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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서북민의 1차 봉기
무신의 난이 일어나고 이의방이 정권을 장악한 후 최초로 일어났던 대규모의 농민봉기는 서북지역에서였다. 서북지방은 군사적 특수지대로서 서경 과 더불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역사적·지리적 특성으로 서 경은 고려 초기부터 수도 개경과 같은 유사한 통치기구와 체제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독립된 기반을 확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 사회가 오래 지속되면서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문벌귀족이 중앙의 정치권력 을 독점함에 따라 서경 등 지방세력과의 갈등이 발생하였다. 金潤坤,<高麗 貴族社會의 諸矛盾>(≪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3). 이들의 대립 은 개경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집단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인종 초에 발생한 이자겸의 난의 여파로 개경세력은 약화되고 묘청을 중심으로 하는 서경세력 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묘청의 난이 실패하자 서경세력은 위축되어, 이제는 개경과 대등한 자리를 유지할 수 없도록 제도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고려정부는 묘청의 난을 진압한 직후에 西京畿를 없애고 江東·江西·中和·順化·三和·三登의 6현을 설치하였을 뿐 아니라 서경 관제도 개편하여 監軍과 分司御史臺만을 남기고 나머지 官班을 모두 없애 버렸다.≪高麗史≫권 58, 志 12, 地理 3, 西京留守官 인종 13년. 서경의 제도적인 격하는 당연히 경제적 기반의 약화로 이어졌으리라 판단되는데, 이로 인해 西京 吏民은 개경정부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에 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의종은 자주 서경에 행차하여 西京 吏民을 위무하기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무신란으로 정권이 문신에서 무신으로 바뀌면서 다시 서경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서북민은 중앙 집권체제가 동요하고 있는 틈을 타서 서경을 중심으로 봉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서경토호의 목적이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었다면, 서경민은 사신의 행차 등으로 인한 지나친 요역동원과 지방관의 탐학에 대한 불만에서 봉기하였다고 보여진다.
다음 양계의 경우, 이곳은 북방 이민족과 국경이 맞닿고 있는 변방지대이었으므로 고려는 특수 행정구역으로 설정하여 남도와는 다르게 통치하였다. 邊太燮,<高麗 兩界의 支配組織>(≪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양계에 거주하는 모든 장정을 州鎭軍에 소속시켜 방수에 참여케 했으며, 李基白,<高麗兩界의 州鎭軍>(≪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양계에서 거두어들이는 조세는 京倉에 운반하지 않고 모두 그 지역의 군수에 충당시키는 등 둔전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安秉佑,<高麗의 屯田에 관한 一考察>(≪韓國史論≫10, 서울大 國史學科, 1984), 20쪽. 양계는 일부 지역 을 제외하고는 산이 많으며 토지가 척박하고 기후가 한냉하여 논농사는 거의 지을 수가 없었고 밭농사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남도에 비해 수확량에 많은 차이가 있는 열등한 생산조건 아래서 경작에 종사한 둔전군은 비단 그 신분이 천민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뿐 아니라 생활여건도 극히 비참한 상태에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姜晋哲,<高麗時代의 農業經營形態>(≪韓國史硏究≫12, 1976), 42쪽. 더욱이 고려 전기가 지나면서 점차 토지의 사 유화 경향이 일어나게 되었다. 다음 내용은 후기의 사료이지만 권세가에 의 해 양계지방의 토지 소유관계가 변질되었음을 보여준다.
① 공민왕 5년(1356) 6월에 교지를 내려,‘서북면의 토지는 일찍이 조세를 받지않고 防戍에 쓰이게 한 것이 이미 오랜 전례로 되어 있는데 근래에 권세가가 겸병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관청에서 조사, 장악하여 1결마다 賦稅 1석씩을 받아서 軍需로 지출토록 하라’고 하였다(≪高麗史≫권 78, 志 32, 食貨 1, 田制 租稅).
② 北界는 예전에는 私田이 없고 관청에서 租를 거두어 군량에 충당하였는데 뒤에 권세가가 다투어 점유하여 사전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군량의 공급이 이어지지 못하여 백성에게서 양식을 거두니 백성들이 이를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 安州 이북이 특히 그 폐해를 많이 입었다(≪高麗史≫권 82, 志 36, 兵 2, 屯田 신우 원년 10월).
위의 사료는 13세기 후반의 것이지만 이미 12세기 경부터 남도지방에 대 한 권세가의 토지겸병과 더불어 양계지방에도 토지의 사유화가 같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북계지방은 선대로부터 세습되는 남도의 민전과는 달 리 북방으로 이주해 온 徙民들에게 생활보장을 위해 나눠주거나 投化한 여진인에게 지급하는 토지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곳은 개인의 소유권이 약한 민전이 많았으며, 鄭鍾瀚,<高麗 兩界의 民田과 그 所有關係의 變化>(≪慶北史學≫6, 1983). 國屯田이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어떤 계기만 마련된다면 이곳의 실정에 밝은 관리에 의해 탈점이 용이하였으며, 특히 북계지역의 토지가 먼저 권세가의 不輸私田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같은 양상은 동계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짐작되지만, 이곳은 북계에 비해 토지가 더욱 척박하므로 권세가에 의한 사유화가 보다 완만히 진행되었으리라 생각된다.
