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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십자군 전쟁(1217년∼1221년) 下
9. 1217년의 공세
일단 잘 무장된 헝가리 군이 당도하자 군사력의 추는 다시 십자군 쪽으로 기울었다. 알 아딜은 병력을 급히 소집하긴 했지만 그 역시 꽤 늙은 상태였고(그는 1145년 생으로 당시엔 이미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다) 사실 군사적으로 유능한 인물이었다고는 보기 어렵기 때문에 이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진 못했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예루살렘에서 급거 탈출하기 시작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이 도시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방어에는 별로 유리하지 않으며 난공불락의 요새라고도 할 수 없는 접근이 용이한 위치에 있어 셀 수 없을 만큼 주인이 바뀐 도시였다.
그런데 1217년의 십자군 공세를 기록할 때 한 가지 난감한 점은 이 안드레 2세가 별로 자세한 기록을 남겨줄 연대기 작가를 대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무슬림 쪽도 그다지 상세한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1217년 당시의 상황을 아주 상세하게 알기는 힘들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십자군의 우세였다는 점이다.
1217년 11월 요르단 강에서 헝가리 군이 주축이 된 십자군은 알 아딜이 보낸 군대를 쉽게 물리쳤다. 알 아딜은 현명하게도 무리하게 이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각지의 요새와 도시의 방비를 굳건히 했다. 헝가리군이 머지않아 돌아가면 나머지 군대는 큰 병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문제는 진짜 헝가리 군이 일찍 돌아갈 지 말지였다.
1217년의 남은 시기에 헝가리군은 약간의 성채와 타보르 산(Mt Tabor) 주변 만 점령했을 뿐 전과를 전혀 확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투석기(catapults 와 trebuchets)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방비된 요새들을 공략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기 알라의 은총이 있었던지 진짜로 알 아딜이 원하던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중동 지역의 기후와 질병에 익숙하지 않은 외부의 침략자들이 항상 겪게 되는 문제인 질병이었다. 과연 안드레 2세는 적절한 시기에 병에 걸려 쓰러지게 된 듯하다.
결국 안드레 2세는 보무도 당당하게 잘 무장된 대군을 데리고 성지까지 왔건만 아무 소득 없이 병력을 물려 철군하기로 결정했다.(1218년 2월) 다만 아주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앙드레 2세가 떠나기 전 성지에서 약간의 성유물들을 챙겨 헝가리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렇게 어이없이 주력부대인 헝가리군이 철군하자 나머지 십자군도 저절로 해산하게 되어 5차 십자군의 성지에서의 첫 군사 행동은 아무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5차 십자군이라는 게 하나의 군대라기 보단 여러 군사 집단들을 통틀어서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5차 십자군이 다 끝난 건 아니었다. 새로운 십자군 집단이 아이유브 제국의 심장부인 이집트를 노리고 있었다.
10. 이집트 공세
엔드레 2세와 현재 십자군 국가들의 성지 예루살렘 탈환전과는 완전히 별도로 새로운 십자군이 1218년 성지가 아닌 이집트로 향하고 있었다. 이 군대는 프랑스는 물론 독일과 기타 유럽 지역에서 온 병력들로 꽤 잡다한 구성을 하고 있었다.
1218년에 일단의 독일 십자군이 퀄른에서 당도했고 홀랜드 백작인 윌리엄 1세는 지금의 네덜란드 및 프리지아 인근 지대에서 병력을 모아 이 군대에 합류했다. 그리고 이전에 설명한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6세 역시 상당한 병력을 이끌고 합류하자 군대의 규모가 제법 커졌다. 이들과 프랑스에서 개별적으로 모인 십자군들이 합류하자 정규 십자군이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군대가 모아졌다.
이들은 1218년 이집트 공세를 시작하기에 앞서 다른 무슬림 군주와 동맹을 맺었는데 그 대상은 바로 아나톨리아 고원지대에서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롬 술탄국의 케카부스 1세 (Keykabus I)였다. 십자군이 기대한 것은 이들이 시리아를 공격해 시리아에 있는 아이유브 제국의 군대가 남쪽으로 남하하지 못하게 묶어 두는 것이었다.
