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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 shoppinger들의 모습들
'window shopping' 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아이쇼핑'이라는 표현보다도 옳은 영어식 표현이라는 것으로, 물건을 구입한다는 개념보다도 구경의 개념을 마음에 두는 것으로서의 즐거움을 취하는 태도나 행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복음이라고 함은 값없이 주는 것으로서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내놓아진(disclosure of Jesus) 것으로서, 세상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진열되어진(Outlet) 쇼핑몰과 같이 이해되어질 수 있고 그러한 차원에서 접근이 가능합니다. 물론 가능하다는 것과 정당하다는 것이 동일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러한 개념의 중심이 없는 가운데서 표현의 기회라고 하는 것을 임의적 주관으로 객관화하여서 여론몰이를 합당하게 하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을 볼 때에 상당히 유감이라고 함을 말하겠습니다. 이러한 와중의 중심에서 읽게 되어지는 고용된 자들로서 인식되어지는 자들의 글들이 그 인식의 향기롭지 못한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주목하는 것도 역겹게 느껴지는 가운데서, 값없이 주신 복음 그 자체는 값진 것이라는 것을 가리우는 듯한 흥정의 여론몰이는 더욱 더 그 부끄러움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window shoppinger들의 언어선별에 대하여 그러한 것에서 가장 중심으로 부각되어지고 있는 선별된 언어 '목사교'라는 말에 대하여서는 특별히 이러한 언어를 선별할 수 있는 인식적 상대성은 정황적으로 볼 때에 구교의 입장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지난번 교황님의 언급에서 '가톨릭만이 참된 교회라고 하는 것과 교황권을 인정하지 않아서 개신교는 크게 잘못되었다'는 식의 발표가 있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 제가 하나님의 개념이 바르게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면 교회의 참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언급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여러가지 파장이 해석되어질 수 있는데, 현실적이라는 한정적 입장에서 언급한다고 할 때에 교황권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다면 그러면 신교에서는 목사권이 잘못되었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입장에서 선별되어질 수 있는 언어선별이 바로 '목사교'라는 것과 목사라는 직분의 권위이해를 놓고 쟁점화한 것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해석이라는 것은 그것에 대한 실제의 의미보다도 해석적 실제로서는 분명히 이 카페와 여러 온라인 상황에서 읽을 수 있는 것으로서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구교의 입장의 안티적 개념으로서 선별되어진 언어로서의 '목사교'와 '목사'라는 직분의 권위의 비교가 그리고 그 실제적인 것에 대한 인식의 규정이 어떤 것인지 논의되어야 할 당위성을 가지게 되었고 단편적인 언급들이 오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직분으로서의 목사직과 교황권의 해석과 실제 1)일반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어지는 권위 남용에 대한 해석의 차이와 인식 일반적인측면에서의 대형교회에서의 원목과 부목의 관계성에 대한 명령과 복종의 개념으로 이해하시는 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일부 잘못된 구약적 인용으로 해석하시는 분들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을 현실에서 본 기억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대한 단편적 이해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시정의 의미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전반적인 개념으로서의 목회자들의 서열적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의도성이 있는 것으로 분명히 잘못된 입장인 것입니다. 특히 모세와 여호수아의 순종과 시종이라는 개념에서 그러한 직계적 순종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은 사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권위와 그러한 가운데서 증거적 권면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의 권위라고 하는 것을 실제적으로 모세를 통해서 읽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모세가 말한다고 하여도 맹목적 개념으로 비로소 해석되어질 수 있는 가능태가 본질적 실제로서의 순종을 위한 권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것은 형태적 개념으로만 현상적 개념으로만 이해하려는 자들의 인식의 불충분성 때문에 비롯되어지는 것임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시종으로서 모세에게 순종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질서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진 순종이지 결코 인위적 개념으로서의 맹목적 당위성에 따른 것으로 해석가능성을 실제화 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교회에서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또는 그러한 정황에서 언급되어지는 것에 대하여서는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한 질서적 개념의 실제의식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이것은 목양과 일반 양으로서의 성도의 관계뿐만 아니라 목자들의 관계에서도 해석되어지는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황권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는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르치고 있는 하나님의 개념은 그러한 실제의식을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순종이라는 개념이 맹목성처럼 보인다고 하여도 실제의식에 판단한 믿음에 따른 것으로행할 때에 그 명령하는 자로서의 원목의 권위는 자기 스스로의 개념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속칭 '목사교'라는 말은 성립이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면에 교회체제(?)의 형태의 완전성(?)이라고할 수 있는 구교의 체제에서는 그 체제의 단일성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체제의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는 그리고 그 명령의 심부름꾼으로서의 한계를 설정할 수 있는 실제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은 없다는 것이 하나의 비판의 실제가 되어지며 교황권으로는 교회의 참과 거짓을 말할 수 없으며, 안티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지는 성립되어지지 않는 '목사교'비판은 또한 기각되어진 것으로 언급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해둡니다. 결론적으로
