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병산서원(屛山書院)
사적 제260호
세계문화유산 등재 2019년
<交通案內>
주소: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30
안동-병산서원(46번) 병산서원-안동(46번)
<찾아 가는길>
안동에서 28㎞거리, 하회마을에서 6㎞거리
하회마을입구에서 좌회전 약6km거리 비포장도로
<安東가는 方法>
기차편: 중앙선 안동역 에서 하차
버스편: 대구-안동(1시간 20분), 동서울-안동(4시간),
대전-안동(3시간), 부산-안동(4시간)
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북대구 인터체인지에서
중앙고속도로 안동방면(서안동 톨게이트 이용)
<河回마을 가는 길>
버스편:
안동역앞 횡단보도를 건넌후 왼쪽으로 50m지점
(버스터미널 에서는 육교를 건넌 후 오른쪽으로)의
버스 승강장에서 46번 버스 이용(약 40분 소요)
승용차편:
안동시내에서 예천방면 국도로 약30분소요,
서안동 톨게이트 에서 예천방면 약15분소요
병산서원은 본래 풍악서당 이라 하여 조선 명종
18년(1563) 풍산읍에 창건되었으나 선조5년(1572)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진 서원 이다.
도착하자 눈애 들어오는 것은 치마를 펼쳐 놓은 듯한
병산(屛山)이다.
맨 처음 인간에게 건축을 가르친 것은 자연이다.
인류 초기 움집의 둥근 모양은 자연에서 제일 흔하게
만나는 디자인이다. 해도 달도 나무의 그루터기도 모두
둥글다.
둥지를 만드는 새와 곤충은 비록 미물이지만,
건축 역사에서 만큼은 인간의 선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건축에서 자연은 늘 중요하다. 이는 동서양
모두에 해당되는 말로, 서양 건축의 화려한 출발점인
그리스 신전에서도 자연의 모습을 읽어 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양의 대표적 건축가인 가우디(Antoni Gaud)도
자연에서 건축의 모티프를 찾고는 했다. 하지만 서양의
건축물들은 자연에 동화되어 하나가 되기보다는 자연을
표방하여 화려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가우디의 자연 건축 역시 그리스·로마·중세를 거치며
화려했던 그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반면 우리 전통 건축은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이 없다.
때로는 슬며시 자연이 되어 버려 어디까지가 건축이고
어디까지가 자연인지 구분조차 힘들다.
사람들이 서원을 제쳐 두고 서원 앞에 우뚝 솟은 병산이
낙동강으로 눈을 툭툭 털어 내는 모습에 빠져든다 해도
그것이 병산서원의 건축미를 가볍게 하지는 않는다.
자연 속에 녹아든 병산서원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건물이 자연과 어떻게 어우러져야 하는지를 무언으로
보여 준다.
병산서원은 세상을 잊은 선비처럼 천연덕스럽다.
서원 앞에 군락을 이룬 배롱나무 역시 온통 눈꽃을 피우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들어간다.
떠나간 이를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 선현을 모시는
서원에 안성맞춤인 나무다.
관리인은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 특히
배롱나무를 좋아했다고 귀띔해 주었다.
류성룡과 함께 그의 셋째 아들 류진의 위패를 모신 곳이
병산서원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스물네 살에 벼슬을 시작하여
우의정까지 오른 류성룡은 국난을 내다보고 정읍 현감으로
있던 무명의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을 전라 좌수사에
천거한다.
이때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 전이다.
그가 없었다면 이순신도 없었을 것이고, 조선의 명운도
달라졌을 것이다. 배롱나무는 나목(裸木)으로 인식되어
여인이 머무는 안채 마당에는 심지 않았지만,
사내들에게는 속을 숨기지 않는 강직한 선비 정신을
의미했다.
이 나무는 무상한 세월 속에서도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서원을 든든하게 지켜 온 병산과 함께 시류에 휩쓸리지
않던 결연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서원의 이름은
이 산의 이름에서 왔다고 한다.
성리학의 비조인 주자(朱子, 1130~1200)의 스승 유자휘
(劉子翬, 1101~1147)의 호가 병산(屛山)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병산서원의 명칭은 다분히 중의적이다.
류성룡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엿보인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 서원을 짓는 까닭은 두 가지다.
후학을 가르치는 것과 사당에 모신 스승의 제사를
지내는 것. 그래서 서원 공간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학생을 가르치는 강당 영역과 제사를 모시는 사당
영역이다.
서원 밖에서 강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외삼문(外三門),
강당에서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을 내삼문(內三門)이라고
하여 구분한다. 그리고 여기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하인의
영역이 덧붙는다. 병산서원의 경우, 서비스 시설을
포함한 강당 영역은 고려 시대부터 유지되던 풍산 류씨
가문의 풍악서당이 1572년 풍산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면서 세워졌지만, 이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1607년에
다시 지어졌다.
