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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등대 & 등대섬'.,이야기.
팔미도등대.
사람의 발길이 닿기 힘든 바닷가
외딴 섬에 홀로 서 있었던.,등대.
처음 등대가 세워졌을 백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아무도 발길을 하지 않을 것만 같은 절벽 위에서
망부석처럼 망망대해를 비추며 제자리에 있던 등대.
그무렵, <등대지기>.,노래 가사.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위에 비치며
한 겨울에 거센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마음을
사람의 마음을~
흰갈매기도 잠들은
고요한 파도 위에
수 없이 많은 이야기...
지금은 외항선이나 컨테이너 선박이 등대 앞을 분주히 드나들고,
공간에 따라서 복합 문화 공간, 관광지가 되어 많은 사람이 찾지만,
등대가 비춰온 백년이라는 시간의 무게는 결코 가벼이 볼 것이 못된다.
등대 주위의 바위 절벽,
그 속의 오래된 고목 한 그루.
대를 이어온 등대지기들의 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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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 국토해양부 공식집계.,섬 총수는 3358.
이중에 무인도서는 2876개로 전체 섬의 85.65%를 차지.
행정안전부가 전국 지자체 중심으로 집계한 개수는.,4201.
이처럼 섬 개수가 정확하지 못한 배경에는
지적도에 아직 잡히지 않은 무인도 때문이다.
섬도 땅의 일부라 국유지가 있고 사유지가 있다.
사유지가 국유지보다 많은 무인도.
비율은 사유지 61.24%(46.83㎢),
국유지 28.98%(22.16㎢),
공유지 9.78%(7.48㎢).
전국의 육지와 섬을 잇는.,등대.
등대 관리인이 섬에 거주할 경우에
법률에 따라 등대섬은 무인도로 인정.
1960년 기준, 전국의 등대 기수.,총 254.
38.5 해리 당 1기가 설치되어 있는.,비율.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설치된.,팔미도등대.
지난 100년간 인천앞바다를 지켜온.,팔미도.
2009년 '평화의 상징' 첫발을 딛게 된.,등대섬.
약 100년간 민간인에게 개방되지 않았던.,무인도.
2016년 3월 22일 오전 인천 앞바다에 낀 짙은 안개.
인천앞바다 섬 지역을 오가는 11개 전체 항로가 마비.
여객선이 제때 운항을 못하고 안개가 걷히길 기다렸다.
이날, 인천항 운항관리실에 따르면
06시 30분 시정거리 200∼500m에 불과.
인천∼백령도 등 11개 항로, 12척 여객선이
인천앞바다 안개가 걷힐 때까지 운항 대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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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구한 말, 인천 개항과 함께 일본과 서구 열강은
우리나라 연안에 등대 설비가 없어 함선의 운항이 어렵고
무역상선의 해난사고가 빈번해지자, 정부에 등대 건설을 요구.
구한 말, 정부는 인천항 관세수입 일부를 건설비로 충당.
1902년 5월 등대건설에 착수 후, 1903년 6월 1일에 점등했다.
인천앞바다 수많은 섬들 중에서도 외딴 섬 무인도였던.,팔미도.
인천항 진입항로 길목에 위치한.,팔미도 등대.
인천항 남쪽으로 15.7㎞ 떨어진 작은 섬.,팔미도.
우리나라 최초로 등대의 불빛을 밝힌.,팔미도등대.
바닷물에 부식되지 않은 콘크리트.
대리석으로 지었기에 해양건축 효시.
지난 100년간 임무 수행을 다한 후,
인천시 지방문화재(제40호)로.,지정.
원래, 그 자리를 지키며 보존되고 있다.
2003년 12월 팔미도등대는
100주년 기념상징 조형물인
"천년의 빛"으로 교체되었고
2009년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게 한.,숨은 주역.
당시, 우리나라 국운을 좌우했던.,팔미도등대.
오늘날까지, '등대섬' 하나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1950년 9월 14일 자정
켈로 부대 특공대 요원들.
팔미도로 들어가 등대불을 밝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다.
팔미도 등대는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상륙함대 이정표.
군사보호구역이어서 오랫동안 민간인이 출입할 수 없었다.
2009년 민간인의 출입을 통제한지 106년만에야 개방되었다.
2002년 2월 4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
인천광역시청 관광진흥과(032-440-4045)에서
무료숙박 체험 및 등대 관련정보를 얻을 수 있다.
과거, 'UN군 & 미해병대' 6.25 참전용사들이
옛 추억을 회상하며 즐겨 찾던.,옛 관광 명소.
현재, 등대체험 및 섬탐방.,프로그램.
초등학생들의 단골 방학 숙제감.,명소.
'인천항 연안여객터미널~팔미도~ 팔미도등대'
등대여행 2시간 30분 소요.(왕복 뱃길 45분 포함),
.........................주변 볼거리..............................
인천종합어시장→ 밴댕이회무침거리.→한국근대문학관.
월미도, 인천 차이나타운, 을왕리해수욕장, 송도국제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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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거문도는.,'고도,서도,동도' 3개의 섬.
'고도' 만을 거문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도와 서도는 삼호교로 연결되어 있다.
거문도 별칭오르는 "삼도(三島)"
"삼산도(三山島)" "거마도(巨磨島)".
고흥반도 남쪽으로.,40㎞ 지점에 위치.
고도 면적 0.42㎢, 해안선 길이는 3.70㎞.
서도 면적 7.77㎢, 동도 면적 3.43㎢이다.
여수, 녹동항 등지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고도를 중심으로 하는 수역(水域)은
순천· 여수 방면에서 제주도로 항해하는
여러 선박의 기항지로서 근해어업의 근거지.
갈치· 삼치· 고등어· 방어 등의 좋은 어장.
김 생산지로도 유명하며 전복 양식이 활발.
거문도는 성어기 파시(波市)의 역사가 길어
현재, 마을들은 파시에서 유래되어 발달한 것.
'거문도뱃노래'는.,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
'고도· 동도·서도' 세 섬이
감싸안고 있는.,도내해(島內海)
수심이 깊어 큰 배의 출입이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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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거문도 등대
1905년 4월 12일 세워진뒤 지난 100년간
남해안 뱃길을 밝혀왔던.,남해안 최초 등대.
등대 아래에는.,"미스 수선화" 군락지.
원래, 수선화의 원산지는.,'지중해 연안'.
'어떠한 사연이 있어 거문도에서 자생할까?'
거문도 미스 수선화는 부화관이 있는.,'금잔옥대',
제주 수선화는 부화관 없이 오글오글한.,꽃잎 형태.
조선 후기,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 김정희가
한양에서 귀한 수선화가 제주에서 소, 말에게 먹이거나,
보리밭에 나면 원수 보듯 파낸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제주 수선화는 천주교 선교사들이 심었던듯.