고려 후기에 들어서면서 북계는 토지겸병뿐 아니라 지방관에 의한 수탈 도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앞서 설명하였듯이 명종 때의 병마사 정세유는 백 성의 재화를 거두어 중앙에 바쳐 아들 允當의 승진을 청탁하였으며,≪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4년 12월. 조원 정은 동북면병마사로 부임하여 백성의 재물을 거두었는데 다른 사람의 머리 카락까지 잘라 가졌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5년 2월. 또한 서북면병마사 李知命은 왕명에 의하여 군수물자인 龍州창고의 苧布를 팔아서 거란실을 사서 상납하였다.≪高麗史節要≫권 13, 명종 15년 정월. 이같은 관리들의 백성들에 대한 수탈 양상은 중앙과 연결되는 구조적인 모순을 지니고 있었으니 양계 주민들의 국가에 의한 강제적인 사민정책과 북방사신들의 빈번한 왕래로 인한 역역 부담에 대한 고통 등은 개경정부에 대한 반감을 한층 더 쌓이게 하였다. 이 때 조위총이 난을 일으켜 서북면의 여러 성에 동참하도록 호소하자 병마사 등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 불만이 쌓여있던 서북계의 토호인 都領과 주민들 대다수가 그것을 따르게 되었다.
서북민의 항쟁은 이미 명종 2년에 昌州·成州·鐵州에서 그 전초전이 시작되었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2년 6월. 이들 북계 3주민의 봉기는 지방관의 탐학에 대한 분노와 지역 세력의 약화로 인한 불만에서 파생된 단순한 민란이었으나, 병마사 송유인은 이들이 두려워서 수습을 시도하지 않고 관직을 포기할 정도로 불온한 기운 이 감돌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서북계의 모든 지역이 동요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이후 명종 3년에는 문신 복고를 바라는 반무신란의 성격이 강한 金甫當의 난이 일어났으며 金甫當의 난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邊太燮,<武臣政權期의 反武臣亂의 性格>(≪韓國史硏究≫19, 1978).
黃秉晟,<金甫當亂의 一性格>(≪韓國史硏究≫49, 1985). 이듬해에 趙位寵이 봉기하였다. 다음은 조위총의 봉기 과정을 적은 내용이다.
(조위총은) 의종조 말기에 兵部尙書로서 西京留守가 되었다. 정중부·이의방 등이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세웠으므로, 명종 4년에 位寵이 병사를 일으켜 중부 등을 토벌하기를 모의하여 드디어 東北兩界 諸城의 군대에 격문을 보내어 호소하기를,‘듣건대 上京의 重房이 의논하기를, 북계의 여러 성에는 대개 사납고 교만한 자가 많으므로 토벌하려고 하여 이미 대병력을 출동시켰다고 한다. 어찌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 죽음에 나아가리오. 마땅히 각자의 병마를 규합하여 빨리 서경에 집결하도록 하라’하였다. 이에 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하였으나 오직 延州만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趙位寵).
조위총은 의종 때에 병부상서로서 서경유수를 겸임한 것으로 보아 문신이었던 것 같다. 무신들은 김보당의 난 이후 문신을 제거하여 중앙에서 무신 위주의 정치권력을 확보한 이후 지방관까지 모두 무신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3년 10월. 따라서 조위총은 조만간 관직에서 쫓겨날 위기의식을 느끼고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金錫亨은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킨 원인을 무신들에 대한 문신의 복수라기보다는 혼란된 시국에 처하여 한몫 보려는 투기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는데(≪봉건지배계급에 반대한 농민들의 투쟁≫, 열사람, 1989), 받아들일 만한 견해라고 생각된다. 그는 김보당이 문신들의 지지만으로 난을 성사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서북계의 吏民을 그의 세력권 내로 편입시키기 위해 서북계 농민과 토호들의 불만을 이용하였다. 그는 서북계 주민에게 무신들이 서북계를 공격하려고 하니 이를 방어해야 한다고 선동하여, 평소에 주민들이 가지고 있던 중앙정부에 대한 피해의식을 자극하였다. 그런데 연주를 제외한 절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하였다고 한다. 연주가 이에 동참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 지역 토호인 도령 玄覃胤·玄德秀 부자가 자신들의 토착적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李貞信,<西北地域의 農民抗爭>(≪高麗 武臣政權期 農民·賤民抗爭 硏究≫,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91), 44∼47쪽.
