아했다.
- 그런데 우리는 올바른 분자식이 H2O라는 것을 어떻게 알까? 똑똑한 아이들의 순환논리
“수소와 산소의 원자량은 1과 16인데, 실험실에서 물을 분해해보면, 산소 8그램이 나올 때 수소 1그램이 나온다. 따라서 수소 원자 2개가 산소 원자 1개와 결합하여 물분자를 이뤄야 한다. “
수소의 원자량이 1이고 산소의 원자량이 16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까?
“우리는 분자식이 H2O임을 안다. 따라서 수소와 산소가 결합할 때 총 무게 비율이 1:8이라면 수소와 산소의 원자량 비율은 1:16이어야 한다. “
그럼, 우리는 물의 분자식이 H2O라는 것은 또 어떻게 아는가?
이것이 돌튼과 그의 동시대인들 모두를 괴롭힌 순환성이다. 우리가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은 총 결합 무게들뿐이다. 우리가 분자식을 안다면, 결합 무게들로부터 원자량들을 추론할 수 있다. 우리가 원자량을 안다면 분자식을 추론할 수 있다. 그러나 관찰만으로는 원자량도 알 수 없고 분자식도 알 수 없다. 이 순환성을 깨뜨리지 못하는 한, 원자화학은 제대로 이륙할 수 없었다. 돌튼의 ‘최대 단순성의 규칙들’은 순환성을 깨뜨릴 방법을 제공했다.
- 과산화수소는 H2O2인데, 돌튼은 과산화수소를 몰랐고, 훗날 톰슨은 숙고 끝에 새로운 화합물은 HO2로 결론짓고 ‘이산화수소’로 명명하고 물은 HO라는 견해를 유지했다.
- H2O에 동의한다는 것은 원자량들과 분자식들의 체계 하나를 통째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뜻했다. 화학자들은 1850년대에 이르러서야 원자량들과 분자식들에 관한 일반적 합의에 도달했다.
2) 아보가드로-칸니차로 신화
- “한 괴짜 이탈리아인이 진리를 알아챘지만 무시당했는데, 결국 50년 뒤에 더 체계적이고 집념이 강한 다른 이탈리아인이 그의 연구를 발굴하여 그것이 옳음을 모두에게 확신시켰다” 아보가드로의 생각은 당대에 싸늘하게 취급당했고, 간간히 다양하게 재등장했으며, 결국 칸니차로에 의해 확립되었다.
- 아메데오 아보가드로(1776~1856): 법률가 교육과 수련을 받음, 이탈리아 피에몬테 주 베르첼리 소재 왕립 칼리지의 자연철학교수, 이탈리아 소도시 과학교사, 토리노대학 교수, 분자이론, H2O
- 아보가드로는 ‘이븐’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원자론에 대해서 함축하는 바를 밝혀냈다. 화합물의 분자식은 결합 부피들에 기초하여 결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돌튼을 “화합물 속 분자들의 가장 그럴싸한 개수 비율에 관한 자의적 전제들”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비난했다.
- ‘이븐’(EVEN) : Equal Volume Equal Number 동일 부피 동일 분자수 가설로, H2O라는 분자식을 제공했지만, 또한 물의 부피가 2일 것을 요구했다.
- 아보가드로는 ‘이븐’을 유지하기 위하여 물 분자가 양분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 제안이 옳다면 산소 원자도 양분되어야 할 텐데 이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그는 산소 입자가 애초부터 2원자 분자여야 한다고 추정했다. 수소도 마찬가지. 2H2 +O2=2H2O
-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그의 가설을 충분히 정당한 이유로 배척했다. 돌튼과 이원주의의 전도사 베르셀리우스는 이 가설을 배척했다. 같은 유형의 원자 2개는 같은 전하를 지니므로 서로를 밀어낸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아보가드로는 왜 동일 유형의 원자 2개가 서로 달라붙는지, 또 달라붙는다면 왜 그런 뭉치기가 원자 2개에서 종결되는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돌튼은 ‘이븐’에 저항할 물리학적 이유가 있었다. 배척의 이유로, 만일 ‘이븐’이 참이라면, 기체들이 결합할 때 반드시 총 부피의 감소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들이 서로 결합하면서 입자들의 전체 개수가 줄어들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총 부피의 감소가 항상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 스타니슬라오 칸니차로(1826~1910) : 이탈리아 시칠리아 태생, 혁명적 정치가, 화학자, 연구자, 교육자, 한 참고문헌에 따르면,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부활시킴으로써 1850년대에 모든 최신 화학 연구를 완벽하게 종합하면서 현대 원자론의 토대를 마련했다. “
3) 원자화학에서 작업주의와 실용주의
- 부피 측정에 기초한 추론은 원자화학의 발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했지만 아보가드로나 칸니차로를 통해 그런 중요성이 획득되지는 않았다. 화학적 단위는 원자의 무게 뿐 아니라 그것이 차지하는 부피를 통해 개념화될 수도 있다.