조선 후기 박해를 받고 주인을 잃은 수선화가
야생화가 되어 "제주 수선화"로 불리우는듯 하다.
제주 수선화는 12월에 꽃을 피우지만
거문도 미스 수선화는 이른 봄이 개화기.
두 종류 수선화는 야생화가 아닌., 원예 품종.
누구인가 심었던 관상용 원예 품종이
돌보던 주인을 잃고나서 야생화가 된 것.
거문도 미스 수선화는 누가 언제 심은걸까?
수선화 꽃말.
'날 잊지 말아요'.
'고결, 자아도취, 자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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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1900년' 약 40년간 러시아는
일본· 한국· 중국의 연안지를 대상으로,
태평양 진출계획 일환인 부동항 획득을 기도.
1885년초 영국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군과
러시아군 간의 전투가 개시되면서, 조선에서도
'영국 러시아' 양국 충돌 위기가.,예상되던 시점.
이때 러시아의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나돌면서,
영국도 러시아에 대해 견제수단으로 거문도 점령.
'1885년(고종 22) 3월 1일~1887년 2월 5일'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점령한 후, 주둔군은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군함도 5∼6척에서 10척까지 증가.
'블라디보스토크'보다
완벽한 부동항을 노리던
러시아의 남진정책 견제가
영국이 거문도를 점령한 목적.
영국은 청· 러시아· 일본과의 세력 균형을 이유로
자국의 동양함대를 주둔시켜 "해밀턴 항"이라 불렀다.
결국, 불법 점령 2년 만에 이곳에서 철수한.,거문도 사건.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해양 강대국., 영국.
구한 말, 영국군은 왜 거문도에서 철수한걸까?
영국군이 거문도 점령 당시 심었던.,수선화.
그들이 철수한 후, 흔적인.,"거문도 미스 수선화."
그리고, '한국 최초 테니스장'인 "해밀턴 테니스장".
영국군과 거문도민의 관계는 원만
도민들은 영국군에게 노동력을 제공
그대신, 보수와 의료 혜택을 받았던 섬.
그당시, 영국군은 발전기로 전등을 설치.
경복궁보다 1년 먼저 전등이 설치되었고
아울러, 유럽까지 통신 케이불을 설치한 것.
당시,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항의하기 위해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거문도를 방문하였고
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의미인 ‘거문(巨文)’으로 개칭.
이때, 종래 삼도를 거문도라 부르게 되었다는.,외딴 섬.
과거, '러시아 태평양 출구' 구실을 하여.,‘동양의 지브롤터.'.
또한, 왜인들이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살았던 섬이기에.,‘왜섬’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대한해협 문호.,거문도.
거문도사건은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
조선을 배제하고 열강간 이해 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
조선 정부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
영국은 거문도를 무단 불법 점령함으로서
러시아가 조선에 진출해 부동항을 구축하고.
동아시아를 장악하려는 남하정책 계획에 제동.
청나라 정여창 제독은 거문도에 도착하여
진상을 파악한 뒤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 측과 외교 교섭을 벌였던.,거문도 사건.
조선은 사건해결 교섭에 주도하지 못하였고
청나라·영국·러시아 3국 상호 교섭에 의존할 뿐.
러시아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강력히 항의.
러시아도 제주도 등 조선 영토를 점령하겠다고 위협.
영국 해군도 거문도에 대한 군사적인 평가를 실시,
거문도가 군항으로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86년 3월 청나라가 타국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보장하는 조건으로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여기에 희망을 얻은 이홍장은 같은 해 8월 28일과 9월 2일
주청러시아공사 라디젠스키(Ladygensky)와 회담을 하였고
러시아가 '조선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것.
청나라는 10월 5일부로 영국에 러시아 측 보증을 전달
영국은 청나라를 중재자로 하여 몇 차례 교섭을 벌인 뒤,
10월 29일 철수의사를 청나라에, 조선에는 11월 28일 통고.
거문도사건 해결에 중재 역할을 한 청나라는
그후, 더욱 더 조선 정부에 종주권을 과시하여
조선의 내정 간섭을 보다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거문도사건'의 발단은 구한 말, 고종 재위 때
일제를 견제할 목적으로., '러시아, 청나라, 미국'
외세를 끌어들이며, 거문도 항만 개발권을 남발한 탓.
.
'1894~1895년'.,청일전쟁.
'1904.2.8∼1905년 가을'.,러일전쟁.
1905년 4월 12일에.,'거문도 등대' 점등.
일본은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
조선은 '1910∼1945' 35년간., 일제강점기.
'1941~1945' 태평양전쟁 후, 1945년 8.15 해방.
거문도는 청일전쟁 이후부터
8.15해방까지 일본 해군 주둔지.
일제 '신사 터'와 계단이 남아있다.
'신사 터'로 올라가는 길.
조선 말, 김류(金瀏)가 남긴 '해상기문'에는 거문도에
세계 열강들이 앞다투며 찾아와 외국인들과 필담한 기록.
김류는 거문도 사건 발생하기 일년 전, 고종 20년 71세 운명.
1814년(순조 14)에 태어난 김류(金瀏)[1814~1884)
과거를 보려고 한양으로 가던 도중 전라도 장성 땅에서
노사 기정진(1798~1879)의 학문에 감화되어 과거를 포기.
노사의 문하생이 되어 학문을 배우고 고향으로 돌아와
낙영제를 세우고 수많은 후학을 배출하였으며, 말년에는
완도 청산, 신지도 등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고 전해온다.
김류가 남긴 '해상기문' 기록에 의하면,
'거문도 사건' 훨씬 이전부터 거문도를 포함한
대한해협 도서지역은 세계 열강들의 항로 쟁탈 각축장.
'황해~남해' &
'동중국해~ 동해'
폭 200km 대한해협.
대한해협과 이에 연속되는
대마도 이키도 등 징검다리 섬.
쓰시마해협은 옛부터 한일교통로.
현재, 부산~ 일본 시모노세키(下關),
부산~오사카 & 부산~하카다 사이에는
매일 수차례 여객선이 오가는.,정기항로.
현재, '대한해협 ~쓰사마해협'은
태평양전쟁 뒤, 맥아더라인 평화선.
1965년 한일 양국 간 어업협정 체결 후
'전관수역 & 공동수역'으로 설정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해저터널 건설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며
최근 한일 양국 간 해저터널 건설논의가 부활되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과거사에 따른 역사적인 앙금이 문제점.
'일본 시발점' 규슈 사가현 가라쓰시.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조선 출병로.
거문도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에 속해있는 섬.
해마다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거문도등대는
거문도를 찾는 관광객들이 들러가는 필수 코스이다.
거문리 선착장에서 등대까지 1시간 도보거리.
삼호교를 거쳐 유림해수욕장을 벗어나면 '무넘이'.