한편 1218년에 이들의 계획을 알게 된 장 드 브리엔 역시 이집트 공격에 찬성했는데 사실 여기에 찬성하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도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독일을 중심으로 편성된 십자군은 엔드레 2세가 이끈 군대보다는 교황과 관계가 깊었고 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리처드 1세의 생각대로 이집트를 먼저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리처드 1세가 언급한대로 적의 심장부인 이집트를 그대로 두면 결국 예루살렘을 지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이 판단이야 정확할지도 모르지만 이집트처럼 당시에 많은 인구과 군대를 가진 국가를 순전히 상륙 부대 만으로 점령한다는 것은 상당히 무모해 보이는 전술이었다. 그럼에도 이 성공하기 힘들어 보이는 군사적 도박이 감행되었다.
장 드 브리엔 및 현지의 십자군 병력은 1218년 5월 24일 아크레에서 프리지아 함대에 함류했다. 이 보다 앞서 4월에는 프랑스에서 십자군 본대가 이집트로 향했다. 이들이 아틀릿을 거쳐 나일 강 유역의 가장 중요한 요새 가운데 하나인 다미에타 항에 이르게 된 것은 1218년 6월이었다.
11. 다미에타
다미에타 항은 이전 살라딘 편에서도 설명했던 이집트의 항구 도시로 카이로를 비롯한 나일강 하류 지역의 주요 도시들로 향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잘 요새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살라딘은 1160년대 4차례에 걸친 이집트 공략에서 경험을 얻어 이 도시의 중요도를 잘 알고 있었다. 1169년에는 비잔티움 - 십자군 연합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경험도 있었다.
따라서 살라딘은 재위 기간 동안 이 도시를 더 요새화 시켰다. 다미에타는 나일강 및 육지에서 동시에 공략하지 않는다면 고립시키는 일이 불가능한 요새도시였다. 거기에 함대와 지상군이 동시에 포위공격하더라도 튼튼한 성벽과 탑 덕분에 쉽게 함락될 도시는 아니었다.
다만 공세를 시작할 즈음에 십자군에 유리한 점도 있었다. 그것은 알 아딜이(당시 73 세) 고령으로 앓아 누웠는데다 후계자들이 서로 협력할 가능성이 적어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걱정거리였던 엔드레 2세의 대군이 돌아갔기 때문에 이집트의 아이유브 왕조는 십자군의 추가 공격에 대해서 방심하고 있었다.
따라서 불행 중 다행이랄까 일단 다미에타를 방어하는 병력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만약 기습의 이점을 최대한 노리고 아이유브 왕조가 알 아딜의 사후에 내분에 빠진다면 이집트 원정도 꼭 불가능 하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일단 다미에타의 높은 탑과 성벽은 쉽게 정복이 가능하지 않았다. 따라서 십자군은 8월 24일 두개의 배위에 공성탑을 건설하고 도시 외각은 요새탑들을 공격했다. 다음날인 8월 25일 십자군은 요새 외각의 탑들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군사적 성공은 일단 여기까지였다. 결과적으로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전부 점령하는데 실패했을 뿐더러 워낙 다양한 군대가 모이다 보니 다시 내부적으로 의견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이후에 군사 행동에 대해서 합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아후 아이유브 왕조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알 아딜이 사망한 것이다.
12. 알 카밀
알 카밀(al-Malik al-Kamel Naser al-Din Abu al-Ma'ali Muhammed 1180년∼1238년)은 알 아딜의 아들 중 하나로 1218년 당시에는 38세였다. 이 정도 나이라면 당시 기준으로 한창 때 이므로 그가 만약에 다른 전제 왕정 국가에서처럼 유일한 후계자였다면 그다지 힘들지 않게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쿠르드 족 왕조인 아이유브 왕조는 기존에 있던 투르크 인들과 비슷한 계승 방식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자 계승이든 아니든 간에 한사람이 모든 영토를 물려받는 게 아니라 각 영지를 자식과 형제들에게 분할하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자식들이 사이좋게 영토를 분할하기 보다는 서로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 반복해서 싸움을 되풀이 하게 만들었으므로 주기적으로 중세 이슬람 제국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와 같은 폐단을 어느 정도 극복한 것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오스만 제국 역시 형제끼리 피튀기는 혈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잔인성에 대해서만큼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는데 다만 내전이 줄어든 만큼 왕족 및 그와 연관된 소수의 사람만이 희생되었다는 데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알 카밀 역시 그의 아버지 알 아딜이 겪은 것과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 아딜이 73 세에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형제들은 문제되지 않았지만 대신 알 카밀의 형제들이 문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알 카밀은 이집트에 그 세력 기반이 있었는데 살라딘 시절부터 아이유브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다마스쿠스는 그의 형제 알 무아잠(Al-Mu'azzam 'Isa Sharaf ad-Din)이 다스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 다음 일어날 일은 다마스쿠스의 시리아 세력과 이집트의 알 카밀 세력간에 내전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참으로 미묘하게도 5차 십자군이 다미에타 항을 공격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알 카밀은 고민한 끝에 우선은 이집트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방위를 튼튼하게 하는데 우선 촛점을 마췄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만 흘러갈 순 없었다. 그가 다미에타의 방위에 힘쓰는 사이 카이로에 정변이 일어나 그의 동생을 술탄으로 옹립하려는 정변이 일어났고 그 결과 알 카밀은 병력을 카이로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1219년 정변을 막은 후에도 다마스쿠스의 알 무아잠은 건재했다.