이제 서북민과 관군은 절령을 경계선으로 대치하게 되었다. 정부는 중서시랑평장사 尹鱗瞻에게 3군을 거느리고 가서 서북민을 공격하게 하고, 內侍禮部郞中 崔均을 東北路指揮使로 삼아 동북지역 주민이 가담하지 않도록 타이르게 하였다. 윤인첨이 거느린 관군이 절령역에 이르렀을 때, 西兵은 눈보라를 무릅쓰고 내려와 이들을 대패시켰다. 윤인첨 부대가 서병과의 첫 접전에서 패배하니 정부는 동북면으로 우회하여 서병을 공격할 계획을 세워 동북계를 선무하던 최균에게 병마사와 더불어 동북면에 주둔하여 서북지역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서병을 치기 위해 和州營(永興)으로 들어갔을 때 서병과 내통하던 동북계의 주민에게 잡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10월. 이제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란이 양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서북민의 봉기가 절령 이북 전역에 확산되어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을 무렵에 서북면병마부사 杜景升은 창주에 있었다. 그는 서북면 전역이 조위총에 가담하여 전세가 불리하고, 그의 휘하에 있던 分道將軍 朴存偉·李彦功 등이 조위총에게 잡히자, 도주하여 창주를 떠나 香山·撫州를 거쳐 지름길로 야행하여 겨우 개경에 도착하였다. 왕은 그에게 東路加發兵馬副使로 삼아 동북방면으로 보내어 반군이 동북부 지역까지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경승은 孤山(安邊)·宜州(咸南 德原)·定州·長州·孟州·德州·撫州 등 동계를 거쳐 서경 북쪽의 여러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반민들의 세력이 서경부근에 한정되도록 하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杜景升. 더욱이 무주 부근에는 정부와 보조를 같이하며 서북민에 저항하고 있는 연주가 있었으므로 관군은 순조롭게 진격할 수 있었다.
서북계의 여러 주가 정부군에 함락당하거나 항복을 하자, 다급해진 반란민들은 한편으로는 연주를 공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개경을 공격하여 북쪽과 남쪽에서 압축해 들어오는 정부군의 봉쇄를 벗어나려고 노력하였다. 이제 연주와 개경에서의 전투상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① 雲州郎將 君禹가 邊孟에게 편지를 보내어 延州를 달래며 말하기를,‘西京 差使員이 40여 성과 여러 사원의 승려·雜軍 만여 명을 거느리고 그대의 성을 침략하고자 하니 마땅히 신중히 생각하여 속히 소집에 응하도록 하라’하니 林擢才가 (변)맹의 머리를 베어서 성 밖에 효시하였다. 조금 후에 西兵이 와서 성을 공격하자 탁재가 격파하였다. 저녁에 서병이 다시 성 남쪽에 주둔하여 타이르기를,‘동북의 여러 성이 군사를 일으켜 三韓을 바로잡으려고 하는데 오직 너의 성이 따르지 않으므로 군사 1만여 명을 동원하여 공격하는 것이다. 다만 利厚 兄弟나 탁재·당취 등을 죽이고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는 자가 있으면 장차 후한 상을 내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하였다. 德秀가 군사를 이끌고 나와 공격하니 서병이 크게 무너졌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10월).
② 서병이 다시 연주를 여러 겹으로 둘러싸니 德秀가 高勇之·李唐就 등을 보내어 급히 공격하여 패배시켜 사로잡고 죽인 자가 매우 많았다. 서병이 다시 성을 공격하므로 덕수가 또 나가서 격파하여 兵仗을 획득한 것이 헤아릴 수가 없었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11월).
③ 서병이 서울에 와서 개경 서쪽의 權有路에 주둔하였다. 이의방이 매우 노하여 서경사람 尙書 尹仁美, 大將軍 金德臣, 將軍 金錫材 등 귀천의 구별없이 모두 죽여 시가에 효수하고, 군대를 이끌고 나아갔다. 먼저 崔淑 등 기병 수십 명을 보내어 적진을 뚫고 돌격하여 여러 사람을 죽이니, 여러 군사들이 그 기세를 타고 공격하였다. 서병이 놀라 흩어져서 크게 패배하여 달아났다. 의방이 승전의 기세를 타고 북으로 쫓아 대동강에 이르렀다. 位寵이 흩어진 병사를 수습하여 다시 성을 지켰다. 의방이 성 밖에 군사를 주둔시켜 달포를 머물렀으나 고통스러운 추위에 싸울 수가 없어서 다시 서병에게 패배하고 돌아왔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4년 10월).
④ 이 때에 行營兵馬使 및 四摠官이 싸웠으나 불리하여 서울로 돌아오는데 서병이 길을 막았다. 경승이 이를 맞아 대동강에서 격파하였는데 무릇 20번 싸움에 모두 승리를 거두어 서병을 대패시켰다. 경승이 돌아와 平州에 이르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杜景升).
