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1부 6 중요한 것은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해나가는 일이다.
‘페스트’라는 말이 비로소 들먹여지게 되었다. 이제 이야기는 베르나르 리외가 창가에 앉아 있는 데까지 진행되었는데, 여기서 필자가 그 의사의 의아심과 놀라움을 정당화하는 것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뉘앙스를 지닌 채 그가 보인 반응은 시민들 대부분의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재화(災禍)란 누구에게나 닥쳐오는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는 여간해서 믿기 어려운 것이 된다. 이 세상에는 전쟁만큼이나 페스트가 흔했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 터졌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다. 의사 리외도 모든 시민이 그랬던 것처럼 속수무책이었다. 따라서 그의 망설임도 이해해야 한다. 또한 그가 불안과 신념 사이에서 엉거주춤하고 있었던 것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전쟁이 터질라치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오래가지는 않겠지. 너무나 어리석은 일이야.” 전쟁이라는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짓일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가지 말란 법은 없다. 어리석은 일은 항상 악착같다. 사람들이 늘 자기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 시민들은 모든 사람처럼 자기들 생각만 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휴머니스트들이었다. 즉, 그들은 재화를 믿지 않고 있었다. 재화는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재화란 비현실적인 것으로, 이내 지나가버리는 악몽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항상 재화가 사라져버리지는 않는다. 악몽에서 악몽으로 계속되며, 사라지는 것은 오히려 인간들이다. 특히 휴머니스트들이 맨 먼저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그들은 제 몸을 보살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시민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잘못이 더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겸손할 줄 몰랐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것이 자신에게는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며, 그랬기 때문에 재화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사업을 계속했고, 여행 떠날 준비를 했고, 제각기 의견을 토로하기도 했다. 미래라든가 이동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말살하는 페스트를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재화가 있는 한 아무도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의사 리외가 자기 친구 앞에서 여기저기에서 발생한 수많은 환자들이 아무 예고도 없이 방금 페스트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도, 그에게 위험은 여전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다만 의사이기 때문에 고통에 대해 대강 알고 있었고, 좀 더 풍부한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창밖의 변함없는 시가를 내다보면서, 의사는 이른바 불안이라는 미래에 당면해 가벼운 구토증을 느꼈지만 대수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 병에 관해서 알고 있는 바를 머릿속에서 종합해보려고 애썼다. 숫자들이 그의 기억 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그는 역사상으로 알려진 약 30회에 걸친 대대적인 페스트가 약 1억의 인명을 앗아갔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1억의 사망자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쟁 중 한 사람의 사망자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의 죽음이란 죽는 것을 누가 봤을 경우에만 의미를 갖는 것이어서, 역사를 통해서 뿌려진 1억의 시체라는 것은 상상 속의 한줄기 연기에 불과한 것이다. 의사는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페스트의 기억을 더듬었다. 프로코프에 의하면 하루 동안 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는 것이다. 만 명의 사망자라면 커다란 영화관 다섯 배다.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알기 쉬울 것이다. 다섯 군데 극장이 끝나서 나오는 사람들을 모아서 그들을 시가지 광장으로 끌고 간 다음, 무더기로 그들을 죽여버린다. 그러면 적어도 그 이름 모를 시체의 더미 위에 낯익은 사람의 얼굴을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누가 만 명씩이나 남의 얼굴을 알고 있단 말인가? 게다가 프로코프 같은 사람들은 수를 헤아릴 줄도 몰랐음이 자명한 일이다. 70년 전에 광둥(廣東)에서는 그 재화가 주민들에게 퍼지기 전에 쥐 4만 마리가 페스트로 죽었다. 그러나 1871년에는 쥐를 헤아리는 방법이 없었다. 모두 주먹구구로 대강대강 계산했고, 그래서 오차가 생길 가능서잉 많았다. 그래도 쥐 한 마리의 길이를 30센티미터라고 할 때 4만 마리를 잇대어 늘어놓는다면………
그러나 의사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되어가는 대로 보고만 있었으나, 그래서는 안 될 판이었다. 몇몇 증세로 유행병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조심만 하면 충분하리라. 마비와 쇠약, 눈의 충혈, 입의 오염, 두통, 가래톳, 심한 갈증, 정신착란, 온몸의 반점, 내부적인 장애, 그리고 마침내는….자기가 알고 있는 그런 것들에 만족해야만 했다. 그러고는 결국 어떤 구절이 리외의 머리에 되살아났다. 그것은 바로 증세가 열거되어 있는 의서(醫書) 맨 마지막에 적혀 있는 구절이었다. ‘맥박이 미미해지고, 눈에 띄지 않게 꿈틀거리다가 숨이 끊어진다.’ 그렇다. 그런 증세 끝에 마침내는 실오라기에 매달린 운명이 되어서, 그 4분의 3은-이것은 정확한 숫자였다-자기들의 죽음을 재촉하는 이 알 수 없는 동작을 하려고 꽤나 애를 쓰는 것이었다.
