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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급함이 불꽃처럼 일게 하소서.
(시 42: 1-5)
정확한 날자는 기억할 수 없지만 아마도 10여 년 전, 12월 달 어느 날인 것으
로 생각됩니다. 강남에 볼 일이 있어서 강남역 근처 어느 골목에다 차를 주차하였습니다. 일을 다 마치고 주차했던 장소로 다시 돌아왔지요.
그 당시에는 문정동에 있는 어느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서둘러서 강남에서
일을 다 마치고 교회에 가서 성탄절 행사 준비를 하고 있는 선생님들과 학생들
을 만나기로 약속했었습니다. 차에 성탄절 행사 준비자료를 다 놓아두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차가 온데 간데 없어졌습니다.
내가 차를 다른 곳에 세웠나 하며 찾아보기도 했지만 찾을 수가 없어 그 골목
여기저기에 있는 가게에 들어가 물어보았습니다. 결론은 누군가가 차를 견인해갔다고 하더군요. 그 때의 황당함은 뭐라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젠 차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실 탄천으로 갔습니다.
거기에 가서 차량번호를 대니까 차가 보관되어 있다고 말하더군요.
차를 찾아가려면 벌금과 견인료 등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 돈이 얼마냐고 물어
보니까 내가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보다 조금 많았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한
만 원 정도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만 원이 없어서 강남에 보관되어 있는 차를 가지고 가지도 못하죠. 더군다나 교회에서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어찌되었든 간에 빨리 가야만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하기로 했습니다.
벌금을 내는 사무실에 어떤 분이 들어왔습니다. 외모로 볼 때, 무척 부티가 나보이는 50대의 아저씨였습니다. 이 분도 내 처지와 똑같이 자신의 차가 견인되어 차를 찾아가려고 오신 분이었습니다. 이 분에게 내 사정을 얘기하고 돈 만원만 꿔 달라고 부탁드렸습니다. 빌려주시면 온라인으로 내일 안으로 송금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아무 말도 안하고 나를 위아래로 힐긋 쳐다보더니 그냥 가더군요.
또 한 분이 사무실에 들어 왔습니다. 이 분은 트럭을 찾으러 온 분이었습니다.
겉모습을 볼 때, 그다지 여유가 있어 보이지 않는 30대의 남자였습니다.
어찌되었든 간에 조금 전에 아저씨에게 말했던 것처럼 다시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흔쾌히 '아 그래요. 내가 드리지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계좌번호나 연락처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한사코 괜찮다는 말씀만 하시고 유유히 자신의 차를 찾아 타고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지금도 그때,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분을 통해 도움 받았던 일을 생각만 하면, '아직도 이 세상은 살만 나는 세상이구나' 하는 흐뭇한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 5절을 다함께 보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
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
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를 전부터 많이 들어왔습니다. 여러분만 힘든 것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도 힘들어합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표현하지 않을 뿐입니다. 이 시간 낙심하며 불안해하는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길 바랍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알지 못하는 어느 분을 통해 도움을 받았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릅니다. 이름 모를 한 사람의 도움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긍정적인 시각과 힘을 주지 않았습니까? 하물며 우리가 '나의 구주'라고 날마다 신앙고백 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면 우리는 단 하루를 살지라도 가슴 벅찬 감격과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소망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소망이 사람이, 심지어 여러분 옆에 앉은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환경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실력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아왔더라도 이제는 오직 하나님이 여러분의 유일한 소망
이길 바랍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이라고 단호히 선포하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목숨을 건 사람 치고 역사적으로 실패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쓰임 받은 사람들은 한사코 하나님께 목숨을 걸었고 인생을 맡기고 산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내가 그렇게 살 만한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지 않을까요?
여러분, 이 시간 차근차근 여러분의 문제를 조용히 들여다보십시오.
하나님이면 해결할 수 있는 일인가요, 아니면 하나님도 불가능한 일인가요?
하나님이 능력이 없다고 믿나요 아니면, 내가 하나님께 확신이 없어서 맡기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을까요?
교회에 한 여학생이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왔습니다.