서북계의 군대는 雲州의 토호가 중심이 되어 연주를 공격하였으며, 서경의 아랫쪽인 개경은 조위총을 중심으로 한 서경병이 주축이 되어 공격하였다. 특히 서북계는 연주와 운주가 인접해 있으면서 두 지역의 토호들 사이에는 북쪽 지역에서의 주도권에 대한 경쟁관계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곳은 연주가 완강히 버팀으로써 무려 1만 이상이 되는 군대로서도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서북민 항쟁에서 결정적인 실책은 연주를 끌어들이거나 항복시키지 못한 점이었다. 연주가 배후에 있음으로써 서북민은 관군과 안심하고 싸울 수가 없었으니, 개경이 있는 남쪽만 신경을 쓰다가는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연주성은 견고할 뿐 아니라 유능한 지휘자로 인해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앞의 사료 ①에 의하면 승려들도 연주성의 공격에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로 보아 양계의 사원들도 서북민의 봉기에 합세한 것으로 판단된다. 사원의 승려들이 서북민의 봉기에 합세했다고 나와 있는데, 물론 서북계의 전 사원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들 사원이 토호인 도령의 위협에 못이겨서인지, 혹은 문신들과 결탁하여 기득권을 유지하던 사원이 무신정권에 반대하여 함께 봉기하게 되었는지 그 실상은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다. 사원은 지주적인 성격이 내재해 있어 농민들과 대립되는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서북민의 1차 봉기에서는 토호들이 대다수 가담했던 만큼 사원이 존립하기 위해서는 그 지역 토호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봉기에 가담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조위총이 이끄는 서경군은 개경을 공략하려다가 이의방의 군사에 쫓겨 서경으로 퇴각하였다. 이로써 절령을 경계로 서북민이 장악하고 있던 북 쪽 지역이 점차 축소되어 반민들의 기세가 약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관군 자 체에도 문제점이 있었으니, 관군과 연주 토호들이 각기 서북민과 싸우고는 있으나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태세는 갖추고 있지 않았다. 즉 두경승이 이끄는 군대가 불리하여 서북민에게 쫓겨 북방에서 점령했던 지역을 버리고 남으로 내려올 때도 연주민은 도와주지 않았다. 물론 연주의 토호 또한 서북 민과의 싸움에 급급하여 도울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연주 토호들은 자신의 세력권을 보호·유지하기 위해서 독자적으로 지켰을 뿐 정부군과 크게 연관을 맺은 것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여기에서도 양계 토호들의 개경정부에 대한 독자적인 자세를 파악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그들이 반민들과 싸우는 것에 대해 다행으로 여길 뿐, 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에 대해 제재를 가할 수도 없었다.
서경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정부는 두경승을 後軍摠管使로 삼아 서 경 주위의 군현들을 진압하게 하였다. 한편 명종은 조서를 내려 조위총 등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5년 정월. 그런데 일시적이나마 조위총이「請降」한 것으로 보아 고려정부를 무너뜨리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조위총은 항복을 요청했다가 다시 반격을 가하게 되는데, 원래 문신출신으로서 고려 사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그는 승산이 불투명해 지자 잠시 항복할 것을 고려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조위총의 난을 계기로 호응하여 봉기했던 서북지역의 농민들은 조위총 등 지배층과는 목적한 바가 달랐으므로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따라서 그는 주위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항복을 번복하였다고 보여진다.
관군은 승세에 힘입어 서경을 공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에 앞서 관군은 서북계의 반민들의 근거지인 漣州(平南 价川)를 공격함으로써 서경의 배후세력을 없애고자 하였다. 연주가 관군의 공격으로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니 조위총은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奔院·龍岡 등 서경 주위의 군현민이 관군에 항복함으로써 연주는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졌고 결국 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에게 함락당하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杜景升. 이제 남은 반민은 서경성을 지키는 조위총을 위시한 주력부대뿐이었다. 관군이 연주성을 함락시킨 후 곧 이어 서경성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가해오니 조위총은 그들만의 힘으로 정부군에 대항하기에는 한계에 달했음을 깨닫고 북방의 금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는 무려 3차례나 금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1차와 2차의 사신은 가는 도중에 죽임을 당하거나 조위총을 배반하고 정부군에 붙음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으며, 3차 때 徐彦이 금나라에 도착하였으나 금에 의해 도리어 포박을 당하여 고려정부로 보내졌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趙位寵. 그리하여 금나라와 합세하여 고려정부를 공격하려던 조위총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금나라로서는 조위총이 비록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귀속시키겠다는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이를 얻기 위해 승산이 불확실한 고려의 내전에 말려듦으로써 오히려 고려와 송이 함께 금을 공격하게 되는 국제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외세를 끌어들여서라도 자신의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막으려던 조위총의 계획은 무위로 끝났다. 그는 서경 이북 여러 성에 사람을 보내어 구원병을 보내도록 설득하였다. 한때는 조위총의 거병에 적극 가담했던 서북지방의 토호들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대다수가 정부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이같이 변심하게 된 이유 중에는 금나라와 제휴하여 고려를 무너뜨리려는 조위총의 행위가 서북민을 불안하게 한 점도 있었으리라 보여진다. 정부측으로 돌아선 대표적인 지역으로 宣州를 들 수 있는데 다른 성도 이와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된다. 다음은 선주에 관한 내용이다.