여기서부터 해안가 기암절벽을 낀 1.2km거리 산책로.
길 양쪽으로 들어선 동백나무 숲길을 걷다보면
세상 모든 상념을 떨쳐 버릴 수 있을 만한 곳이다.
거문도 등대 절벽 끝에는 '다도해 전망대'.,관백정.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내한 때
방문하고 싶어했던 섬으로도.,유명.
영국 여왕은 왜 거문도로 가려한걸까?
거문도 사건 당시 영국군의 철군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거문도에 내려온 경략사(經略使) 이원회(李元會)의 보고.
영국군 사망자의 묘지는 모두 9기, 현재는 3기만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영 타도 주장이 높아
일본인들 묘비보다.,더 큰 서구식 묘비는 파손.
그후 '영국군 묘' 6기는 본국으로 이전 안장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영국군 3인 서구식 비석도
방치된채로 버려져 있는 것을 해방 이듬해에
거문도 유지들이 보수해 관리해온.,영국군 묘역.
'영국군 묘지' 비문에 적혀있는.,글귀.
“1886년 3월 알바트로스(Albatross)호
수병 2명이 우연한 폭발 사고로 죽다.
윌리엄 J. 머레이(William J. Murray)와
17세 소년 찰스 댈리(Charles Dale)”
“1903년 10월 3일 알비온호 승무원
알렉스 우드(Alex Wood) 잠들다.”
십자가에 새겨져 있는.,글귀.
엘리자베스 여왕은 거문도사건 과정에서
순직한 영국군 3인 묘지에 참배하려 한 것.
2004.12.1(수)~ 12.2(목) 방한 일정 때였다.
2005년부터 주한 영국대사관은 거문도 주민들이
백년간 영국군묘지를 관리해온 것에 대한 보답으로
거문중학교에 장학금을 지급하며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2015년 9일 여수시와 여수시교육청 등에 따르면
주한 영국대사관은 지난 2005년부터 거문도를 방문,
영국군 묘지를 참배하고 거문중학교에 첫 장학금 지급.
2005년부터 2010년까지 매년 150만∼550만원을 전달한 것.
장학금은 한영협회에서
기부금 형식으로 마련하여
영국대사관을 통해 지급한 것.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묻혀지고 지워졌던 사건.
영국에서는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거문도 사건.
장차, 한영(韓英)외교를 위해 어떤 조치를 해야할까?
'대한해협 해금강' 관광자원 활성화가
'금강산 개발'보다 안보 면에서 효율적.
외화획득원 관광자원 잠정가치도 높은 곳.
'거문도 ~백도'.,뱃길.
'거문도 ~ 백도' 한려수도 해역은
'천혜의 국제적인 관광자원' 해금강.
관광산업은.,'황금알을 낳는 거위.'
굴뚝 공해 없는 공장 같은.,외화 수입원.
수입 원자재도 필요없는.,100% 외화 소득원.
외국인 관광객 숫자에 비해
내국인들이 주로 찾는 현실이
늘 안타깝게 여겨지는.,관광자원.
영국군 불법 무단 점령으로 기록된.,거문도 사건.
UN군 6.25참전부터 현재까지 '혈맹 우방국' 영국(英國).
거문도 사건에 관한 역사 기록은 수정 보완해야 하지 않을까?
혈맹 우방국들과 외교를 돈독히 하려면
'역사의 현장' 관리가 최우선 중요한 시점이다.
그래야, '거문도 관광 해역'이 빛을 발하지 않을까?
세계 최초의 등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파로스 등대.
알랙산드로스(BC356~BC323)대왕이 세운 등대.
원래, 이집트에 신도시 건설때, 중심 탑 목적으로 건설.
탑 공사가 지연되는 동안에., 항구로 발달한.,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 위치한.,세계 최초의 등대.
16세기부터 등대 불을 밝히는데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
17세기 나무· 양초·기름을 사용, 18세기 후반 무연 기름등.
19세기 '프리즘 렌즈 & 반사경'을 이용하여
약한 불빛을 한점으로 모아 강한 빛을 내게 했다.
20세기 초, 등유와 아세틸렌 가스를 사용하는 등이 개발.
1920년대 전기등이 일반화되었으며,
오늘날 크세논 플래시 진공관을 사용.
일기가 나빠 불빛이 잘 보이지 않을 경우
사이렌, 경적 소리 등으로 경고 신호를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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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 있는
'세계 최초의 등대' 높이는.,110m.
기원 후 처음 몇 세기 동안 페니키아인과 로마인들은
'흑해~영국'지중해, 대서양 해안 여러 곳에 등대를 건설.
로마 제국 멸망 후, 해상무역이나 여행이 거의 사라졌기에,
12세기에 무역이 부활 전까지 유럽에 등대가 세워지지 않았다.
그후, 등대를 다시 세우기 시작한., 프랑스 & 이탈리아.
한자동맹 이후 '스칸디나비아 & 독일' 해안에 등대 건립.
16세기 말, 유럽 해안 주변에는 30여 개 등대가 세워졌다.
18세기 초, 등대 망루를 나무로 만들었으나,
목재 망루는 폭풍에 휩쓸리는 경우가 많았다.
1759년 영국에서
에디스톤록스 모래사장에
최초로 벽돌 등대가 세워졌다.
지반이 불안정한 모래사장에
스미턴의 설계가 성공을 거두자
각지의 공해(公海)에 등대가 세워져
1820년 경 전세계 주요등대는 약 250개.
20세기 콘크리트, 강철에 밀릴 때까지
벽돌은 등대 건축 주재료로 사용되었다.
18세기 후반 물고기·식물·광물 기름으로
그을음 없는 기름등 발명 후 혁명적인 발전.
무연 기름등은 빛이 보다 선명하고 뚜렷했고
렌즈와 반사경으로 빛의 밝기와 범위를 늘렸다.
19세기 무렵에는 회전등이 등장하게 되었고
20세기 초에는 등유와 아세틸렌 가스를 사용.
아세틸렌 가스등은 지금도 일부 등대에서 사용.
1920년대 전기등 개발이 완성되어 일반화되었다.
20세기 후반부터 레이더·로랜 등
다양한 항해설비들이 개발됨에 따라
등대 역할은 19세기 이전보다 크게 감소.
기존, 노후화된 옛 등대들은
관광자원으로.,활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해안가 등대는.,562기.
유인등대가 43기, 무인등대 519기.
최근, 국내 등대관광 붐이 일자 한국관광공사는
인천 팔미도등대, 부산 가덕도등대, 울산 울기등대,
울진 죽변등대, 진도 하조도등대, 군산 어청도등대,
태안 옹도등대 등 7곳을 가볼 만한 등대 여행지’로 추천.
삼면(三面)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자연환경.
