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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미르얌은 어느 날 요하난 벤 스테파노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
대한 사랑의 귀착지는 위에 계신 어머니이시지. 그러나 그 능선을 올바로 계승해 이어 나가려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찾아 오르신 분량을 온전히
이루어야 해.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서 능선을 이어 달릴 수 없는 것이니까.”
예수님께서
지상에 더 오래 계셨더라면, 바울이 아닌 이삭이나 여호수아의 노정을 닮은 제3의 인물이 예수님 품에서 성장하여 마리아 누이의 심성과 사랑을
간직하고, 우리가 아는 그 바울을 능가하는 치솟음과 균형감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참으로 창창하고 창창한 계승자의 면모를 이루었을 터인데,
그러한 인물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에 휘몰아친 고난을 뚫고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지 못하였지요.
(Hong, 1210)
예수님의
능선 / [Audio]
“성녀
미르얌은 어느 날 요하난 벤 스테파노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 대한 사랑의 귀착지는 위에 계신 어머니이시지. 그러나 그 능선을 올바로
계승해 이어 나가려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찾아 오르신 분량을 온전히 이루어야 해.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서 능선을 이어 달릴 수 없는
것이니까.’” 하늘 사랑의 귀착지는 성령님이시고 그 성령님 사랑의 능선을 올바로 계승해 이어 나가려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찾아 오르신 분량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르신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서는, 즉 공생애를 출발하실 때에 이미 이루신 그 첫 봉우리의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서는, 그 봉우리에서부터 이어지는
능선을 타고 저 중심부의 상상봉으로, 성령님 사랑의 중심 능선으로 이어 달릴 수 없는 것이기에 그러하다는 내용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복음 4:23 이하를 보시면, “그러나 진실한 예배자들이 아버지께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다가오는데, 바로 지금일세.
그래서 아버지께서는 정녕 그렇게 당신께 예배 드리는 이들을 찾고 계시네. 전능하신 분께서는 영이시니,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이들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네”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말씀을 공부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출발하실 무렵에 이미 터득해
오르신 성령님의 심정자리, 그리고 그때까지 깨우치신 말씀의 봉우리, 그 성령님의 사랑과 말씀의 봉우리 위에서 그 능선을 타고 하나님 사랑의
품으로 들어가는 시대가 올 것인데, “그때가 바로 지금일세!”하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신 것이지요.
완성된
숙성의 경지
그리고
에베소서 4:13, “우리가 모두 전능하신 분의 아들에 대한 믿음과 깨달음에 일치를 이루고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완성된 숙성熟成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시어”, 초대교회가 생각하던 ‘그리스도의 완성된 숙성의 경지’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보여 주신 공생애 3년
무렵의 그 경지에 더하여, 십자가 사건 이후로 초대교회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영적으로 친견한, 에베소서가 기록될 무렵의 예수님 영체의 그 자태,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경지에까지 이르게 하시어, 더 이상 우리가 사람들의 속임수와 간사한 술수에서 나온 온갖 교훈의 풍조에 흔들리거나 이리저리 밀려다니는 어린
아이가 되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몇몇은 사도로 몇몇은 대언자로 몇몇은 복음전도자로
목자와 교사로 세워 주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일종의 ‘교회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늘 사랑의 귀착지는 위에 계신 성령님이신데, 그 능선을 올바로 계승해 이어 가려면, 예수님께서 찾아 오르신 분량, 사생애 30여 년의 각고의
노력 가운데 공부해 오르신 그 분량, 그리고 공생애 3년 동안에 이루신 그 엄청난 심정적 분량, 그리고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기독교 2000년사
가운데 교회를 사랑하시며 하나님과 성령님 사랑의 품을 찾아 오르신 그 분량을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미숙한
모방 유형들
이러한
‘예수님의 완성된 숙성의 경지’를 자기도 한번 흉내내 볼까 하고 나타난 ‘전도관’의 박태선이라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6.25전쟁 이후로 오갈 데
없던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심상을 치유와 능력의 역사로 사로잡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결국 많이 빗나가서 조선시대 ‘남사고’ 예언서나
