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484]許敬宗(허경종)5절
-擬江令長安歸揚州九日賦
의강령어장안귀양주구링부
本逐征鴻去 본축정홍거
還隨落葉來 환수락엽래
菊花應未滿 국화응미만
請待詩人開 청대시인개
본래 멀리가는 기러기를 쫓다가
떨어지는 잎새따라 다시 돌와왔네
국화가 아직 활짝 피지 않았으니
청하건대 시인을 기다렸다가 피어 나기를.
고양공공(高陽恭公)
許敬宗 | 허경종
허경종은 592년에 항주 신성현에서 급사중 허선심의 아들로 태어났다. \
허경종은 초기 수재로 천거되어, 회양군 사법서좌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허경종이 관직 생활을 시작한 대업 연간의 수나라는 양제의 잇따른 실책으로 인해
점차 망국의 길로 빠지던 상황이었다.
수나라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난 가운데,
강도로 피난해있던 양제는 우문화급에 의해 살해된다.
허경종의 아버지인 허선심은 이때 우문화급에게 굴복하지 않아 결국 살해된다.
허선심이 살해된 뒤, 허경종은 정처 없이 떠돌다가 이밀에게 의탁한다.
이밀은 허경종을 원수부 기실로 삼았으며, 허경종은 위징과 함께 기록을 관장한다.
618년 이밀이 몰락한 뒤 허경종은 당나라에 귀순하여 연주(漣州) 별가가 되었는데,
진왕 이세민이 허경종의 명성을 듣고는 그를 벽소하여 진왕부 학사로 삼았다.
진왕 이세민이 당태종으로 즉위한 뒤인 634년 허경종은 저작랑으로 제수되었고 수국사를 겸임하였으며 중서사인으로 승진한다.
636년, 태종의 황후인 문덕황후 장손씨가 붕어하면서 조정대신들이
문덕황후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다. 이때 장례식에 참석했던 허경종은
구양순의 용모를 보고 그를 비웃다가 탄핵을 받아
홍주(洪州) 도독부 사마로 좌천되었다.
그뒤 허경종은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여, 급사중, 수국사를 맡았다.
허경종은 태종의 지시로 무덕실록과 정관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고양현남으로 봉해졌다. 태종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허경종은 장안에 남아
태자 이치의 대리청정을 보좌하였다.
잠문본이 죽자 허경종은 검교중서시랑(檢校中書侍郞)이 되었다.
647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가 더해졌다.
649년, 태종이 붕어하고 태종의 태자인 이치가 당고종으로 즉위한다.
이때 허경종은 우지녕을 대신하여 예부상서로 임명되었다.
허경종은 풍앙의 재산을 목적으로 자신의 딸을 풍앙에게 시집 보냈다가
어사로부터 탄핵을 받아 정주(鄭州) 자사로 좌천되었다.
652년, 다시 입조하여 위위경(衛尉卿)이 되고 홍문관 학사가 더해졌으며
수국사를 다시 겸임하였다.
655년, 다시 예부상서로 임명되었다. 고종이 황후 왕씨를 폐위하고 소의 무씨를
세우는 것을 논의할 때 허경종은 고종에게 찬동하였고 이후
장손무기, 저수량, 한원 등을 무고하여 좌천시켰다.
656년, 태자빈객이 더해졌으며 뒤에 시중으로 임명되고 감수국사를 맡았다.
658년, 군공으로 진봉되었고 같은 해 이의부를 대신하여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662년, 우상(右相)으로 임명되고 광록대부가 더해졌다.
663년, 태자소사, 동동서대삼품[1]로 임명되고 감수국사를 맡았다. 이후 672년에 사망하여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양주(揚州) 대도독으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