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3730
1월9일[연중 제1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youtu.be/JpHfuniWeyo
[인천교구 신형학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집전(효성동 본당 보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고귀한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비참으로 얼룩진 한 인간의 시선!>
언젠가 한 기도 모임에서 저도 예수님처럼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비슷한 사람을 대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저도 예수님처럼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고 멋지게 외치며, 그를 악령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내공이나 포스가 부족한 저였던지라 우선 큰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구마(驅魔)까지는 아니어도, 차라도 한잔 대접하고, 기도라도 해드려야 했었는데, 전혀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만 싶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집니다. ‘구마’ 그것 아무나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우선 바깥으로 드러나는 그 모습에 기가 질립니다. 눈빛이며, 분위기며, 말투며, 언행이며, 마주 앉아있으면 소름이 다 끼칩니다. 머리카락이 자동으로 일어섭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 사람들 바라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측은한지 모릅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전도 여행의 베이스 캠프였던 카파르나움의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거기에 있던 더러운 영에 들린 사람을 만나십니다. 극단의 사악함이 극단의 신성함 앞에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그를 예수님께서 유심히 바라보십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라도 바라 보는 듯한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달리, 예수님의 시선을 더없이 부드러웠고 따뜻했습니다. 한없는 측은지심과 연민으로 가득했습니다.
참으로 특별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창조주 하느님의 시선과 망가질 대로 망가진 한 비참한 인간의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극단의 신성함 앞에 극단의 사악함이 굴복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참다못한 더러운 영은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소리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 24)
더러운 영이 들린 가련한 한 인간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으로 가득한 눈길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오늘 하루를 살아봐야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 또 다른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굽어보시고, 눈여겨보십니다. 죽음의 문화에 깊이 빠져든 청년들, 여러 가지 중독 증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청소년들, 극단적 세속주의와 편리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 배금주의와 소비향락주의에 젖어든 우리들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옛날 더러운 영에게 외치셨듯이 오늘 나에게 외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카파르나움에서 있었던 더러운 영의 추방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에 더러운 영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더러운 영에 들렸던 사람에게서 튕겨져 나와 내동댕이쳐집니다.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는 어느 정도 권위와 힘이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말은 이웃을 살리는 말인지 아니면 죽음으로 몰고 가는 말인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M6dEM58O9M
++++++++++++++++++
<말에 힘이 있는 사람들의 특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권위란 ‘영적인 권위’임을 말하기 위해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히틀러 같은 경우도 말에 권위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령의 도움이었습니다. 말의 권위는 그 말이 미치는 영향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죄를 없애시는 말씀입니다. 더러운 영을 이기는 권위가 아니면 말에서 좋은 권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말엔 힘이 있었을까요? 말에 표징이 얹혔기 때문입니다. 말에 힘을 주는 성령님은 또한 병을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는 힘이시기도 합니다. 물론 성령께서 말에만 표징을 주시는 일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경우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지 못해도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사람들은 내가 일으키는 외적인 표징들로 나의 말을 더 확신하게 됩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모델이 된 인물이 있습니다. 템플 그랜딘입니다. 그녀는 동물 과학 분야의 연구뿐만 아니라 자폐증 옹호자로서도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입니다.
템플 그랜딘은 어린 나이에 자폐증 진단을 받았고 의사는 이 아이가 말도 못 할 것이고 공부도 못할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녀를 일반 학교에 보냅니다. 그녀의 어머니 믿음대로 템플은 말도 하고 대학도 들어갑니다.
그녀는 소가 압착 슈트에 안겨 있는 방식에서 영감을 받아 자폐인의 과민성을 진정시키기 위해 설계된 장치인 압착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소의 움직임을 파악해 지금 북미에서 많이 사용하는 소 사육장을 설계하였습니다. 여러 책과 강연으로 그녀는 한 때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위 안에 들어가기도 하였습니다.
꼭 기적을 행해야만 표징이 아닙니다. 표징이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일인데 세상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줍니다. 이 놀라움을 주지 않으면서 말씀에 권위를 지닌 인물은 없습니다.