우리나라 '등대 & 바다낚시' 관광 해역.
'전국의 등대'를 하나로 이어주는.,'갈매기길'.
'등대 관광벨트'를 조성해야 할.,싯점인 것 같다.
'초, 중, 고'수학여행.
등대학습체험장으로
가족동반 여행지로서
국제적인 관광지로서
신혼여행지 명소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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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1970년대 해운대는 신혼여행 명소.
제주도가 신혼여행지로 부상하기 이전에는
충청남도 아산시의 온양 온천이나 경상북도 경주,
부산의 해운대가 최고 신혼여행지로.,각광을 받았다.
1966. 11. 7 개장한 해운대 극동호텔.
극동호텔은 부산 최초의 특급 호텔로서
서울 워커힐 호텔 다음으로 큰 호텔이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부산에 올 때 피서지.
낮에는 갈매기떼가 날던 해운대 백사장.
밤에는 밀물때 키 넘는 파도가 장관이다.
여기에서 전국의 등대 복원을 구상한걸까?
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 등대건설 박차.
태평양전쟁과 6·25전쟁 등으로 거의 파괴.
1960년대 복구에 진력한.,박정희 전대통령.
조선비치 호텔, 파라다이스 호텔 건립 후
극동 호텔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해운대를 피서지로 유명하게 만든.,극동호텔.
1913년 일제강점기 국내 최초.,인천 송도 해수욕장.
1960 광안리 해수욕장], 1965 해운대 & 송정 해수욕장.
1970 다대포 해수욕장은 모두 1960년대와 1970년대 개장.
제주에 올레길이 있다면
부산에는 갈매기길이 있다.
부산 지역에는 2012년 6월말 778기 항로 표지가 있다.
그중 국가에서 관리하는 것은 639기, 그중 유인 등대로는
영도 등대, 오륙도 등대, 가덕도 등대 3곳, 나머지는 무인등대.
부산 지역에는 독특한 형태의 등대들이 많이 건설되었다.
기장군 대변항, 인근 '포구 월드컵 공인구' 형상의 월드컵 등대,
출산장려 목적 세계 최초 젖병 등대, 성공을 기원하는.,닭벼슬 등대,
천하대장군 등대. 칠암항에 부산 야구 열기를 반영한.,야구 등대.
APEC 정상 회담이 열렸던 해운대 누리마루 앞바다에는.,연꽃 등대.
향후, 관광자원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국내에서 등대 및 등대 섬을
관광자원화 하고 있는.,부산.
.......부산 남구 용호동.,五六島 공원........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22호' 오륙도(0.019㎢)
부산만 승두말에서 남동쪽으로 약 600m에 위치.
승두말, 방패섬(32m)·수리섬(32m)·송곳섬(37m)·
굴섬(68m)·등대섬(밭섬:28m).,5개 해식 이암(離岩).
간빙기 전, 육지 승두말에서 남동쪽 반도.
간빙기 후, 지금처럼 5개의 섬이 되었다.
오륙도는 우삭도가 간조시 1개의 섬이었다가,
만조시 2개의 섬으로 분리된다고 하여.,五六島.
부산광역시 상징이며, 경승지 오륙도공원으로 유명.
오륙도를 일주하는 관광유람선이
남구 민락동에서 운항되고 있으며,
휴일에는 낚시꾼과 관광객들이 많다.
.................................................
오륙도 공원.
.............오륙도 등대.......................
오륙도에서 육지와 가장 가까운 방패섬은
세찬 비바람을 방패처럼 막아주는 섬이다.
솔섬은 소나무 자생지에서 비롯된 이름이며,
송곳섬은 송곳처럼 뾰족하게 생겨 명명된 이름.
수리섬은 독수리가 갈매기를 포획하려 모여든 섬.
굴섬은 오륙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큰 굴이 있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한 사람 몫의 음료수가 될만했던 섬이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오륙도 등대섬.
위가 평평해 예전에 밭섬이라 불리웠던.,섬.
부산항 앞바다에 가지런히 배열된., 5 바위섬.
.
'부산항을 지키는 수호신'이자
'부산의 상징'인 오륙도(五六島)
부산만 북안 '승두말'로부터 남동향으로
뻗어있는 기암절벽의 바위섬들을 말한다.
썰물에는 5섬 밀물에는 6섬으로 보여 오륙도.
1937년 11월, 오륙도 밭섬에 등대가 개설.
1876년 부산항 개항 후, 부산의 관문 오륙도.
오륙도 등대는 당초 6.2m 높이로 건립되었다.
1998년 12월에 등탑 높이 27.5m로 새롭게 건설.
부산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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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대는 오륙도와 더불어
부산을 대표하는 쌍벽 명소.
태종대 앞바다에 있는 주전자섬.
소용돌이 조류가 급한 바다물 위에 떠서
'살아 움직이는 섬,' 같다 하여.,생도(生島).
놋쇠 주전자처럼 생겼다 하여.,유분도((鍮盆島).
이 섬에서 가까운.,동삼동 옛 어부들에게는
'바다어장의 쉼터이자, 풍랑 피신처' 성역(聖域).
인근어장 어부들이 신성시 여겨 깨끗하게 관리한 섬.
주전자섬은 태종대와 신선바위
사이에 동떨어져 있는 외톨이 섬.
이 섬까지가.,부산항 경계선점장소.
세가지 금기사항이 전하는.,주전자섬.
영도에 사는 어부가 고기를 잡던 도중에
이섬에 들러 용변 본 후에 고기 한마리 못잡고
어구까지 잃고 홧병으로 숨졌다는., 전설의 고향.
또 다른 전설은 고기잡던 어부가 추위를 피해
이 섬에 들러 불을 피웠는데 그뒤로 주전자섬이
불덩이로 바뀌는 꿈을 꾸고나서 숨졌다고 전한다.
그후, 어부들은 이 섬에 들러
절대로 용변을 보지 않지 않았고
추워도 불을 피우지 않았다고 한다.
옛부터 이러한 전설이 있어
깨끗하게 유지되고 있는.,섬.
.....주전자섬........
칼새 집단 서식지로
독도 등 도서지역의
'생태계보전 특별법'
특정도서 지정.,등대섬.
면적 : 8,088㎡
태종대 앞바다에는 크고 작은 돌섬들이 있는데,
섬 하나가 주전자처럼 생겼다고 하여.,유분도(鍮盆島).
이 섬에 3가지 금기 중 하나.,"섬 안에서 통정하지 말라."
..........................................................................
배를 타고, 주전자섬 안으로 들어가 보면
육지에서 바라보기보다.,크고 넓은.,무인도.
바다낚시 애호가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진 섬.
모기가 워낙 많은 섬이라서
모기장 없이 밤을 지새우기 힘든 곳.
남자 늑대보다 모기가 무섭다는.,무인도.
