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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과 감동으로 한 주를 보냈습니다. 저쪽에서는 아직도 잔치가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제 끝났습니다. 그래도 그 감동과 기쁨을 쉽게 잊을 수는 없습니다. 그 힘으로 이 어렵고 힘든 세상을 견뎌나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감동을 기대하며 지탱하는 것이지요. 그럴지라도 여전히 슬픔과 아픔을 짊어지고 버티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냥 뭉개버리고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속에서 해결하지 못한 과거로 인하여 한 세기를 아파하며 지나온 백성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였습니다. 용서가 없는 화해는 의미가 없지요. 감추어진 진실을 가지고는 상처를 치유할 수도 없습니다.
비교적 따듯한 한 주를 보냈습니다. 그런 날들도 있는 거죠. 그래도 대기가 차가워져 있으니 바꾸어둔 가벼운 가을 옷을 도로 꺼낼 수는 없습니다. 그냥 그런 대로 입고 지나가는 거지요. 함부로 이랬다저랬다 하다가는 감기 걸리기 십상입니다. 조금 후면 다시 추위가 닥칠 것입니다. 겨울이니 그냥 따라가면 됩니다. 아직은 겨울 초입이니 한참을 가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한 해를 아주 바쁘게 보내는구나 싶습니다. 겨울 석 달 지나면 다시 봄을 살아야 하고 다시 석 달도 안 돼서 여름을 지내야 하고 또 금방 가을을 맞습니다. 다시 겨울을 살아야 하고 말입니다. 우리 한국사람 정말 ‘빨리, 빨리’ 안 할 수가 없습니다. 환경이 그러니 말이지요.
좋은 주말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랍니다. ㅎㅎ
2022년 12월 10일 김종우 목사 드림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누가복음 12 : 3)
<올빼미>
역사에는 ‘라면’이 없다고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아쉬움이 큰 미련이 생기기도 합니다. 소현세자가 차라리 그냥 청국에 머물러 살았다면 어땠을까 싶지만 고국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생각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국내 사정을 너무 몰랐던 것은 아닌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8년 만의 귀국, 얼마나 그리웠을까요? 더구나 어린 아들과의 이별로 자식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아픔을 딛고 사실 세자는 청나라에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나름 꽤 큰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서 정작 고국에서는 평가절하에 모함까지 벌이고 있었습니다. 당쟁의 결과 권력투쟁의 희생물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조는 나름 남한산성의 굴욕이 평생 트라우마로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래도 한 나라의 왕인데 적국의 장수에게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청나라’에 대해서 듣는 것만도 치를 떨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자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산다니 말이나 됩니까? 철천지원수, 씹어 먹어도 시원찮은데 그들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신하들도 옛 명나라와의 신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그 누구도 세자 편을 들어주고 있지 않습니다. 나라를 혼자서 이끌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인조는 생각합니다. 이런 아들에게 나라를 물려주었다가는 거덜 나겠구나.
그리웠던 고국, 보고 싶었던 가족,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오는 날부터 찬밥 신세입니다. 간신히 자리를 잡으려 하지만 그 누구도 따라주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버지인 왕은 대놓고 반대하며 나아가 적대적으로 상대합니다. 가지고 온 청나라 새로운 문물을 보여주어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습니다. 청나라는 그저 원수일 뿐입니다. 가까이 할 수도, 가까이 해서도 안 되는 상대일 뿐입니다. 한 가지 구호가 있다면 ‘타도 청국’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나라의 장래와 현실과는 차이가 심합니다. 더구나 방향타를 쥐고 있는 왕은 전혀 먹히지를 않습니다. 세자의 행동반경이 좁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세자는 오랜 이국생활과 그 속에서 당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여러 지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침술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뛰어난 침술사 ‘경수’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연히 그가 써놓은 동생에게 써놓은 편지를 보게 됩니다. 아니 맹인이 어떻게 편지를 쓰지? 이상합니다. 그리고 경수가 주맹증 침술사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볼 수 없지만 캄캄해지면 희미하게 볼 수 있습니다. 사실을 알게 되자 오히려 경수에게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청나라에서 가지고 온 돋보기안경까지 선물합니다. 거짓말쟁이로 혼이 나야 할 판에 세자의 신뢰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 원손과도 가까워집니다.
