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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바를 알지 못하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κολο?θει μοι, 아코루데이 모이)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찬송가에도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함께 가려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보이는 주님]을 [보고] 따를 수 있었으나, 지금에는 어떻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진정 따르는 것인가? 중대한 일이면서도 관념적으로 생각하고 습관적으로 행동하며, 주관적으로 판단해버린다. 대다수의 개념들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목회자의 길’을 가는 것이라 생각하고 [신학교와 목사]를 생각한다. 결코 신학교나 목회자의 길이 다 ‘주님을 따르는 길’만은 아니다. 그건 다만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이 말에 펄쩍 뛸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의 참뜻은 [주님의 길]이 모두 다 [사역의 길]만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삶』그 자체라는 말이다. 사역은 어디까지나『삶』에서 나온 것이어야지, 사역 자체가 삶이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젖은 엄마가 섭취한 음식물이 엄마의 소화기관을 거쳐 유방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지, 유방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젖]이라는 말은 [유방]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나 엄밀히 따지면 유방은 젖이 나오는 [기관]이고 젖은 [내용물]이다. 마찬가지로 [사역]이나 [삶]이 같은 말인 것 같지만 사역은 젖이 나오는 기관 같다면 삶은 그 내용물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교회(外形的)나 목사직은 사역자의 일터요, 자격이지, 사역의 [원동력]이나 [내용]은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아무리 훌륭한 교회(기준이 무엇인지 문제지만), 실력 있는 신학 교육을 받은 목사라 할 지라도 [삶]이 없는 사역, 얼마나 힘들고 따분한 고행(苦行)이겠는가?
고로 사역은 [삶의 결과]요 [열매]일지언정, 사역 자체가(어떤 사역이든 간에) [주님을 따르는 길]이라고 보기에는 정당치 못하며 더욱이 주님을 따르는 것은 목회자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 천만한 생각인지 모른다. 잘못하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망칠뿐더러 자신의 인생(人生)자체를 망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는 그를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따르는 순진한 많은 사람들의 [신앙적 삶]까지도 파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시민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한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삶도 올바로 살지 못하게 된다. 천국을 위해서 바로 살지 못한다면 하다 못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국가와 사회와 가정과 자신을 위해서라도 충실해야 할 것이다. 바른 신앙, 바른 삶은 자기 자신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 사람의 활동영역(活動領域)에 비례해 엄청난 영향을 많은 사람에게 끼치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릇된 신앙], [잘못된 삶], 역시 전염병처럼 사역 기간과 범위에 따라 퍼져나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심히 책망하신 것도 그들 자신들의 [문제 신앙]이 자신들에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셨다. (마 23:14)
사역과 주님을 따르는 것!
왜 다른가?
사역이란 말은 그 단어 자체에 자기를 필요로 하는 대상을 포함하고 있다. 즉, [사람]이라는 대상이 있다. 그러므로 그 등식(等式)은 [사역자=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나와 주님의 관계]이다. 여기에 사람이 꼭 끼일 필요가 없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른다 해도 엄밀히 말해서 [그들과 나와의 관계]가 [나와 주님과의 관계]만큼 중요하거나 심각하지 않다. 그들과 나는 상대적(相對的)이라면 나와 주님과는 절대적(絶對的)인 것이다. 그들이 나를 버리거나 떠날 수도 있으나, 나는 주님을 포기하거나 주님이 나를 버릴 수는 없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는 것은 상관없을 수도 있으나, 주님이 나를 미워하시는 것은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나 많은 사역자들이(다는 아니고) 주님 없이도 잘 하고 있지만 주님을 따르는 자는 주님 없이는 따르는 의미가 없어진다. 무엇을 따른다는 말인가?
결국 [주님을 따르지 않는 사역]은 있을 수도 없으며 [따르지 않는 사역자]가 무슨 [주님의 종]인가?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삶]이 선행(先行)되어야 엄마가 섭취한 영양분에서 젖이 나오듯 풍성(風盛)한 사역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보이는 주님]을 보고서 따랐지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요 20:29) 어떻게 하는 것이 따르는 것인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역시 [보지 못하고] 믿는 분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성경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나갈 새...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라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떻게 길을 떠나는 사람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갈 수가 있느냐 하는 말이다. 이 말씀을 실제적으로 적용해 보자. 당신은 지금 일어나서 대문 밖을 나간다. 우선 방향을 잡아야 할 것이다. 오른 쪽이냐, 왼쪽이냐, 아니면 앞으로냐?
더욱이 당신은 혼자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가족이 있었고, 종들이 있었으며 수많은 가축 떼가 뒤를 따르고 있었다. 머무를 장소도 적어서는 안되고, 가축 떼를 배불리 먹여야 할 초장과 흐르는 시내도 있어야 한다. 미리 종들을 시켜서 철저히 답사를 시켜도 이만저만 세밀히 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우에 [무조건 믿음으로]를 외치며 결행(決行)했다가 무참히도 낭패를 당하고 다시 원점(갈대아 우르)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믿음은 [무조건] 이지만 현실은 [무조건]이 아니다. 좌냐 우냐를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믿음] 이라는 단어의 참뜻을 정리해 보자.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신념(信念)인가?