따라서 십자군과 다른 술탄들, 그리고 이집트 내부의 정적들에 둘러싸인 채로 위험한 소모전을 치루기보다는 알 카밀은 큰 것을 양보하는게 낮겠다는 판단을 했다. 즉 성도 예루살렘을 십자군에 양도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기로 한 것이다.
십자군의 명분이 성지 탈환이었으므로 이런 조건을 내건다면 사실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5차 십자군이 성지와 주변 지역을 탈환하는 선에서 1219년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일은 훨씬 복잡하게 진행된다.
13. 펠라기우스
아무래도 5차 십자군에서 신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5차 십자군이 성지 탈환 하나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와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그렇게 일이 쉽게 해결될 순 없었다.
이야기를 다시 알 아딜 사망 직후인 1218년 하반기로 돌리면 당시 알 카밀은 다미에타를 열심히 방어하고 있었다. 십자군은 여러 겹으로 요새화된 다미에타의 외각지역과 해안가의 교두보만을 점령했을 뿐이었다. 좁은 해안가의 교두보에 갖힌 십자군의 모습은 마치 1169년 당시 다미에타 포위나 아니면 3차 십자군에서의 아크레 포위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십자군에게는 애석하게도 교황은 이런 십자군을 돕기 위해 5차 십자군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다. 그것은 광신적인 추기경 펠라기우스(Pelagius)를 십자군의 종교적인 지도자로 파견한 것이다. 이 인물은 1213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어 동서 교회의 통합을 추진하는 중대한 과업을 담당했지만 결과적으로 동방 정교회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두터운 신임 때문인지 이번에는 5차 십자군을 지휘하는 임무를 띄고 다미에타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성무 이상으로 세속에 관심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오만하고 독단적이었다. 이런 인물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해 그렇지 않아도 지휘권이 통일되지 않은 5차 십자군에 보낸 것은 결과적으로 재앙이었다.
펠라기우스는 다미에타에 당도하자마자 예루살렘 국왕 장드 브리엔 보다 자신의 지위가 더 높다고 하여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지휘권에 일일이 간섭하므로써 십자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이끌어 갔다.
이와 같이 펠라기우스의 등장이 인재(人災)였다면 1218년 10월 이후로 발생한 폭풍과 홍수, 그리고 전염병은 그야말로 천재(天災)였다. 이 사건은 마치 아크레 포위전의 재판과도 같았는데 엄청난 폭풍과 홍수가 지나간후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거둬갔다.
1219년에 이르러 이 전쟁을 계속해야 겠다고 믿은 광신적인 추기경 펠라기우스는 다미에타 공세를 명령했다. 적지 않은 십자군이 전염병으로 죽었지만 다행히 이 전염병이 다미에타의 수비군에도 악영향을 미쳤으므로 지금이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다미에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시점에서 사실 알 카밀은 앞서 말한 궁정 음모를 처리하기 위해 카이로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라의 은총이었는지 결국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완전히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반대로 알 카밀 역시 십자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다.
1219년의 여름이 찾아오고 다미에타 포위전이 1년이 되가자 알 카밀은 이 의미없는 소모전을 끝내고 일단 자신이 가진 것을 온전히 지키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상(단 예루살렘 성벽의 일부는 파괴시킬 작정이었다)을 맺으려고 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 십자군의 시선을 다마스쿠스의 알 무아잠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는지 몰랐다.