그게 조금 마음에 걸려서 목사님이 짓궂게 여학생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등에 지라고 했지 어디 목에 걸라고 했냐?" 했더니, 여학생이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목사님, 잠잘 때는 등으로 넘어가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시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목걸이만 걸었다고 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뭘 보고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오늘 말씀 1∼2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
하니이다 내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
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에게 굶주려 있는 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에게 굶주려 있습니까? 얼마나 굶주려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형편에 있나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삶에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것이 무엇인가요?
여러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 나의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이 아닐까요?
우리가 그 하나님 안에 거하며 사는 길은 갈급해지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굶주
려 있는 겁니다. 마 5:6은 말씀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이 시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갈급함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다른 것을 위해
서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먼저 여러분의 삶에 갈급함을 주시도록, 우리들의 예
배에 하나님의 임재를 갈급해 하도록,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갈급해 하는 그
런 기도를 먼저 드립시다.
'나 여호와는 거룩하니 너희는 거룩할지니라' 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급해 하고 굶주리게 되면 우리는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온전히 만져주시고 삶에 깨어진 조각들을
다시 맞춰주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진짜 굶주려 있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왔다가 사람들만 너무 많이 보고 하나님은 거의 보지 못한 적이
있었던가요?
내가 하나님을 만났던 기억 중에 오랜 과거에 있었던 것 말고 아주 최근의 것
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지난날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연을 읽는 것에 지쳤
습니다.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물론 점심식사도 있었습니다. 음식이 풍성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에티오피아에 사는 기근에 찌든 사람들 앞에 어제 결혼식 음식이 차려지면 어
떤 일이 벌어질까요? 순식간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과 예배가 하나님을 더욱 갈급해 하고 목말라함으로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해지고 풍성해지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만나는 간증이 생동감 있게 언제나 계속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무지개교회만 가면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아름다운 소문이 울려 퍼지길 원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하나님을 목말라하는 주의 성도들이 모여들어 하나님을 찬양하길 원합니다.
주님을 알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들.
영적인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하나님 임재'를 간절히 소망하던 사람들.
하나님을 잡고자, 또 하나님께 잡히고자 그 뒤를 끊임없이 쫓았던 사람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고 하나님을 본 이후에 하나님 이외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사람들. 성경에서 모세, 욥, 다윗, 바울 등을 말합니다. 여기
에 자랑스런 여러분들이 들어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대합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
내 영혼이 낙망할 때
42: 1-5
인간은 자기의 불완전성과 한계상황을 뛰어넘지 못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며 못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나(요 14:12), 때때로 그와 정반대의 현실에 부딪치곤 합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신앙과 현실의 괴리를 느끼게 될 때 적지 않은 혼란을 겪습니다. 우리는 위대한 신앙가나 영웅적인 일을 했던 사람 중 이와 같은 벽에 부딪혀 낙심하고 괴로워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본문 성경을 기록한 시인은 그 영혼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한 채 낙망하며 불안해한다고 토로하였습니다(5절).
성경학자들은 이 시편을 다윗의 글이라고 합니다. 개혁자 칼빈(Calvin)은 다윗이 사울의 박해를 받고 망명생활을 할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라 하고 그것을 왕궁에서 봉사하던 고라 자손 중에서 보관했을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독실한 믿음과 헌신을 했던 사람이지만 지금 당장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한 채 매우 어려운 지경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 것은 사람들이 그를 향하여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고 조롱하는 소리를 들을 때였습니다. 그때의 그 참담한 심정을 토로하여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고 하였고(3절), 또는 옛날을 기억하면서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4절).
이와 같은 일들은 다윗뿐만 아니라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낙망하고 불안하게 되는 경우와 그런 때에 일어나는 현상과 여기 신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이나 결과를 생각하면서 은혜 받기를 원합니다.
Ⅰ. 신자가 낙망하는 이유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처럼 패기 있게 힘찬 비상을 하는 자이며 낙망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사 40:31).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도, 성령받은 사람도, 은혜가 충만한 경험이 있는 사람도 낙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1) 세상의 악함 때문에 낙망합니다.
세상에는 어느 시대나 어떤 곳에서나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그렇지만 악이 득세하고 선이 짓밟히는 것을 볼 때 성도는 낙심하게 됩니다.