window shoppinger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 그 복음에 대하여서 관심을가지는 것보다는 그 가치를 논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불법이요 또한 그 판단 마저도 실제적이지 못함과 그 인식까지도 이미 판단되어졌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실제적으로 교회의 지도자들로서의 목사직분의 권위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여 보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어리석은 입장인 것을 알면서도 답변한다면 그렇다고 말하겠습니다. 그냥 적지 않은 세월을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물론 해석과 실제라는 개념의 방향성과 인식이라고 함을 더 논해야 하겠지만 그러한 현실적인 측면에서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으로 복으로 바꾸시는 섭리의 사실을 믿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의 주의 뜻하심을 더 분명히 받지 못했을 것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현실적이라는 사태적 파악에서만 비롯되어질 수 있는 부당한 권면이라고 하는 것도 주 앞에서 믿음 안에서 분별하여서 순종할 때에 맹목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사실 가운데서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목사직의 권위 특히 축도에 관련되어진 것도 이미 교회의 질서의 실제를 인정한다면 일반적인측면에서의 성도들의 축복하여 기도한다는 것과 동일하면서도 질서적 공식적 입장에서의 축복기도를 할 수 있다는 측면의 사실성을 인정함이 옳은 것입니다. 옛 역사 가운데서 고해성사라는 개념으로 정치화하여서 종교의 세속적 권세의 통합을 이루고 있는 것과 동일시 또는 비교하는 가운데서의 신교의 목회자의 권위를 매도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고해성사도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질서의 교황권이 종으로서의 한계설정적 실제의식을 비로소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루어진 역사의 아픔일 뿐입니다. 그것의 인식에서 참된 교회로서의 개신교의 교회 질서이해에 혼선을 가지지 않기를 바라며 또한 이러한 실제성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안티적 사람들의 악플에 실제성을 부여하여서 두려워할 필요도 없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으로 언급해둡니다. 참으로 복음을 증거함에 있어서 물건 흥정하는 듯한 자들로서 그 가치와 권위를 임의적으로 묻는 이들에게 그 질문과 임의적 규정의 실제없음에 따라서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더 이상 기만적 입장의 합리적 파편들을 펴는 어리석음은 나타내지 않음이 지혜의 실제라는 것을 말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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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형태나 체제는 ..별반 다를게 없는 것이지요?..늘 새롭다구 하는 그 모습안에 우리 `인간의 연약함`이 늘 있음을 상기 하시지요!~~..해 아래 새것이 없다 했거늘 우리는 늘 새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답니다!!.. 감성으로만 이루어진 신앙은 검증이 필요합니다!..그것도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말입니다!..그래서 신학이 생겨난 것입니다!!.. 22:10
새것이 아닐 수도 있고 새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사도를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에베소서의 그것을 우리가 함께 그리한 곳들을 만나지 못하였으니 이루거나 만나면 새것이요. 이미 이천년전에 잠시 있었고, 따로 기르시는 하나님의 백성중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을 것이고 또한 만세전에 하나님안에의 소망 그것이니 옛부터 하나님안에 있고 계획하시며 드러내셨으나 거짓자들을 인하여 숨었으나 다시 드러내시며 소망하게 하시니......그렇습니다. 샬롬
`새것`을 들고 나오는 분들의 전형적인 슬로건이 바로 이러한 것이지요!!..여태까지 없었다가 이제사 나타났다 하니,..그 체제가 이름하여 무슨무슨 형제자매회라 하니 참으로 설득력이 있소이다!..그런 체제나 형태들이 무수히 많이 생겨나구 없어지는 것은 알고 계시는지요?..그래두 성서를 부인하거나 하나님을 모른다구 아니하니 `형제`라구 불러야 하는 친밀감은 내게 있소이다!!
네. 인터넷에서도 어디서나 뵈실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삶 온 몸과 영혼으로 그리스도를 살아내시는 분들입니다. 함께하시는 노약자와 오갈데없는 여러 지체님들도 아프고 병들고 죽어가는중 교회중에와 세상가운데 소리없이 드러남없는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계십니다. 본원은 천안이고요. 분원은 전남 무안에 있습니다. 역사는 세상이 알지못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수백년이랍니다. 샬롬
예!..그러시군요!!..인터넷 주소라도 하나 올리시지요??..한번 보고 싶네요!!~~
정말 부끄럽습니다. 다만 사모할 뿐 뵈온지 수개월이니 우습은 제 모습입니다. 용서하세요. 아무데나 검색창에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를 열람하시면 찾을 수 있겠습니다. 샬롬
상대방의 생각을 제대로 읽지 못하면서 그리스도 위에 세운다고 분별을 말씀하심은 지혜롭지 못하군요.. 참으로 답답하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하여서 바른 인식을 가지고 그리고 그의 계시로서의 성경해석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의식을 비로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은 가운데서 성경의 언어와 그 언어로서의 직분에 대한 임의적 판단은 가능할 뿐이지 옳은 판단이 아닌 것이며 그것은 올바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실제의 개념없는 성경주의, 기독교는 신비이지만 개념없고 임의적인 한계설정이 안되는 신비주의는 성경이 지지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윈도우쇼핑을 하더라도 영혼을 훔치는 도벽과 영혼들을 기만하는 것은 용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