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 운동 40년을 돌아볼 때 나에게 다가오는 질문은 “한국교회사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의미는 무엇일까?”이다. 몇 년 전까지 나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독자적인 운동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 운동은 “복음주의 신앙 배경을 가진 대학생들의 스터디 모임”(신국원)으로 출발하여 “신앙과 삶의 괴리로 고민하는 한국교회”(양승훈)의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렇기에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한국 복음주의 교회를 부정하거나 이탈하려는 운동이 아닌, 복음주의 내부의 자기 갱신 운동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1980년대 초 복음주의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생겨났고 40여 년이 지난 지금 더 심화한 위기를 돌파하려는 복음주의의 노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복음주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살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는 교회다. 신앙생활에서 구원의 감격을 유지하고 예배와 말씀과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와 영적 교제를 하며 복음 전도에 전념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복음주의의 존재 이유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기본적으로 복음주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부정하는 복음주의는 물질주의적 기복주의, 균형을 잃은 은사주의, 일방적인 정치적 보수주의, 교회 내의 사제주의, 사회적 약자와 환경에 대한 무관심, 반지성주의로 축소되거나 변형된 복음주의다. 이러한 복음주의는 개인 구원과 교회 성장에 몰입하지만, 사회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데는 무관심하다. 그 결과 구원받은 신자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을 사회문화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는지에 대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화평이 이루어졌음은 믿지만, 십자가의 피를 통해 세상 만물과 화목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골 1:20)을 무시한 결과다.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처참할 정도로 땅에 떨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복음주의 기독교의 일부지만 복음주의의 약점을 보완해서 더 건강하고 성숙한 복음주의로 나아가려는 운동이다. 최근 복음주의 교회 내에서 많은 이들이 ‘기독교 세계관’ 또는 ‘성경적 세계관’에 공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지난 40여 년 동안 멈추지 않고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린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불혹(不惑)의 나이가 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더 충실하고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과제를 생각해 본다.
첫째, 복음주의와 ‘기독교 세계관’이 대립되지 않고 신학적으로나 목회적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복음주의를 더 성숙하게 만드는 운동이라는 인식이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확고해지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
둘째, 더 많은 그리스도인 학자와 전문가들이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공학, 의약학, 농수산학, 해양학, 예술, 체육학 등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적인 관점으로 학문을 연구해서 수준 높은 결과물을 제시해야 한다.
셋째, 기독교 세계관의 토대 위에 다음 세대를 교육해서 모든 영역에서 사회를 이끌어 가는 모범적인 시민과 사회인으로 성장시켜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치는 CTC(기독교세계관 교육센터) 같은 기관과 기독교 학교들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넷째, 기독교 세계관을 모든 영역에서 실천해야 한다. 그동안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독교학교교육운동’, ‘기독교사운동’, ‘직장사역연구소’, ‘기독경영연구원’, ‘기독교변호사회’, ‘밀알복지재단’ 등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운동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서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위기에 처한 한국 복음주의 교회를 살리는 운동이다. 복음주의 교회와 신자들의 세계관이 성경적으로 충실하게 형성되고 삶의 모습이 변화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목표다. 이 목표를 위해 더 꿈꾸고 더 기도하고 더 애써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