房瑞鸞은 宣州의 鄕貢進士이다. 조위총이 병사를 일으키자 서북 여러 성이 모두 그에게 귀부하였다. 방서란이 그의 형 孝珍·得齡에게 말하기를,‘… 하물며 위총이 도모하는 바가 역모에 있으니 종국에는 반드시 자멸할 것입니다. 형은 마땅히 깊이 생각하십시오’하였다. 효진 등이 옳게 여겨 밤에 비밀리에 고을 사람들을 달래며 말하기를,‘위총이 처음에 賊臣을 처단할 것을 명분으로 삼은 까닭에 여러 성이 호응하였다. 그가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향하다가 개경 교외에서 관군과 싸워 번번이 패배하니 관군에 의해 추격당하다가 죽은 시체가 서로 겹칠 정도였다. 그들이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다시 항거하고자 하나 이미 사기가 떨어져 다시 떨쳐 일어날 수는 없고, 다만 믿는 바는 험준하고 견고한 성뿐이다. 만약 관군이 하루아침에 서경을 함락시키고 병력을 이곳으로 옮겨온다면 전체 성이 반드시 가루가 될 것이다’하였다(≪高麗史≫권 100, 列傳 13, 房瑞鸞).
선주가 언제 조위총을 배반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관군이 서경을 함락시킨 다음에는 선주를 침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으로 보아 윤인첨이 서경을 포위한 명종 5년 6월 이후의 어느 시기였으리라 생각된다. 이로 보아서도 서북 여러 성의 토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보존하는 데 유리하다면 어느 쪽이건 상관없이 돌아섰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토호들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있는 조위총으로서는 봉기가 성공한다면, 일정한 지위를 약속하는 僞官을 주어 달래거나, 심지어는 이기기 위해서는 이민족이라도 손을 잡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서북민의 봉기는 서경성이 정부군에 의해 포위되고, 金나라의 원조도 바랄 수 없게 되자 서북 여러 성이 정부군에 항복하는 위기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 때 조위총의 원조 요청에 적극 호응한 사람들은 서북지역의 토호가 아닌 일반 농민들이었다. 다음 기록에서 토호와 백성들의 태도가 명확히 잘 나타나 있다.
麟州사람 康夫·祿升·鄭臣 등이 防守將軍 蔡允和를 죽이니 왕이 內侍祗候 崔存을 보내어 달래게 하였다. 얼마 후에 또 義州分道 尹光輔·防禦判官 李彦升을 죽이고 위총에 호응하였다. 위총이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의 우두머리를 僞官에 임명하였다. 인주도령 낭장 洪德이 강부 등을 잡아 위총에 항거하려고 하였다. 강부 등이 소매 속에 칼을 넣고 (홍)덕의 집에 이르러 그를 해치려고 하니 덕이 문에 복병을 두었다가 그를 살해하였다(≪高麗史節要≫권 12, 명종 6년 3월).
위와 같이 조위총의 모병에 대해 도령 등 토호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으나 강부·녹승·정신 등 일반 주민들은 적극 지원하였다. 이것은 서북민의 1차 봉기가 끝난 이후에 봉기가 일어난다면 이제 토호들이 아닌 농민들의 주도로 일어날 것을 시사하는 점이기도 하였다. 토호들은 자기 지역에서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조위총이 거병했을 때 호응하여 급속히 일어났으나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전의를 상실하고 조위총에 호응하는 주민들을 붙잡아 정부에 바침으로써 그들의 피해를 극소화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이와는 달리 농민들은 지속적으로 항거할 자세를 견지했던 것 같다. 그 들은 정부에서 파견한 防守將軍 등을 죽임으로써 농민항쟁을 다시 유발시켰다. 그러나 조위총은 농민의 결정력에 의존하기보다는 토호들에게 위관을 주어 회유하는 등 양계 지배층의 환심을 사기에만 급급함으로써 그의 패망은 필연적이었다. 결국 명종 6년 6월에 무려 1년 동안이나 버티던 서경성은 윤인첨·두경승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함락되었고, 조위총은 처형되었다.
서북민의 봉기는 무려 2년 이상 지속되어, 개경정부를 공포에 몰아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들을 진압시킨 후에도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강경한 탄압책을 쓰지 못하였다. 즉 서북계의 40여 성과 동북계의 많은 주진들이 난에 가담하였으나, 그 책임을 물어 참수된 사람은 조위총 한 사람 뿐이며 나머지 110여 명은 감옥에 가둔 것으로≪高麗史節要≫권 12, 명종 6년 6월. 보아 처벌이 최소한에 그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서북민을 가혹하게 처벌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서경성을 관군이 장악했다고는 하나 아직 항복하지 않은 반민들이 곳곳에 상존해 있었으므로 개경정부가 안심을 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 묘청의 난이 끝난 이후에 처벌당한 사람들의 수나 그 가혹함을 보면≪高麗史節要≫권 10, 인종 14년 2월. 이 때에 얼마나 가벼운 형벌만 가했는지 잘 비교가 된다. 이같이 끝까지 투항을 거부한 서북민을 중심으로 서경성이 함락된 지 1년도 못되어 다시 봉기하게 되었다.
