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라고 해서 무조건 예뻐야 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공주들만 모여 있는 유리의 성을 들여다보는 만화경이 아니다. 그것은, 저자거리의 지난한 삶을 진솔하게 풀어내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지는 또 하나의 현실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배우에게서 미의 원형질 같은 것을 찾으려고 하는 어떤 무의식적 본능이 있다. 예뻐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얼굴이 예쁘고 몸매가 좋다는 것이 모든 여배우의 필수조건이 될 이유는 없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아직도 왜 사람들이 김태희를 예쁘다고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편이다. 내 눈으로 보자면, 김태희는 매우 평범한 얼굴이다. 사람들이 흔히 지적하는 그녀의 청순미라든가 단아한 모습은, 이미 우리가 수많은 여배우들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었던 낯익은 모습이 아닌가? 김태희는 포스트모던 보이와 걸들이 넘쳐 나는 시대에, 도시 감각의 화려함에서 약간 빗겨나 있다는 것이 행운이었다.
[중천]은 김태희의 첫 스크린 도전작이었지만 흥행에서도 실패했고, 연기력 면에서도 낙제점을 받았다. 눈물의 여왕답게 우는 연기는 많았지만 그 모습은 한결같았다. 그녀의 연기에게 내면적 고뇌를 찾는 일은 너무나 어려운 미션이 되었다. CF나 드라마에서는 통하던 김태희의 연기가 왜 스크린에서는 단점이 부각되었을까? 거대한 화면으로 클로즈업되는 얼굴에서 관객들은 배우들의 솜털과 잔주름까지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것이다. 오직 진정한 연기력만이 관객들과의 경계를 허물고 감동 있는 울림을 만들 수 있다.
[중천] 이후 와신상담, 1년 동안 김태희가 준비한 것은 자신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새로운 김태희였다. 다음 작품에서 그녀가 맡은 캐릭터는 일단 기존의 배역들과 차별화를 가져야 한다. 청순한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 과감하고 도전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으면 더 좋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킨 작품이 [싸움]이다. 한지승 감독은 [남녀 사이에서는 싸움도 사랑의 한 표현이 아닐까]라고 생각하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싸우면서 정든다는 말이 있듯이, 애정이 완전히 없으면 굳이 싸울 일도 없다.
[완성된 영화를 처음 보면서 혼자 얼굴이 빨개졌다. 초반에 찍었던 장면 중에서 나의 부족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싸움]에서 김태희는 상대역인 설경구와 이혼한 부부로 나온다. 싸움 구경 중 첫째는 부부싸움 구경이라고 하지만, [싸움]에서는 이혼한 뒤에도 신나게 싸우는 부부들이 등장한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그들은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이혼한다. 대학 강단에 서는 곤충학 강사 상민(설경구 분)와 유리공예가 진아(김태희 분)는 이혼 후에도 이런 저런 핑계로 서로에게 연락을 한다. 그것은 증오의 연장선상인 것 같지만, 증오 역시 사랑의 한 표현이다.
여자는 남자에게,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을 하라고 다그친다. 남자는 마음속으로는 수없이 미안하다고 말하고 화해하고 싶지만 여자의 화난 얼굴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친다.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된 부부싸움은 쇠파이프로 내려치고, 자동차로 상대의 차를 들이받으며 질주하는, 서로를 살해할 정도의 위협적 상황으로 치닫는다.
[관객들이 [싸움]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나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촬영하면서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어서 너무 편했다. 다른 드라마 같은 데서 내가 맡았던 비현실적 상황이나 캐릭터에 비해, [싸움]은 내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익숙한 상황일 수도 있기 때문에 훨씬 감정 표현이 자연스럽게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확실히, 김태희는 변했다. [싸움]에서 그녀는 멍든 얼굴로 울부짖으며 소리 치고, 쇠파이프를 들고 몸을 날려 상대를 가격하는 과격한 액션씬까지 보여 준다. 마치 옛날의 김태희는 잊어라, 이제 난 더 이상 인형공주가 아니다, 이렇게 소리치는 것 같다.
[싸움]에서 설경구 김태희가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조금 의아한 반응을 보인 것은, 과연 설경구 김태희 조합이 어울리는가 하는 의문점이 들었기 때문이다. 1980년생인 김태희와 1968년생인 설경구의 물리적 나이 차이가 10년 이상이 나는 데 부부로 등장하는 것도 그렇지만, 두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이미지는 그만큼 거리가 있었다.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오아시스]나 [열혈남아] 같은 작가주의 계열의 작품에서 걸출한 연기를 보여준 설경구와, CF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 대중들에게 친숙한 이미지로 많은 상업 작품에 출연해 온 김태희가 같은 스크린에서 만난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싸움]이 시작된 지 채 10분이 지나지 않아서 그런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김태희는 지금까지 그녀가 맡은 어떤 배역보다도 현실감 있는 연기로 관객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하지만 [중천]에서의 천편일률적인 표정 연기는 많이 극복되었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진정한 연기자라고 하기에는 내면 연기의 드러냄이 아직도 미흡하다.
한지승 감독은 [김태희는 생각보다 표현력이 풍부하다. 과격한 면도 있다. 촬영하면서 김태희를 캐스팅 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김태희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장점이 과연 표현되었을까 의문이다. 감독으로서는 행운이라고까지 느꼈던 캐스팅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싸움] 제작팀의 회식 자리에서 설경구가, [[싸움]은 김태희 망가지기 프로젝트다]라고 말한 것처럼, [싸움]에서 그동안 우리가 알던 김태희와는 다른 많은 모습들을 볼 수 있다. 눈물이 두 뺨으로 주룩주룩 흘러서, 아이새도우의 검은 눈물자국이 길게 그어진 모습은 그래도 애교스럽다. 악다구니치듯이 소리 지르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비 내리는 진흙탕 위에서 뒹굴고, 불탄 집에서 검게 그을린 연기로 망연자실하고, 멍든 얼굴로 사생결단하듯이 남자에게 달려드는 김태희의 모습은 지금까지 청순함과 단아함의 대명사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여배우들이 필수적 통과제의처럼 거쳐 가는 망가지는 캐릭터 때문에 김태희가 [싸움]을 선택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다.
[설경구 선배는 [싸움] 촬영하던 첫 번째 회식 때, [싸움은 김태희 망가지기 프로젝트]라고 말했지만, 망가지는 것에 대한 의식은 하지 않았다. 시나리오가 재미있었고, 내가 맡은 배역인 진아에게 몰입해서 촬영을 했다. 완성된 영화를 먼저 본 기술 스텝들이 예쁘지 않게 나오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감독님이 여주인공을 설마 비호감으로 만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걱정하지 않았다.]
한지승 감독의 [싸움]을 마케팅적 측면에서 보면, 한국 영화의 관객이 20대의 젊은 세대들에게서 벗어나고 있다는 한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동안 [베사메무초]처럼 부부간의 갈등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흥행에서 크게 빛을 보지 못했다. 만약 [싸움]이 좋은 반응을 얻는다면, 그것은 한국 영화의 주 수요층이 20대 초중반에서 중후반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30대 계층을 겨냥한 영화들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다.
마이클 더글라스와 캐서린 터너가 부부로 등장해서 서로를 죽이는 엄청난 부부싸움을 다룬 영화 [장미의 전쟁]처럼, [싸움]도 부부싸움 구경이라는 관음증적 욕망을 스크린으로 확대 공개한 작품이지만, 결말은 할리우드와 사뭇 다르다. 서로를 죽일 듯이 극한으로 치닫다가 감성적 부분으로 귀환하는 한국적 정서를 감독은 선택했다. 물론 의외의 반전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