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2일 월요미사에 함께하신 사제 |
주례 : 함패트릭 신부(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강론 : 상지종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예수회 : 김정욱, 최영민, 오세일, 박종인 신부
골롬반 : 함패트릭, 남승원 신부
꼰벤뚜알 : 박문식, 서영섭 신부
예수성심 : 장윤성, 이무현 신부
작은형제회 : 유이규 신부
도미니꼬 : 배수판 신부
그리스도 : 김종국 신부
의정부교구 : 맹제영, 김영철, 상지종 신부
안동교구 : 김영식, 손성문 신부
전주교구 : 문정현 신부
원주교구 : 박무학 신부
청주교구 : 김인국 신부
서울교구 : 이영우 신부
부산교구 : 이균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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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월요미사에 함께하신 수도회 |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회
베네딕도회
선한 목자 예수 수녀회
성 바오로딸 수도회
성가소비녀회
예수의 까리따스 수도회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원죄없으신 마리아 교육 선교 수녀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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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구속주회
꼰벤뚜알
도미니꼬 |
"함께 와서 이 불의한 자들과 맞서 주십시오"
강론 서영섭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요즘처럼 생명과 평화라는 말이 간절한 적이 없습니다. 매주 월요일 마다 이곳 대한문에서 함께 모여 드리는 미사 역시 우리의 이러한 간절함을 담아 봉헌하는 미사라고 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곳곳에선 인간과 자연의 생명이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겨져 고통에 신음하고 있습니다. 진정 이 땅에 생명과 평화의 기운이 힘차게 살아있는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에게 부여된 생명은 바로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함부로 다뤄서도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너그러운 관용은 하느님을 섬겨야 하는 우리 자신들이 돈을 섬기는 배금사상주의와 돈과 물질이면 다 된다는 황금·물질만능주의에 빠져 물신을 숭배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배금사상주의와 황금·물질만능주의는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생명의 존엄한 가치를 돈과 물질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시켜버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명박 정권이 매우 잔인하고 비정한 것은 다름 아닌 생명뿐만 아니라 죽음조차도 차별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보십시오. 가난한 노동자들과 철거민들의 생명을 어디 귀중하게 다루고 있습니까? 이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어디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그깟 죽음이야 하며 전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익히 잘 알고 무척 많이 들었을 지난 3년 전 기억하기 힘든 하지만 절대로 잊어서 안 되는 쌍용자동차 사건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기업주의 부도덕한 경영으로 한평생 성실하게 일만 했던 무려 2600여명이 넘는 선량한 노동자들을 대량 정리해고를 한 사건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주 싸늘했습니다.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무한 이기심에 귀족 노동자들의 배불린 파업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음이 최근 밝혀졌습니다.
회계조작으로 마치 회사가 적자인 것처럼 하며 노동자들을 쫓아낸 것입니다. 설령 부실한 회사라도 기업주는 경영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기업의 윤리를 저버리고 오히려 노동자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부로 자신들의 잇속만을 챙기며 살아갑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 그리고 여전히 죽음에 대한 유혹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가정은 만신창이가 되어 가정의 평화는 오간데 없고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습니다.
쌍용자동차 어느 해고노동자와 그의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8층 베란다가 어느 순간부터 높이감도 별로 없는 거 같고 이렇게 봐도 죽을 거 같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내가 여기서 뛰어내리면 날 걸러줄 나무도 없네... 이런 생각도 들고... 내내 울다가 어느 순간 보니까 내가 옷장에서 남편 넥타이를 꺼내서 묶고 안방 쓰레기통을 뒤집어서 그 위에 올라가 목을 매고 있더라구요. 술 먹고 몸에 휘발유랑 다 부은 적이 있어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야 되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들고... 추하지 않게 죽는 게 어떤 건가... 아침에 눈 뜨고 막 채비를 하는데 사람이 떨어졌다는 소리를 들으니까 가슴이 철렁하더라구요. 내 남편일 수도 있겠구나 싶으니까...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상담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전 세계에서 지구상 대한민국이 자살률이 가장 높고, 대한민국에서 지금 평택, 쌍용자동차 한 회사에서 해고된 사람들의 자살률이란 것은 지금 가히 세계최고이며 이렇게 예외적인 일이 한 지역에서 집단적으로 벌어지는데 세상이 아무렇지도 않게 돌아간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을 처음 만나 느꼈던 전반적인 감정은 뭐냐면 이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긴장감이 없다. 그런 느낌이 전반적으로 들었습니다. 죽을까? 말까? 죽어야 되겠다. 막 죽음을 준비하고 뭐 이런 것이 아니라 표현을 하자면 그냥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긴장감이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는 거나 죽는 거나 그냥 언제나 여기서 이쪽으로 언제든지 아주 수월하게 손쉽게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느낌이 그 집단 전체적으로 퍼져있는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들의 고통을 헤아려 보셨습니까? 오죽하면 죽음을 희망을 여기며 무려 한 분도 아닌 스물세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과도한 스트레스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들이 죽기까지 마지막 절규는 “살고 싶다.”였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있어 해고는 살인입니다. 노동자들에게 있어 살아갈 삶의 근원은 일터입니다. 일터에서 쫓아낸다는 것은 그들을 죽음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리서 2320항을 보면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과 창조주의 거룩하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자살 냉정하게 바라보면 우리의 냉대와 무관심이 죽인 사회적 타살이었습니다. 살고 싶다는 그들의 절박한 호소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었습니까? 이 사회는 버젓이 인간의 존엄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철저히 파괴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김정우 지부장님 오늘 34일째 그리고 새누리당사 앞에서는 스무 명의 쌍차 해고노동자들이 5일째 곡기를 끊으며 살려달라고 온몸으로 처절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들을 살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억울한 죽음 예수님 한분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지금껏 예수님만큼이나 억울한 죽음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우리 각자 이러다간 내가 죽을 수 있다, 라는 절박함으로 더 이상은 이러한 억울한 죽음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로 생명과 평화를 지켜나갔으면 합니다.