시편 73:1-3에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사울 왕의 신하로서 진실된 마음으로 왕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그를 역적으로 몰아서 죽이려 하였고 이스라엘 전역으로 도망 다니는 다윗에게는 발붙일 곳이 없었습니다. 본문 성경 6절에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땅과 헤르몬과 미살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2) 자기의 무능을 알았을 때 낙망합니다.
여간 자신감이 있고 미래에 대한 비젼을 가진 사람도 너무나 두꺼운 현실의 벽과 거기 서 있는 자신의 무력함을 인식할 때 힘이 빠지고 좌절하게 됩니다. 불의 사자라 불리우는 엘리야는 아합 왕 앞에서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사람입니다(왕상 17:1). 그는 갈멜산 꼭대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을 모아 놓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했으며 또 그들을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모두 죽여 버리기도 했습니다(왕상 18:40).
그러나 잠시 후 아합 왕과 이세벨의 폭정으로 하나님의 선지자가 모두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큰 실망과 좌절에 빠져 죽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열왕기상 19:10에 보면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 속에 두 가지 사람이 있음을 실토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하고 탄식하였습니다(롬 7:24). 그것은 자기 안에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자기에 대한 실망에서 오는 탄식입니다.
(3) 하나님께서 외면하신다고 생각했을 때입니다.
원래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빈틈없이 살피시고 감찰하신다고 믿었습니다(시 139:1-4). 그는 평생동안 저를 살피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극심한 환난에 처하여 고통 중에 있는 자신을 하나님께서 모르는 척 외면하신다 생각할 때 그는 낙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3:1-2에도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본문 말씀 3절에도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하고 조롱한다고 말했습니다. 불신자들 보기에도 하나님이 그를 철저하게 외면하시고 그 기도를 들어 주지 않는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신자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야 40:27에는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고 했습니다.
Ⅱ. 낙망하게 될 때 어떻게 해야하는가?
신자가 어떤 이유로든지 낙망하게 된다는 것은 그 믿음이 중심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대체로 이럴 경우 욥의 아내처럼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거나(욥 2:9), 요나와 같이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를 가집니다(욘 4:9). 아니면 엘리야처럼 자포자기하며 죽음을 재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왕상 19:4).
그렇지만 믿음 있는 사람은 침착하게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립니다. 본문 말씀 5절에는 낙망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라고 하였습니다. 사탄은 언제나 시험을 당하는 성도에게 접근하면서 이때를 제일 좋은 기회로 삼아 흔들고 넘어뜨립니다.
(1) 세상을 보지 말아야 됩니다.
요한1서 2:16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실망했거나 신앙 생활에 갈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 아닌 다른 데로 눈을 돌리게 되면 더 큰 시험에 휘말리게 됩니다.
힘있는 권력자를 의지하려 하거나 재력 있는 사람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시편 146:3-4에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선은 잠시 도움을 준다 하더라도 결국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스스로 몰락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정으로 파고드는 시험을 물리치고자 사랑하는 제자 베드로를 향해서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마 16:23).
(2) 자신을 보지 말아야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과신하고 있습니다. 세상 만사를 자기의 기준에서 바라보거나 판단하려 드는 것입니다. 심지어 신앙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도 자기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평가 하곤 합니다.
예레미야 17:9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좋은 것은 무조건 선이고 제게 나쁜 것은 모두가 다 악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기 중심의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73편을 기록한 시인은 악인이 항상 평안하고 부요한 것을 보고 자기는 마음을 정결케 하고 손을 깨끗이 하여 무죄하게 살아온 것이 허무하다고 탄식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악인 갑자기 몰락하는 것을 본 후 마음을 돌이켰습니다(시 73:17). 그리고는 자신을 가리켜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라고 하였습니다(시 73:21-22).
(3)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됩니다.
본문 말씀 5절에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낙망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 숨막히는 좌절과 낙망의 사건을 가지고 오히려 찬송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욥기 1:20-21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낙망이 은혜로 바뀌어 진다는 것입니다.
① 주의 뜻을 깨닫게 되는 은혜입니다.
시편 73:16-19에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 시인은 의인과 악인의 구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과 멀리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편 73:27-28에 “대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고 하였습니다.