이와 같은 소식이 십자군 진지에 당도했을 때 이를 강경하게 거절한 것은 바로 펠라기우스였다. 그는 이집트를 모두 점령하고 말겠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펠라기우스가 생각하기에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은(당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이 무슬림에게도 중요한 도시라는 사실을 추기경 역시 알고 있었다) 그 만큼 알 카밀이 궁지에 몰려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지금이 공격의 호기라는게 펠라기우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결국 5차 십자군에서는 결국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펠라기우스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들은 지원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만한 태도로 예루살렘을 반환하겠다는 평화 협상 제의마저 거절한 것이었다. 그의 상상 속에서는 이미 이집트와 이스라엘 까지 정복이 끝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다미에타의 십자군 가운데는 이탈하는 부대가 속출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왔는데 추기경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거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이미 다미에타 하나만을 점령하는데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과연 이집트 정복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 지도 알 수 없었다.
우선 홀란드(네덜란드)의 빌헬름 1세(William I of Holland)가 펠라기우스가 평화 협상을 거부한 것을 듣자마자 먼저 짐을 싸서 고향으로 떠났다. 오스트리아 공작 역시 이 의미 없는 소모전에 더 이상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오스트리아를 향해 귀국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십자군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장 드 브리엔의 뛰어난 지도력과 3대 기사단(성전, 구호, 튜튼)이 십자군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끝까지 피를 보겠다는 추기경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위한 노력은 1219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다미에타에 당도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Saint Francis of Assisi)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14. 성 프란체스코
성 프란체스코는 사실 중세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인이자 수도승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친숙한 이 성인의 이름을 딴 도시로는 샌프란시스코가(영어식 발음) 있으며 중세는 물론 근현대에 까지 수많은 미술 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또 성 프란체스코회(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181년에서 1182년 쯤 이탈리아의 아시시에서 태어나 수도승이 된 이후에는 당대의 관습에 따라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 (한국 카톨릭 교회 표기)로 불렸다. 하지만 본명은 지오바니 프란체스코 디 베르나도네(Giovanni Francesco di Bernardone)이다. 아버지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는 이탈리아의 부유한 상인으로 아버지 덕에 그는 꽤 유복하게 자랐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방탕하고 사치스런 생활 끝에 종교에서 구원을 얻고 다시 신앙인으로 거듭난 성 프란체스코는 모든 재산을 물려받기를 거부하고(이 때문에 아버지와 법정에서 재판까지 벌여야 했다)누더기 같은 수도복 하나만을 가지고 유럽을 전전하며 자신의 신앙을 전파했다. 청빈과 결혼했다는 그의 선언처럼 그는 모든 재물을 거부하고 구걸을 통해 얻은 돈은 성당을 수리하는 데 사용했다.
당시의 사치스럽고 부패한 종교계의 타락에 염증을 느꼈던 많은 이들이 프란체스코 주변에 모여 들면서 일종의 신앙 공동체가 생겨났는데 이를 작은 형제회라고 불렀고 각자 독립적인 조직으로 발전해 이를 1회(작은 형제회, 꼰벤투왈 프란치스코회, 카푸친 작은 형제회), 2회(클라라 수녀회), 3회(수도 3회, 율수회, 재속 프란치스코회)로 나누어 불렀다. 이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성 프란체스코는 4차 십자군 시절 십자군에 직접 참전하려고 한 적도 있으나 오히려 여기서 계시를 받고 아시시로 돌아갔다고 한다. 사실 4차 십자군이 한 일을 생각해 보면 이런 게 정말 신의 계시일 것이다. 덕분에 성 프란체스코는 그 명성에 큰 흠집이 날 일을 피한 셈이니까 말이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다미에타의 5차 십자군을 방문한 것은 아마도 두 가지 목적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성 프란체스코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이는 이교도는 악마 추종자라고 생각한 중세 시대의 다소 광신적인 분위기와는 달랐고 무엇보다 교황으로 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추기경 펠라기우스의 의견과는 상이하게 달랐다. 그러나 지금 관점에서 보면 성 프란체스코야 말로 참된 종교인의 자세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막대한 인명을 잃고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추기경과는 달리 평화를 진정으로 원했다.
