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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1장 1-8절 앞서 보내심을 받은 사자
옛날 왕들은 어느 장소로 원행을 갈 때 미리 신하들 가운데 한 두 사람을 보내어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갈 것을 알리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왕이 가려고 하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 왕의 사자의 지시에 따라 왕이 오기 일찍 전부터 왕을 맞을 준비를 하고 기다렸습니다. 길도 닦아서 깨끗이 하고, 마을도 깨끗하게 하고, 왕이 머물 처소나 쉬어갈 곳을 미리 완전하게 준비하고 음식들도 역시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한다는 것은 왕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하는 것이지만 준비를 대강한다는 것은 왕에 대한 모욕을 주는 것으로 여겼기에 심하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의 사자는 왕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왕의 뜻을 분명하게 전달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전달의 정확성 여부에 따라 사람들이 칭찬과 상을 받을 수도 있고, 혹은 멸망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읽은 마가복음 1장 1-8절 말씀에 등장하는 침례 요한도 역시 구약 이사야서와 말라기서에 “오리라”고 기록된 예수님의 사자였습니다. 2-4절을 읽어보면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침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을 위한 준비사역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 대상은 주님을 맞이해야 할 이스라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길을 예비하기 위해 침례 요한을 도시로 보내지도 않으셨고, 예루살렘으로 보내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광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복된 복음의 시작을 광야에서 시작하셨을까요?
첫째로 광야는 일부러 큰 맘 먹고 찾아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갈급함을 크게 느끼는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이 있는 곳으로 일부러 찾아갑니다. 복된 소식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예전의 기도원처럼 말입니다. 예전에는 기도원을 참 많이 다녔습니다. 그때는 서울과 온 나라에서 일부러 기도원을 찾아가서 기도했습니다. 거리가 멀어도 기도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만큼 갈급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광야는 인간세상의 곤고함을 잘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35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은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거칠은 광야같고, 매말라 있고,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과 같습니다. 이로인해 그들의 마음은 곤고합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의 마음은 광야처럼, 메마른 땅처럼, 사막처럼 곤고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시간이 흐를수록 주변의 사람들이 다 떠납니다. 얻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자기 가진 것을 나눠주어야 할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곤고한 마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복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인 복음이 들려졌습니다. 온 세상의 죽은 생명을 살리고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왕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광야와 메마른 땅같은 마음이 기뻐하겠고, 사막같은 마음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의 원인이 됩니다.
사실 목마른 가운데 물을 마셔 본 사람이 물을 그리워하듯이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잠시라도 맛본 사람들이 기쁨과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맛본 사람들은 곤고한 마음을 못견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곤고함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자유롭게 하며, 흡족하게 먹고 마시게 하시는 풍요로 바꾸어 주실 구원자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애굽 땅에 노예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총리가 되어 애굽을 다스렸던 요셉 때를 그리워하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 그 이전에 하나님이 자신의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사모하듯이 말입니다.
그 옛날 하나님이 맛보여주신 존귀함과 풍요의 날이 있었기에, 그리고 하나님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 있었기에, 그 날을 기억하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가나안 땅으로 갈 날과 그 땅으로 인도하실 하나님의 은혜의 날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면서 그들을 구원해내실 자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죄악으로 영원한 멸망의 판결을 받은 온 세상을 진정으로 구원하실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곤고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셔서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54장 11절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한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이제까지는 곤고하게 살았습니다. 광풍에 요동하며 안위를 받지 못한 채 살았습니다. 사는 자체가 고생이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힘으로도 통치자의 힘으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세상에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세상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듣는 자마다 광야같은 마음, 메마른 땅같은 마음, 사막같은 마음에서 구원받아 자유롭게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복음이 마치 단 비와 같이 온 세상을 적시며 하나님의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흐르는 생명수가 강같이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에 흘러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들어간 물은 온 사막을 촉촉하게 적시면서 그 속에 있는 씨앗들을 발아시키고, 그것들이 자라서 풀이 되고, 꽃이 되고, 나무들이 될 것이며, 그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 한 가운데로 흐르는 그 물에 의해 사람들은 살아나며 세상은 살아날 것입니다.
이 부분의 의미를 이사야 32장 15-16절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라 그 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마침내 곤고함에 사로잡혀 있던 백성들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날이 옵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하나님께서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로인해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은 숲으로 여길 정도로 비옥하고 풍요로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현하시는 정의와 공의가 온 세상에 거하며 사람들의 마음 속에 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곤고함에 빠진 여러분들을 찾아오셔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셨음을 믿으십니까? 아멘
예수님이 그들을 찾아오셔서 구원하신 그때에 사람들이 느끼게 되는 기쁨을 이사야 35장 6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예수님의 복음으로 인해 이루어질 저는 자와 말 못하는 자에게 임할 놀라운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그들 마음 가운데 임하여 기쁘고 즐겁게 뛰며 노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마가복음을 보면 그 복음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 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에서부터 복음의 시적점으로 마가복음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선지자가 예언했던 이 복음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마가는 마가복음 1장 1절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고 말씀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마가복음 전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복음을 위하여 침례 요한을 통하여 준비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감동하셔서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를 통해 예수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그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을 보내시기 700년 전부터 미리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가는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했던 하나님의 사자가 바로 침례 요한이라고 가리키면서 그가 도시나 이스라엘의 중심 성읍인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광야로 나갔던 이유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를 이끄셔서 광야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그 광야같은 마음들을 영접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을 구원하실 자신들의 구세주로 마음에 영접하도록 돕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침례 요한을 광야로 보내신 하나님께서는 그가 광야에서 외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들을 사람들을 이끌어 보내셨습니다. 그가 외친 내용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예수님이 너희들 가운데 그리고 너희 마음 가운데 임하시도록 주님이 임하실 길을 준비하며 주님이 오실 길을 곧게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다가 돌아가시지 않고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하실까에 대한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다가 돌아가시지 않고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 들어오시도록 길을 닦는 행위가 바로 회개입니다.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침례를 전파하니”하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냥 회개가 아니라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말씀에 반응하는 인간의 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 죄를 지적하시면 인간은 하나님이 보이신 죄들을 하나하나 회개함으로 마음의 돌들을 제거하고 높아진 마음을 낮추고 낮아진 마음을 높이며 구부러진 길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렇듯 사람들로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만드는 돌들이 많이 박혀 있습니다. 또한 교만하기도 하고, 자존감이 떨어져 있기도 합니다. 또한 구부러져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왜곡하고 옳은 것도 삐딱하게 듣는 경향이 있습니다. 삐뚤어진 마음은 삐뚤어진 것에 반응하며 바른 것을 들어도 삐뚤어지게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삐뚤어진 영향을 미치게 합니다.