‘정도령 사상’에 뿌리를 둔 영생불사 개념에 입각한 새로운 메시아론을 주창하다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서 나온 조희성이라는 이가 만든
교단이 영생교이지요. 그가 말하기를 “사사기에 나오는 단 지파가 그 이후로 성경에서 사라졌는데, 그 사라진 단 지파가 우리나라의 시조 단군의
무리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사기 18:30을 보시면, “그리고 단의 자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그 조각 신상을 세웠다. 그리고 이 땅이 포로로 잡히는 날까지, 모셰의
손자이며 게르숌의 아들인 예호나탄과 그의 자손들은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사사기 이후로 이스라엘에서 단 지파가 사라진 것이
아니에요. BC.720년 무렵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단 지파가 소규모로 이스라엘 북단 좁은 땅에 남아 있었습니다. 본래는 이스라엘 서부
지역에 단 지파 영토가 있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에게 압박을 받아서 북쪽 지역으로 옮겨 간 것입니다. “이 땅이 포로로 잡히는 날까지” 모세의
손자이며 게르숌의 아들인 예호나탄과 그의 자손들이 단 지파의 제사장이 되어서 계속 우상을 섬겼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희성이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성경에서 단 지파가 사라졌다”고 하면서, 요한계시록 7장을 거론하며 “봐라, 열두 지파가 언급 되어 있는데
단 지파는 없지 않으냐?” 한 것이지요. 그러면서 무슨 기와 조각에 히브리어가 적혀 있다는 둥 하면서, 히브리어를 조금 공부한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억지로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7장에서 왜 단 지파가 언급되지 않았는가 하면, 예수님 당시 유대교 묵시문학인 ‘열두 족장의 유언’ 가운데 ‘단의 유언’에 의하면,
“단 지파에서 메시아의 대적자가 나온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우상숭배의 극치를 달리던 지파이기 때문에, 초대교회에서도 단
지파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단 지파를 굳이 집어넣지 않은 것입니다. ‘열두 지파’라는 의미만 통하면 되는
것이니까, 요셉의 아들인 메낫셰를 그 자리에 대신 집어넣은 것이지요.
요한계시록
7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열두 지파로 상징되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서 ‘만 이천 명’씩 나와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의 도장을 받을
것이다”라는 의미만 전달되면 되는 것이니까, 단 지파를 제외한 것입니다. 그들은 ‘저주 받은 백성’이라고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조희성은 스스로 자신이 단 지파의 적통후계자라고 말하면서, “우리민족이 단 지파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고, 그러면서 자기는 ‘영생불사의
진인’이라고도 하였는데, 감옥에서 죽고 말았지요? 결국 그들의 주장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리라고 예고된 ‘저주 받은 지파’이고, 청세기
49장에서 ‘뱀으로 묘사된 지파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되고 마는 것이지요.
일어나지
못한 계승자
아래
단락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지상에 더 오래 계셨더라면”, 80세, 100세까지 계셨더라면, “바울이 아닌 이삭이나 여호수아의 노정을 닮은
제3의 인물이 예수님 품에서 성장하여 마리아 누이의 심성과 사랑을 간직하고, 우리가 아는 그 바울을 능가하는 치솟음과 균형감각으로 예수님께
다가가, 참으로 창창하고 창창한 계승자의 면모를 이루었을 터인데, 그러한 인물은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에 휘몰아친 고난을 뚫고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지 못하였지요.”
바울
이후에 디모데와 디도가 일어나 초대교회를 지도했고, 그들의 제자들 또한 유명한 교부들이었는데, 그들이 바울만큼의 그릇을 온전히 계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70년, 80년을 지상에 더 계셨더라면, 바울 역시 예수님 곁에서 같이 역사를 펼치면서, 아마 그리스-로마
지역을 담당하는 ‘해외선교국장’ 정도의 역할을 맡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예수님의 계승자는 이삭이나 여호수아처럼, 즉 아브라함을 그대로 빼닮은 이삭이나 모세와 더불어 40년 동안 광야 노정을 달린 여호수아처럼,
그 미지의 계승자는 자신의 연단기간을 온전히 채우고 예수님을 닮아 오르면서, 사라가 아브라함을 사랑했던 것처럼, 이삭이 그러한 사랑의 심정으로
아브라함을 닮아 오른 것처럼, 막달라 마리아 누이의 심정으로 동일하게 예수님을 사랑해 오르면서, 우리가 아는 그 바울의 한계를 능가하는 치솟음과
균형감각으로 그리스-로마 지역에 관한 학식도 갖추는 동시에 아브라함 이후로 이어진 2000년 히브리영성을 오롯이 간직하고서, 유대인들에게도
친숙하고 헬라스 사람들에게도 익숙하며 나아가 메소포타미아의 유대인공동체에게도 성공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평온한 균형감각을 지닌 그러한
인물로 성장해야 했는데, 결국 그러한 인물은 나오지 못하고 AD.70년에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만 것이지요. 그러한 인물이 예수님 십자가 사건
이후에 휘몰아친 고난을 뚫고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Hong, 2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