성 프란체스코의 두 번째 의도는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이슬람 원리 주의 국가들과는 다르게 당시 이슬람 교도들은 이교도에게 훨씬 관대해서 수많은 토착 기독교 종파 및 기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무슬림 군주 밑에서 살고 있었다. 사실 이들은 인두세를 바치는 주요 세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들에게 로마 교황의 영향아래 놓이는 카톨릭 신앙을 전파한다는 것은 특히 십자군 전쟁 중임을 고려하면 웬만한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실 성 프란체스코가 행한 여러 기적 가운데 으뜸은 그가 이집트에서 무사히 살아 나와서 예루살렘 까지 순례했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연대기 작가들에 의하면 성 프란체스코는 직접 술탄 알 카밀과 면담을 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점은 동시대 아랍 연대기 기록에는 전혀 그의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아마도 여러 기록들을 조합하면 성 프란체스코가 면담을 한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누더기를 걸치고 온 수도승을 본 알 카밀은 아마 대수롭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했을 가능성도 있다. (후세의 신화 중 하나는 성 프란체스코가 알 카밀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불속에 뛰어들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진위 여부는 알기 힘들다.)
복음을 전파하려던 성 프란체스코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아무튼 알 카밀은 다른 이유에서 평화가 간절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루살렘 뿐 아니라 베들레함과 나사렛 같은 주변 지역도 양도하겠다는 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그런데 이 제안을 받은 펠라기우스는 더 기고만장해져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을 하는 이유가 그만큼 알 카밀이 궁지에 몰려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유럽에서 프리드리히 2세만 건너오면 이집트 정복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하는 펠라기우스의 상상 때문에 평화를 위한 모든 노력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거기에 펠라기우스는 이교도와 협상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펠라기우스를 비롯한 주전파의 의견에도 약간 일리는 있었다. 예루살렘만 돌려받아서는 예루살렘 왕국을 재건할 수 없으며 그렇다면 안정적으로 성도 예루살렘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펠라기우스의 상상과는 달리 프리드리히 2세는 5차 십자군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었으며 알 카밀 역시 그렇게까지 궁지에 몰려 있는 것도 아니었다.
15. 다미에타 함락
1219년에 평화를 위한 마지막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다시 지루한 다미에타 공방전이 이어졌다. 당시 이집트에는 기근에다 전염병까지 돌아서 그때까지 남아있는 십자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그들에게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적도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사실 뿐이었다.
이미 수많은 생명을 무의미하게 잃었지만 펠라기우스의 지칠 줄 모르는 전쟁 수행 의지 때문에 잔존 십자군 병력은 아무튼 다미에타에 대한 최종공세를 시작했다. 그런데 1219년 11월 4일 십자군이 다시 공세를 재개했을 때 그들은 다미에타의 견고한 요새가 거의 텅 빈 상태임을 알고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정은 이랬다. 다미에타의 요새에는 아직도 많은 식수와 식량이 남아있고 일부 외각 지역이 점령당했어도 성채는 완전히 건재했다. 따라서 사실 수비할 사람만 있으면 요새는 1220 년까지 충분히 버틸 만 했다. 그러나 수많은 십자군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이 성안에도 돌기 시작하더니 결국 수비대 대부분이 쓰러질 정도로 유행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무기와 식량이 얼마든지 있었는데도 방어에 성공할 수 없었다.
아무튼 다미에타를 점령하는데 마침내 성공하자 십자군내의 묵은 갈등이 다시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다미에타 포위전에 가장 큰 공이 있는 장드 브리엔과 그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항상 주장해온 펠라기우스가 도시의 통치권을 두고 다툼을 벌인 것이다. 장 드 브리엔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고 자신이 예루살렘 국왕으로써 다미에타의 통치권을 가져야 한다고 좋게 말로 이야기했다.
솔직히 항상 발목만 잡은 펠라기우스가 작은 도시 하나까지 자신이 다 가지려 들었기 때문에 여론이 매우 좋지 않았다. 결국 추기경은 다른 기사단이 모두 장 왕을 지지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가 도착할 때 까지만 이란 단서를 달고 장 드 브리엔의 통치권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하지만 그들이 1218년부터 거의 1년 반 남짓해서 얻은 것은 다미에타 항구 하나 뿐이었다. 그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반환하겠다는 협상을 두 번이나 거부하고 얻은 전리품 치고는 너무 초라했다. 그래서 이제 잔존한 십자군 - 펠라기우스는 말할 것도 없고 장드 브리엔과 주요 기사단들 - 은 지금까지 희생의 댓가로 더 큰 것을 원할 만 했다. 따라서 이집트 정복을 위해 내륙으로 진격하는 일이 이 재앙 같은 5차 십자군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이 도시가 카이로 까지 가는 관문이라고 해도 그때까지 희생이 엄청나게 컸던 데다 모두들 내심 프리히드리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오기를 바라고 있었으므로 일단 십자군은 다미에타에서 더 진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1220년의 상황
1219년 말 다미에타 함락이후 5차 십자군은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진다. 물론 유럽에서(결국 6차 십자군 때 올 것이었지만) 올 것이라 굳게 믿은 프리드리히 2세의 대군을 기다리면서. 본래 5차 십자군은 이시기에 병력의 상당 부분이 귀국해서 그 규모가 줄어 있었으나 유럽에서 현지 사정을 잘 모르고 오는 새로운 십자군 병력들과 3대 기사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다행히 병력 규모가 심각하게 줄어들진 않았다.