헬렌 켈러의 선생님인 설리번 선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 또한 지독한 어둠 속에서 실명까지 하고 독방에 오래 갇혀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어둠에서 나온 경험이 있기에 그 어둠에 있는 헬렌 켈러에게 말로써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저의 유튜브 중 성체조배에 관한 것만 매우 조회수가 높습니다. 영향을 가장 많이 준 동영상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체조배를 통해 저 자신과 이웃이 변화되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강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말에 능력이 있음을 스스로 믿지 못하면 말에서 확신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 대한 표징을 나 자신이 보았을 때는 그 주제에 대해서는 말에 힘이 실립니다. 자신도 모르게 실리는 그 힘을 듣는 사람은 느끼고 반응하게 됩니다.
표징과 함께하지 않는 말의 권위는 없습니다. 공부가 부모 자신들은 변화시키지 못했으면서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한다면 아이들은 그 말을 잘 들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먼저 그 말이 나를 변화시키고 이웃의 삶을 변화시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을 보면 내 말에도 힘이 실릴 것이고 권위도 실릴 것입니다. 표징과 함께 하지 않는 말에는 어떤 권위나 도 있을 수 없습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장례가 나서 ‘연도’엘 다녀왔습니다. 장례식장에는 조문객들이 무척 많이 왔습니다. 71년생이니 조금 일찍 하느님의 품으로 간 것도 있지만, 고인이 생전에 많은 봉사를 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고인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고인이 생전에 꾸르실료 봉사를 열심히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연도에 갔습니다. 연도 중에 ‘자녀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대학생인 딸은 눈물 때문에 엄마를 위해 기도를 다하지 못했고, 대녀가 대신 ‘자녀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연도를 마친 후에 딸은 엄마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습니다. “엄마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지금의 남편을 만났을 때와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리고 예쁜 딸을 낳았을 때라고 했다고 합니다. 엄마는 늘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였고, 엄마의 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그렇게 이웃을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보여주었으니 이제 내 삶의 의미도 ‘이웃을 위한 봉사’라고 하였습니다. 엄마는 ‘구름’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하늘을 보면 구름이 된 엄마를 만날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엄마는 구름이 되어 나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엄마 이제 아프지 않은 곳에서 편안히 계세요.”
우리가 고인을 위해서 ‘연도’를 하는 것은 신앙 안에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도 중에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며 고인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청합니다. 성인 호칭기도를 바치면서 성인들의 전구를 청합니다. 우리도 언젠가 주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의 남은 삶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백성의 간절한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어 저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과 표징입니다. 복음은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고인은 해야 할 일을 깨달았고, 실천하였습니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위해 연도를 하였습니다.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마귀는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지 않습니다. 마귀는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의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고인은 자선과 봉사로 마귀를 쫓아냈습니다. 그랬기에 많은 사람들이 고인을 위해 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한나는 성전에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나에게 아이를 주셨습니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고인의 손에는 오래된 묵주가 있었습니다. 고인은 늘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2024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도 오늘 본기도에서 들었던 것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깨달은 것을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마귀를 쫓아내는 것입니다.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주님! 세상을 떠난 요안나와 죽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소서.”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1월9일 [연중 제1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1,21b-28: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모든 것을 버린 사도들은 무엇을 발견하게 되는가? 복음에서는 그들이 “카파르나움”(21절)로 간다. 카파르나움은 위로의 땅 혹은 아름다운 땅으로 해석되는 이름이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거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십니다.”(24절) 여기서 보면 구세주의 현존은 악마에게는 고문이었다. 더러운 영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분의 오심을 예상하였다. 그러니 저렇게 소리를 쳤다. 주님을 뵌 악마는 그분을 유혹하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마태 4,3)이라고 말한다. 악마나 마귀나 아버지와 아드님을 알아보지만 믿음이 없다.
주님께서는 악마가 진리를 말할지라도 믿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들은 우리를 속임수에 빠뜨리기 위해서 진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다. 베드로가 칭찬을 받았는지 생각해 보자.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이렇게 고백한 베드로를 복되다고 하신 것은 그의 말이 아니라, 그 마음 안에 있는 사랑을 보신 것이다. 같은 고백을 악마도 하였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고, 악마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고백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랑으로 고백했지만, 악마는 두려움으로 말하였다. 베드로는 “주님, 저는 주님과 함께라면 죽을 준비도 되어있습니다.”(루카 22,33) 말씀드렸고, 악마는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하였다. 믿음을 지니되 사랑과 함께 지니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이는 사랑을 지닐 수 없다.
