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安武)의 본명은 안병호(安秉稿)이고 별명은 안강이며 호는 청전이다. 그는 1883년 6월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 해연면의 경성행영병무총감인 안수익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무반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어려서부터 조부의 슬하에서 한학을 배웠고 커서는 군사학을 배우려고 경성교련관양성소에 입학하였다. 그는 교련관양성소를 졸업한후 함경북도 무산지구 진위대에 배치되여 교련관으로 있으면서 대원들에게 신식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변경방술에 힘썼다. 1907년 7월, 《군대해산령》으로 하여 무사진위대도 해산되게 되자 안무는 망국의 치욕을 통절하게 느끼면서 군복을 벗었다. 그는 문희옥, 양한호 등과 함께 무산지역에서 교편을 잡고 청소년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심어주면서 반일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하였다. 1910년 《일한합병》이후 안무는 민족독립을 위해 부친과 무산군수였던 지약한이 꾸리고 있는 화룡현 덕화사 부동(가마골)의 구학서당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문희옥, 양한호와 함께 부친을 도와 사숙을 개량하고 학생들에게 신문화와 반일민족사상을 전수하였다. 1919년 《3.13》반일시위가 있은후 안무는 부동, 남평, 류동, 로과, 강장동, 상양동 등지의 민중을 조직, 동원하여 반일집회와 시위운동을 단행하였으며 4월후에는 간도국민회와 련계하여 덕화, 상화, 숭선, 로과 등지에 국민회조직을 확대하였다. 1919년 하반년부터 민중반일운동이 무장투쟁으로 전환되였다. 안무는 부동 등지의 청년들을 동원하여 경호대를 조직하고 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친일주구와 밀정들의 활동을 경계하였고 그들을 처단하였다. 그후 경호대를 기초로 국민회군이 조직되자 그는 국민회군의 사령으로 임명되여 결사대와 경호대의 군사훈련을 책임졌다.
1919년 10월, 홍범도부대가 장백, 혜산을 거쳐 자성, 강계 등 지방으로 진격하자 안무는 홍범도부대와 련계하여 부대를 이끌고 무산, 혜산 일대로 진격하여 적의 초소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연하면서 함경도 변경지역 민중들의 반일열의를 북돋우어 주었다.
1920년 봄부터 안무가 령솔하는 부대는 홍범도부대와 련합하여 하마탕, 대감자 일대에 주둔하면서 두만강남안의 조선변경으로 빈번히 출격하여 적들의 군경초소를 습격하군 하였다.
그해 5월 안무는 홍범도부대, 최명록의 도독부, 훈춘 한민호부대, 신민단부대 등과 련합하여 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북로독군부는 최명록을 부장으로, 안무를 부부장으로, 홍범도를 정일제1군 사령으로 임명하고 두만강남안의 남양, 온성, 종성, 회령, 무산 등지에 빈번히 출격하여 일제군경초소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연하였다. 그리고 6월 7일 안무는 홍범도 사령을 협조하여 일본군대를 봉오동 상촌에 유인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얼마후에는 홍범도부대의 부관 주건과 함께 상해림시정부에서 파견되여온 리용, 채영 등의 협조하에 명월구의 이청배에 군민회군의 사관훈련소, 군수창고, 피복공장 및 18개소의 병영을 수축하고 재봉침 13대, 군복용포목 15필을 마련하였다. 8월말 안무는 어랑촌일대로 이동하여 홍범도부대와 련합하였으며 22일 새벽에 적들을 습격하였다. 이것이 곧 완류구전투이다. 25일 고동하전투를 진행하고 안무는 부대를 맹가동방향으로 이동하였고 홍범도부대는 안도현 황구령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일제는 《경신년토벌》때 화룡현 부동에 쳐들어와 안무의 집과 부동학교에 불을 지르고 수많은 반일군중을 체포, 학살하였다. 1921년 12월 7일, 고려공산당(상해파)의 중앙위원 김하구가 로씨야로 가는 도중 돈화에 들려 연설하였다. 안무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여서 맑스주의리론을 몰랐으나 1919년부터 1921년 사이에 자기가 겪은 체험으로부터 김하구의 견해에 찬동하였다. 그는 지난날 생사를 함께 하면서 싸워온 간도국민회가 리동휘가 지도하는 고려공산당에 참가하여 투쟁하는것을 찬동하였다. 하여 구춘선, 마진 등은 간도국민회의 전체 성원이 고려공상당에 가입하며 돈화에 고려공산당중령총감부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안무는 같이 온 최량과 함께 국민회를 대표하여 동양비서부에 가서 상기 국민회의 결정을 전달할 임무를 접수하고 12월 15일 로씨야로 들어갔다. 1922년 안무는 로씨야 이만에서 연변으로 돌아왔다. 그는 구춘선 등과 토의하고 간도국민회의 군사부를 대한의용군사회로 개칭하고 무장부대의 확대에 힘썼다. 그는 액목현조선족학교에 군사양성소를 설치하고 비밀리에 청년들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24년 명월구에서 명동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모아산부근에서 안무는 친일주구들의 밀고로 룡정일본령사관에서 파견한 형사이며 주구인 최창락 등 수명의 경찰들에게 포위되였다. 적수공권이였으나 워낙 기골이 장대하고 날래며 무예가 뛰여난 그는 달려드는 경찰놈을 때려 눕히고 다른 놈을 발길로 차서 쓰러뜨리고는 포위를 뚫고 뛰였다. 급해난 놈들은 뛰는 안무를 권총으로 사격하였다. 불굴의 장사 안무는 복부에 4발의 적탄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놈들은 중상을 입은 안무를 룡정총령사관에 압송하였으나 압송도중에 숨졌다. 그때 그는 41세의 장년이였다. 안무장군의 유해는 처음에는 룡정의 허청리에 매장하였는데 반일정신이 강한 이름 모를 청년, 학생들이 끊임없이 찾아와서 참배하자 가족과 친지들은 일제가 또 무슨짓을 할지 몰라 그의 유해를 부친이 사는 명원사 룡천동에 이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