'대변', '불을 피우기' 및
'남녀 간 육체적인 관계'를
3 금기(三禁忌)로 여기는.,섬.
'아침 바다를 만나다.'소설 배경무대.,영도~태종대.
삶에 갑갑함을 느껴 무작정 부산행 기차를 탄 여자가
기차에서 부산해양대학교 학생을 만나 사랑을 나눈 줄거리.
태종대에서 - 김석규 詩.
'오륙도 쪽에서 이슬비가 날아오고 있었다.
등대를 지나 말없이 따라 걸으며 부끄럼을
그렇게도 타던 소녀라 할까 여인이라 부를까
맛도 없이 삼켜버린 스물 하고도 몇 살, 아직 바다는
푸르고 발밑에 파도는 부서지는데 몰래 숨어서 마셔버린
젊은 날 사랑/ 그것을 사랑이라 이름 지어 부를 수 있을까/
홀로 불혹에 서서 탄식한다./
갈매기 몇 마리 바다 위에 날고 있고.'
태종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주전자섬 & 오륙도.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태종무열왕이
전국 순회 중 휴식을 취한 곳.,태종대.
조선 태종도 유람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조선시대 한발이 있을 때마다
동래부사가 기우제를 지낸 곳.
태종대 망부석에는
옛날에 왜인에게 끌려간
남편을 기다리던 이곳의 여인이
기다림에 지쳐 돌이 되었다는.,전설.
태종대
영도등대에서
바라본.,오륙도.
영도등대 & 해안 암초군.
부산광역시 해안가 남구, 사하구, 서구,
강서구, 수영구, 영도구 등지에 무인군도.
영도구 동삼동에는 뭍에서 1.4㎞.,생도.
남구에는 육지에서 2㎞.,오륙도와 나암.
사하구 다대동에는 뭍에서 1㎞ 안쪽으로
솔섬·팔봉섬·경도·동섬·백합등·도요등이 있고,
좀더 먼.,자섬·금문섬·오리섬·서도·동호섬·목도 등.
뭍에서 11.1㎞., 북형제도, 뭍에서 17㎞ 남형제도 등.
장림동에서는 0.12㎞.,' 모래섬' 맹금머리.
서구 암남동에는 거북섬·동섬·두도가 있고,
수영구 광안동에는 0.01km 안개돌섬(노을섬)
낙동강 삼각주와 남해안을 끼고 있는 강서구에는
대마등도·장자도·신자도·진우도·견마도·죽도·토도·
호남도·입도·범여섬·대죽도·중죽도·미박도·모서도·말무섬·
유주암 등 부산광역시 내 무인도는 대부분 해양수산부 소유.
사하구 북형제도 남형제도,
강서구 장자도, 서구 동섬,
강서구 모서도와 말무섬 등
무인도 대부분 재무부 소유.
사유지로는 한진중공업 소유 사하구 솔섬,
개인소유는 서도, 농심 소유의 강서구 진우도.
김길녀 詩 - 태종대, 등대
잠시, 흔들린 슬픔의 상처 부여잡지 못해
마지막 생을 놓아버린 자살바위 아래
모자반 숲에서 출렁이는 통곡소리
감싸안는 따뜻한 불빛.
그곳에서
반짝이고
있습니다.
자살 바위로 표현된
삶의 힘겨움과 그 힘겨움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위로하는
등대의 불빛이 인상적인.,시(詩).
'영도 등대' 아래에
노상 횟집들이 있다.
노상 횟집에서
아래로 더 내려오면
태종대 자살바위 해안가.
태종대 자살바위 아래
해안가로 이어지는.,길.
태종대.,해벽 암장 루트.
자살바위~신선바위 ~ 등대~
유람선선착장 ~ 등대자갈마당.
태종대 자살바위.
태종대 자살바위 아래
뭍에서 50m 남짓 떨어진
암초군에.,갯바위낚시 명소.
부산항 시간낚시배가
부산앞바다 갯바위마다
낚시 애호가들을 내려놓은 후
밀물 전, 오후에 다시 되돌아온다.
태종대 자살바위 해안이 바로 눈앞이라
거리 상으로 가깝지만, 파도가 거센.,암초.
갯바위낚시 후, 물때를 놓치면 고립되기 십상.
오전에 물이 썰 때 들어가면, 상당히 넓은듯 하지만
오후에 물이 밀때 즈음이면, 시시각각 좁아지는.,암초.
갑자기 일기가 나빠지면, 거친 파도 속에 고립되기 쉽다.
만조 때에는
몇 사람이 겨우
앉을 곳을 제외하면
파도가 온 몸을 적신다.
불과 50m 앞에 해안가는
태종대 자살바위 밑 암초군.
성난 파도에 온몸이 찢길듯한
두려움 엄습하는.,갯바위 낚시터.
감히, 헤엄쳐 나올 엄두가 나지 않아
시간낚시배 올 시간 만 기다려야 한다.
갯바위 낚시 명소지만, 파도가 무서운 곳.
태종대가 위치해 있는 부산 영도(影島)는
본래, ‘목장이 있는 섬’이라 하여., 목도(牧島).
당시 이곳에서 기르던 말이 비호와도 같이 빨라
그 그림자가 끊어질 정도라 하여.,절영도(絶影島).
1951년 영도출장소(影島出張所) 설치.
현재 지명 영도(影島)로 불리게 되었다.
1934년 일제때 개통된.,'영도다리'가 유명.
가덕도 등대(加德島 燈臺)
...........................가덕도 등대.............................
대한해협 쪽으로 돌출한 절벽 끝에 위치한.,가덕도 등대.
'정방형 적벽돌 부속사와 중앙부 8각형 등탑'.,단일 건물.
등탑 높이(해발72.1m)는 건물의 기초로부터는 9.1m 높이.
부속사는 건축면적이 105.6㎡,
현관 우측은 사무실, 좌측은 침실,
뒤쪽으로는 부엌과 욕실, 다용도실 등.
등대 건물의 상부는 고딕건축의 첨탑과 흡사하고,
옥상 난간과 외벽 창호의 상·하인방은 르네상스풍.
100년 전 등대로서 2002년 새 등대가 들어설 때까지
사용되었을 만큼 원형이 잘 보존된 일제강점기 건물.
'1902년~1910'년 사이 건설된 41개 유인등대 중 하나.
공사는 등대건설 소관부서 탁지부 등대국에서 맡았지만,
직원, 기술자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가덕도 등대.
1909년 12월 점등을 시작
2003년 9월 16일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0호로 지정되었다.
..............................................
가덕도 등대는 진해만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군사요충지.
남해안 최남단에서 '부산 &진해' 국제항로를 지키는 위치.
현존하는 대한제국시대 등대 중 유일하게 불을 비추는 등탑.