가령 누군가가 여러분들이 사는 동네에 이사를 왔다고 합시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을 까 궁금할 것입니다. 그런데 옆집에 여러분들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와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이 굉장히 나쁜 일만하다가 이사를 왔다고 전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직도 그 사람을 만나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갖게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이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도 여러분 마음에는 옆집 사람으로 들었던 나쁜 이미지가 남아 있어 떨떠름하게, 그리고 마지 못해 인사를 받을 것입니다. 침례 요한은 그 마음을 바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이런 왜곡된 인간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의 진실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께닫고 자기의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예수님께 나와 구원해달라고 부르짖는 죄인들의 죄를 다 용서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복음은 자기들의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를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로 자기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요, 그리시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로 삼으신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전해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침례 요한에게 인도해주신 사람들은 이렇게 요한이 전해주는 그 복음을 듣고 회개로 반응을 했습니다.
5절 말씀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하나님이 온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인도하신 수많은 사람들이 침례 요한에게 가서 침례 요한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은 자기 안에 있는 죄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죄인줄 몰랐던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많고 더러운 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침례 요한 앞으로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 가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침례 요한이 광야에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고 전할 때의 모습과 삶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구약 시대에 이 복장을 한 사람은 엘리야선지자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악한 아합과 이세벨로 인해 완전히 더럽혀지는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선포했습니다. 그때 엘리야 선지자가 입었던 옷이 바로 낙타 가죽으로 만든 옷이었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었습니다.
침례 요한은 바로 엘리야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예언한
엘리야였습니다. 말라기 4장 5-6절을 보면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침례 요한이 예수님이 오실 길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마음에 돌을 제거하고 낮은 마음은 높이고 높은 마음은 낮추며 비뚤어진 마음의 길을 바르게 펴는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의 자녀들로 향하게 하시고, 또한 온 세상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키게 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침례 요한은 백성들의 마음의 길을 미리 닦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침례 요한은 광야에서 나는 음식을 먹었는데 그것은 바로 메뚜기와 석청이었습니다. 광야에 메뚜기가 있었던 이유는 요단강 가까운 곳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석청은 벌들이 땅에다가 집을 짓고 그곳에 꿀을 모아 놓은 그 돌을 석청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먹고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광야로 몰려들게 하시기에 능하신 분이십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청운의 꿈을 품고 대도시로 나가서 교회를 개척하다가 문을 닫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대도시에 개척을 시키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세우기 이전에 하나님이 자신을 어디로 보내시는 지를 묻는 소명을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그 시간이 오래 걸릴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따라 복음을 전할 장소와 대상들을 명확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까 광야에 나가서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몰려들지 않았습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어도 침례 요한은 그들에게 한 푼의 돈도 사사롭게 받지 않고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메뚜기와 석청으로 음식을 삼으면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그런 그가 말합니다. 7-8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침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리라”
침례 요한은 회개의 침례만을 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기 뒤에 오시는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실 분을 미리 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여러분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실까요? 회개의 목적은 단순히 죄를 씻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회개의 목적은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시기 위해 여러분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오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을 영접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침례 요한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자로써 물로 침례를 주면서 성령으로 침례를 베푸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셔서 교회로 하여금 물로 침례를 베풀면서 구원을 갈망하며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주님으로 모셔들이게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의 죄를 자신의 피로 다 씻어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십니다.
그때 사람들은 거듭나게 되어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회개하기 이전의 죄를 다 들여다보고 알았기 때문에 그 생활을 혐오하면서 그 길에서 떠나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길을 가게 됩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거룩한 새 옷을 입히시고 각자에게 맞는 십자가를 주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십자가를 질 것인가 말 것인가의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보면서 뒤로 물러갑니다. 믿음과 헌신을 버립니다. 이는 자기의 육체의 썩어질 것을 위해 예수님을 믿으려고 했다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삶을 살라고 초청하시자 그 좁은 문과 좁은 고난의 길을 생각하면서 믿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적은 무리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새생명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사람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이 그들 속에 역사하는 사람들 속에 나타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합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마다 즐겁게 뛰놀며 노래하며 영광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면서 따르는 온전한 결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곤고한 광야와 메마른 땅과 사막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으로부터 흘러 넘쳐 흐르는 생명수의 강인 성령이 충만하게 흘러 여러분들을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나고 있습니까? 주님과 더불어 살리며 풍성하게 하시는 생명의 역사에 함께 참여하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을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