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소리
이태호
소리는, 아침 햇살 담은 사구(砂丘)를 타고 파문 지듯 온 동네를 물들였다.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그 시간은 다시 올 수 없다. 하지만 내 마음속엔 그 시절 그 소리는 파스텔 색조로 마음속에 수繡놓아져 있다. 지금도 어떤 슬픔이거나 고통에 힘겨워할 때면 어김없이 명징하게 울리던 그 종소리가 먼저 들린다. 소리를 따라가 보면, 유년의 창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소리 근원지는 다름 아닌 교회 앞 늙은 소나무에 매달린 기다란 산소통이다. 손잡이가 반쯤 부러진, 뭉툭한 쇠망치는 잔솔 틈에 숨어 있었다. 소리를 만들어 내는 목사님은 훌쩍한 키에 코가 유난히 길고 뾰족했다. 땅! 땅! 땅! 두드리면, 소리는 멀리서 들을수록 더욱더 은은하게 들렸다. 당시 나의 바람은 목사님처럼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그런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벼르고 벼르던 어느 날이었다. 단짝을 꼬드겨 산소통이 매달린 소나무 숲으로 납작 엎드린 채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기어서 갔다.
목사님의 망치는 잔솔 밑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 쇠鐵가 귀한 시절이라 자꾸만 없어진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때문에 소리를 만들 때만 가지고 오신다고 단짝이 말했다. 그렇다면 돌멩이를 찾을 수뿐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만리포는 천지가 모래다. 단단한 차돌멩이를 구하기 위해선 갯바위 쪽으로 가야만 했다. 다음날, 단단한 돌멩이를 구하여 서너 번 두드리고 얼른 도망쳤다. 하지만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땅! 하는 짧은 단말마斷末摩로 그치고 말았다. 그때야 나는, 아름다운 소리는 아무나 만들거나 흉내 낼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와 우리 집은 직선거리로 불과 백오십 미터 안팎이다. 그 때문에 안마당이거나 방안에서도 교회를 올려다볼 수 있었다. 만약 집 앞을 가로막은 사구가 없었더라면, 예배드리는 모습까지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래언덕을 탓하지 않았다. 등성이에는 봄을 기다렸던 해당화 꽃송이가 다섯 장 꽃잎을 달고 다투어 피어올랐다. 그 향기는 한여름까지 파스텔 조로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집 안팎을 부드럽게 감쌌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이면 꽃이 진자리마다 황적색 둥근 수과가 달린다. 우린 그 안에 든 하얀 씨앗을 털어내고 새콤달콤한 맛을 즐겼다. 그 때문에 해당화를 키우는 부드러운 그 모래 언덕을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
하늬바람에 실린 새벽 종소리는 더욱 아름답다. 파문 지듯 성스러운 색조로 온 동네를 물들이며 하루를 여는 전주곡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종종 새벽기도에 참석하시는 어머니를 따라 사구를 넘었었다. 주일이면 이른 아침부터 마음이 들떠 있었다. 무엇보다 나를 서두르게 한 것은 하얀색 레이스가 퍽 어울리던 주일학교 선생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바닷가 별장에서 간호인과 함께 생활하는 서울에서 온 누나였다. 얼굴이 창백했었는데 아마도 어떤 지병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럼에도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상냥한지 언제나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우리 개구쟁이들을 사랑해 주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누나 미소와 풍금 소리가 보이는 것 같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병역을 마치고 도심 속에 들면서 교회는 방해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결정적인 원인은 새벽마다 울리는 성능 좋은 앰프소리도 한몫했다. 그 전자음은 어린 시절 종소리와는 사뭇 달랐다. 나에게는 소음공해로 들렸다. 사촌 누나와 하숙집주인인 권사님 작용은 더 컸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사회 초년생 하루는 참으로 고단하다. 그런 나에게 모처럼 주워지는 휴일이란 누적된 피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내 자유는 언제나 구속받았다. 성능 좋은 앰프 소리와 함께 권사님의 교회 가자는 소리, 사촌 누나 닦달은 그야말로 감옥(prison)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탈출 기회를 노렸다.