사무실, 주거공간이 단일건물에 위치한 복합형 등대로서
원형을 그대로 유지해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붉은 벽돌과 미송 사용
등대 출입구 윗부분에는
조선 황실 상징.,오얏꽃 문양.
조선의 자주권 확보를 바라는 열망이 담겨져 있고
근대 서구건축재료, 장식 등이 최초로 사용된 건물.
가덕도는 부산 지하철 1호선 하단역에서
시내버스로 가덕도 선창마을에 닿을 수 있고,
진해 산업도로에서는 버스로 용원에서 하차 후.
마을버스로 가덕도 천성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가덕도~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
'부산~거제' 간 광역도로망이 구축되어,
동남광역권 산업, 항만, 물류를 담당할 전망.
현재, 가덕도에 부산 신항만 & 신공항 건설 중.
부산광역시 '낙동강 하구' 사하구에 속한
몇몇 섬들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전망이다.
면적 20.78㎢, 둘레 약 36㎞.
부산에서 가장 큰섬.,가덕도.
부산항은 전국 컨테이너 물동량의 75%를 처리한다.
부산지역 항만 물류산업 종사자는 전체의 10%를 차지.
항만 물류산업의 부가 가치액도 부산 전체의 20%를 차지.
우리나라는 '연간 무역액 1조 달러' 세계 9위 무역국.
부산항 공헌도가 컸으며 항만은 지역경제에도 큰 도움.
지구촌 80%가 항로로 이어지고, 무역의 70%가 바다 무역.
국내 수출입 물류 99%가 바다를 통하고 있다.
그래서, 해양정책 및 항만 산업의 중요성은 크다.
부산항은 국내 해양정책을 사실 상, 선도하고 있다.
........................
........................
전라북도 군산시., 선유도 등대.
'선녀가 누워 있는 자태'라.,선유도.
인어(人魚)를 형상화 한.,선유도 등대.
선유도 (인어)등대
선유도 등대
선유도 등대
선유도.,암초 등대 들.
.............선유도.,암초등대......................
2015년 9월 7일 선유도해수욕장 앞 암초 등대.
군산지방해양수산청은 7일 높이 15m 등대를 설치.
등대 녹색 불빛은 밤에 14㎞ 밖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목포.,비금도 등대.
섬이 큰 새가 날아가는 것처럼
생겼다고 하여.,비금도(飛禽島).
기장.,대변(로봇 태권V) 등대 & 대변항 등대.
호미곶 등대박물관
1982년 장기곶등대(호미곶등대)가
경북 기념물 제39호로 지정되었으며,
1986년 전문박물관 제13호로 지정되었다.
1995년 포항시에서 장기곶등대박물관으로 이관 확정.
이후 부족한 전시면적 확장을 위한.,제2전시관이 건립.
2002년 장기곶등대박물관이 해양수산부 산하.
2002년 국립등대박물관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등대................
등대(燈臺)는 해상교통의 안전과
선박 운항의 능률 증진을 위하여
해안이나 섬에 설치된 구조물이다.
즉, 등광(燈光)이나 형상·음향·전파 등의 수단에 의하여
항만, 해협, 연안수역 항로에서 선박의 지표로 하기 위한
각종 항로표지 중 광파표지(光波標識)로 분류되는 구조물.
굴뚝 모양 구조물에 등롱(燈籠)을 얹고
등대 내부에는 등명기(燈明器)를 설치하여
등광을 발함으로써 항행선박의 위치 결정이나
선위측정(船位測定)에 이용되는.,'유인&무인'등대.
유인등대는 등대원이 등대에 상주하면서
각종 항로표지(안개신호소, 선표지소 병설)
및 기기의 관리와 운영을 도맡아 하는 곳이며,
무인등대는 자동설비로 관리인 없이 운영되는 곳.
................................................................
우리나라에 등대가 등장하기 이전에는
해안가 산이나 섬에 봉수대가 등대 역활.
1902년 일제강점기 해안등대국이 설치되었고,
소월미도·팔미도·백암·북장자서 등에 등대건설.
해방 직전, 등대 32기, 등표 110기, 등부표 22기,
안개신호 18기, 무선전신 9기, 기상관측 23기였다.
태평양전쟁과 6·25전쟁 등으로 거의 파괴.
1960년대초까지 그 복구사업에 진력하였다.
.
'1894∼1895' 청일전쟁에 즈음하여 일본의 참모총장은
1895년 6~9월 우리나라 전 연안의 등대건설 위치를 조사.
1901년 등대건설을 해야한다고 대한제국 조정을 압박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계획의 일환으로서
우리나라 연안의 등대건설을 서두르게 된 것.
1901년(고종 38) 항로 표지의 위치를 확정
인천 항로에 5기, 서해안과 남해안 항로에 9기,
부산항 3기, 목포항 1기, 마산항 3기, 동해안 항로 2기,
성진 항로 1기, 대동강 항로에 4기 등 30여 기.,등대를 건립.
이는 일본의 불빛이 한국으로 뻗어 가고 있음을 의미.
이어 1902년(고종 39) 인천에 해관 등대국이 설치되었고,
세관공사 등대국-등대국-항로 표지관리소로 이어진.,등대업무.
1902년 해관등대국(海關燈臺局)을 설치하여
탁지부(度支部) 관리하에 같은 해 5월 소월미도,
팔미도, 북장자서 및 백암에 등대건설을 착수했다.
1903년 4월 부도등대 건설도 착수했는데,
그 중 팔미도 외 3개 등대는 1903년 6월에
점등을 개시하고 부도는 1904년 4월에 완성.
이것이 우리나라 등대건설의 효시이기는 하나
대한제국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 이용하기 위한 것.
1904년 개전 직후인 4월부터
압록강에 다수의 부표(浮標)와
대화도등대, 서해안 등대 등 건설.
일본해군은 남해안 및 동해안에
등간(燈竿) 4개 소를 설치하였다.
1905년 말, 우리나라 등대는 일본해군이 설치한 것들과
야표(夜標: 주로 밤에 만 이용되는 등광이 있는 등대) 15기,
주표(晝標: 낮에만 이용되며, 형상·채색에 의해 지표가 됨) 37기.
당시 항로표지의 소관은 등대국(燈臺局)에 속하는 것,
해관(海關)에 속하는 것, 일본해군에 속하는 것 등.,복잡.
1905년 10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나라의 관세권을 장악하게 됨에 따라
일본인 총세무사 취임을 계기로 1906년 4월
모든 등대시설은 구한 말에 총세무사가 인수,
'세관· 공사부· 등대국' 소관으로 통합 운영된다.
구한 말 정부는 1906년 이후 5년간 계속 공사하여
우리나라 전 연안에 등대를 증설하는 데 착수하였고,
1907년 6월 기선 녹천환(31t) 및 기선 압천환(32t)을 건조.
