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계 5:12)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riches)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오늘은 돈과 부자를 악하게 보는 분위기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나 돈을 미워하신 적이 없습니다. 부자청년을 사랑하셨고(막 10:21), 사람들의 세금을 횡령했던 세리 삭게오 집에 가셔서 그와 교제하셨으며(눅 19:5), 돈 궤를 맡길 유다가 필요하실 만큼 돈도 있으셨습니다(요 13:29). 물론 그들을 사랑하셨다고 해서 그들의 죄를 용납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가난이 덕목인양 가르치는 설교에는 예수님도 머리 둘 곳이 없었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 지역에서 그랬다는 말이지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본부를 두셨고 거기 집이 있었습니다. 네 명의 친구가 중풍병자를 데려와 지붕을 뚫고 집으로 들어온 사건 아시죠? 그 집이 예수님의 집입니다(막 2:1).
(막 2:1, 쉬운성경) <중풍병 환자를 고치심>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셨지, 가난을 추구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마 26:11). 가난은 덕목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청렴'이 '가난'과 비슷한 말처럼 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벌로 부르신 자들도 있을텐데 왠지 부를 죄악시하는 분위기는, 큰 기업을 일으켜 부를 창출하여 일자리를 통해 다시 사회에 기여하라는 부르심을 교회 내에서 싹부터 잘라내려는 마귀 짓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부자들은 다 선하고 부는 덕목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마음의 동기가 중요합니다. 가난해도 탐욕스러운 자가 있고 부해도 탐욕이 없는 자가 있습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요. 애초에 부와 가난을 선악과 연결해서 생각한 것이 근거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가난은 덕목, 재벌은 끌어내려야 할 죄인'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성경은 뭐라고 하는지를 잘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mind)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부를 창출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부를 창출하고 기업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까지 잘못된 가르침에 지래 겁먹어서 가난을 덕목으로 삼는다면 우리 사회는 가난한 사회로 전락할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부를 좋아하면서 겉으로는 부를 욕하고 있는 교회, 이것이 이 사회에 고스란히 드러난 상태라고 저는 봅니다.
해결책은 무엇이냐? 세상의 중심인 교회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뀝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당당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돈과 부에 대해 가르쳐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죄지만 (딤전 6:10) , 분명 부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들이 있으며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 주변에 있으니 그들을 잘 돌봐야 하지만, 가난은 덕목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부자들이 겸손해야 한다면 가난한 자들도 겸손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담대해야 한다면 부자들도 담대해야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이중 잣대를 버리고 예수님이 보시는 그 시각으로 부와 가난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를 추구하는 것에 대해 '번영신학'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음 구절을 인용할 것입니다.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이 구절에 대해서는 속시원한 설명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부하려 한다"라는 것은 세상의 부귀를 탐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번영은 나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것'이라는 진리를 듣고 부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왜 부하려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건강하지 않다면 (상처에서 나왔거나 뻐기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썩은 씨에서 시작되었기에 썩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러니 부하려는 마음의 동기를 한번 살펴 보십시오. 덤으로 자신의 삶의 문제가 나오는 뿌리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다 가졌다는 진리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가난해 지심으로 이미 부요케 된 자들입니다. 이미 부요케 되었다는 자아상이 있다면 왜 부 "하려" 하겠습니까? 이미 가진 부를 풀어 놓는 방법을 알기 원하는 것과 부하려는 욕망은 다른 것입니다. 부 "하려" 한다는 말에는 자신이 부하지 않다는 생각이 이미 깔려 있습니다.
이미 가진 것을 아는 자들과 부하려는 자들의 차이는, 전자는 안식합니다. 후자는 안식을 못합니다. Wow! 짧지만 엄청난 계시지요. 그래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진다고 바울이 경고하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부자가 되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부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들이라면(이미 가진 부를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표출하도록 부르심 받은 자들이라면) 부를 창출하여 그것을 다시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는 꿈을 꾸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뜻이기 때문에 반드시 도와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