사람은 信念이 있고, 또 있어야 한다. 信念이 없으면 소망도 없고 소망이 없으면 일을 추진해 나갈 수도 없다. 그러나 세상이 신념으로 다 통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만 아직 보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보이는 세상일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信念으로 믿듯이 다 信念으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信念으로 믿은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眞理로 통하지 않는다면 나의 信念이 잘못되었든지 하나님이 잘못되었든지 할 것이다.
한 마디로 信念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결코 아닌 것이다. 信念은 信, 不信을 막론하고 다 가지고 있는 인간적(人間的) 순수한 본성(本性) 中의 하나이다. 아이들이 [엄마를 졸라대면 용돈을 줄 것이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는 이 아이가 가지고 있는 信念을 믿음으로 착각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허다하다.
이 信念이 우연의 일치로 자기 뜻대로 되었을 때 [내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는데 이루어 주셨다] 고 나팔을 불어댄다. 그런 [우연적 성공]은 기독교인(基督敎人)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또한 그런 [우연적 성공] 때문에 [우연적 실패]를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人間의 基本的 信念]이 [하나님]이라는 매체를 끌어들여 신앙화(信仰化) 되는 것이 곧 무속신앙(巫俗信仰)인 것이다. 그래서 요사이 기독교의 위기가 기독교 신앙의 무속화 경향(傾向)이다. 무속적 종교심은 인간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산신령을 찾던 사람이 교회에 밀려든다고 해서 민족 복음화 운운 할 수 있으며, 팔백만, 천만, 운운 할 수 있겠는가? 뿐만 아니라 이것을 [세계 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의 축복]이라고 나팔을 불어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갈 때 이런 무속 신앙으로 출발했겠는가? 칠성당에 가서 새벽마다 빌던 열심으로 새벽기도 열심한다고 훌륭한 믿음이라고 추켜세울 수 있겠는가? 복채 바치던 심정으로 십일조 정성껏 한다해서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면서 [...찌어다]해 줘도 되는가 말이다.
우리 냉철히 생각해 보자!
거짓과 허위는 오래 가지 못한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다고, 염불이야 어떻든 잿밥에만 마음이 쏠려 망발(妄發)나팔을 불어대도 한국기독교는 계속해서 [유례 없는 축복]이 유지되겠는가? 그렇게 해 먹고 후세들에게 소위 [한국 기독교전성기]가 어떤 식으로 평가되겠는가? [현실]을 위장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역사]는 왜곡되지도 될 수도 없을뿐더러, 왜곡하면 할수록 왜곡하려는 그 시도까지도 역사는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을 찾자!!
아니, 그러기 전에 왜곡된 믿음인 [信念]을 마음의 왕좌(王座)에서 추방하자. 그리고 그 자리에 실존(實存)하시는 믿음을 모셔들이자. 그래서 그 믿음이 역사하시게 하자.(약 2:22) 아브라함은 바로 이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아브라함 뿐 아니라 “모든 믿음의 (선진)先進” (히 11:2)들이 [實存的 믿음의 삶]을 살다 가셨고, 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 (히 12:1)으로 보고 계신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믿음』을 따른다는 말이요. 이 말은 곧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기도 한다.
다시 본론의 아브라함을 보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라는 말은 사실 어떤 면에서의『믿음의 삶』이란 꼭 어떤 목적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또한 그 목적지 때문에 혹은 목적 때문에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엄밀하게 믿음 생활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정치를 하는 사람을 대통령의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원리와 같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사는 삶을 믿음생활, 혹은 신앙생활이라 해야 할 것이다. 믿음을 얻고자 하는 신념을 가지고서 노력하는 사람의 삶을 신앙생활이라 하면 안 된다. [신념생활을 한다]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가려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결국 천국에 못 갈지도 모른다. 다만 현재 천국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만이 천국에 가는 것이다. 그는 또한 지금 천국의 삶을 사는 것이기도 하다.
아무라도 미국에 가지 못하고 오직 미국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있어야만 갈 수 있다. 갈 수 있나 없나를 미국대사관에서 심사를 한다. 미국에 가기 전에 미국 생활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많이 해야한다.
또한 미국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늙은 할머니에게는 생각지도 않던 향수병(鄕愁病)만 더 생길 수도 있다. 미국생활을 즐길 줄 아는 자가 미국 가서 만족하게 살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천국에 가기 전에 천국생활에 익숙해져야 하고, 나아가서 천국 삶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준비나 훈련이 안된 사람들은 이 세상 생활이 천국보다 훨씬 좋을지도 모른다.
어떤 영어성경은 요 14:3절의 ‘처소’를 [맨션]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그러나 맨션이 누구에게나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요사이 인기를 끌고 있는 맨션아파트가 시골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는 [고려장 땅굴 속] 일 수도 있다. 힘들고 불편하고 일거리 많은 시골 생활이 훨씬 좋은 것이다. 맨션아파트 삶을 즐길 줄 아는 아들 며느리나 손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서 [천국생활의 예행연습]을 해보자!...