의사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리창 저편에는 봄의 신선한 하늘이 있었고, 반대편에는 아직도 방 안에서 쩡쩡 울리고 있는 말, 즉 페스트가 있었다. 그 말에는 과학이 거기에 적용하려고 하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맘때면 적당하게 활기를 띠어 요란하기보다는 차라리 윙윙거리는, 만약 인간이 동시에 행복과 침울을 누릴 수 있다면 결국 행복하다 할 수 있는, 그 누렇고 뿐연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일련의 기괴한 환상들까지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도 평화롭고 그렇게도 무관심한 평온 상태는 그 옛날의 재화들을 거의 힘도 안 들이고 일소시켜버렸다. 페스트에 휩쓸려서 새 한 마리 볼 수 없게 된 아테네. 말 없는 빈사 상태의 환자가 들끓는 중국의 도시들. 썩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시체들을 구덩이 속에 처넣고 있는 마르세유의 복역수들. 페스트의 무서운 바람을 막기 위한 프로방스 지방의 거대한 토벽 건축. 자파와 그 도시의 끔찍스러운 거지들. 콘스탄티노플 병원의 땅에 납작하게 붙은 채 습기에 썩어 가는 침대들. 음울한 페스트가 창궐할 때 볼 수 있는, 갈고리로 끌려 나오는 환자들과 마스크를 한 의사들의 혼란. 밀라노의 공동묘지에서 있었던 산 사람끼리의 성교. 공포에 휩싸인 런던 시의 시체 운반차들. 그리고 도처에서 끊임없는 아우성으로 가득 찬 낮과 밤. 아니다, 그 모든 것이 그 한나절의 평화를 말소시켜버리기에는 미력했다. 유리창 너머에서 문득 보이지 않는 전차의 종소리가 울려서 순식간에 그 잔인성과 괴로움을 반증해주었다. 오직 바다만이 집들 사이에 생긴 충충한 바둑판 무늬 끝에서 불안하고 결코 안정되지 못한 그 무엇이 이 세상에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의사 리외는 물굽이를 바라보면서 루크레티우스가 말한 바 있는, 페스트에 휩쓸린 아테네 사람들이 바다 앞에 세워놓았다는 그 화장터를 생각했다. 그들은 한밤중에 그곳으로 시체를 가지고 갔다. 장소가 비좁아서 생존자들은 자기들과 가까운 사람들을 먼저 화장하려고 서로 횃불을 휘두르며 싸웠고, 메고 온 시체를 그냥 두고 가기 싫어서 피를 흘리며 다투었다는 것이다. 고요하고 어둠침침한 바다 앞, 시뻘겋게 타오르는 화장터와 불꽃이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의 횟불 싸움, 그리고 침착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을 향해서 솟아오르는 독기에 찬 짙은 연기, 이런 것들을 누구나 상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두려운 것은…….
그러나 그런 망상은 이성 앞에서는 견뎌내지 못했다. ‘페스트’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온 것도 사실이고, 바로 그 순간에도 재화가 두서너명의 희생자를 들볶아 쓰러뜨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수롭잖게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는 일이었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인정해야 할 것은 단호히 인정하고, 결국에는 쓸데없는 공포감을 쫓아버려 적당한 대책을 강구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페스트는 멎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스트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탓이요, 또는 그렇게 생각되었더라도 대책이 없을 테니 말이다. 만약 페스트가 멎는다면 -그것은 가장 가능성 있는 일이다. -모든 일은 잘될 것이다. 반대의 경우에는 페스트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그것에 먼저 대비하고 그것과 싸워서 이기는 방법이 있는지 없는지를 사람들은 알게 될 것이다.
의사는 창을 열었다. 그랬더니 대뜸 시가의 소음이 크게 들려왔다. 이웃에 있는 공장에서 짤막하게 반복되는 기계톱의 소리가 들려왔다. 리외는 기운을 냈다. 매일매일의 노동, 거기에야말로 확실성이 있었다. 나머지는 무의미한 끈이나 동작에 얽매여 있으므로 그런 식으로 어물거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직책을 충실히 해나가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