- 부피 측정에 기초한 사고의 진짜 위력은 ‘원자가’ 개념을 통해 드러났다. 1865년에 출판된 아우구스트 빌헬름 호프만의 <현대 화학 입문>은 원자가 개념의 형성 과정을 매우 합리적이며 아름답게 재구성한다.
- 호프만은 수소 기체와 염소 기체 1:1의 부피 비율로 결합하여 염산을 이루고, 수소 기체와 산소 기체는 2:1의 부피 비율로 결합하여 물을 이루며, 수소 기체와 질소 기체는 3:1의 부피 비율로 결합하여 암모니아를 이룬다고 지적한다. 이 부피 비율들로부터 염산의 분자식 HCl, 물의 분자식 H2O, 암모니아의 분자식 H3N이 나왔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원자들의 가설적 개수가 아니라 부피 측정에 기초하여 확증된 원자들의 상대적 개수였다.
- 이 중대한 발전은 작업주의의 승리였다. 이것은 19세기 중반 원자화학자들의 다수가 공유한 전형적인 태도다. 그들은 실험적 작업과 직접 연결될 수 있는 이론적 생각을 진지하게 취급했으며, 그런 연결을 점점 더 많이 발견하고 발명하고 확보하려 애썼다.
- 이 화학자들은 이론적 작업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작업적 토대를 확장하려 애썼다. 그들은 관찰 불가능한 원자와 분자를 거론하는 것을 아예 삼가는 실증주의자도 아니었고 원자와 분자에 대한 자신들의 그림을 굳게 믿는 순박한 실재론자도 아니었다. 이 철학적 미묘함은 겸허함에서 유래한 실용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관찰 불가능한 것의 불확실성 앞에서 체념하는 겸허함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적극적으로 자신을 추구하는 겸허함에서 말이다.
19세기 원자화학에서 가장 값진 진보는 불확실성을 참아내며 현실에 충실하게 수행한 이론적 경험적 탐구에 의해 이루어졌지, 교리적 명확성이나 공리적 제일원리의 고수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았다.
4) 미결정에서 다원주의로
- 1816년까지 등장한 원자화학 시스템들이 최소 9개에 달했는데 그중 서로 경쟁하고 상호작용하며 발전한 주요 실천 시스템들을 5개 꼽을 수 있다.
i. 무게 유일 시스템 : 물질들의 거시적 결합 무게로 부터 원자량을 추론하여 결정하고 사용하는 일에 집중하며, 이 시스템을 실천한 사람들은 현상에 대한 이론적 설명보다 화학적 분석에 집중했다.
ii.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 : 볼타 전지를 사용하여 다양한 물질들을 전기분해하고, 화학반응을 원자들의 정전기적 인력과 척력의 귀결로 이해되었다.
iii.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 : 아보가드로가 처음 구성했으며, 화학자들은 무게 뿐 아니라 부피도 물리적 원자들의 측정 가능한 속성으로 간주했다. 중점은 실재론인데, 즉 다양한 물질의 원자와 분자의 진짜 속성들을 알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이븐’은 이 시스템의 주춧돌이었다.
iv. 치환-유형 시스템 :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에 대한 환상이 깨지면서 등장했다. 큰 영향력을 발휘한 일군의 유기화학자들은 원자와 분자의 진짜 속성들에 관하여 사변하는 대신에 분류를 주요 목표이자 활동으로 삼았다.
v.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 : 많은 초기 유형이론가들은 유형 공식의 취지가 분자의 실제 기하하학적 구조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여겨지지 않았다. 정말로 그 구조를 알아내는 일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이 시스템을 실천했다.