압록강 동·서 수로 부표정리 및 대화도등대 운영업무를 수행.
경술국치 후
1912년까지 등대 37기,
기타표지 133기를 증설하였고,
8기를 개축하여 총 207기가 되었다.
태평양전쟁 중 일본은 등대를 군사시설로 이용.
국제적 공기(公器)였음에도 폭파를 면치 못했다.
8.15 광복 후, 기존시설 80%가 파손상태로 있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측에서 일본정부에 대하여
우리나라 등대를 광복 이전 상태로 복구하라 전령.
일본정부는 당황하여 조선총독부 교통국장에게 급명.
예비자재 결핍으로 인천항 근해에
겨우 미국 함정이 출입할 정도 가등(假燈)
(등대 개축 또는 소등 때 긴급 가설등대)을 설치.
일본인 간수를 재배치하였고,
1945년 12월 26일에는 등대업무가
전반적으로 한국직원에게 인계되었다.
한편, 이를 계승한 한국직원의 등대업무는
광복 직후 혼란으로 등대를 돌볼 여유가 없었고,
미군정청으로부터 체계 있는 세출영달을 받기에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된 관계로 많은 용품이 도난당하여
등대시설이 재기불능 실정이었으므로, 할 수 없이 일부는
항 단위로 미군측의 해무관에 의하여 직접 관리한 바도 있다.
1950년 6·25전쟁 때 시설 45% 이상이 상실.
그동안의 복구와 재건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
기존시설의 50%를 가지고 다시 새출발해야 했다.
등대시설의 광원장치 등 특수기재의 입수가 곤란,
기술자의 부족 및 종업원의 기술미숙 등으로 오히려
광복 이전보다 광달거리(光達距離)의 약화를 초래했다.
'1950~1953'년 매년 평균 15% 복구공사를 진행.
요원양성, 등대원 가족후생, 등대운영 대책에 주력.
1954년 및 1955년 등대영조물 2,035㎡와 등대지기 18기
등대선 5척 복구 및 1960년 등대 254기(38.5해리 당 1기).
1962년 9월 국제등대협회(IALA)에 가입하였고,
국제 해상교통 체계에 의해 등대건설을 시작하여,
1962년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힘입어 등대건설 박차.
.
1998년 9월, 양질의 등대시설을 확보하였고.
자라나는 세대에게 개척정신을 함양할 목적으로
포항항 입구 호미곶에 '등대박물관'을 건립하였다.
2016년 현재,
양적으로 질적으로
국제 수준 등대를 확보.
'소청도, 팔미도.옹도, 어청도, 홍도, 마라도. 우도.
오동도, 소매물도, 영도, 오륙도, 간절곶, 울기,
호미곶, 독도, 속초'.,16선 아름다운 등대.
......................마라도등대.......................
부산.,오륙도 등대.
...............오륙도등대..................
부산 태종대.,영도 등대.
..................영도 등대.......................
처음에는 목장 뜻말 목도 등대로 불렸으나
당시 이곳에서 기르던 말이 비호와 같이 빨라
그 그림자가 끊어질 정도라 하여., '절영도 등대.'
그후, 1974년 행정 편의상 '절'자를 빼고
영도등대로 개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산시 영도구 태종대에 위치한.,영도 등대.
1906년 12월 설치된 후, 부산항 길목의 불빛.
2004년 새 등대시설물 교체 후.,해양관광 명소.
..............................................................
먼 옛날, 물 부족으로 고민하던.,우도 주민들은
섬 남서쪽의 동천진동에 우물을 열심히 팠단다.
그러나, 기대하던 물은 나오지 않았기에
지관(地官)을 불러, 그 연유를 물었단다.
“여자 없이 어떻게 자식(물)을 낳는가.
각시를 데려와라. 그것도 서쪽
어두운 곳의 색시여야 해.”
주민들은 수소문끝에 바다 건너 구좌읍 종달 리
‘서느렝이굴’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발견했단다.
제를 지내고 물을 항아리에 담고 새색시를 모셔오듯.
가마에 실어 섬으로 갖고온 물을 우물에 쏟아부었단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우물이 솟구쳐 올라왔단다.
더 놀라운 것은 깨끗하고 벌레가 생기지 않은 것.
제주 성산포항 북동쪽으로 3.8km지점에 위치한 우도.
제주도 연안 부속도서 중 가장 큰섬.
섬의 형태가 소가 드러누워 머리를 내민
모습과 비슷하다고 하여 우도(牛島)라 한다.
우도는 산호가 부서져 형성된 산호해수욕장.
‘우도8경’ 청정해역으로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시월애’ ‘인어공주’ ‘연리지’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일본인 관광객 등 세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전북 군산.,어청도 등대...................
'어(於)' 감탄사로 시작되는 푸른 섬.,어청도(於靑道).
군산항 북서쪽 72km 외딴 섬으로 중국과 최단거리에 위치.
‘칭다오 닭울음이 들리는 섬’으로 불릴 정도로 중국과 가깝다.
현재, 전북 군산시 옥도면 소속.
구한 말에, 인천부(仁川府) 소속.
어청도에는 치동묘(淄東廟)가 있다.
BC 202년 한고조가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통일하자
항우는 자살하고, 재상이던 전횡은 군사 5백과 더불어.
망명길 3개월 만에 해무 속 푸른 섬이 나타나 배를 멈추고
이곳에 정착하면서 어청도라 명명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1912년 러일전쟁 후 등대가 들어선 이유는
러시아 조차지였던 중국 다렌항을 접수하면서
개설한 '오사카~ 다렌' 정기항로 중간 기착지가 필요,
이런 연유로 서해안에서 제일 먼저
일본인들이 어청도로 이주한.,연유.
한일병합 직후 어청도에 등대를 건설.
즉, 어청도 등대는 일본의 대륙진출 야망.
일본의 정략적인 목적에 의해 건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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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기등대는 동해안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등대.
'1906년 3월~1987년 12월'까지 80년간 사용했고,
2004년 울기등대 구 등탑(등록문화재 제 106호 지정)
울기등대는 대왕암공원에 있다.
신라 문무왕이 사후 용이 되었다는.,'수중왕릉'대왕암.
울산12경의 하나 대왕암 송림은 해금강에 버금가는 절경.
수령 100년이 넘는 해송 1만 5000여 그루가 울창한 송림 숲.
기암괴석과 바다가 어우러져 한폭의 동양화를 연출.
등대는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산책로 끝에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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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등대......................
1905년에 독도에 등대를 겸한 망루가 설치되었다.
1954년 8월 10일 무인등대로 독도등대가 설치되었다.
1967년 7월 8일 등탑을 철근콘크리트조로 개량하였다.
1997년 12월 30일 유인등대 공사 착공.