② 악이 선으로 바뀌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낙망할 만큼 큰 고난을 주시고는 그것으로 오히려 덕이 되게 하십니다. 극심한 환난의 밑바닥에서부터 최고의 영광으로 등극하게 된 요셉은 하나님께서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창 50:20). 낙망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성도는 자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선하신 목적을 성취하고 계심을 알게 됩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목을 늘어뜨리고 앉아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도 그때부터 자기가 하여야 될 새로운 사명에 착수하였습니다. 곧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며,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자기 대신 선지자가 되게 하는 등 하나님 나라 운동의 기틀을 마련하게 하였습니다(왕상 19:15-16). 하나님의 백성들은 낙망할 수밖에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주께서 베풀어주시는 진수성찬의 기름진 상(床)을 맛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시 23:4-5).
③ 믿음의 신비를 알게됩니다.
구약시대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는 당시의 백성들이 신앙생활에서 낙망을 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거부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말라기 3:14에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대하여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말 3:16).
하박국 선지도 성도가 낙망하는 것을 보고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하고 항의하였습니다(합 1:13).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였습니다(합 2:3-4).
이와 같은 응답을 받은 하박국은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합 3:18-19).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시편 42편 6-8절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심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의 인자하심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의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 인간의 고귀한 가치 >
필자는 34살에 첫째 딸을 얻었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이름을 ‘은혜’라고 지었고
2년 후 얻은 둘째 딸은 성경에서 가장 예쁜 이름이라고 여긴 ‘한나’라고 지었다.
필자에게 두 딸은 천하보다 귀해서 천하를 다 준다고 해도 두 딸의 손가락 하나도 잘라줄 수 없다.
더 나아가 필자에게 “두 딸은 천하보다 귀하다.”라는 표현으로도 성이 차지 않고
“두 딸은 내 생명보다 귀하다.”라고 여기고 있다.
모든 정상적인 부모는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마음은 그래도 실제로 사람은 그렇게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길 만큼 사랑하셨다.
더 나아가 “너는 내 생명보다 귀하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죄로 인해 죽게 된 나를 온전히 구원하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즉 하나님은 나를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셨기에 나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주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내어 주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창조하셨기에 사람의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천하에는 없다.
하나님은 ‘영혼’이란 잔을 너무 크게 만드셨기에 천하를 다 얻을 수도 없지만 다 얻어서 영혼의 잔에 넣어도
그 잔을 채울 수 없다.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며(전 1:7).”
솔로몬에게 물이 바다로 흘러들듯이 부귀영화가 흘러들어 왔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영혼은 채워지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혼의 바다를 채울 수 없다.
하나님이 영혼의 용량을 천하보다 크고 바다보다 넓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물질로 영혼을 채우려는 일이다.
<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
어떻게 거대한 용량을 가진 영혼의 바다를 만족시키는가?
시인은 고백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7절).”
고라 자손이었던 시인은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른다는 고백을 통해 독자들에게 두개의 깊은 바다를 떠올리게 한다.
‘영혼이란 깊은 바다’와 ‘하나님이란 깊은 바다’이다.
‘하나님의 바다’는 끊임없는 사랑으로 ‘영혼의 바다’를 찾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고 한 영혼의 구원을 그토록 기뻐하신다.
또한 ‘영혼의 바다’도 끊임없는 사모함으로 ‘하나님의 바다’를 찾는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왜 영혼이 그토록 하나님을 찾는가?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는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에 행복을 주는 절대 조건은 하나님밖에 없다.
환경과 처지가 어떻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행복한 사람이고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체득했던 다윗은 시편 23편 1절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왜 부족함이 없었겠는가?
다윗에게도 부족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아쉬울 것은 없었다.
그런 행복한 고백이 내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행복이란 많이 가진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부자들은 그 진리를 잘 안다.
부자들이 그 사실을 잘 아는 것은 부자 체험을 해봤기에 깨닫는 특권이다.
그처럼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지혜로운 부자들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라.
행복의 파랑새는 부자에게 찾아오지 않는다.
물질은 행복을 위한 최저의 가능성을 제공할 뿐이다.
참된 행복은 하나님을 깊이 만날 때 주어진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