- 완벽한 시스템은 단 하나도 없었다. 예컨대 무게 유일 시스템은 분자식의 결정이 자의적이라는 문제에 시달렸다. 선택지들이 다수라는 점, 그리고 어떤 선택지도 완벽하지 않다는 점은 그들을 이중으로 낙담시켰다.
- 아무튼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이는 시스템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원자량들과 분자식들 시스템에 대한 합의가 늦어도 1860년대에 이루어졌다. 그 이전의 미결정 상황은 유기화학의 발전 덕분에 해소되었다. 탄소의 원자가를 4로 확정한 것과 같은 구조 이론의 성과들이 비교적 단순한 화합물들의 분자식을 유일무이하게 결정할 수 있게 해주고 그 결과 원자량들이 확정되었다.
-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 다음에 경쟁 이론들 중 일부를 종합하는 것이 가능했다. 원자가라는 개념은 위 마지막 세 시스템의 종합을 가능케 했다.
- 미결정 문제 : 이론이 증거에 의해 불충분하게 결정된다는 문제. 철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서로 정반대되는 두 가지 반응을 보여왔다.
다수의 이론들이 존재할 가능성과 어떤 이론도 확실성을 보유하지 못한다는 점을 환영하는 반면, 다른 철학자들은 미결정에 강한 불만을 느끼면서, 모든 증거가 확보되면 각각의 영역에서 단 하나의 이론이 참된 이론 혹은 가장 좋은 이론으로서 등장할 것이라고 논증하려 한다.
- 과학자들은 다양한 이론을 포함한 다양한 실천 시스템들을 발전시키며, 그 시스템들은 다양한 인식적 목표들의 성취에 적합하다. 위대한 과학적 성취들은 이런 식으로 미결정을 육성하는 것에서 나오지, 미결정성을 제거하는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
3.2 원자화학에서 다양성과 수렴
- 이 절의 목표는 19세기 전반에 화학적 원자에 관하여 이루어진 지식의 발전을 체계적이며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화학적 원자론의 발전을 이 분야의 다양한 실천시스템들과 관련지어 분석하는 것, 그리고 그 시스템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분석하는 것이다.
1) 화학적 원자의 개념을 작업화하기
- 원자량들과 분자식들을 알아내는 19세기 화학의 성취는 원자-분자 수준이 실재를 직접 관찰하지 않고 이루어졌다. 그들은 원자-분자적 개념들을 구체적 경험적 실천들과 직접 융합하는 법을 터득했으며, 그렇게 융합할 수 없는 개념들을 경계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화학자들은 예컨대 아보가드로의 생각을 더 경험적인 방식으로 다룰 수 있게 된 다음에야 비로서 그 생각을 받아들였다.
원자는 인간의 감각으로 직접 접근할 수 없지만 화학적 원자를 경험적으로 다루는 방법들이 다양하게 있었다. 그래서 ‘관찰 가능성’ 대신 작업화라는 주제를 고찰하고자 한다.
작업화는 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반박될 수 있다. 그러나 작업화 방법은 실제로 개념의 의미 자체의 일부이기도 하다. 만일 어떤 작업화가 작업적 정의로서 구실한다면, 그 작업화 이전에는 해당 개념의 의미가 그 개념을 포함한 모든 진술의 진릿값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허용할 만큼 충분히 확정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 작업화하기 : 동등성에 의거하여 무게를 측정하기/ 결합에 의거하여 무게를 측정하기/ 부피에 의거하여 개수를 세기/ 비열에 의거하여 개수를 세기/ 전하에 의거하여 분류하기
- 19세기 주요 경쟁하는 원자화학 시스템들 : 무게 유일 시스템/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 치환-유형 시스템/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
2) H2O 합의
- 19세기 중반 원자화학의 모습은 매우 복잡했다. 주요 실천 시스템을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고 그것들의 상호관계가 복잡하고 역동적이라는 점도 드러났다.