“그래, 봉급을 모아서 하숙집을 옮기자.” 결심과 계획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되도록 교회와 사촌 누나 댁에서 더욱 멀리 떨어져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당시 내 일기장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come out of prison' 얼마나 지겨웠으면 감옥에서 나왔다고 기록했을까.
지금도 어머니 말씀이 생생하다. “아들아 더도 덜도 아닌, 내 생애 우리 큰아들을 ‘집사님!’이라고만 부르게 해다오.” 그분 간절한 부탁은 생전에 들어 드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런 고집을 고수했을까? 그 이유를 앰프로 바뀐 종소리와 교회 가자는 성화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설득력이 없는 것 아닌가. 그랬을 것이다. 그 원인은 기성인이 되기 위한 잡다한 지식 쓰레기통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사랑하는 어머님께서 소천하셨다.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 어머니 유언은 지켜졌지만, 진정 어머니께서 원하시던 집사 직분에 대한 책임과 의무는 자발적이지 못했다. 한동안 나는, 가물에 콩이 나듯이, 마치 길손처럼 서먹서먹하게 교회 문을 기웃거렸다. 그때마다 어떤 죄책감으로 이렇게 자신을 위안했다. “머지않아 스스로 교회 문을 밀고 하나님을 찾을 것이다.”
창립한 지 55년째인 ‘만리포교회’는 예전과 비교하면 외형만은 많이 변했다. 성도聖徒 다수는 동네 나이가 든 어른들이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은 아리따운 새댁이었거나 총각 시절부터 교회를 지키는, 그러니까 장로나 권사 아니면 안수집사 직분을 가진 분들이다. 낙향한 다음부터 우리 부부는 주일을 지키기로 약속했고 실천했다.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소천하신 어머님께서 50여 년 동안 지키시던 그분 자리에 우린 나란히 앉았다.
목사님 설교내용은 누가복음 15장 ‘돌아온 탕아’ 이야기였다. 렘브란트 집 떠난 아들이 아버지에게 돌아온 마지막 장면을 그린 유화작품이 떠올랐다. 울리기로 작정이나 한 듯 마치 모든 설교 내용은 나를 향하는 것만 같았다. 가슴에서 복받쳐 오르는 뜨거운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전쟁터에서 파편을 맞고도 울지 않았던 나는, 설교가 마무리된 다음에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면서 산소통이 매달려 있던 솔숲을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는 철재로 세워진, 철탑 위에서 듬직한 십자가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맨드라미 피던 기억 속 화단도 많이 변해 있었다. 아기자기한 꽃나무 대신 목련 나무 한 그루가 함부로 부서지는 가을 햇살을 애써 담아내고 있었다. 화단 자리에는 수도꼭지가 서너 개 달린 음수대 있었다. 수돗가랑 곁에서 어머니께서 즐겨 부르시던 ‘목마른 자들아 다 이리 오라.’ 라는 찬송가 가사를 떠올렸다. 나는, 목마른 자들을 기다리고 있는 수도꼭지들을 하나씩 만져 보았다. 문득, 종소리와 함께 어머니 말씀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부터 나는, 소리를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보고 만지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
* 현재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talent)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교회에 봉사하고 있다. 영상과 음향, 주보 Power Point, 각종 computer system을 담당한다. 이 나이에 이르러서도 최첨단 기술을 소화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한다.
요즘엔 천국에 계신 어머니께서도 빙그레 웃으시고 계실 것 같다. 다만, 문제는 끽연이다. 그 때문에 기도 제목은 ‘금연의 결단’이다. 이 또한 이루어짐을 굳게 믿는다. 오늘도 나는 주보를 제작하기 전에 기도와 함께 고린도전서 10장 12절 말씀을 묵상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Beautiful Dreamm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