1220년이 시작되자 오만하고 독선적인(그리고 이교도와의 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광신적인) 추기경 펠라기우스와 비록 현재는 명목상의 자리이긴 해도 그래도 경험이 풍부한 예루살렘 국왕 장 드 브리엔의 갈등도 가라앉았다. 그 이유는 둘의 사이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실리시아 아르메니아(현재의 아르메니아가 아니라 지금의 터키 남부 해안 지역의 실리시안 아르메니안 왕국 (Armenian Kingdom of Cilicia)이다. 과거 비잔티움 제국 시절 많은 아르메니아 인이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
과거 십자군 전쟁사에서 언급했던 실리시아 아르메니아의 군주 레오 1세의 손자인 레오 2세는 아르메니아의 군주(Lord of Armenian cilicia)에서 스스로 왕(King of Armenia Cilicia)으로 승격해서 주변에까지 꽤 힘을 떨친 군주였다. (아르메니아 군주로는 레오 2세지만 왕국으로 승격한 이후에는 레오 1세나 혹은 Levon I, Lewon I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그의 딸인 스테파니에 공주가 바로 장 드 브리엔과 재혼했는데 1220년 6월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둘 사이의 어린 아들도 죽고 말았다. 사실 레오 2세는 아들 없이 딸 둘 밖에 없었고 스테파니에 공주가 장녀였으므로 장 드 브리엔은 둘 사이의 어린 아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 모자가 둘 다 죽고 말았으므로 이제 실리시아 아르메니아에서 그의 입지는 크게 좁아졌다. 하지만 레온 2세가 1219년에 죽은 후 아르메니아가 혼란에 빠졌고 차녀인 이사벨라는 매우 어렸기 때문에 장 드 브리엔은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고 팔레스타인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제 다미에타에는 왕이나 그에 견줄 만한 대영주가 없게 되었다. 3대 기사단(튜튼, 구호, 성전)은 본래 교황에 대해서 충성을 바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교황으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 받은 펠라기우스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즉 다미에타의 십자군에 명령을 내릴 사람이 추기경 한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3대 기사단의 단장들을 비롯한 여러 기사들은 펠라기우스의 속물근성과 무능함에 치를 떨고 있었다. 아마도 장 왕이 자리를 비운 것은 이런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데다 펠라기우스가 아무리 무모해도 프리드리히 2세가 당도하기 전까진 이집트 내륙으로 진군하려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었다.
17. 카이로 공세
1221년 여름이 지나기 전 펠라기우스도 이제 프리드리히 2세가 성지로 오지 않을 것임을 눈치 채기 시작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로 말할 것 같으면 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그토록 분열 시키고자 노력했던 신성 로마 제국을 재건하는데 온 힘을 다 쏟고 있었다.
1220년 신성로마 제국 황제로써 로마에서 대관식을 치른 프리드리히 2세는 같은 해 자신의 아들 하인리히를 시칠리아 국왕에서 독일 국왕으로 임명하고 독일 통치를 위임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2세는 다시 시칠리아로 건너가 자신의 독일로 간 사이 혼란 상태에 빠진 시칠리아 왕국의 재건 작업에 착수했다. 이제 시칠리아에서 북독일에 이르는 거대한 단일 제국을 건설하려는 프리드리히 2세의 야심을 모르는 이는 없게 되었고 펠라기우스 역시 더 이상은 프리드리히 2세를 기다릴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펠라기우스는 이에 십자군에게 내륙으로 진격해서 적의 수도인 카이로를 점령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사단과 기사들도 분명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적어도 장 왕이 다시 올 때 까지만이라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카이로와 다미에타는 적어도 직선거리로만 100km 이상 떨어져 있었으며 실제로는 수많은 지류가 있는 거대한 나일 삼각주를 지나야 했는데 특히 이 지류들은 우기에 나일강이 범람하기 전까지는 물이 흐르지 않는 마른 강이거나 혹은 얕은 개울에 불과했다. 하지만 일단 범람하면 이 지류들은 배 없이는 지나는 일은 불가능한 큰 강으로 변신했다. 따라서 잘못 들어갔다가는 빠져 나올 수 없는 함정으로 변신했다.