KBS HD역사스페셜 – 무인시대 100년,
고려농민 일어서다.
https://www.youtube.com/watch?v=9WdT7GrITTw
農民(농민)과 賤民(천민)의 蜂起(봉기)
무신 정권이 성립된 후 농민, 천민 등 하층민의 저항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킨 것을 계기로 서북 지방 일대의 주민들이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이들 농민의 저항 운동은 수년 동안 지속되다가 진압되었다.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했으며, 개경까지 공격하려고 하였다.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켜 연합 세력을 형성하였고, 경주와 강릉 지역 또한 연합하여 그 세력을 크게 확대하였다.
경주 지역에서 신라의 부흥을 내세운 이후 서경, 담양에서도 고구려와 백제의 부흥을 외치면서 삼국 부흥 운동이 일어난 것은 이 시기의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어 부곡, 소 등 특수 행정 구역의 주민과 노비의 봉기가 활발하게 일어난 점도 하층민 봉기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특히, 신분 해방을 꿈꾸며 개인이나 관청에 예속되어 각종 잡역에 시달리던 노비들의 저항 운동이 유례 없이 치열하게 일어났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게다가 그들의 저항 운동이 신분 해방을 부르짖은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전주에서는 지방관의 가혹한 사역에 반발하여 관노비들이 봉기하였다. 그리고 개경에서는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30여 년간 이와 비슷한 형태의 신분 해방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읽기자료
⋅ 봉기의 여러 모습 ⋅망이⋅망소이의 난
망이 등이 흥경원을 불태우고 그 곳에 있던 승려 10여 명을 죽인 다음, 주지승을 협박하여 편지를 가지고 서울로 가게 하니,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우리 고을을 승격하여 현으로 만들고 또 수령을 두어 무마시키더니, 다시 군사를 동원하여 와서 치고 우리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가두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가? 차라리 창칼 아래 죽을지언정 끝내 항복하여 포로가 되지는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른 연후에 그만둘 것이다.” ‘고려사’
만적의 난
만적 등 6인이 북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공⋅사노비를 불러모아 모의하기를 “국가에서 경계년(무신정변) 이래로 천한 무리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경우가 많이 일어났으니, 장군과 재상이 어찌 종자가 따로 있으랴?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우리는 고달프게 일하면서 채찍 아래 곤욕을 당할 수 있느냐?”하니 모든 노비가 그렇게 여겼다. …… 약속한 날이 되어 모두 모였으나 무리가 수백에 지나지 않으므로,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다시 보제사에 모이기로 약속하고 명령하기를 “일을 비밀히 하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삼가여 누설치 말라.” 하였다. 율학 박사 한충유의 집안 노비인 순정이 이를 주인에게 밀고하니 한충유가 최충헌에게 고하였고, 최충헌은 만적 등 100여 명을 잡아 강에 던졌다’ 高麗史(고려사)
“고종 42년(1255) 3월, 여러 도의 고을이 난리를 겪어 황폐해지고 지쳐 조세, 공부(나라에 바치던 공물과 세금), 요역 이외의 잡세를 면제하고, 산성과 섬에 들어갔던 자를 모두 나오게 하였다. 그 때 산성에 들어갔던 백성은 굶주려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가에서 죽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잡아매어 놓고 가는 자가 있었다. 4월,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 병란과 흉년이 든 이래로 해골이 들을 덮었고,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백성이 줄을 이었다. 도병마사가 날마다 쌀 한 되씩을 주어 구제하였으나, 죽는 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무신 정권(1170 ~ 1279)하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한 농민, 천민의 봉기는 귀족들의 정치적 반란과는 달리 사회 ․ 경제적인 모순에 의한 하층민들의 반항이었으므로 민란이라 할 수 있다.
농민 봉기는 이미 무신의 집권 이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무신들의 농민에 대한 과중한 수취는 이들로 하여금 유민으로 떠돌아다니게 하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무신 정변 후의 무인들은 보다 과중한 수탈로 농민을 곤궁하게 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무신 상호 간의 정권 다툼을 계기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봉기하였다.
“고종 42년(1255) 3월, 여러 도의 고을이 난리를 겪어 황폐해지고 지쳐 조세, 공부(나라에 바치던 공물과 세금), 요역 이외의 잡세를 면제하고, 산성과 섬에 들어갔던 자를 모두 나오게 하였다. 그 때 산성에 들어갔던 백성은 굶주려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늙은이와 어린이가 길가에서 죽었다.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잡아매어 놓고 가는 자가 있었다. 4월, 도로가 비로소 통하였다. 병란과 흉년이 든 이래로 해골이 들을 덮었고, 포로가 되었다가 도망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백성이 줄을 이었다. 도병마사가 날마다 쌀 한 되씩을 주어 구제하였으나, 죽는 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무신 정권(1170 ~ 1279)하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한 농민, 천민의 봉기는 귀족들의 정치적 반란과는 달리 사회 ․ 경제적인 모순에 의한 하층민들의 반항이었으므로 민란이라 할 수 있다.