궁 밖은 다를지 몰라도 궁 안에서는 세자의 편에 서주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인조 왕은 세자를 박대하고 나아가 왕권까지 위협당하는 줄 의심하며 그 정도가 심해집니다. 역사 속에서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가족 안에서도 피비린내 나는 다툼이 발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친지가 아니라 바로 부모자식 간에서 말입니다. 잘 아는 대로 이씨조선이 출발하며 형제의 난으로 이방원이 두 형제를 제거한 이야기는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아버지까지 제거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제거하는 일도 발생합니다. 어떻게 권력을 지키려 자기 자식을 살해할 수 있을까 싶지만 그만큼 권력의 힘은 무섭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침술사 경수가 궁에 들어온 것은 ‘이형익’이라는 어의에게 발견되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궁에 들어와서도 그를 보필하며 왕을 비롯한 왕족의 건강을 지켜줍니다. 세자가 돌아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세자가 아프다 하여 두 사람이 세자를 찾아갑니다. 침을 놓고 돌아서는데 경수가 침이 이상함을 감지합니다. 어둠 속에서 보였지요. 이형익은 경수가 주맹증 환자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형익이 퇴근하고 경수가 다시 확인하려 들어가 확인한 사이 들켜 도망합니다. 그리고 세자는 사망합니다. 암살자로 몰리는 가운데 이형익과 인조 왕의 밀담을 엿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놀라운 사건을 어떻게 드러냅니까? 더구나 맹인의 증언을 누가 믿겠습니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사실을 이야기했다가는 목숨이 날아갑니다. 말을 해요 말아요? 그런가 하면 자기가 본 것을, 아는 것을 밝혀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하지요? 아무튼 조그마한 의문으로 탄생한 역사 스릴러입니다. 인조실록에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라고 기록된 역사적 미스터리에서 출발하여 만들어진 이야기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개인감정에 매여 있음으로 그 주변인뿐만 아니라 온 나라가 당해야 하는 아픔을 봅니다. 다시 말하지만 소현세자의 생각과 의지대로 조선이 움직였다면 그 후의 나라가 어떻게 변했을까 기대해봄직도 한데 말입니다. 영화 ‘올빼미’(The night owl)를 보았습니다.
<그 때가 언제냐고요>
성경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대필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들은 대로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되어 있지만 인간이 한 말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딤후 3 :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 예,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람을 택하여 성령으로 감동시켜주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되어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기록한 것입니다.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 성령의 감동이 따라오면 성경 속의 하나님의 뜻이 살아나옵니다. 그 결과 히 4 :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움직입니다. 읽는 사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통하여 말씀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요 1 :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신 말씀은 첫째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가리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에 함께 하여 움직이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달리 표현하면 말씀이 들어간 사람이고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여 당신의 일을 기록하셨고 오늘 우리 손에도 들리게 하셨습니다.
물론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서점에 성경이 있으니 아마도 서점 주인들은 저절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럴 리가 없지요. 한 예로 3년을 예수님을 따라다녔어도 그 안에 마귀의 꼭두각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를 다녀도 또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있게 마련입니다. 더구나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한 주일에 딱 한번 들었다 놓는 사람도 있습니다. 1년 열두 달 가봐야 성경 한 페이지도 읽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안에 무슨 말씀이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습니다. 요즘은 교회 갈 때도 성경을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이제 대부분 교회에서는 대형 화면에 다 띄워줍니다. 찬송가도 성경도 보기 좋게 커다랗게 다 나오는데 무거운 성경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편해지는 만큼 나태해지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세상이 날로 편해진다고 그냥 좋다고 하지요. 빠르고 쉽고 편하고, 그것이 발전해가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의 신앙도 간편 간소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신앙의 성장이 아니라 매장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빠르고 간편해지는 것을 마다할 필요야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 마음에 더 많이 담아두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때에 맞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입에서 술술 흘러나오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4 : 45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우리 모두 때를 따라 그 양식, 영의 양식,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어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빕니다. 주님은 그를 가리켜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라 칭찬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러한 당신의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대단한 재능과 실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때에 맞는 양식을 주인 집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사람입니다. 누구에게요? 주인 집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 의미를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이상하고 괴이한 일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임에도 성경 이야기를 해주면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이해가 됩니다. 자기가 분별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이야기인데 딴 소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심하기는 해야지요. 그러나 나에게 확실한 진리의 말씀이 있다면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틀렸다면 가르쳐주어야 하니까요.
