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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리라 돌아오리라
예레미야 31:15-20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주님의 부활을 맞아 그리스도교회의 전통인 부활절 인사를 나누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10주일 동안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다가 이렇게 다시 만나니 참 반갑다. 역시 예배는 얼굴을 맞대고 드려야 몸과 마음이 평화롭다. 지금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여러분도 속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다. 모든 어버이들께 축하드린다. 코로나19 시대에 카네이션 구경은 잘하셨는가? 지난 10주간 동안 큰 변화가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코로나19를 적절하게 대응한 덕분에 우리나라는 갑자기 선진국 시민이란 자부심과 명예를 얻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적어도 효(孝)사상에 있어서는 일찍부터 선진국이었다. 홍일식 교수는 <한국인에게 무엇이 있는가>에서 효사상은 옛 전통유산이 아니라 21세기에도 품을 미래유산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런 사례를 들었다. 1980년대 미국 LA 한국식당에서 있었던 경험이다.
늘 사람이 붐비는 큰 식당이었는데, 사장님의 낯빛이 어두웠다고 한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 원인은 그 지역 흑인 불량배들이었다. 당시 이민사회에 한·흑 갈등이 심각하였고, 소수민족인 한인이 경영하는 식당이 붐비니 종종 화풀이 대상이 된다고 하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난동을 부리고, 흉기를 들이 댄다고 하였다.
그래서 홍 교수는 사장에게 한국인의 효사상을 보여주고 가르치라는 좀 엉뚱한 제안을 하였다. 하루 날을 잡아 늙은 부모를 모시고 오는 사람에게 음식을 원하는 만큼 무료로 제공하고, 그것이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이라는 것을 알려주라는 내용이었다. 사장은 심드렁하게 반응하였다. 총에 맞아 죽을지, 사업을 접을지 하는 마당에 효사상을 가르치라는 말이 너무 한가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홍 교수 일행이 떠나고 행패가 지속되자 사장 부부는 이러나 저러나 망하게 생겼으니 속는 셈치고 효도잔치를 벌여보자고 했다. 날을 잡아 골목마다 포스터를 붙이고 지역신문에 광고하니 그 날 늙은 부모를 모시고 온 흑인손님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모두가 난생 처음 겪는 일이라며 고마워하였다.
그리고 그 날로 흑인깡패의 일상적인 행패는 끝났다. 그리고 효도잔치는 연례행사로 이어지고 있고, 덕분에 지역 내 한·흑관계가 아주 좋아졌다고 한다. 한국인의 효사상이 흑인들의 가슴에 잠자던 착한 본성을 일깨웠고, 자신의 부모를 대접하는 한국인에게 형제애를 느끼게 한 덕분이었다.
1)
효는 한국인들만의 부모 사랑은 아니다. 성경을 비롯해 모든 나라 사람과 심지어 한낱 미물도 부모 사랑을 알고 또 실천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성경은 하나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해 표현하고 있다. 공통점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받았으며, 모든 자녀는 그 어머니를 통해서 세상에 왔다. 한 마디로 하나님과 어머니는 나를 낳으신 분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어머니의 사랑에 비유하는 것이다. 마치 자녀를 업어 기르는 어머니의 모습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를 일평생 품어 주시는 분으로 고백한다.
“내게 들을지어다 배에서 태어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업힌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내가 업을 것이요 내가 품고 구하여 내리라”(사 46:3-4).
성경에서 어머니의 이미지로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한 것은 어머니의 마음이야 말로 세대와 만민이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모국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마음을 요약하면 ‘자비(헤세드)와 긍휼(라함)’이다.
본문은 예레미야 예언의 내용이다. 예언 속에서 라헬과 그 자손 에브라임의 이름을 부른다. 주제는 라헬의 통곡이고, 또한 에브라임의 탄식이다.
라헬은 누구인가? 라헬은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로, 북이스라엘 왕국의 시조할머니이다. 라헬은 아주 늦게 요셉을 낳았고, 베냐민을 낳으면서 죽은 불행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애굽으로 팔려간 아들 요셉이 낳은 두 아들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인데, 에브라임 지파가 중심이 되어 세운 왕국이 북 이스라엘이다.
본문에 등장한 라헬의 통곡과 에브라임의 탄식에는 이러한 가정적 배경과 역사적 현실이 모두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어머니 라헬의 통곡은 장차 그 자식들로 인한 슬픔인데, 그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통곡하는 어머니에게 응답하신다.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6).
여기에서 네 일에 ‘삯을 받다’는 의미는 ‘네가 자식을 낳아 키운 것이 결코 헛일이 아니다’란 뜻이다. 어머니에게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인가? 자녀가 잘 되리란 희망과 약속이다.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7).
지금 자식들은 재난을 겪고 있다. 순전히 자신의 불순종과 하나님에 대한 거역 때문이다. 이제 징벌과 치욕을 당하는 자식들은 후회하고 있다. 다시 용서와 회복을 기다리고 있다.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하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18).
그럼에도 하나님은 마치 어머니의 마음으로 에브라임을 염려하신다.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창자가 들끓으니 내가 반드시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20).
선지자 예레미야가 말하는 비전은 이렇다. 불순종한 아들은 징벌을 받고,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 그러나 아들은 탄식 가운데 자신을 뉘우치고 치욕을 느끼며, 회개하는 중에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을 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헬의 통곡과 에브라임의 탄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요약한 것이 오늘 설교 제목이다.