농민 봉기는 이미 무신의 집권 이전부터 싹트고 있었다. 무신들의 농민에 대한 과중한 수취는 이들로 하여금 유민으로 떠돌아다니게 하여 도적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무신 정변 후의 무인들은 보다 과중한 수탈로 농민을 곤궁하게 하였다. 이에 농민들은 무신 상호 간의 정권 다툼을 계기로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봉기하였다.
영상한국사 I 140 피폐한 농민들의 삶, 민란을 부르다!
https://www.youtube.com/watch?v=-Ln2W3prJDA
무신 정권이 성립한 이후 무신 간의 권력다툼으로 정부의 행정력은 야화되었다. 또한, 무신 집권자들은 농장을 확대하고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하여 농민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특히 향·부곡·소와 같은 특수 행정 구역의 주민들은 일반 군현민보다 많은 세금과 공물을 부담하였다. 한평, 이의민처럼 천민 출신이 최고 집권자의 자리까지 오르자, 농민과 천민의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졌다.
이러한 것들이 원인이 되어 무신 집권 시기에는 전국 각지에서 농민과 천민의 봉기가 일어났다.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 형제는 과도한 세금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봉기하여 한때 충청도 일대를 점령하였다. 전라도 전주에서는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관노비들이 봉기하였다. 경상도 운문과 초전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이 농민을 이끌고 일어나 세력을 확대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고려 왕조를 부정하고 삼국을 부흥시키려는 운동도 일어났다. 신라의 부흥을 내세우며 경주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를 시작으로 서경에서는 고구려의 부흥 운동이 일어났고, 전라도 담양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한편, 최충헌의 집권 초기에 사노비인 만적은 노비들을 모아 봉기할 것을 계획하였다(1198). 만적의 봉기는 실행 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만적이 죽은 후에도 신분 해방을 위한 노비들의 봉기는 계속되었다. 이들 봉기는 모두 실패하였지만, 하층민의 의식이 성장하였음을 보여 준다.
고려 무신정권의 성립은 ‘힘이 곧 정의’라는 폭력ㆍ실력ㆍ무력 만능의 풍조를 유행시켰다. 고려와 후백제 사이에서 벌어진 통일전쟁의 주역은 호족이었지, 일반 백성은 아니었다. 고려 초기 광종의 노비안검법으로 변화한 사회분위기는 곧 이은 문벌귀족들의 치세로 고정화되는 듯 했지만, 무신의 난을 계기로 정권 소외계층, 일반 백성, 노비 등이 구름처럼 일어나 자신들의 권리를 외치기 시작한다.
민란은 후백제, 후고구려 등과 연결하는 등 지역적 할거 움직임도 보인다.
Ⅰ. 배경과 개관
무신집권 초부터 30년간 집중적 발생.
무신정권에 대한 반란은 서북계에서 먼저 시작. 이 지역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국경지대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발발.
같은 민란이지만 서적이 국방지대의 군사적 조건 위에서 봉기했다면, 남적은 농민생활의 불안에서 일어난 순수한 농민반란.
고려무신정권(1170~1270, 최씨정권 1196~1208) 시기 몽골의 침입(1231~1270)이 겹치며 민생 도탄.
Ⅱ. 일람표
◇1172년 서북계의 창주(昌州)ㆍ성주(成州)ㆍ철주(鐵州) 주민의 난-수령의 탐학에 저항
◇1173년 김보당의 난-무신의 집권에 대한 문신의 반동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의 난(많은 농민이 참가했고, 난이 평정된 뒤에도 나머지 무리들이 계속해 1179년까지 민란)
◇1176년 공주 명학소 망이ㆍ망소이의 난-신분해방
◇1182년 충청도 관성과 부성 농민 반란-수령의 탐학에 저항
◇1193년 김사미ㆍ효심의 난 경상도 운문(청도)과 초전(울산)
◇1198년 개경 만적의 난
◇1199년 명주(강릉) 민란, 삼척ㆍ울진까지 함락시키고, 동경(경주)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서 서로 합세.
◇1200년 진주 공사노비 반란, 합주(합천) 부곡민의 반란 연합전선 전개.
◇1202년 경주 패좌와 이비 중심 대규모 반란. 신라 부흥 내세우고 운문산, 울진ㆍ초전의 반란군과 연합
◇1217년 최광수 서경중심 고구려부흥 주장, 흥복병마사 자칭
◇1237년 담양 이연년 형제, 몽골의 3차 침입 속 백성 지킨다는 명분으로 백제 부흥 내세우며 정치적 봉기. 백적도원사 자칭.