믿음은 위대하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악마들도 믿음을 지니고 있었지만, 사랑이 없었다. 만일에 우리가 악마와 어울리면 믿음을 자랑할 수 없다. 베드로와 악마의 고백은 다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껴안고자 그러했지만, 마귀들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라고 그렇게 말했다. “조용히 하여라.”(25절) 그분은 악마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시고 새로운 가르침을 베푸신다. 나는?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을 만난 마귀는 이렇게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의 이 말은 악마가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잘 보여 줍니다. 마귀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분명히 알고 있듯, 악마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아 가는 데 방해하지 않습니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마귀의 이 말 한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악마는 우리가 하느님과 아무 상관 없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는 구원받으려면 미사와 고해성사를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도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느님 나라를 준비하는 삶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하느님과 그 어떤 것도 함께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과 무엇인가 함께하여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는 마귀의 말처럼, 아주 부담스럽고 괴롭게 느껴집니다. 신앙이 짐처럼 귀찮게 느껴집니다. 오히려 하느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이 매우 편하고 기쁩니다. 악마는 이렇게 우리를 지배합니다.
‘권위’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힘’ 또는 ‘누군가의 행동에 변화를 줄 수 있는 힘’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악의 지배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힘입니다. 이 힘이 그분의 말씀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이 말씀 한마디가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던 악마를 떠나가게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그분의 말씀에는 우리를 빛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인도할 수 있는 탁월한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기억하는 신앙인이 되십시오.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 말씀의 힘>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마르 1,21-28)
이 이야기는, “예수님 말씀은 하느님 말씀”이라는 증언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증언입니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예수님입니다. 마귀도 아니고, 카파르나움 사람들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집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는 말은, ‘예수님 말씀’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고 몹시 놀랐다는 뜻입니다. <‘권위’ 라는 말은, 여기서는 ‘하느님의 힘’을 뜻합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기들을 압도하는 ‘하느님의 힘’을 느끼자 크게 놀란 것입니다. <그 힘에 자기들이 압도당하는 것 때문에 놀랐을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달리”라는 말은, 그 당시의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에는 ‘힘’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 옛날의 유명한 학자들의 말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가르쳤고, 자기들의 지식을 자랑하기만 했습니다. <요즘에도 그런 식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가르침에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힘이 없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창세 1,3)
‘예수님 말씀의 힘’은 하느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사용하신 그 ‘말씀의 힘’과 ‘같은 힘’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 말씀의 힘’을 증언하는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실 때 말씀만으로 고쳐 주신 일들이 많고, 죽은 사람을 살리실 때에도 말씀만으로 하셨는데, 대표적인 예는 말씀만으로 자연계를 복종시키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마르 4,39)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마귀를 쫓아내신 일들도 ‘말씀의 힘’을 잘 드러낸 일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만일에 복종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마귀들은 예수님의 명령에도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반대로 표현하면, 마귀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느님의 힘’을 느끼기만 했는데,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면서 자기들이 느낀 그 힘이 실제적인 힘이고 하느님의 권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놀라게 되는데, 그들은 놀라기만 하고 예수님을 믿는 단계까지는 가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성이 없고 자유의지가 없는 자연은 예수님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합니다. 마귀들도 자유의지가 없으니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긴 하지만, 본래 반항하는 본성이 있어서, 복종하면서도 반항합니다.