1998년 12월 10일 유인등대로 승격시켜
포항지방해양수산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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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도'의 신비>라는.,전설의 고향인.,독도.
울릉도 지역에서 독도와 관련하여 전해져온다.
풍랑을 만나 가산도 섬으로 흘러들어간 세 어부.
그곳에 살고 있던.,노인의 도움으로
다시 울릉도로 돌아온다는 줄거리이다.
살아서 돌아온 세 어부들의 말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큰 배에 식량과 물을 싣고
신선이 살고 있다는 신비의 섬을 찾아나선다.
그러나, 철아닌 복숭아꽃이
떠내려오는 것만을 보았을 뿐
풍랑이 심해 끝내 찾지 못한 섬.
옛 울릉도 주민들에게 가산도(독도)는
인간이 사는 섬이 아닌, 신선이 사는 섬.
'보천교' 신도들에게.,가산도(독도)는 성역.
1911년 증산교 계열인.,보천교(교주 차경석).
증산교 교주 강일순(姜一淳) 사망후.,신흥 종교.
교세 중심지는 동학농민운동 본거지 전라도 일대.
보천교는 울릉도 개척령 당시 불교와 천주교,
개신교와 함께 울릉도에 입도한 종교 중 하나.
현재, 활동이 중단되어 그들을 찾아볼 수 없다.
"이땅이 뉘 땅인데."에 따르면,
보천교인들은 간산도를 찾아서
울릉도로 들어왔으며 그들이 찾는
간산도가 독도 임을 알고 무리하게
독도로 가다 조난을 당했다고 전한다.
포항.,호미곶등대.
...........................포항 호미곶등대........................
1896년 청일전쟁 승전국 일본이 대륙진출 기반을 다질 때
1907년 9월 9일 일본수산실업전문대학 실습선 쾌응환(快應丸)이
대보 앞바다 항해하다가 암초에 좌초되어 승선자 4명이 사망한 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등대시설 공사를 하게 되었으며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았다.
1908년 4월 11일에 착공하여 11월 19일에 준공하였으며
12월 20일 점등한 등대명칭은 동외곶등대(冬外串燈臺)였다.
1934년 장기갑등대(長鬐甲燈臺).
1995년 장기곶등대(長鬐串燈臺).
2002년 2월 호미곶등대(虎尾串燈臺).
8각형 연와조 철근 없이 벽돌로만 건축.
내부는 6층이고 등탑 높이는 26.4m이다.
등탑 내 각 천정에는 대한제국 황실문양.,오얏꽃(李花文).
출입문, 창문은 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의 박공양식으로 장식.
상부는 돔형지붕에 8각형 평면이고, 하부로 갈수록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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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지도 형상'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는
영일만 입구에 붉은 벽돌로 건축된.,호미곶등대.
1908년 12월 20일 최초 점등,인근에.,등대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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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볼만한.,등대 &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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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산지항.,산지 등대.........
제주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산지항' 하차.
산지공원으로 올라가면, 많은 어선의 불빛.
일반인, 등대체험을 위한 등대 숙소를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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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주는
‘등대체험숙소’가 전국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등대체험숙소는 2006년부터 매년 초중고 방학 동안
자녀를 둔 일반인 가족을 대상으로 개방 운영되고있다.
전북 신안군 흑산면.,홍도
일반인 가족.,등대체험 숙소
......거문도.,등대체험 숙소........
거문도 등대휴양소(061-666-0906)
'여수지방해양항만청 홈페이지'., 신청.
1팀 8명까지., 무료로 숙박이 가능하다.
여수연안여객선터미널(061-663-0116)에서
거문도행 여객선(7시40분, 13시40분)., 출발.
약 2시간 소요되며., 편도 요금은 3만6600원.
고흥 녹동항에서 거문도행 여객선을 이용 가능
거문도 등대.
................................거문도 등대............................
전라남도 여수시 삼산면 덕촌리.,거문도 등대.
동양 최대, 국내 최초의 등대(1905년 4월 12일).
1929년 3월 23일 55,000촉광의 불빛,
1934년 4월 6일 등질을 섬백광으로 바꿔
강섬광 91,000촉광, 약섬광 55,000촉광 불빛.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더불어 업무를 중단.
1947년 2월 1일 석유 백열등으로 업무를 시작,
1951년 4월 8일 섬백광을 15초 마다 1섬광씩 발.
2006년 8월 종합정비공사로 시설물을 새롭게 신축.
등대는 높이 33m.,백색 육각형 철근콘크리트 구조물.
거문도와 백도의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설치.
등대 절벽 끝에는 경치를 즐길.,관백정 설치.
관광객들에게 제공되는 원룸 형식의 숙소에는
식기류, 조리 기구, 싱크대, 침구류 등이 잘 구비.
주변 관광지로는 백도, 거문리와 서도를 연결하는 삼호교,
영국군묘지, 신사 터, 거문도뱃노래전수관, 거문진 터, 귤은당 등.
거문도 등대는 소장 1명, 직원 2명 등 총 3명이 시설을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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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패밀리횟집(061-666-2334) 자연산(고등어회, 갈치회),
삼도식당(061-665-5946) 자연산 생선회와 소라, 해삼, 갈치조림.
강동횟집식당(061-666-0034)은 자연산 생선회, 물회, 매운탕 요리.
................한려수도...................
비경지 한려수도는 남해 물길 50해리.
전남 여수시 오동도 ~경남 통영 한산도.
호수처럼 잔잔한 푸른 물빛 위에
5백여개 크고 작은 섬들이 동화처럼
떠 있는 물길 3백리 절경지대.,한려수도.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적지가
곳곳에 있어 역사교육장으로서도 훌륭한 곳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 섬과 섬 사이를 내달리는 쾌속정.
석양에 비친 물길 위에 범선 두어척이
떠가는듯 떠오는듯 무심히 펼쳐있는 정경.
한려수도 아니면 맛볼 수 없는.,낭만의 극치.
한려수도 해역은 수온과 수질이 어족 양식에 최적지.
우리나라의 수출전략 어종이 많이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바다 낚시터로 각광받으며, 많은 해수욕장들이 연안에 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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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려수도" 해상국립공원의 중심이자
'우리나라 갈매기길'의 중심지역.,여수.
남해 일대 갈매기길은 모두 여수로 통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한해협~쓰시마해협'
연결고리 출항지.,여수((麗水)
......................여수...........................
여수는 한반도 남해안의 중앙에 위치한다.
北으로 전라남도 순천시, 광양시와 인접하고,
西로 여자만 건너 고흥, 東으로 바다 건너 경남 남해
여수는 남해안 지역의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선을 보인다.
주변에 돌산도, 경도, 묘도, 화태도, 백야도 등 총 365개 섬들.
연륙도서 4개를 포함하여 유인도는 49개, 무인도는 316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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