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훈과 장태수의 빛과 그림자
삼성의 실패담 하나 더.
86년엔 팀마다 스카우트 요원이 제대로 없었다. 감독, 코치들이 귀동냥으로 정보를 듣거나 어쩌다 경기 장면을 보는 것말고는 유망주 아닌 선수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가 없던 시절이었다.
삼성의 87년 1차 지명 신인은 한양대 좌완 투수 장태수와 동아대 외야수 이정훈으로 압축되고 있었다. 결국은 장태수로 낙점됐다. 당시나 지금이나 왼손 투수는 워낙 금값이어서 외야수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이정훈은 키가 170cm로 작고 삼성엔 장효조.장태수.허규옥 등 쟁쟁한 외야 멤버들이 포진해 있어 이정훈이 아무리 야무진 방망이를 휘둘러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때 필자가 우연히 이정훈의 대학 4년 때 기록을 알게 됐는데 이정훈은 40번의 도루 시도에서 한 번만 실패하고 39번을 성공시킨 '쌕쌕이'였다. 이 점을 삼성 관계자가 미리 알았다면 '장태수 낙점'을 재고하지 않았을까. 이정훈은 2차 지명으로 밀려 그해 꼴찌였던 빙그레(현 한화)에 의해 1착으로 찍혔다.
투 선수의 프로 성적을 비교해 보자.
장태수는 87.88년 1승씩을 거두고 롯데로 트레이드됐는데 89.90년 2년간 1승도 못 올리고 쓸쓸히 은퇴했다. 반면 이정훈은 87년 타율 3할3푼5리(3위)의 폭발적인 타력을 앞세워 그해 신인왕에 올랐고 91.92년엔 연속 수위 타자를 차지하는 등 6년간 화려한 시대를 맞이했다.
장태수는 키는 컸지만 투구폼이 엉성해 자연히 스피드가 떨어졌다. 변화구도 신통치 않아 2,3이닝을 버티기 힘들었다. 단순히 왼손 투수라는 잇점 때문에 지명했으니 그야말로 스카우트의 '구석기 시대'였다.
어떤 이는 이정훈이 약팀 빙그레에 입단했으니 처음부터 주전을 꿰차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지, 삼성에 갔더라면 보통 선수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역사엔 가정이 없으므로 뭐라 단정할 수 없다. 데뷔 초기엔 빛을 발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이정훈의 타격과 베이스 런닝은 타고난 것이어서 장효조.장태수.허규옥 등 쟁쟁한 외야수들이 2~3년 뒤에 내리막길을 걸었을 때 바로 진가를 발휘하지 않았을까. 늦게 시작한 만큼 전성기가 더 길었을지도 모른다.
이정훈의 경우는 옜날 일이라 치더라도 아직까지 스카우트의 중요성을 몰라 패착을 거듭하는 팀이 있다. 한화 이글스가 대표적이다. 스카우트가 약하니 실력보다 이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92년 지연규,95년 신재웅,97년 이성갑 등 큰 돈을 들인 투수들이 모두 기대에 못 미쳤다.지연규는 6년간 3승 4패, 약간 나은 편인 신재웅은 3년간 14승 2세이브(15패), 3억 2,000만원짜리 이성갑은 부상으로 한 게임도 못 뛰었다.
한화는 빙그레 시절인 87년 이정훈 이후 될성부른 신인이 스타급으로 성장한 예가 강석천(89년), 정민철(92년), 송지만(96년) 등 세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스카우트에 실패하는 이유는 단 하나, 스카우트의 직급이 낮기 때문이다. 경력들이 적으니 능력이 발휘돌 수 없는 것이다.
고향이 대구인 그는 누가 보더라도 라이온즈의 입단이 기정사실처럼 되어있던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라이온즈의 선택은 그가 아닌 류중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풍부한 외야진을 가지고 있던 라이온즈로서는 유격수 포지션의 류중일이 더욱 탐이 났으니까요.
그런 그를 낼름 주워먹은 팀이 바로 이글스 였고, 이정훈은 이글스에서 '타도 라이온즈' 를 꿈꾸게 됩니다.
데뷔 첫 해인 1987년 이정훈은 신인으로써 22게임 연속안타라는 기록을 세웁니다.(비록 김기태-박정태 등에 의해 기록은 깨어지지만...)
1987년을 그는 100경기에 출장하여 0.335의 타율 124안타 56득점 34타점 20도루와 0.407의 출루율 0.441의 장타율로 타율 3위, 최다안타 1위, 득점 8위, 도루 7위를 차지합니다.
또, 보너스로 '22게임 연속안타' 라는 신기록까지 합쳐 신인왕을 받게 됩니다.
연속안타 기록 수립당시 발바닥 부상으로 도저히 나올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상처를 촛불로 지져가며 나오는 투혼을 발휘하여 '악바리' 라는 별명을 얻게되지요.
1988년 이정훈은 팀의 1번타자로 96경기에 출장 0.309의 타율 113안타 69득점 34타점 18도루 0.378의 출루율 0.413의 장타율을 기록하며 이강돈, 유승안, 강정길등과 팀 타선을 이끌며 팀을 시즌 2위의 자리에 올려놓습니다.(타율 10위, 최다안타 6위, 득점 3위, 도루 9위)
비록 한국시리즈에서 막강한 타이거즈에게 패하여 준우승에 그치지만 신생팀 창단후 3년밖에 되지 않은 이글스가 준우승까지 한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1989년 부상으로 인해 51게임 타율 0.323 64안타 30득점 23타점 14도루를 기록하는데 그칩니다.
이글스는 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지만 '선동열' 의 타이거즈에게 4-0 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칠수 밖에 없었지요.
1990년 다시 돌아온 그는 114경기에 출장 0.291의 타율 117안타 71득점 52타점 22도루 7홈런 0.365의 출루율 0.408의 장타율을 기록합니다.(타율 9위, 최다안타 8위, 득점 4위, 도루 5위)
91년 그는 111경기에 출장 0.348의 타율 132안타 81득점 55타점 18도루 17홈런과 출루율 0.420 장타율 0.602를 기록하게 됩니다.(타율 1위, 최다안타 4위, 득점 4위, 홈런 7위)
이 해의 타격왕 경쟁은 손에 땀을 쥐게할만큼 박진감이 넘쳤습니다.
이정훈, 장효조 그리고 장종훈 이 세명이 매일 물고 물리는 격전을 벌인 타격왕 경쟁에서 그는 결국 2위인 장효조를 1리차이로 제치며 타격왕에 오릅니다.(이정훈 0.348, 장효조 0.347, 장종훈 0.345)
이해에도 이글스는 타이거즈에게 덜미를 잡히며 준우승을 하게 됩니다.
1992년 이정훈은 2년연속 타격왕의 자리에 오르며 완연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111경기 출장 133안타 89득점 68타점 21도루 25홈런 0.445의 출루율 0.621의 장타율을 기록합니다.(타율 1위, 최다안타 8위, 득점 6위, 홈런 4위, 도루 7위)
2년연속 타격왕을 기록한 그는 같은 팀 선수인 3년연속 홈런왕 장종훈과 함께 팀을 역대 최다승과 함께 리그 1위로 만드는데 기여합니다.
그 해의 한국시리즈에 그동안 이글스의 발목을 잡아오던 타이거즈가 자이언츠에게 패하자 이글스는 팀 창단 첫 우승의 기쁨을 누릴 준비를 합니다만 결과는 자이언츠의 우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