마귀들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말이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는데, 자유의지란, 자신의 의지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선택하는 자유입니다. 마귀들은 악 자체이고, 스스로 선한 일을 선택해서 실행한 적이 없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경우에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예수님 말씀의 힘에 압도되거나 그 힘을 두려워하거나 그 힘에 놀라면서도 예수님을 안 믿는 경우가 생깁니다. 따라서 “믿음이란,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다 주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의 것은 없다. 나의 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다.”라는 단계까지 가야 비로소 주님을 믿는 것이 됩니다.> <마귀들은 원래 거짓말만 하는 존재이고, 그 거짓말이 너무 교묘해서,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누구든지 쉽게 현혹됩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부인하고 예수님은 ‘사람’일 뿐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은, 자기들이 하는 일에 참견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이고,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는 말은, 너 따위는 우리를 멸망시킬 수 없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는,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으로 한 말이고,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는, 앞의 ‘나자렛 사람’이라는 말처럼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예수님은 사람일 뿐이라고 주장하려는 의도로 한 말입니다.>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사고 친 내용입니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첫 번째 행적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일이었고, 그것은 일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벌이신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안식일 법을 어기는 사고를 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첫 번째 행적인 악마 추방,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의 실현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인 악마의 혀 놀림을 중지시키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코 1,25) 그러자 악마는 그 사람에게서 나갔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은 그 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로써 당신께서 선포하신 ‘복음’인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사실이 지금 여기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마와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이를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코 1,27)
그렇습니다. 놀라웠던 것은 그분의 ‘권위’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위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놀라워했던 것은 그분의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권위’를 나타내는 ‘exusia’라는 말은 ‘힘’이란 뜻으로, 하느님께만 사용되는 말이라고 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결국 이 구마 치유는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에 의탁하여 행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마할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엄의 영은 주 예수께로 가라.”고 명함으로써 예수님의 힘과 권위를 빌어 행하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첫 번째 행적은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처럼 오늘 우리도 당신의 ‘권위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느님의 힘이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체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
<오늘의 샘 기도>
주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거룩함 안에서 제가 새로 나게 하소서.
제가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주님이신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날 권위주의가 타파됨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철통같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정치가들이 민초들의 힘에 무릎을 꿇게 되고 많은 희생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의 동등한 인권이라는 본래의 모습으로 점점 돌아가고 있음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 편중되게 권위를 누려왔던 가부장적 서열주의도 무너져 남녀간의 차별, 노사간의 차별, 선생과 학생의 차별, 상사와 부하직원의 차별 등 직위와 기능의 차이가 인간이 공통으로 누려야할 권위에 차별을 낳아서는 안 된다는 것은 참으로 기뻐할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다운 권위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부모의 권위, 스승의 권위, 정치가의 권위, 성직자의 권위가 점점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권위주의는 타파되어야 하지만 참다운 권위는 더 빛나야 합니다. 율법주의는 타파되어야 하지만 율법은 완성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마르코 1장 21절-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 가르치심을 듣고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고 전합니다. 하나는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마르코 1장 22절)라는 반응과 또 하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코 1장 24절)라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강하게 거부하는 반응입니다.
두 번째 사람을 복음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마르코 1장 23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회당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과 더러운 영이 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놀라워하는 깨끗한 영혼입니까? 아니면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라고 강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입니까? 아니면 놀라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까?
그런데 왜 사람들이 이런 반응을 보일까요? 만약 사람의 말을 들었다면 아무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시작하시기 이전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습니다. 모두들 똑같이 회당에 있었습니다. 누가 건강한 영혼인지 누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이런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입니다. 서로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빛을 받고 평소의 삶이 드러난 것일 뿐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고 해서 평소에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건강한 영혼이라고 해서 평소에 눈에 띄게 드러나는 삶을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평소에는 잘 모릅니다. 각자 자기의 삶을 살기 때문이고 그리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의 속 마음을 우리의 눈으로는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 앞에서만이 드러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 놓고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리서 4장 12절)라고 말씀하신 대로 마음 속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겉으로 볼 때에는 크게 차이가 없습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 이전까지는 아무도 그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나서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마르코 1장 24절)라고 말했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평소에 예수님과 아무 상관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대로 살면 자기가 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과는 아무 관계없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이야기하면 금방 화를 내고 거부하고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의견만이 최고인양 조금도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복음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는 사람은 바보이고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입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평생 예수님과 아무 상관 없이 살기 때문에 “예수님”이라는 말도 들어 보지 못한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면서도 그분과 아무 상관없이 제 멋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마르코 1장 24절)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반드시 신자가 아닌 사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신자라고 하더라도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일 수 있습니다. 회당에 모여 있다는 것은(마르코 1장 21절.23절) 평소에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평소에 전적으로 말씀대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말씀을 듣고는 놀라고 무언가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오늘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나의 삶과 별로 관계가 없다면 나는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고 사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고 그분의 말씀이 내 삶의 지표가 된다면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새롭고 권위있는 가르침에 놀라고 감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영혼이 참으로 건강한 영혼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영혼이시라 믿습니다. 아멘.