다시 하나님 말씀, 성경으로 돌아옵니다. 성경은 한 사람을 통해서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한 시대에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먼저 구약 성경이 모두 주어지기까지 약 1,50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저자도 30명은 넘습니다. 신약도 100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자 역시 10 명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장구한 시간 속에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갖추어지기까지 예수님 다녀가시고도 몇 백 년이 소요되었습니다. 성경의 시작 창세기로부터 성경의 끝, 요한계시록을 마치기까지 그렇게도 많은 시간과 사람들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낱권들을 모으고 진위여부를 가려야 하고 하나로 맞추는 일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일꾼들이 기도하고 서로 의논하고 완성한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은 꾸준히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주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약속대로 오셨을 때 정작 당신의 백성은 알지도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약속을 이루셨고 다시 오마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새 언약 곧 신약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던 그 때 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 : 10) 아멘! 기도로만 영원히 가는 것은 아니겠지요. 과연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언제요?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말입니다. 언제일까요? 지금 우리 모두 그 날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기다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약속하고 가신지 2천 년이 지나도록 아무 이상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가끔 물어봅니다. 언제쯤 오시면 좋겠습니까? 뭐라고 대답하지요? 오늘이라도 오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신자가 얼마나 될까요? 정말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의 예언은 반드시 성취되어 실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알파와 오메가 즉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시작과 끝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구약의 예언입니다. 사 46 : 10 “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하였노라”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셨습니다. 요 19 : 28 - 30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아멘! 이것이 초림 예수님이 이루신 실상입니다. 즉 구약의 예언이 초림 때 실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초림 때 약속하신 것은 재림 때 이루실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있을까요 없을까요? 분명 있겠지요. 처음과 끝을 다 기록해 놓으셨으니까요. 보겠습니다. 초림 때의 예언입니다. 요 14 :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일이 이룰 때니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입니다. 즉 예언이지요. 그러면 예수님 재림 사건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입니다. 과연 거기서 주님이 이루셨다고 하는지 보겠습니다. 계 21 :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뭐라 하십니까? ‘이루었다’고 하십니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마 24 :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초림 때의 예언이지요. 그러면 재림 때 어떻게 되는가 봅니다. 계 17 :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이루게 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 그 이상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속에 하나님의 하실 일과 하신 일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세에 대하여 이미 배웠습니다. 말세 즉 종말이 언제라고요? 예수님이 나타나시는 때가 말세입니다. 그 때는 예언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예수님 초림 때는 구약의 말세, 즉 구약의 종말이지요. 신약의 종말은 언제이겠습니까? 예수님 재림 때입니다. 이 때 신약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이 모든 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이 실상으로 나타난 것을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의 예언이 실상으로 나타난 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은 예수님 재림 때의 일을 일어난 사실로 기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말이 됩니까? 아직 모르는데 일어났다니요? 그렇습니다. 일어날 때까지는 모릅니다. 그러므로 안다는 것은 이미 발생했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요한계시록이 해석이 되면 예수님 재림은 이미 일어난 일이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 아닙니까? 이 무슨 해괴한 일이냐고요? 그러나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우리 또한 옛날 2천 년 전에 유대인들의 잘못을 그대로 반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잘못을 성경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요 1 : 10 - 11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실제로 그랬습니다. 메시야가 하나님 약속대로 여기 그 백성 가운데 왔지만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셨는데, 즉 이미 재림하셨는데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없겠습니까?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그럴 것이라는 말입니다. 왜? 믿음이 없으니까요.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눅 18 : 8 “---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사람들이 그럴 것입니다. 아니 호령 소리나 나팔소리도 안 들렸고 휴거도 없고(살전 5 : 16 - 17) 예수님 오시는 것 보지도 못했고(행 1 : 11),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셨다고? 무슨 미친 소리야? 이거 이단 아니야?