사당 영역은 류성룡이 죽은 뒤 그의 제자 정경세, 이준
등이 1614년에 존덕사(尊德祠)를 지어 류성룡의 위패를
안치하면서 조성되었다.
이후 만대루까지 들어서고 부대시설이 완성되면서
지금의 병산서원이 되었다.
병산서원은 철종 때인 1863년 사액서원(왕이 현판과
특혜를 주어 지정한 서원)이 되고, 1978년 사적 제260호
로 지정되었다.
고려말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으로 사용되던 서원을
서애 류성룡 선생(1542~1607)이 후학 양성을 위해
이곳으로 옮기고 이름을 병산이라 고쳐부른 것이다.
그 후 광해군6년(1614) 서애 류성룡 선생의 업적과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 를 창건하고 그곳에
선생의 위패를 보관하였으며 1629년에는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하고 있다.
철종14년(1863)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은 이곳은
고종8년(1871)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제외된 전국 47개 서원중의 하나이다.
서원의 경내에는 서애 선생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를
비롯해 입교당, 전사청, 장판각, 동재, 서재, 만대루,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또한 서애 선생의 문집을 비롯해 각종 문헌이
소장되어 있으며 주변 자연환경이 매우 수려하여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현재 사적제260호로 지정된 병산서원에서는 아직도
3월과 9월 초정일에 류성룡 선생의 후학들이 모여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紹介>
절묘한 경치와 배어난 건축미로 유명한 이곳은 하회마을
에서 화산(花山)을 넘어 낙동강이 휘어 돌면서 만들어낸
암벽과 마주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어 병산서원(屛山書員)
이라 부른다.
1613년(광해군5년)에 정경세 선생등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서애 류성룡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존덕사를 창건하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후 1629년 선생의 셋째 아들 수암 진 공을 배향한
서원이다.
이 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말
부터 사림의 교육기관이었으나 1572년(선조5)에 류성룡
선생이 이곳으로 옮긴후 1863년(철 종 14)에 '병산'
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 을 담당하면서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렸을 때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가 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존덕사,
입교당, 신문, 전사청, 장판각, 동재, 서재, 만대루,
복례문, 고직사 등이 있다. 묘우인 존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양식에 풍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청이 화려하게
채색되어 있다.
존덕사에는 주향인 류성룡 선생과 배향인 류진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강당인 입교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가구는 5량이며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 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신문은 향사시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되며, 전사청은
향사시 제물을 장만하여 두는 곳이다.
장판각은 민도리집 계통으로 되어 있으며 책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곳이다.
정면 4 칸, 측 면 1칸 반의 민도리집으로 된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곳으로
사용된다.
문루인 만대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식
건물로써 서원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도록 건축되었으며, 향사 때에는
고지기가 개좌 또는 파좌를 아뢰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서원은 현재 사적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류성룡 선생의 문집을 비롯하여 각종 문 헌 1,000여종
3,000여책이 소장되어 있다.
지금도 3월과 9월에 후학들이 향사를 지내고 있다.
<文化財揭示板>
이 서원은 본래 풍악서당(豊岳書堂)이라 하여
조선(朝鮮) 명종(明宗)18년(1563) 구(舊) 풍산현(豊山縣)
북쪽에 창건(創建)되었으나 선조(宣祖) 5년(1572)
이곳으로 옮겼다.
후 광해군(光海君) 6년(1614) 서애(西厓) 유성룡 선생의
업적(業績)과 학덕(學德)을 추모(追慕)하는 사림
(士林)들의 발기(發起)로 사묘(祠廟)를 짓고 향사(享祀)
하였다.
서애 유성룡(1542∼1607)선생 본관(本貫)은 풍산(豊山)
으로 명종 19년(156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도승지
(都承旨), 예조판서(禮曹判書), 우의정(右議政), 좌의정
(左議政)등 많은 관직(官職)을 역임하였고 임진왜란시
(壬辰倭亂時)에는 영의정(領議政)으로 왕을 호종(扈從)
하였으며 도체찰사(都體察使)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화기(火器) 제작(製作), 성곽(城郭) 수축(修築)등
군비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
하여 군대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선조 31년(1598) 북인(北人)의 탄핵으로 한때 관작(官爵)
을 삭탈당하고 향리(鄕里)에서 후학(後學) 양성(養成)에
힘쓰며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등 많은 저서(著書)
를 남겼다.
선조37년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고 다시 풍원부원군
(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도학(道學), 문장(文章), 덕행(德行),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嶺南) 후생(後生)들의 추앙(追仰)을
받았다.
경내(境內)에는 복례문(復禮門), 만대루(晩對樓), 동(東)·
서재(西齋), 입교당(立敎堂), 장판각(藏板閣) 존덕사(尊德祠)
등이 있다.
<關聯 參考資料 文獻>
1. 어떤 사람을 양반이라 불렀는가?
2. 조선시대 양반집은 왜 아흔아홉 칸 인가?
3.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