- 그러나 위에 서술한 다섯 가지 원자화학 시스템들의 중요한 성취들은 새로운 물질들을 다수 발견했고, 새롭거나 이미 알려진 무수한 물질들을 정확히 분석했으며 원자에 관한 작업적 지식을 획득했고, 유기물질들을 분류했으며, 다양한 화학반응들을 예측하고 설명했다.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중대한 성취일뿐더러 후대 화학자들의 성취를 위한 디딤돌이었다.
- 로크는 1850년대에 일어난 유기화학의 개혁을 ‘조용한 혁명’으로 명명했다. 그 개혁의 산물로 H2O를 비롯한,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분자식들과 원자량들이 등장했다. 한 지배적 시스템이 타도되고 다른 지배적 시스템이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훨씬 더 다윈주의적인 발전 패턴이었다는 것이다.
3) 합의를 넘어서
- 주요 논점은 다원성의 가치가 될 것이다.
-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의 종말 : 그 시스템의 핵심은 화학결합에 관한 정전기학적 설명이었다.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의 핵을 이룬 설명의 강력한 목표와 단순한 도식은 당시에 융합하던 나머지 세 시스템들과 조화될 수 없었다. 유형에 대한 숙고는 이원주의의 핵심 전제를 부정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점, 아보가드로의 2원자 원소들은 이원주의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화학결합에 관한 설명은 이원주의의 핵심이었을 뿐 아니라 주요 장점들 중 하나였다. 다른 시스템들은 그 장점을 능가하지 못했다.
- 4장과 5장에서 상술할 ‘보호주의적 다원주의’라는 신중한 유형의 다원주의에 입각하여 다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합당한 이유들 때문에 일단 잘 정착한 실천 시스템은 훗날 완전히 가치 없게 되기 어려우며 폐기되더라도 반드시 매우 신중하게 폐기되어야 한다.
전기화학적 이원주의는 결코 죽지 않았다. 단지 원자화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물리화학이라는 새로운 하위 분야를 더 자연스러운 거처로 삼았을 뿐이다. 계속 생존하여 20세기의 이온결합 개념 안에 깃들었다.
- 새로운 합의의 이런 결함들을 감안하면, 아주 오랫동안 자기네 이론의 형이상학적 진리성에 관하여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그렇게 반세기 동안 격동적인 발전을 거치고 나자, 이제 원자는 분할 가능하고, 막대기로 표현된 결합은 허구이며, 원자가는 양자화학에 정확히 들어맞기 어려운 개념이다.
- 물은 H2O가 아니라고 보는 화학 시스템을 상상할 수 있으려면, 화학의 진화 계보에서 얼마나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과학에서 절대적으로 영원하며 변경 불가능한 성취란 없다.
3.3 복잡한 화학에서 미묘한 철학으로
1) 작업주의
- 브리지먼 : 작업주의 철학자, 실험물리학자, 고압 물리학에 관한 선구적 연구의 공로로 1946년에 노벨상
자신의 실험실에서 브리지먼은 당시까지 다른 과학자들이 도달한 압력보다 거의 100배 더 높은 압력을 만들어내고 그런 고압에서 다양한 물질들이 어떤 참신한 행동을 하는지 탐구했다. 극단적 고압에서는 기존에 알려진 모든 측정기가 망가졌다. 자신이 도달한 압력의 최고 기록을 계속 갱신하면서 브리지먼은 점점 더 높은 압력에 접합한 새로운 측정법들을 잇따라 개발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가 가용한 측정법이 존재하지 않는 개념들의 근거 없음을 진지하게 숙고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경험주의는 관찰 가능한 것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 데 집중한다. 반면, 작업주의는 실행 가능한 것을 지식의 토대로 삼는 데 초점을 맞춘다. 19세기에는 원자와 분자를 이런 의미에서 관찰 가능하게 만들 길이 없었다. 그럼에도 원자와 분자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었다. 화학자들은 원자와 관련된 다양한 속성들을 측정하는 방법을 알아냄으로써 원자를 작업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 염소-수소 치환반응을 실행하고 흡수된 염소기체와 방출된 수소 기체의 미세한 부피들을 측정함으로써 연구자는 그 반응에 참여하는 염소 원자와 수소 원자의 상대적 개수들을 측정한다. 이 원자-세기는 아주 잘 확립된 실천이지만, 이 실천으로 염소 원자와 수소 원자가 관찰 가능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비록 원자 자체는 관찰 불가능한 상태로 머물러 있더라도, 원자화학은 이런 식으로 번창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관찰 불가능한 것을 세는 방법이다.