따라서 카이로로 진격하려면 아예 1160년대 십자군의 이집트 침공시처럼 삼각주를 우회기동하든가 아니면 강이 범람하지 않는 시기를 택해야 했다. 당시엔 범람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사실 빨리 진군하든지 내년에 진군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 소식을 듣고 급거 다미에타로 돌아온 장 왕은 이미 추기경이 진격하려고 마음을 굳힌 것을 알고는 놀랬다. 추기경은 내년 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없었으며 빨리 승부를 봐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여기서 장왕이 끝까지 반대했더라면 추기경도 자신의 뜻만으로 군대를 진군시키기는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그렇게 되면 저 오만 불손한 추기경이 원정이 실패한 책임을 장 왕 때문이라고 모두 뒤집어 씌울 가능성이 있었다. 잘못하면 오랜 세월 우트르메르에서 자신이 쌓아왔던 명성을 한번에 날릴 수도 있었다. 거기에 추기경의 집요한 설득이 이어지자 마지못해 장 왕도 카이로 공세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장 드 브리엔과 펠라기우스가 동의하니 결국 십자군은 1221년 7월에 카이로를 향해 내륙으로 진격했다. 진격할 당시에는 나일강이 범람하지 않아서 진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병사들이 자신들이 건넌 얕은 도랑과 개울이 나중에 돌아갈 수 없는 강으로 변하게 될 것이라곤 알 지 못했다.
18. 재앙의 끝
1221년 8월에 십자군이 카이로 인근까지 도달했을 때 현 상황이 승리가 아닌 패배라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알 카밀은 함정으로 제발로 걸어 들어오는 십자군 군대를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그들의 거점 보급 기지이자 유럽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항구인 다미에타에서 십자군이 멀어질수록 그들은 재앙으로 다가가는 것이었다.
알 카밀의 군대는 현명하게도 정면 승부를 하는 대신 게릴라 전법으로 군대의 측면을 노리고 기습과 후퇴를 반복했다. 삼각주 지형에 익숙한 그의 군대에게는 아주 쉬운 일이었다. 사태가 점점 심각해져 감을 깨달은 일부 독일 군대는 다미에타로 후퇴해서 늦기전에 그들의 귀중한 생명을 살릴 수 있었다.
장왕과 주요 기사단 역시 사태가 점점 심각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일강이 범람하기 시작하자 삼각주 지형에 익숙하지 않고 배도 없는 십자군은 꼼짝없이 섬 사이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바로 이 시기가 되자 이집트 군의 활동이 활발해 지기 시작했다.
본래 이집트는 나일강의 편리한 해상 수송로를 역사적으로 잘 활용해 왔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사용된 석재들도 대개 나일 강을 이용해서 수송했을 만큼 나일강은 농업은 물론이고 물류 수송에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강이었다. 사실 이집트의 주요 도시들이 대부분 나일강이나 그 지류에 건설된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만큼 나일 강이 범람하자 이제 이집트 군은 정박해 놓았던 배를 이용해서 삼각주에서 아주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미로 같은 삼각주 지형에 익숙했므로 십자군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쉽게 적을 공격했다 따돌릴 수 있었다. 물론 십자군이 삼각주에서 빠져나갈 길을 모두 막아버린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사정이 이쯤 되자 펠라기우스도 상황의 심각성을 곧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후퇴를 하려고 해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곧 십자군에는 어떻게든 필사의 퇴각전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후 벌어진 혼란상은 사실상 십자군이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통제 불능의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부 십자군 부대들은 적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군수품 가운데서 포도주(오늘날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당대에는 깨끗한 물을 장기 보존하거나 혹은 현지에서 식수를 구하기 힘든 경우도 있었으므로 술도 식수처럼 사용되었다)를 몽땅 다 마셔버렸다. 그 결과 너무 취한 병사들이 퇴각은 커녕 바로 서서 걷기도 힘든 추태를 연출했다.
