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본 메세지] ---------------------
내가 또다시 그들과 함께 전투에 나선 것은,
모두에 대한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도겠지만,
아련듯 피어오르는 평상의 피곤함,
목숨을 걸지 못하는 지루한 일상에 대한,
투사(鬪士)로써의 정당한 저항때문이었으리라.
쏴아아아아.
물보라를 일으키며 유유히 흐르는 명동의 푸른 물은, 언제나 나의 육신과 정신적 찌꺼기를 깨끗히도 씻어내는구나.
먼 곳, 낮으막한 언덕에는 고풍스런 성당이 시민들을 아우르고, 그 앞에 펼쳐진 푸른 나무숲은 새들과 짐승과 작은 곤충들을 살포시 감싸고 있다.
저들은 대자연의 풍요가 그저 당연하다고 느끼겠지만,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영원한 진리 앞에, 우리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풍덩!
'오늘이 그날인가?'
명동의 맑은 물살을 헤치면서도 내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바가 있었다.
전쟁. 피와 살이 튀고, 인간과 귀신이 함께 지르는 비명. 악귀의 추악한 손이 전쟁 속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것도 머나먼, 그곳에 사람이 산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는 고향땅 먼 곳에서, 전쟁의 망령이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제길!!'
그것은 꼭 원시리우스의 잘못만은 아니다. 그에게 느끼는 나의 나쁜 감정은, 그저 그가 포고문을 들고왔다는 것뿐 아무 것도 아니었다. 허나 나 또한 사람이기에 그의 포고문이, 그리고 그것을 전하는 원시리우스 자신이 왠지 부담스러워서이다.
'그래....원시리우스도 이번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다.'
헤엄을 마치고 강가를 나서며 든 생각이다.
난세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누가 더 옳고 누가 더 그르겠는가?
"아, 정말 하늘도 변덕스럽네 그려. 허허."
한바탕 가벼운 원망으로 무거움을 떨친 나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무구(武具)를 손질했다.
"어디 가는겨?"
"예, 신천이란 곳에서 전쟁이 났나 봐요."
"그래? 휴우...참 어지러운 세상이야. 언제쯤이나 평화가 올지..."
"언젠가는 오겠죠."
늙은 삼촌은 천천히 나를 거들며 푸념이다.
"음...이놈도 참 고생이여, 허허허"
10년전 용사의 땅에서 받은 둥근 강철 방패. 이제는 아무리 깨끗히 손질해도 오래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철모르는 조카 녀석은 자신이 어른이 되면 꼭 줘야 한다고 응얼거리지만, 이런 흉칙한 도구를 어찌 아이들 세대에까지 물려줄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전란의 근원을 뽑아야 할텐데...
"자, 다 됐다."
그 또한 용맹한 전사였던 삼촌은, 나의 무장을 다 돕고 즐거운듯 콧노래를 불렀다.
"또 그 노래하세요?"
"후후후. 왠지 모르지만 멈출 수가 없는 걸...하하"
'저기 지나가는 객들아, 고향가면 전해달라. 나, 여기, 페르모필메의 언덕에, 가져온 묘비 베고 누워 남겨진 님 그린다고...'
검은 무덤의 노래. 원래는 고대 영웅들의 이야기를 찬양한 노래인데, 늙은 삼촌은 출전때마다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쯤되면 전쟁이 어떻고, 평화가 어떻고를 떠나 한 명의 혈기왕성한 투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겉으로는 이 참혹한 전쟁을 욕하면서도, 정작 갑옷을 입고 적을 무찌르러 갈 때에는, 왜 저다지도 기쁨에 겨워하는 걸까? 번번히 물으려다 그만두곤 하는데...아마 나도 그 무엇을 느끼기 때문이리라.
왠지 모를 즐거움을.
"그럼 이만."
"부디..."
마지막까지 슬픈 눈빛을 참는 삼촌을 뒤로하고 나는 소집 지역으로 향했다.
'저기 지나가는 객들아, 고향가면 전해달라. 나, 여기, 페르모필메의 언덕에, 가져온 묘비 베고누워 남겨진 님 그린다고...'
나는 원시리우스와 함께 배치되었다. 이번 사안이 얼마나 심각한지, 전투력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었다. 그냥 지역별로, 인원별로 대오를 짰다. 너무도 엉성한 처사였다.
"이건 좀 아닌데..."
"빼그, 너무 심란해 하지 말게."
"아냐 원시리우스. 도대체 급해 하는 이유가 뭔지..."
이 시대의 전쟁에서 한 대오의 구성은 매우 중요했다. 각 대오의 열이 서로의 방패를 겹쳐 나서지 않는다면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가장 강한 대오부터 가장 약한 대오까지 조밀하게 편성하고, 실제 전장에서 어떻게 배치하는가는, 전쟁의 승패뿐만아니라 개인의 목숨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저기 보게, 역전의 전사들도 우리와 같이 하지 않는가?"
원시리우스가 가리킨 곳에는 옛 동료들이 있었다.
"오오! 저들은!"