그래서 좋으면 당신은 천국 갈 자격이 있을 뿐 아니라 천국 삶을 영원히 즐기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천국]이 맹목적이 되었다가는 큰일 날 수도 있다.
[천국]이 목적이 아니라 [천국 삶]이 목적이어야 한다.
[천국 삶은 곧 믿음의 삶]이다.
그것은 또한 목적이 성취된 것이기도 하다.
삶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그 삶을 사는 것은 곧 목적 자체가 성취된 것이나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그 목적이 성취된 사람이었고 이미 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꼭 목적지가 정해져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 목적지 때문에 답사를 한다거나 스케쥴을 철저하게 짤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것이 그가 나아가는데 그를 주저하게 하거나 망설이게 하거나 가로막지는 못했다. 방향이 어디이든 위치가 어디이든 환경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그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의 [목적적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당신 자신에게 이 원칙을 적용 시켜보자. 당신은 내적 어떤 만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 삶은 방안에 있든지 밖에 나가든지 환경이나 조건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 대문 밖을 나갔다고 해서 걸어갈 방향 때문에 신경 쓸 필요가 있는가? 갈 곳이 없으면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으면 어떤가? 그 삶이 정지하는가?
시장에 가면 어떨까? 생각이 환경 때문에 혼란해진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의 나라는 골방이나 광야 같은 환경적 천국이 아니며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지역이나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 속에 있는 것이다. (눅 17:21) 이러한 [현세적 천국 삶]을 누리는가? 또 즐기는 자만이 [영원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으며 천국의, 참으로 천국다운 모든 혜택(?)들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컴퓨터가 사람이 할 일을 대신 많이 해 줄 수 있지만, 컴퓨터 자체를 활용(活用)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 아무리 값비싸고 유용한 컴퓨터가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천국은 [누리는 자]들의 에덴 동산이요, [즐기는 자] 들의 낙원인 것이다.
그러면 내재(內在)하는 [實存的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본문을 통해 아브라함의 경우를 살펴보자.
성경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여” (창 11:31)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창 12:5)라고 기록하고 있는가 하면 히11:31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 하셨느니라”
여기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하였고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고도 하셨다. 이 말씀은 그들은 결코 갈대아 우루를 떠난 목적지가 가나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은 다만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본향 찾는 것을 나타내는” 제스쳐일 뿐이다. 그가 찾고 사모하는 본향은 이 땅에나 또는 가나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하나님이 ...저희를 위하여 예비하신 한 성”이었다. 역시 히 11장 9절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면 그들이 이 땅에서는 무엇으로 살았는가?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히 11:13)” “믿음으로 ...같이 장막에 거하였다”고 말하는 그 [믿음]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이 믿음은 무엇인가?
우선 우리가 잘 아는 히 11: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를 살펴보자. 히브리서 기자는 “실상”?ποστασι?(휴포시타시스)를 본서에서 3회 사용하고 있다. 히 1:3과 3:14과 11:1, 그런데 1:3에서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본체의 형상이시라”에서 ‘본체’로 번역되었다.
이 말씀을 직역하면
“이는 (2절의 아들)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성을 묘사하는 말씀인데 하나님은 ‘영광’과 ‘본체’로, 아들은 ‘광채’와 ‘형상’으로 비유된다. 또 3 : 14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에서 ‘확실한 것’으로 번역이 되어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이 번역상 문제가 있다.
원문은 알랜드역이
“τ?ν αρχην τηs ?ποστ?σεω? (텐 아르켄 테스 휴포스타세오스)로 되어 있다. ‘확실한 것’ ?ποστ?σεω?(휴포스타세오스)는 소유격으로, τ?ν αρχην(텐 아르켄)은 목적격으로 돼있어 헬라어 형식상 이런 문장은 하나의 술어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문제는 후에 논할 기회가 있을 줄 알고 여기서는 주제를 벗어날 수 없기에 본론으로 가보자.
다른 번역은 이 낱말들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공동 번역은 1:3을 “...하나님의 본질을 그대로 간직하신 분이시며 ”에서 본질로, 새 번역 성경은 “그의 본체의 완전한 표현이시며”에서 본체로, 현대인 성경은 “...하나님의 본성을 그대로 나타내시는 분입니다”에서 본성으로,
흠정역은 his person으로,
ASV는 his substance으로,
NIV는 his being으로,
리빙 바이블은 marks him as Gad로,
RSV는 his matur,
모펫역은 God's own character로,
구약 칠십인 역에서는 a Support나 base나 foundation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상으로 종합해 볼 때 표현이야 어떻든 ?ποστασι?(휴포스타시스)가 [his being]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
믿음은 [개념]이 아니라 【존재】요.
[인간적 신념]이 아니라 【꿈틀거림】이다.
이 믿음의 [力事]가 [歷史]를 이어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이 [完成]을 이루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