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바지오, 〈다메섹 가는 길 바울의 회심〉, c.1601, 230×175cm, 산타마리아델포폴로 성당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사울은 길을 가고 있었다. 이는 자기 확신에서 비롯한다. 사울은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죄인이라 확신했다.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의 지도자였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은 마땅하다는 확신으로, 사울은 다시 그들을 결박해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고 말에 타 길을 가고 있었다(행 8:1; 9:1-2).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와야 하는지 사울은 또렷하게 알았다. 다메섹으로 가서 그들을 결박해 예루살렘으로 오면 된다. 자신이 하는 일과 가는 길에 대해 확신하는 사울에겐 아무 의혹이 없었다. 오래된 확신이 진리인 줄 알고 걸어왔던 길이 있다. 진리를 보는 눈이 비늘로 덮여 있다면 확신은 ‘살기와 위협이 등등’한 섬뜩한 사람을 만든다. 어둠 속에 갇힌지도 모른 채 자기 확신을 진리라 주장하며 칼을 휘두를 수 있다. 다소(Tarsus)의 사울이 그랬다.
카라바지오(Caravaggio, 1571-1610)는 빨간 망토를 두르고 허리에 칼을 찬 16세기 이탈리아의 장군 차림으로 사울을 그렸다. 장군처럼 차려 입고,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견마잡이 앞세워 가는 길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행 9:3). 빛에 눈부셔 보지 못하게 된 사울이 말 등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지면서 허리에 찬 칼이 풀어져 나가고 빨간 망토는 땅바닥에 팽개쳐진다. 확신으로 가득해 가던 길이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울이 갖는 그 확신이 뭐가 문제여서, 저 꼴을 당해야 하는가(빌 3:5-6).
예수께서는 사울의 그 확신 반대편에서 다른 말씀을 하신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 어떤 흔들림도 없이 길을 가던 사울을 참 빛이신 예수께서 흔들어대신다. 확신으로 가득했던 사울이 틀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가말리엘 문하의 학벌 좋은 사울이라도 틀릴 수 있다. 오래된 확신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되자 전 존재가 흔들렸다. 사울 외엔 아무도 요동하지 않았다. 견마잡이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삐를 여전히 쥐고 있고, 말도 떨어진 사울을 행여 밟을까 봐 조심스레 앞발을 드는 양이 여유롭다. 사울에게만 비친 빛 때문에, 사울에게만 닥친 깨달음으로 사울은 흔들린다. 흔들리며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졌으니 두 팔로 땅을 짚어야 할 텐데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떨어진다. 누군가를 맞아들이기 위해 팔을 뻗는 모양이다. 눈이 감겨 있지만 보이는 것이다. 교리의 확신을 넘어 진리의 사랑으로 닦을 새로운 길이 열릴 모양이다. 이전엔 뜬눈으로 착각을 확신하며 걸었지만, 이젠 감은 눈으로 진리를 마주보며 걷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