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점차 늦가을속으로 흘러들어가는 분위기이다. 오늘 전국적으로 비까지 내리니 이제 점차 기온은 내려갈 것이다. 기온이 내려가면 세상사에 여러 변화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긴옷과 두꺼운 옷을 꺼내 입기 시작한다. 나무를 포함한 식물들은 잎이 물들며 서서히 잎을 떨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무거운 모습으로 식물들은 가벼운 모습으로 변해간다.
전원에 살면서 식물들의 상황을 상대적으로 자주 접하면서 그들의 삶에 대해 대단한 존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식물과 동물이 어떻 차이를 보이느냐 또는 누가 더 현명하게 세월을 보내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식물은 동물에 비해 대단히 열악한 생존여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 너무도 대견스럽고 본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식물의 여러 부위에서 잎들이 가진 대단하고도 신비로운 대변신을 보면 감탄이 터져 나오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모든 식물들은 염록체를 가지고 있다. 녹색을 띠고 있다. 하지만 식물들의 잎이 원래 다 녹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자신만의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등등이다. 하지만 식물은 태어날 때부터 엄청난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 바로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동물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먹이를 섭취하는데 반해 식물들은 한번 뿌리를 내리면 사망할 때까지 한군데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러니 스스로 식량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광합성작용인데 그때 아주 중요한 핵심이 바로 염록체이다. 태양의 빛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물을 이용해 염록체에서 식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잎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신의 고유의 색을 숨기고 염록체인 녹색을 띠고 살아간다. 태어나 처음에는 연한 녹색에서 점차 진한 색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식물들의 잎은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노력을 한다. 이른바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이다. 뿌리에서는 열심히 물을 빨아 올리면 잎에서는 빛과 이산화탄소를 믹서해서 양분을 만들어낸다. 하루라도 이런 작업을 하지 않으면 식물은 생존할 수가 없다. 물론 체형을 유지하는 줄기의 역할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뿌리와 잎의 역할에 비할까. 아버지가 뿌리라면 어머니는 잎일 것이다. 특히 잎의 희생은 우리네 어머니와도 많이 닮아 있다. 자신의 성격이나 입장은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놓고 오로지 자식과 가정을 위해 헌신한 우리네 어머니와도 너무도 흡사하다. 자신의 색깔은 아예 저 밑바닥에 내려놓고 단지 녹색으로만 거의 평생을 살고 있는 잎에서 어머니의 지난한 인고의 세월을 느낀다.
식물은 잎과 뿌리의 쉬지않는 희생으로 꽃을 피워내고 열매도 맺는다. 그리고 그야말로 일년 농사를 다 짓고나면 이제 서서히 죽음의 길로 접어든다. 다년생일 경우 뿌리는 상대적으로 오랜 시간 존재하지만 잎은 그렇지 않다. 늦가을 들면 추워지고 뿌리는 물을 빨아올리지 않는다. 자칫 기온이 떨어지면 동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잎도 일년의 마지막 정리단계에 돌입한다. 식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기에 자신을 주장할 것도 이미 잊었지만 그래도 그 잎에서 염록체가 사라지면서 잎에는 놀라운 변화가 생긴다. 바로 잎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 고유의 색깔 바로 그의 성격이 드러나는 것이다. 잎에 빨주노초파남보 색깔이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단풍 아니던가.
우리 인간들은 산과 들을 찾아 울긋불긋한 나무잎 색깔을 보며 탄성을 지르지만 그 잎속에 담긴 처절한 희생을 잠시라도 느껴보아야 한다. 우리네 어머니들이 효도관광에 나서서 요란하게 춤을 추는 그런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평생 숨겨운 그 자신의 끼를 한번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남편에게 시달리고 자식 키우느랴 몸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던 그 원초적인 성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단풍의 시간은 너무도 짧다. 1박 2일의 효도관광이 끝나는 것이다. 식물의 잎은 이제 마지막을 향한다. 부는 바람에 이러저리 날리며 대지를 덮는다. 하지만 낙옆은 그냥 낙옆이 아니다. 도시에서는 거추장스런 존재이자 환경미화원들에게는 피곤한 존재이겠지만 농촌 그리고 전원 나아가 대자연에서는 아주 고마운 존재로 남는다. 나무아래에 떨어져 자신의 자식인 나무의 앞날을 위해 마지막 또 한차례 희생의 길을 걷는다. 바로 거름이 되어 주는 것이다. 식물은 어머니같은 희생을 빨아먹으며 겨울을 나고 또 다른 봄을 맞을 것이다. 그렇게 생명은 이어질 것이고 그런 과정에 바로 단풍이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 흔한 것 같은 바로 그 단풍에서 극적인 변신과 장엄함을 느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2023년 10월 14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