역전의 용사들. 원시리우스의 가까운 친구서부터, 저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여럿이 우리와 함께 했다. 음...하지만 과연 개개인의 강력이 통하는 전쟁일까? 그것은 좀 의문이었다.
"자, 걱정말라구! 이번에야말로 적들을 없애버리자구!"
후후후. 역시 원시리우스다. 저 알 수 없는 즐거움은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마 원시리우스의 몸 속에는 환희의 샘물이 있나 보다. 아무리 힘겹고 어려워도 그속에서 끊임없이 피어나는 즐거움이, 동료와 자신을 용맹하게 하지 않는가?
"출발!"
행군이 시작됐다. 여기서 목적지 신천까지는 60파르트 - 달이 두번 차고 져야 도착하는 곳이다.
우리 군단은 별다른 탈 없이 신천 동부의 작은 마을 잠실까지 도착했다. 중간중간 깊은 산속을 지나갈때 신참들의 소동이 있었지만 대부분 토끼나 노루의 모습을 착각한 것이었다. 신참들의 긴장이 우습기도 하지만, 원래 그렇지 않은가? 처음이란 저런 것이라고.
"지금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거야."
"그렇고 말고, 적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다던데..."
"아, 자네 이곳은 처음이던가?"
"음 처음일세. 아니? 원시리우스 자네는 이전에 왔었던가?"
"몇번, 몇번...일이 있었지...하하."
원시리우스는 애써 과거 이야기를 피했다. 무엇일까? 하긴, 원래 원시리우스와 나는 다른 소속이다. 내가 주로 활동한 곳은 군단의 서북부 관구라면 그는 남부 관구 소속이다.
"혹시 그 상처가?"
"......"
원시리우스는 더 이상 답하지 않고 다른 화제를 꺼냈다. 역시...원시리우스 왼쪽 머리 상처는 이곳 전투에서 생긴 것이구나. 다른 이들은 영광의 상처라 쉽게 말하지만, 그 자신은 그렇게 쉽게 받아 들일 수 없겠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쉽게 말한다는 것. 사실 그 자체가 지독히 무례한 것이다. 나 역시 더 이상 묻지 않고 보급받은 딱딱한 빵을 씹었다.
"전군! 전투 준비!"
준비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예정된 대오를 굳게 짜고 신천의 넓은 평원으로 발을 맞췄다. 우리는 군단의 우측에서 다섯번째에 배치되었다.
평원에 길게 대치하고 있기를 잠시. 양측의 대장은 각각의 군단의 앞에 서서 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때로는 적에대한 저주를, 때로는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대장들은 창검을 휘휘 돌리며 뜨거움을 전도하고 있었다.
"전군! 돌격 앞으로!"
"전군! 돌격 앞으로!"
처음에는 천천히, 적과의 거리 100보에선 반 뛰는 걸음으로, 적과 거리 50보에선 대오의 빠른 달리기로. 우리는 그동안의 훈련을 바탕으로 적과의 거리를 좁혀갔다. 북 소리가 둥둥둥, 고둥 소리가 웅장하게 펼쳐지며, 우리의 방패는 적을 깔아뭉갤 듯 육박했다.
와아아!
드디어 피로 피를 씻는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적과 아군을 나누는 것은 그져 갑옷과 오른팔의 두꺼운 인식띠뿐. 찌르고 자르고 부딪치고 넘어지고, 어제까지 함께 농담을 부리던 동료의 시체를 밟고 넘으며 살기위한 투쟁이 펼쳐졌다.
"더 들이부어!"
참이슬과의 한판 전투. 우리는 이 가증스런 적을 물리치기 위해 여기에 왔다.
적의 목을 얼마나 잘랐고, 적의 피를 얼마나 마셨을까? 적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사라지더니 이내 등을 보이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적을 남기지 마라!"
"와아아!"
이 얼마나 오랫만에 느끼는 승리인가? 수차례의 파상공세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거의 손상을 입지 않았다. 그것뿐인가? 저들이 등을 보이고 달아나는 모습은 근래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이 시대의 전쟁에선 후퇴도 주요 전술중의 하나로, 절대 적에게 겨눈 창을 돌려선 안되는 것이었다. 물러날 때도 항상 적에 대한 분노와 살의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불패의 군단이라 자랑차게 외치던 저들이 이렇게 무너지다니...
"뭐해 빼그, 어서 공을 세워야지!"
원시리우스는 미친 듯이 고함을 쳤다. 우리는 요격에 들어갔다. 이미 등을 보인 오합지졸에겐 육질의 안주세트도 요구치 않았다.
"부어라, 마셔라!"
우리는 교범에 맞춰 착착 적을 섬멸했다. 다행인 것은, 그래도 우리는 신참이 많지 않아서, 적을 죽이는데 거의 흥분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왼쪽의 이십삼번 대오는 벌써 부대장이 제어할 수 없을만큼 살육의 광기에 젖어 있었다.
"자리를 이탈하지마!"
"무리해 적을 쫒지마!"
원시리우스와 나는 연방 대오의 침착을 유도했고 대원들도 잘 따라주었다. 아무리 약한 적이라도 궁지에 몰리면 그 힘을 알 수 없는 법. 일방적인 살육전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피해를 입은 대오도 눈에 띄었다.