====================
[부산교구 윤명기 요한 칸시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악령들을 몰아내십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전권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입증해 보이십니다.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회당에서 행하신 두 가지 일, 곧 권위 있게 가르치신 것과 더러운 악령을 몰아내신 일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예수님의 힘의 증거입니다.
곧 권위가 충만한 가르치는 말씀과 힘이 충만한 구마 말씀, 이 둘은 똑같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표징입니다.
예수께서 사셨던 그 당시 팔레스티나에는 어디를 가나 회당이 있었고, 그 회당은 신앙생활과 종교 교육의 중심기관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22절)라고 성서는 전합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의 관습에 따라서 성서를 읽고나서 말씀하셨지만 그분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달리 성서의 단순한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종종 인간의 해석과 규정들을 지키기 위하여 하느님의 본래의 뜻을 행하는 데 실패하곤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뚜렷한 의식을 가지시고 당신 자신의 사명에 대한 넘치는 확신과 절대적인 권위로서 가르치시고 성서본문에 대하여 당신 자신의 해석을 가하십니다.
이렇게 커다란 권위로써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청중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준 직후, 한 악령들린 사람과 당신과의 만남으로 이 감동은 더 커집니다.
악령들린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적대자는 예수님의 구원활동과 하느님 나라의 개시를 멈추게 하기 위해 그의 세력 일체를 불러 모읍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더 강하심을 입증하시고 사탄의 나라를 격퇴시키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과 더러운 악령과의 대화는 적대자간의 교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악령은 자기의 “거처”에서 자기를 제거하고자 하시는 분, 그리고 자기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을 구하고자 하시는 힘있는 분의 현존을 감지하고는 탄원을 외쳐댑니다.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 큰 외침과 반항적인 질문은 구마자의 공격을 막아 보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악령의 이 말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자기 방어의 수단인데, 타락하였을지라도 천사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악령이므로 예수님이야말로 자기 나라의 가장 무서운 적임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그분이 자기 앞에 서 계심 자체가 자기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큰 고통입니다. 악령은 곧 예수께 대하여 싸움을 걸려고 시도할 만큼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아직도 세상에 드러내서는 안 될 예수님의 위격, 즉 감추어두어야 할 비밀을 재빨리 폭로하여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좌절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더러운 영의 외침에 대꾸도 하지 않으시고 단순히 명령하심으로써 악령을 복종시키실 뿐입니다.
이제부터 악령들의 힘은 그분에 의해 부서질 것이며 이 깨지고 부서지는 악마의 나라 위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는데 그분의 복음 선포의 목적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에 악령의 이 말들은 자기 눈앞에 다가온 패배 때문에 오는 공포와 격분을 나타내는 첫 비명소리인 셈입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시도된 구마사건에 대해 하느님께서 승리를 보증해주고 있고 예수님의 우위성, 즉 예수님이 악령보다 강하고 위대하신 분임을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권위 있고 어떤 세력보다도 강하며 모든 존재는 그 명령에 복종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존재보다 우월하신 예수님의 능력을 우리는 정말 믿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다른 종류의 우월함을 생각해봅니다. 예수님보다 인간적 전문가의 어떤 모습에 더 신뢰를 두고 있거나 혹은 복음의 원리보다 신문이나 잡지의 유명인사의 칼럼에 우리의 가치관을 따르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것을 듣기보다는 주식시장의 말을 더 따르거나 예수님의 계명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우리를 모든 죄와 악에서 해방시키시는 구세주이심을 확신합시다.
예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는 3가지 구원의 적들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신 예수께 우리의 신뢰를 둡시다.
“오 사랑하올 예수여, 구원의 모든 적들로부터 저희를 보호해주소서. 저는 그것을 제 자신만으로 할 수 없사오니 당신의 강한 팔로 저를 붙들어주시어 그 어떤 것도 당신과 저의 사랑을 갈라놓지 말게 해 주소서. 아멘.”
=====================
[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1, 22. 27)
우리는 현재 탈권위脫權威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주 듣는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 는 말은 권위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직책에 합당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에서 기인한다고 봅니다. 과거 세속적인 권위는 나이, 직위와 직책 등에서 자동적으로 부여되지만, 영성적 권위는 존재와 삶에서부터 파생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권위exousia는 외부에서 부여되는 권위가 아니라, 존재 자체로부터 나오는 권위이며 힘입니다.