Ⅲ. 주요 민란
01. 창주(昌州)ㆍ성주(成州)ㆍ철주(鐵州) 민란(1172)
①무신집권기 최초의 민란
②세 고을 주민이 수령의 탐학과 가렴주구에 반항
02. 김보당의 난(1173)과 조위총의 난(1174~1179)
①김보당의 난=무신의 집권에 대한 문신의 반동. 의종 복위 등을 외치나 이의민이 잔혹하게 진압
②조위총의 난=서경유수 조위총이 무신에 대한 반발로 일으킨 난. 많은 농민이 참가했고, 조위총의 난 평정 뒤에도 나머지 무리들이 1179년까지 민란 계속.
03. 공주 ‘명학소’ 망이ㆍ망소이의 난(1176~1177)
①수탈당하는 농민과 신분해방을 부르짖는 천민이 함께 봉기. → 향, 소, 부곡은 천민 주거지역.
②한때 공주를 함락시키고 관군을 무찔렀으나 정부의 회유책으로 항복. ← 서경 조위총의 난 진압하느라, 정부는 회유책.
③이듬해 다시 봉기해 충청도의 거의 모든 군현을 점령하나, 정부의 토벌군에 의해 진압. 재봉기 초기, 가야사 점령ㆍ홍경원 승려 10여명 살해 등 사찰 공격(당시 사찰은 문벌귀족, 토호와 함께 백성들을 괴롭히는 수탈과 착취 일삼아)
04. 충청도 관성(옥천)과 부성(서산)의 난(1182)
-수령의 탐학에 반항한 농민 반란
05. 전주 군인과 관노의 반란
06. 김사미ㆍ효심의 난(1193, 남적)
①김사미는 운문(청도), 효심은 초전(울산)에서 반란. 공동전선 펼쳐 경상도 전역에 세력 확장.
②이의민과 합세해 새나라 건국한다는 소문 퍼지며 경상도 지역 호응.
③이듬해 밀성(밀양)전투에서 정부군에 패해 7000명 전사하며 진압.
07. 개경 사노 만적의 난(1198)
①최충헌의 사노비 만적, 공사노비들에게 “무신란 이후 공경대부가 천예(賤隷)에서 많이 나왔으므로 우리들도 최충헌과 중신들을 죽이고 천민에서 해방되면 공경장상이 될 수 있다”며 반란 획책.
②음모 발각 진압.
08. 명주ㆍ동경의 난(1199)
①명주(강릉)에서 일어난 민란이 확대, 삼척ㆍ울진까지 함락. 동경(경주)의 반란과 연합.
②이듬해 진주 공사노비의 반란과 합주(지금의 합천) 부곡민의 반란과 연합전선 전개.
③경주 중심 대규모 민란으로 성장
09. 경주 패좌 이비 중심의 대규모 반란(1202)
①최충헌, 경주 출신 실력자 이의민이 경주에 새로운 나라 건국 야욕 분쇄.
②경주별초군(慶州別抄軍)이 영주별초군(永州別抄軍)을 공격하면서, 최충헌이 유독 경주사람들에 대해 가혹한 처벌.
③패좌(孛佐)와 이비(利備)가 주도하는 대규모 민란 → 신라 부흥 내세우며 운문산, 울진ㆍ초전의 반란군과 연합.
④정국병마(正國兵馬)내세우며 저항, 진압.
10. 담양 이연년 형제의 봉기(1237)
①옛 백제 부흥 기치. 도참설 유포. 백적도원사 자칭.
②몽골의 3차 침입(전라도 고부와 충청도 공주 지역까지 약탈)에 시달리던 일부 지방 관리와 토호, 이연년 형제에 협조.
③백제부흥 정치 봉기, 몽골의 침략ㆍ약탈로부터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는 대몽항쟁, 무능과 부패에 찌든 고려 조정과 무신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농민 봉기.
Ⅳ. 민란의 의의
①초기 하급 관리와 장수의 단순한 정치 반란에서 이후 농민 천민 등이 적극 가담하며 농민봉기로 변모.
②명종ㆍ신종 때 집중적으로 발생 → 최충헌이 강력한 독재정치로 무신정권 안정시키며 종식.
③무신정권 초기, 중앙의 지방통제력 약화 틈 타 지방호족의 토지겸병 등 백성들의 생활 궁핍.
④무신정권은 정권 안정을 위해 민란 평정과 함께 농민 위로, 백성들의 빼앗긴 토지 돌려주고, 조부(租賦 세금과 부역) 감면.
⑤농민ㆍ천민의 반란은 귀족중심의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탈피해 새로운 사회체제로 넘어가게 한 원동력.
⑥농민ㆍ천민의 봉기는 양반관리들의 정치적 반란과는 달리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하층민의 반항.
⑦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교종에 대신한 선종 체계인 조계종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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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승철 화 2020-11-03 오전 2:47 옛역사 재미 있는 것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