자 마지막 때 곧 세상 끝에 일어날 사건들을 보겠습니다. 마 24 :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여기 말씀처럼 해 달 별이 어두워지고 떨어지기를 기다립니까? 벧후 3 : 12 “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하늘이 불에 타기를 기다립니까? 우리가 이미 배워 왔듯이 이 말씀들이 문자대로의 뜻입니까? 하나님은 영으로 말씀하시는데 어리석은 인생들이 육으로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요 6 : 66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님은 혹시나 해서 남은 제자들에게 물어보십니다. 요 6 : 67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그 때 6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아멘! 우리 모두 그런 마음으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가기 바랍니다. 영의 말씀을 육으로 듣는 자들은 떠나야 합니다. 그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르치는 자들이 있으니 하나님은 그들을 조심하라 일렀습니다. 렘 23 :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마 24 :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더구나 그들이 요란을 떠니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24절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그렇지요? 표적과 기사까지 행한답니다. 사람들이 신기하다 놀라며 몰려오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요란을 떨어서 천국 백성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마 7 : 21 - 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주의 이름을 불러가며 온갖 능력과 기사를 행해도 그것은 불법이랍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모인다고 하나님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라 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무엇을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까?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전하지요. 모른다면, 깨닫지 못한다면 어쩌겠습니까? 정규 과정을 다 배우고 신학교까지 졸업하고 긴 과정을 어렵게 지나와 목사 안수까지 받았는데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하면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요. 그러니 또 공부합니다. 이 책 저 책 뒤져가며 연구합니다. 물론 공부하고 연구도 해야 합니다. 역사와 교훈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덧보태 더 재미있고 유익하게 이야기를 만들어서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 잘한다는 평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의 삶이 청렴하다면 신앙도 좋고 인품도 뛰어나다 하여 존경도 받습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들도 찾아오고 교회도 부흥합니다. 그러면 스스로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불법을 행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말씀을 재미있게 또는 은혜 충만하게 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목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깨닫고 전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장의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이 구원받아 천국 영생을 얻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그 백성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깨우쳐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아니하면 구원도 천국도 영생도 없습니다. 때문에 성경의 가장 중요한 약속(예언)을 무시하거나 몰라서 가르치지 않거나 아니면 자기 나름대로 연구하여 예언을 잘못 전하고 있다면 그것은 목회를 헛하는 것입니다. 렘 23 : 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이어 17절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그 말을 듣는 자들 또한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마음이 강팍해져서 옳게 증거하는 말씀을 발로 차며 함께 이단으로 몰아갑니다. 초림 때 예수님이 친히 그렇게 당하셨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잡혀 십자가형을 당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이라고 그런 일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육적 이스라엘이 그렇게 하였듯이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 시대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거짓 선지자에 대하여 그렇게도 경계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21 - 22절 “이 선지자들은 내가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달음질하며 내가 그들에게 이르지 아니하였어도 예언하였은즉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여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달음질하며 예언하였으니 예,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불법이었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전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가르치고 전했다면 그것은 악한 길이요 악한 행위라고 말씀합니다.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예언은 공부하고 연구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날이 이를 때까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 예언의 말씀을 하나님께 받아 기록한 자도 몰랐습니다. 단 12 : 8 - 9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그가 가로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다니엘이 하나님께 받았지만 몰랐습니다. 그래서 여쭈어보았지요. 하지만 뭐라 하십니까? 마지막 때까지는 봉함하라 하셨습니다.
예언은 마지막 때에야 성취되고 그 때에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요 14 : 29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일이 이루기 전에 말씀하셨으니 그것이 예언입니다. 그런데 언제 믿어야 합니까? 일이 이룰 때에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예언이 성취될 때에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뒤집어 생각한다면 예언의 비유의 말씀이 풀렸다는 것은 곧 마지막 때라는 것이요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며 주님이 재림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예수님 재림을 육신으로 오실 것으로 기다리는 듯합니다.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손오공이라도 되라는 말인가요? 육적 이스라엘에 오실 때는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지만 영적 이스라엘에게 오실 때는 영으로 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 :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분명 오리라 말씀하셨지요. 그리고 19 - 20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살아있는 우리만 알게 됩니다.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언제요? 그 날에. 아멘!
예언은 이룰 때까지는 비밀입니다. 마지막 때에 즉 주님 오시는 바로 성취되는 시점에서야 풀립니다. 그것은 연구하고 공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와 교훈은 공부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장래의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알 수 있는 일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그 날이 이를 때까지는 비밀입니다. 그것이 모두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밀로 하기 위해 비유로 감추어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6 : 25 “이것을 비사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 비사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당시에는 비사 곧 비유였지만 오시면 밝히 드러내십니다. 그러므로 비유가 풀어지는 때가 바로 그 날이요 주님 다시 오시는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 비유를 듣고 배우고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느껴지지 않습니까?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 : 7) 그 날이 오고 있습니다. 어쩌면 와 있습니다.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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