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애굽기 13장
1 출애굽기 13:1-16
이스라엘에서의 모든 규례는 자기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행했던 행동을 다시 반복해 보는데 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사건을 유월절이라고 하는 규례를 통해 항상 현재화시킴으로서 하나님과의 동행을 지속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친히 전쟁을 하셔서 획득한 노획물이 바로 이스라엘이며, 지상에서 제거된 장자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장자로 새로 태어난 것도 이스라엘이다.
이런 점에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2절)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이나 가축의 초태생을 따로 거룩한 것으로 구별함으로써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취지에 호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언약에 의한 희생의 피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속에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의 장자에 대해서는 대속을 해야 했다(13,15절). 생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어린 양으로 대속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이유로 인해 그 짐승을 대속할 수 없다면 그 짐승의 목을 꺾어서라도 그 생명을 하나님께로 돌려야 했던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초태생의 구별을 요구하시는가? 초태생이란, 앞으로 태어날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속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힘으로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애굽을 탈출한 백성이기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림이 마땅한 것이다.
죽음과 저주 안에 있어야 할 이스라엘이 어린 양의 피 때문에 생명을 얻었으므로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의 힘은 인간 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나오는 것임을 고백하고 드러내야 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가야하는 가나안 땅에서이다.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5절), 또 "여호와께서 너와 네 조상에게 맹세하신대로 너를 가나안 땅에 인도하시고 그 땅을 네게 주시거든"(11절) 이 예식을 지키라고 말씀하신다. 이말씀은 이미 발생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때문에 이스라엘은 반드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보증이다.
오늘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은 신자라면 자기를 위해 살 수 없다. 그리스도의 것으로(고전 3:23) 십자가 정신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 신자의 신자 됨에 대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목회자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 대열에 끼여 있는 것으로 자신의 구원이 보장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십자가 정신의 확산이란 요원한 것이 되고 말았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십자가 정신을 찾아보기란 참으로 어렵다.
2 출애굽기 13:17-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여정을 가까운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로 지나게 하지 않으시고 홍해의 광야 길로 잡으셨다. 그 이유는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17절)고 했다. 그 길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을 거쳐 애굽으로 들어오는 길의 역순으로 생각할 때에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도로였다.
이런 점에서 애굽의 국경을 지키는 지역에 설치되어 있는 군사 요새들을 전제한 언급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셨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그분 앞에 서야 하는 것이었다(3:12).
문제는 전쟁을 치르는 것 자체가 아니라 애굽에서 나오자 마자 전쟁을 경험하게 될 때 그것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할 백성들의 연약함이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백성들의 마음은 여전히 애굽인 그대로였다.
그들은 아직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알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어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다만 애굽의 종살이가 괴로워서 애굽을 빠져 나왔을 따름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육체적으로 편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깨닫고, 또 이방인들과는 구별되는 자신들의 새로운 운명을 확실히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신의 뜻대로 주장하시는 것이다.
애굽 땅에서 나올 때에 모세는 요셉의 해골을 취했다(19절). 그 이유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고 밝히고 있다(참고 창 50:24-25).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유월절 행사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 결코 인간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대대로 전달하려는 의도가 있는데 요셉의 해골을 이스라엘이 이동시키면서 이 점을 참작해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진두에 모세가 서서 길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향해 갈 때에 요셉의 해골 뒤를 따라 간 셈이 된다. 약속을 따라 그 후손을 바라보다가 죽은 요셉의 해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요셉은 죽었으나 그 요셉을 도구로 야곱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들이셨던 하나님의 언약은 지금 요셉의 해골을 앞세워 하나님에 의해 철저히 지켜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숙곳을 지나 광야가 시작되는 에담에 장막을 쳤다. 그 때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나타났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21절) 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가지 아니하니라"고 했다(2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길을 찾고 노정의 난관을 개척하면서 가나안 땅으로 가야 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붙여주신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었다.
구름과 불 기둥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꼼짝없이 하나님께 붙잡혀서 가는 길이 바로 신자의 인생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코 새로운 길을 향한 개척과 난관의 돌파를 통한 전진이 아니라 성령께 이끌려 가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 내용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고 도구로 쓰신다면 거저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마음이 아니라 전부 내 중심으로 채워진다. 내가 가는 길에 평탄하게 만들어 주시고, 하나님이 친히 나의 보디가드가 되어 주실 것을 요구한다. 마치 기도가 자신의 욕심을 이루어 주는 일에 후방에서 물적, 인적 지원을 요청하는 통신수단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기도에 대한 정의를 그렇게 내리고 있는 곳이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기 위하여 하는 기도로 제시하고 있다(눅 22:42). 그러므로 기도를 함으로 자신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굴복시킬 수 없다면 그 기도는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고 마는 것이다(마 6:5). 결국 자기를 위해 하는 기도는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