정말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가톨릭 신자 분들 중에는 아직도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언급하면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왜일까요? 정치적인 발언이라서 아니면 신부가 기도는 하지 않고 세상일에 왜 그리 관심이 많으냐는 그런 생각이 들어서일까요? 사실 세상일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입니다. 그리고 그 관심은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끝까지 외면하고 있는 마음이 완고한 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예수님께서 가장 보잘 것 없고 힘없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내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신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사는 이 세상엔 여전히 헐벗고 목마르고 굶주린 이들이 넘쳐나는데도 어찌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그들을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이웃을 구해준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잘 압니다. 혹시 이 복음의 내용도 불편하게 들리십니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어려운 이웃을 도와줘야 하는 건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특별히 해고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올해로써 5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것입니다. 바티칸공의회 문헌 사목헌장 27항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조금도 돌보지 않았던 부자를 본받아서는 안 된다. 특히 현대에 있어서는 우리 자신이 그 누구에게나 이웃이 되어 주고 누구를 만나든지 적극적으로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예컨대 버림받은 노인, 불의하게 천대받는 외국인 노동자이든, 피난민이든 그리고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우리 양심에 호소하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당하는 노동의 악조건과 같이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모든 행위 등 또 이와 비슷한 다른 모든 행위는 실로 파렴치한 노릇이다. 그것은 인간문명을 손상시키는 행위이며 창조주인 하느님께 대한 극도의 모욕이다.” 라고 교회는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노동자들을 존엄한 인격체가 아닌 이윤 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하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며 하느님을 모욕하는 범죄행위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불의한 상황을 외면하고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책임을 전가하며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한 침묵은 교회와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위험에 처해진 간음한 여인 막달레나 마리아를 구해준 복음 또한 잘 압니다. 간음한 막달레나 마리아 여인의 삶을 살펴보면 모르긴 해도 그녀 역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절박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고단한 삶을 이해하기는커녕 사람들은 오히려 그녀의 약점을 이용하며 쾌락의 노리개로 삼았습니다.
막달레나 마리아의 한 개인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난하기에 앞서 우선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 모순을 외면하고서 무조건 단죄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점을 잘 아시고 너희들 중에 죄 없는 자부터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루하루 힘겹고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색안경을 끼고 빨갱이라는 이념의 돌로 힘껏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회개하면이라고 말입니다. 가끔 그럴듯하게 말하며 성경의 내용을 호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들의 무리를 경계합니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어떻게 신부가 적개심을 가지고 갈등을 부추기며 용서하지 못하냐고 말입니다.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람을 죽이고 전혀 회개하지 않는 자들 노동자들을 철저히 이윤 도구로만 삼는 자들 이러한 불의 한자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회개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뻔뻔함과 기만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불의한 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이들은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성전을 더럽히고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며 예수님께서 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쫓아낸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용서라는 말, 불의한 자들에게 어줍지 않게 제발 남용하지 마십시오. 이건 예수님에 대한 모욕입니다. 함께 와서 이 불의한 자들과 맞서 주십시오.
성경은 일관되게 이야기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의 기도와 위로가 그들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며 그들의 아픔을 함께해주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고 있는 신앙인의소명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우리가 그들에게 단순히 불쌍하다며 동정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불쌍한 이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의 동정을 느끼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그 감정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입니다. 동정은 그 상황을 떠나게 되거나 돌아서고 나면 금세 잊고 맙니다. 그러나 연민은 다릅니다. 그 연민은 가난하고 아픈 이들의 고통에 끝까지 함께한 예수님의 연대입니다.
동정이 아닌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으로 가난한 이들과 특별히 고통 받고 있는 이 땅의 모든 해고 노동자들이 모두 일터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와 삶으로 연대하는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