"칫, 전장의 법도를 모르는 놈은 차라리 죽는게 나."
원시리우스의 말이다. 물론 맞긴 한데 저들도 고향에는 부모님과 사랑스런 연인이 있을터......하지만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다. 지금은 앞에 달아나고 있는 놈들을 베고 찔려야만 했다.
"원시리우스, 너무 일방적이지 않나? 이건...이건 너무 쉬워."
"빼그, 그런 말 말게. 우리는 이기고 있고, 그것을 즐기면 되는거야!"
승리는, 그것이 너무 일방적일 때, 인간에게 오만이란 화살을 쏘는 법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복귀 나팔이 전장을 메우고, 우리는 다시금 원래의 위치로 복귀했다. 우리는 능숙하게 갑옷과 방패, 투구를 손질했고, 무뎌진 창과 검을 다듬었다. 어떤 놈들은 적의 시체 위에서 호쾌하게 웃고 있고 어떤 놈들은 피에 절은 얼굴로 즐거운 듯 뛰어 다녔다.
군단은 이 평원에서 야영할 것을 결정했고, 내일은 더 깊이 들어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이번 기회에 적의 근거지를 뽑을 모양이다. 이번에야 말로 평화를 이룰 것인가!
아, 그러나...♨
그러나 이런 낙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오만의 신은 우리를 응징할 모양이다. 우리 군단을 둘러싼 신천의 산봉우리에서 작은 연기가 나기 시작했다. 그 연기는 마치 구름과 같이, 마치 안개와 같이 군영에 스며들었다.
"엇? 저것은?"
"적이다! 적의 구원 부대다!"
"뭣이?"
우리를 재빨리 장비를 챙겼다.
"대오를! 대오를 잃지마!"
그러나 순식간에 적의 독구름은 우리를 뒤덮었다.
너무도 급작스런 사태였다.
"침착해! 침착해!"
명령은 전달되지 않았다. 신참이건 용사이건 아까의 승리에서 깨질 못한 모양이다.
미친 듯이 홀로 달려가는 놈이 있는가 하면, 그자리에서 오줌을 질질싸며 두려워 울고 있는 놈도 있었다. 각 급 부대장들이 이리뛰고 저리뛰며 대열을 정비하는데 만만치 않다.
병사들이 어느 정도 전투력을 갖췄을때 이미 시간은 늦고 있었다. 던힐은 무섭게 우리를 짓져왔고 군단은 맥없이 쓰러졌다. 설상가상으로 도망친 줄 알았던 참이슬이 어느새 우리 배후에서 야수의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속았단 말인가!"
병사들의 절규가 북소리보다 높았다.
하나 둘씩 쓰러져 갔다. 민수도 필구도 맥없이 피를 뿌렸다.
"민수야!"
"커억...큭....혀,형..."
"민수야! 정신 차려!"
"흐...형, 난...난 괜찮아."
"안 돼!"
헉헉헉...적들의 폭주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무의식적으로 손을 휘두르고 고함을 치는 수 밖에.
이미 군단의 중앙은 너덜너덜해진지 오래고, 양측 날개는 각개격파로 전멸 위기였다. 애써서 중앙에 모이고 모여 분단을 막는데, 우리의 단순한 패턴은 이미 적들에겐 좋은 먹이감일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우리는 혼신의 힘을 다해 싸웠다. 어떤 희망도 어떤 기대도 없는 것이다. 그냥 우리의 목숨을 노리는 외부에 대한 절망적인 반응이었다. 그저 살아있는 것이니까, 죽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것이다.
퍽퍽!
"이런 씹할!"
묵직한 느낌이 오른팔을 강타했다.
"으어어억!"
뚝!
적의 흰 담뱃대를 뿌러트리자 힘이 쭉 빠졌다.
'여기서 끝나는 것인가?'
담배에 관통 당한 오른팔이 져렸다.
'젠장, 그놈한테 꿔준 돈도 다 못 받았는데...'
허허...인간이란 참 우스운 것이다. 죽음 앞에서도 욕망과 미혹을 떨치지 못하다니. 어짜피 사라질 것에 집착하고, 그 집착에 살아가는게 인간인가?
더 이상 밝은 햇살도 내 눈에 들지 않고, 언제쯤 친구에게 빌려준 돈을 받을지 생각하며 의식을 잃어갔다.
'저기 지나가는 객들아, 고향가면 전해달라. 나, 여기, 페르모필메의 언덕에, 가져온 묘비 베고누워 남겨진 님 그린다고...'
휘....휘리.....릭........
아름다운 평야 신천. 여기도 커다란 성당이 사람들의 마음을 보다듬고, 새 아침 어린 학생들이 하나 둘씩 희망을 걷는구나. 과거의 무시무시했던 전쟁은 어느덧 역사에 묻히고, 인간의 욕망에 얼룩진 술기운만 아련 듯 전사의 이름을 부른다.
오늘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다시 이곳에서 살고, 죽고, 싸우고 하겠지만, 그대, 알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글을 쓴 사람이나 여기까지 글을 읽은 사람이나 얼마나 대단한 문화 생활을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