“돌아오리라... 돌아오리라...”
2)
그렇다면 돌아올 수 있는 희망은 무엇에 근거한 것일까? 오로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식을 염려하여 통곡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자식을 불쌍히 여기신다. 후회하고 뉘우치는 아들의 탄식하는 심정을 불쌍히 여기신다.
선지자 예레미야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이 너희의 눈물과 탄식, 울음소리와 통곡을 들으신다. 너희 역시 내가 기뻐하는 내 자식이다.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도 창자가 끊어지는 단장(斷腸)의 아픔을 겪는다. 내가 너희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죄인의 유일한 희망은 심판자가 지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죄인은 마치 하늘로 이어진 한 가닥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심판자의 연민을 구한다. 그래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실 것을 믿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오라고 외친다. 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단어는 ‘긍휼’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보면 먼저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고 그 사람을 고쳐주신다. 가장 위대한 기적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시작된다. 연민, 동정, 불쌍히 여김, 긍휼, 이것은 어머니 마음과 같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라. 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예레미야가 예언한 라헬의 통곡은 마태복음 2장 아기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마 2:18).
아기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헤롯 대왕의 메시야 제거 음모과 베들레헴 일대 사내아기들에 대한 살상이 있었다. 커다란 불행을 겪는 어머니들의 마음을 복음서는 모든 어머니의 대명사로서 라헬의 통곡으로 빗대었다.
라헬은 성경에서 전형적인 어머니로 묘사되어 있다. 조상 야곱이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라마에서 에브라다(베들레헴)로 가는 도중에 라헬은 둘째 아들 베냐민을 낳다가 산통으로 인해 죽었다. 이를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왕국이 포로로 끌려간 일에 비유하여 어머니의 통곡으로 비유하여 예언한 것이다.
마태복음은 왜 역사적으로 시간과 거리가 있는 어머니의 아픔과 눈물을 베들레헴 대학살과 일치시키려고 했을까? 두 사건은 지역이나 공간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는 하나님의 아픔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세상 곳곳 어디에나 있는 모든 라헬의 눈물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내 자식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자식들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집 자식 일에도 눈물을 섞어 감정을 이입한다. 어머니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닮았다.
하나님의 구원은 불쌍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의지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것이 인간을 위해 희생하신 십자가 사랑의 본질이다. 이를 가장 닮은 모습이 어머니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
3)
요즘 성공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세 가지가 필요하다. 자기 인생을 관리해줄 세 가지는 무엇일까? ‘코치, 멘토, 소속사’이다. 내 삶을 코칭하고, 적절히 상담해주는 좋은 멘토를 만나는 일은 중요하다. 잘 나가는 연예인일수록 좋은 소속사와 함께 한다.
사실 대부분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가장 적절한 ‘코치와 멘토와 소속사’를 만나는 법이다. 그 세 가지를 한꺼번에 맡아 준 존재가 바로 어머니이다.
비록 방법은 서툴고, 전문성은 떨어지지만 어머니는 운명적으로 만난 코치이고, 사랑의 잔소리로 가득한 소중한 멘토이며, 평생 이해관계 없이 나를 위해 기도하며, 보살펴주시는 영원한 소속사이다. 이보다 더 소중한 존재가 있을까?
흔한 이야기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단어가 셋 있다. 거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손꼽는다. 어떤 사람은 사랑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어머니라고 하며, 어떤 사람은 가정이라고 한다. 사실 사랑, 어머니, 가정은 한 뿌리에서 나온 이음동의어(異音同義語)처럼 들린다.
어머니처럼 하나님은 내 삶의 처음과 끝, 인생 전체의 코치요, 멘토이며, 소속사가 되신다. 그래서 유대인의 격언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갈 수 없어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하지 않던가?
어버이는 자녀를 위해 손가락으로 방향을 지시하지만, 그런 잔소리에 그치지 않고 내 길이 되어 주신 분이다. 그 길은 늘 오락가락, 갈팡질팡하던 우리의 삶의 방향을 언제나 사랑으로 돌이키게 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성경의 어머니들과 세상의 어머니들을 통해 그 지극한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다.
지금 우리는 부모님의 뒤를 이어 어머니로 또 아버지로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비와 긍휼로 나를 온전히 부모의 마음으로 이끌어 주시길 바란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내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내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우리 집을 다녀가신 날이 기억이 났다.
어머니의 마지막 인생 프로젝트는 주말마다 4남매의 집을 순회 방문하는 일이었다. 그날은 컨디션이 너무 나빠 오실 수 없는 상황인데도 내가 억지로 모시고 왔다. 그 다음 날에는 색동교회 예배에도 나오지 못하고 누워계셨다. 놀라운 것은 오후에는 모시러온 큰 형 차에 오르면서 이렇게 씩씩하게 말씀하셨다.
“또 와야지.”
그리고 어머니는 지금도 내 마음 속으로 문득문득 찾아오신다.
지금은 부활절기이다. 부활신앙은 “돌아오리라, 돌아오리라”는 약속의 실현이다. ‘통곡에서 긍휼로’, ‘아들의 마음에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타향에서 본향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그리고 ‘엠마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바로 인생의 길에서 헤매던 나 자신이 다시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오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부활신앙을 내게 주시어 언제나 그 희망과 사랑과 긍휼을 뜨겁게 간직하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사 6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