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릭 사티 짐노페디 1번
카페인을 마시면 쉽게 잠들지 못하거나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줄여보려는 커피중독자들에게는 구세주같은 존재가 바로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일 것입니다.
아직 볶지 않은 상태의 커피 생두를 뜨거운 물에 넣고 끓인 후, 탄소 필터를 이용하여 카페인을 걸러내거나 이산화탄소를 높은 압력으로 원두에 침투시켜 카페인을 녹이는 방식 등으로 디카페인 원두를 만들어내는데요. 용매제를 사용하는 것보다는 물이나 이산화탄소를 활용한 방식이 안전하기 때문에 흔히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이산화탄소를 액체나 기체로 구분할 수 있는 온도와 압력의 최대치를 뜻하는 임계점을 넘어선 초임계 상태로 만들어 카페인을 추출해내는 '초임계 이산화탄소 추출법'이 가장 흔하게 쓰이고 있습니다.
초임계 이산화탄소 추출법
물을 이용한 디카페인 커피 원두 추출 방법
마셔도 마셔도 잠을 깨는데 크게 도움은 되지 않지만, 코끝을 스치는 부드러운 향과 구수한 맛이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는 디카페인 커피 원두로 내린 아메리카노와 어울리는 클래식 음악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불면증을 사라지게 해준다는 침대 광고에 등장하였지만, 알고 보면 '느리고 고통스럽게' 연주해야하는 역설적인 음악인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은 어떨까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기에 등장한 반이성적, 반예술을 지향하는 실존주의를 뜻하는 '다다이즘 (Dadaism)'을 대표하는 음악가인 프랑스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에릭 사티 (Eric Alfred Leslie Satie, 1866-1925)'는 '세기말의 반항아'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파격적이면서도 독특한 작품 활동으로 유명한 음악가였습니다.
에릭 사티가 활동하던 20세기 초의 파리는 아방가르드와 미니멀리즘, 다다이즘 등의 다양한 예술 활동이 혼재하던 시기였는데, 그 시기의 개성 넘치는 예술가들 속에서도 독보적인 빛을 발하던 에릭 사티의 독특한 면모는 그가 작곡한 곡들의 작품명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1884년 자신의 첫 공식 작품인 '피아노 독주를 위한 알레그로 (Allegro for Piano)'에 원래 이름인 'Eric' 대신 'Erik'이라고 서명을 하며 자신의 이름을 'Erik Satie'로 통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가곡 '나는 너를 원해 (Je te veux)'나 발레곡 '머큐리 (Mercury)', '퍼레이드 (Parade)'와 같이 매우 정상적인 제목과 아름다운 멜로디의 작품을 작곡한 것은 물론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가면서 보인 것 (Choses vues a droite et a gauche san lunettes for Violin and piano)', '개를 위한 엉성한 진짜 전주곡 (Certable prelude flasques pour un chien)'와 같이 제목만 들어도 독특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세계적인 가구 회사인 시몬스의 침대 광고 배경 음악으로 등장하며 '불면층 치료 음악'으로도 많이 사랑받게 된 '짐노페디 (Gymnopedie)' 1번은 에릭 사티가 1888년, 22세의 나이에 발표한 피아노 독주곡입니다.
에릭 사티의 대표 작품인 짐노페디는 3개의 피아노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번 '느리고 비통하게 (Lent et douloureux)', 2번 '느리고 슬픈 (Lent et triste)', 3번 '느리고 무거운 (Lent et grave)'로 구성된 3개의 짐노페디 중 1번은 신비롭고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품고 있는 곡입니다.
10세의 나이에 이미 소설, 희곡 등을 쓰며 19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의 사실주의 작가로 거듭난 '귀스타브 플로베르 (Gustave Flaubert, 1821-1880)'는 1857년 실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쓴 자신의 대표작 '보바리 부인 (Madame Bovary)'로 사회적 충격을 안겨준 것은 물론 '세 가지 짧은 이야기 (Trois Contes)', '살람보 (Salambo)' 등의 작품들을 통해 동시대 활동하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안겨줬습니다.
에릭 사티 역시 플로베르의 작품에 푹 빠져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지금은 사라진 고대 국가 '카르타고'의 장군 바르카의 딸 '살람보'와 반란군의 수장 '마토'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1862년 소설 '살람보 (Salambo)'가 바로 짐노페디의 탄생에 영감을 준 작품입니다.
그리스어로 '벌거벗은 소년들'이란 뜻의 짐노페디는 고대 그리스의 축제에서 소년들이 발가벗고 추는 춤을 뜻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사실 짐노페디는 숙면보다는 최면에 가까운 음악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느리고 고통스럽게'라는 작곡가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불면증 치료나 명상에 도움이 되는 곡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1번'은 무더위와 밤잠을 설쳐 몽롱한 우리를 유혹적인 향과 함께 우리를 몽롱한 고대 의식으로 끌고가는 부드러운 디카페인 아메리카노와 닮아있습니다.
박소현 / CLASSIC. 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