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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이 열리는 이야기나무] 오이 암꽃 닮은 엄마 |
![]() 글:김바다 “해성아, 엄마 외갓집에 김치 가지러 간다. 피아노 연습하고 학습지도 해 놓아라.”
엄마는 현관을 나서면서 해성이가 할 일들을 거실에 쏟아 놓았다. 엄마가 쏟아 놓은 ‘피아노 연습’과 ‘학습지 해’라는 말들이 공중에서 떠돌다가 하나씩 해성이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둘은 서로 자기를 먼저 해 달라면서 해성이의 뒷머리를 쿡쿡 찔렀다.
해성이는 피아노 앞에 앉아 덮개를 열고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피아노 연습’이라는 엄마 말이 좋아하며 건반 위를 뛰어다녔다. 해성이는 하농 교본을 보면서 손가락 훈련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피아노 연습’이라는 엄마 말을 피아노 건반 위에 내버려 둔 채 뚜껑을 닫았다.
국어 학습지를 하려다 그만두고 과학 학습지를 펼쳤다. 또 수학 학습지까지 펼치고는 연필을 집었다. ‘학습지 해’라는 말은 해성이의 손이 문제 풀어주기만을 기다렸다.
“에이, 하기 싫어.”
해성이는 ‘학습지 해’라는 말을 책상에 내버려 둔 채 거실로 나와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해성인데요, 재윤이 있어요?”
“재윤이 학원 가고 없는데, 왜 그러니?”
“아, 아니에요. 안녕히 계세요.”
해성이는 컴퓨터의 전원 단추를 눌렀다.
“부우우웅!”
컴퓨터 안 부품들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있었다. 해성이는 곧바로 좋아하는 게임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한창 재미있게 게임을 하는데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해성이는 게임을 멈추고 일어설 수가 없어서 그대로 계속하고 있었다. 전화벨도 해성이처럼 끈질긴 데가 있는지 자꾸만 울렸다.
“여보세요?”
“왜 전화 빨리 안 받았어? 너 또 컴퓨터 게임하고 있지?”
“….”
해성이는 거짓말 할 수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피아노 연습했니? 학습지는 다 했어?”
“아니요.”
엄마의 늘 하는 잔소리가 쉴새없이 해성이의 귀로 쏟아졌다.
“컴퓨터 끄고 얼른 할 거 해.”
엄마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못 박듯이 해성이의 귀에 쏟아 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해성이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전화 받는 사이 영웅으로 키우던 인물이 죽고 말았다. 그 영웅을 다시 키우려니까 갑자기 게임하기가 싫어졌다. 컴퓨터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또 전화벨이 숨 넘어 갈 듯이 울어댔다. 그러든 말든 해성이는 그냥 울게 놔두었다.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전화벨이 자꾸만 울어 거실로 나가서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를 드는데 엄마의 화난 목소리가 거실까지 뛰쳐나왔다.
“여태껏 컴퓨터 게임하고 있는 거야?”
“아까 껐어요.”
“그런데 왜 전화 빨리 안 받았어?”
“그냥요.”
해성이는 그 뒤의 엄마 말은 생각나지도 않는다. 집 열쇠를 찾아들고 공원으로 막 뛰었다. 집에 있다가는 수화기를 통해 쏟아져 나온 엄마의 말들이 어깨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을 것만 같았다.
“헉헉헉헉!”
해성이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엄마와 운동 나올 때마다 꼭 둘러보던 자연학습장 앞이었다. 산책길 양쪽으로 여러 종류의 채소를 심어 놓고 푯말을 세워 둔 작은 밭이다. 엄마는 시골 출신답게 자연학습장에 있는 식물에 대해 자세히 알려 주었다.
노란 참외 꽃들이 해성이를 보고 활짝 웃고 있었다. 참외는 수꽃과 암꽃이 따로 피는데, 암꽃은 꽃봉오리가 맺힐 때부터 동그란 아기를 꽁무니에 달고 나온다.
참외 맞은편에는 수박이 심겨 있고 수박 암꽃도 타원형 아기를 매달고서 피어 있었다. 세로로 줄무늬가 있는 주먹만 한 수박을 만져 보니 아기 피부처럼 보들보들했다.
좀 더 걸어가자 온통 보라색으로 치장한 가지가 열심히 아기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 옆의 고추도 짙은 초록 빛깔 옷을 입고 싱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옆에서는 오이 덩굴이 나무 지지대를 타고 이리저리 엉키면서 올라가고 있었다. 오이들도 암꽃과 수꽃이 따로 핀다. 오이 암꽃도 기다란 오이를 꽁무니에 달고 있었다. 노란 꽃이 핀 암꽃은 꼭 나팔 같았다. 제법 기다랗게 자란 오이들이 갈색과 하얀색으로 말라 버린 꽃을 머리에 매달고 있었다. 만지면 금방 바스러지는 보잘것없는 꽃이었다.
“다 시든 오이 암꽃이 왜 지금까지 달려 있지?”
해성이는 그 암꽃들이 안 떨어지고 있는 게 궁금했다. 그래서 다시 되돌아가서 고추, 가지, 수박, 참외 꽃들은 어떤지 살펴보았다. 시들어 마른 꽃들은 거의 다 떨어지고 없었다. 그런데 오이만이 다 말라 쪼그라진 암꽃을 달고 있었다. 아니지, 오이가 암꽃을 매달고 있는 게 아니라 암꽃이 못 떨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해성이는 문득 외할머니와 엄마가 생각났다. 외할머니는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움직일 수 있으니까 해 주는 거지. 내가 힘 빠져서 못하면 그때 해 먹어.” 하면서 결혼한 자식들에게 장도 담가 주고, 가끔 김치도 담가 주신다.
“어머니가 담가 주시는 김치 맛이 최고예요!”
엄마는 외할머니의 손맛이 최고라고 치켜세운다. 외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좋아하신다. 또 외할머니는 집으로 수시로 전화해서
“해성아, 학교 잘 다니냐? 아빠는 요새 일찍 들어오시냐?”
면서 집안 사정을 꼬치꼬치 물으신다.
또 엄마는 어떤가? 늘 해성이에게 ‘이거 해라, 저거는 안 돼’라고 하면서 간섭이 심하다. 해성이는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해성이는 다시 오이들이 자라는 작은 밭으로 갔다. 작은 오이, 조금 큰 오이, 더 큰 오이의 머리에는 시든 암꽃이 달려 있었다.
‘오이 암꽃도 자식이 다 자랄 때까지 지켜 주고 싶어서 못 떨어지는 거 아냐?’
해성이는 오이에 꼭꼭 매달려 있는 암꽃을 하나 떼었다. 손을 대자마자 암꽃이 그냥 부스러졌다. 오이 암꽃은 다른 암꽃보다 더 자식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큰 것 같았다, 우리 엄마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