2) 실재론
- 화학적 증거가 아무리 많았다 하더라도 분자들의 참된 기하학적 구조나 원자들의 실재성에 관한 의심을 완전히 해소할 수는 없었다.
- 무게 유일 시스템에서는 어떤 불명확한 무게의 보유자로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믿음과 인정은 있었지만 그 외의 의미에서 원자가 실재한다는 믿음은 딱히 없었다. 심지어 물리적 부피-무게 시스템도 원자의 물리적 속성들로서 무게와 부피를 인정할 따름이었다. 전기화학적 이원주의 시스템에서는 실재론적 믿음이 조금 더 깊었다. 이 시스템은 전하를 띠었으며 경계가 명확한 입자로서의 원자들과 그것들이 서로에게 발휘하는 힘들을 상상했다. 치환-유형 시스템은 원래 무게 유일 시스템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원자의 실재성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다만, 이 시스템은 기에 화학적 단위로서의 실재성을 부여했다.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은 원자들 사이의 위상수학적 공간적 관계의 실재성을 믿고 인정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이 관계는 분자들의 실재적인 3차원 모양을 완전히 결정하지 않았다.
- 화학자들은 각자 자신의 원자화학 시스템을 실천하기 때문에 반드시 믿어야 하는 만큼을 넘어선 수준의 믿음을 물리적 원자에 대해서 품고 있었다. 돌튼과 아보가드로도 그랬다. 대조적으로 초기에 치환-유형 시스템과 심지어 기하학적-구조적 시스템에 속했던 화학자들 중 다수는 자신들의 실천이 요구하는 만큼의 믿음에서 조금도 더 나아가지 않았다.
3) 실용주의
- 19세기 원자화학자들은 실용주의 철학을 따랐다는 의미에서 실용적이었다는 것이다.
- 번스타인은 ‘실용주의적 태도’를 서로 관련된 다섯 가지 개념을 통해 규정한다. 반토대주의/ 오류가능주의/ 비판적 공동체의 육성/ 근본적 상황의존성의 자각/다수성
i. 내가 보기에 실용주의는 앎의 뿌리가 실천에, 활동에 있음을 강조한다. 실천하는 과학자들의 대다수는 내가 말하는 의미의 실용주의자였으며 특히 화학 같은 분야에서 그러했다.
ii. 우리의 생각에 사용된 개념들은 작업가능해야한다는 주장, 우리가 그것들을 가지고 무언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 그것들이 모종의 명확하고 정합적인 활동들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실용주의와 작업주의 사이의 연관성이 명확히 드러난다. 나는 원자 개념의 작업화를 원자화학자들이 이뤄낸 성공의 열쇠로 지목해왔다. 19세기 화학자들의 다수는 구체적인 실험적 이론적 연구에서 원자 개념을 활용 가능하게 만드는 다양한 길들을 추구했다.
iii. 실용주의의 모든 버전에는 어느 정도의 오류가능주의가 내재한다. 이 오류가능주의는 인간의 인식 능력에 관한 기본적인 겸허함에 그 뿌리를 둔다
19세기 전반기 원자화학자들의 공동체, 심지어 몇몇 완고한 개인들조차도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꺼리지 않았다. 돌튼은 자신의 원자량 값들을 계속 업데이트했다. 리비히와 뒤마는 각각 이원주의 이론과 아보가드로의 관점을 열렬히 채택했는데 더 나중에는 무게 유일 시스템으로 되돌아갔고, 다원주의를 뒷받침했다.
iv. 과학에 관한 실용주의는 과학이 삶의 일부라는 점과 과학의 목표들은 삶의 관심사들과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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