일부 부대들은 독단적으로 식량과 비축 군수품을 태우거나 못쓰게 만들었으므로 장왕과 추기경이 결정도 하기 전에 퇴각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진짜 퇴각이 가능하냐의 문제였다. 나일강이 범람한 것은 물론이고 알 카밀은 수문까지 모두 열도록 지시했기 때문에 배 없이는 이곳에서 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던 알 카밀은 충분히 때가 무르익었다고 여겼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십자군을 궤멸시킬 공세를 준비했다. 알 카밀의 마지막 공세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야간 기습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미 사기가 바닥에 떨어진 십자군이었기에 엄청난 손실을 입고 퇴각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이제 펠라기우스도 뒤늦은 화평제의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 시기 이루어진 것은 화평이라기 보단 그냥 항복이었으나 자신의 삼촌인 살라딘의 선례를 따랐는지 알 카밀은 매우 관대하게 이들이 살아서 나갈 수 있도록 선처했다. 대신 다미에타는 돌려줘야 하고 8년간 상호간의 평화를 유지하는 조건이었다. 알 카밀 입장에서는 이들을 모두 살육할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는 것 보다는 평화협상을 더 갈망했다. 유럽에서 대규모 군대가 새롭게 조직되어 오는 것 보다는 그게 더 좋은 방법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알 카밀은 하틴 전투에서 상실한 참 십자가를 돌려주기로 약속하므로써(3차 십자군 때부터 반환할 것을 십자군 측에서 요구해 왔다) 자신의 큰 배포와 평화를 위한 열망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러나 낭패스럽게도 마침 돌려주려고 보니 참 십자가가 어딘가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이슬람교도들에겐 전혀 중요한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제대로 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하지만 참 십자가의 조각이라고 여겨지는 성 유물들은 꽤 많기 때문에 오늘날 유럽의 주요 교회 가운데는 이를 보관하는 곳들이 꽤 된다)
19. 결과
이 5차 십자군은 크게 두개의 군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전반기에 안드레 2세가 이끄는 헝가리 군이 주축이 된 십자군으로 안드레 2세 본인이 병에 걸려 쓰러지는 바람에 별 소득 없이 귀국한 군대가 있다. 두 번째는 장왕, 3대 기사단, 기타 독립적인 십자군, 영주들 이 모이고 추기경 펠라기우스가 간섭한 십자군이었다.
첫 번째 십자군의 경우 아마 안드레 2세가 건재했다면 성지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을 지도 모른다. 이미 무슬림들조차 예루살렘을 포기할 준비를 할 정도로 안드레 2세가 아무 피해 없이 정예 병력을 상륙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는 베네치아의 해상 수송력이 이미 중세시대에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유지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예루살렘 왕국을 다시 완전한 형태로 재건하지 않는 이상 이를 계속 유지하긴 어려울 텐데 안드레 2세가 이 과제를 모두 달성하려면 몇 년 정도로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병이 아니더라도 본국을 그렇게 장기간 비우지 않고 귀국했을 것이고 결국 예루살렘 왕국은 이전보다 꽤 축소된 상태로 재건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십자군의 경우에는 사실 이집트 정복 자체가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집트는 그렇게 작은 국가가 아닌데다 지형상 쉽게 외세가 침입하기 어려웠다. 사실 이론적으로야 아이유브 제국의 심장부를 먼저 공격하는 것이 맞을 지도 모르지만 현실적으로 예루살렘 수복보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반환하겠다고 했을 때 차라리 그 정도로 만족했다면 교황의 위신도 더 살아날 수 있었을 텐데 추기경 펠라기우스의 무리한 욕심으로 인해 모든 것이 틀어졌고 재앙적인 결말만을 맞게 되었다.
따라서 5차 십자군 이후 교황과 교황의 전권을 위임 받았던 펠라기우스가 비난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했다. 이 재앙적인 전쟁 이후에 교황권이 급격히 추락한 건 아니지만 새로운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견제와 연이은 십자군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권위가 퇴색한 건 사실이었다. 한 가지 불공평한 일은 재앙의 구렁텅이로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밀어 넣었던 펠라기우스 본인은 무사히 살아서 유럽으로 귀국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3차에서 5차에 이르는 십자군의 사실상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직 십자군 전쟁 자체가 끝난 건 아니었다. 아직은 정치적으로 이용할 여지가 적지 않았기에 십자군은 계속해서 이어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