기성세대라고 불리는 우리는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는 지도자들에게 오래도록 시달려 왔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기성세대의 의식 저 밑바닥엔 권력과 권위에 무조건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려는 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게 참 어렵다고 느껴집니다. 예전엔 흔히 權(=힘)을 가진 사람들은 권을 행사하는 권한으로 생각하기에, 망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못처럼 보인다,’라는 말처럼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그렇게 인간적으로 성숙하거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여러 권력자는 자신을 병들게 하고 불행에 빠졌으며, 그로 인한 피해는 당연히 약자들인 국민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원화된 세상과 탈권위 시대에서는, 정치 분야만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도덕성’이 가장 중요한 지도자의 요건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신문사의 여론 조사에서 21세기 지도자의 제1 덕목이 도덕성 24.6%’ 그리고 제2의 덕목이 미래에 대한 비전 20.4% 그리고 국정운영 능력 19.5% 등으로 조사되었다고 할 만큼, 도덕성은 우리가 우리 지도자들에게 요구하는 중요한 덕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시어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워합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1,21~22)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분명 예수님의 말투나 외모는 영락없는 시골 사람의 모습이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당대의 율법 학자들과 다른 무엇인가 특별함이 있음을 느끼고 알아차렸던 것입니다. ‘아, 이게 뭐지!’ 무엇이 예수님의 단순한 가르침에 당대의 다른 지도자들과 다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였을까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말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에게서 느껴지는 권위는 하느님의 힘, 곧 성령 충만에 따른 活力이었으며, 이는 다른 권위자와 전혀 근본과 본질에서 차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다른 지도자들의 권위는 아래(=땅)에서 왔지만, 예수님의 권위는 위(=하늘)에서 주어졌기에 권위 곧 힘의 차이가 드러난 것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표현에서 드러난 것은 말하는 사람 스스로가 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그 말을 살고 있으며 깨달은 것이기에 듣는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쉽게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파생된 메시지의 단순명료함으로 말미암아 군중들은 예수님 말씀의 진정성과 진솔성을 느꼈습니다. 다른 표현으로, 예수님의 권위는 한 마디로 言行一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로서 말씀하신 분이라기보다 삶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증거하신 분이셨기에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껏 백성들은 자기 지도자들의 듣기 좋은 말과 허울 좋은 가르침을 듣고 살았지만, 그들은 말만 앞세우면서 실제로 그렇게 살지 않았음을 마태오 23장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통렬하게 비난하셨던 까닭입니다. 과거의 권위는 나이, 직책, 배움, 경험, 남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자동적으로 주어졌지만, 현재의 권위는 그 직책을 맡은 그 사람의 살아가는 삶의 모습 곧 그 사람의 언행일치된 삶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해 준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직책만 있지 권위는 없고 그 권위에 대한 반감과 그 권위에 저항합니다. 권력자 삶의 실천이 없는 말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으며, 말만 하는 사람에게서 우리는 권위를 느끼지 못하고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여러 분야에서 권위의 상실을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2010년부터 현재까지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변화의 힘이었고 담론이었던 것입니다. 몸으로 가르치니 따르고, 말로만 가르치니 반항한다, 는 표현이 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바로 높은 사람 곧 권위자가 먼저 허리를 굽혀 몸으로 가르치는 겸손과 스스로가 자신이 말한 바를 삶을 통해서 살려고 할 때 우러나온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참된 권위자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실제로 당신의 言行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악마마저도 예수님의 이런 권위를 인정합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악마마저도 하느님의 사람임을 인정하고,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1,24) 하고 고백합니다. 참으로 거룩하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기에 거룩함은 하느님에게서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상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권위는 인간적인 겸손만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권위임을 더러운 악령의 입을 통하여 알려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1,25)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소리를 지르며 나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1,27) 하고 반응합니다. 여기서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표현한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란 모든 존재하는 것은 저마다 원칙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인간의 원칙이 있습니다. 그 원칙에서 벗어날 때 불행해지고 인간다운 삶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삶의 원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그 길만이 우리가 살길이고 잃었던 행복을 되찾는 방법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새 가르침을 통해 사람이 살아야 그 길과 그 원칙을 제시한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야 할 바를 충실히 살 때만이 ‘더러운 영’의 억압과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과 구원을 체험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가르침으로 시작해서 악령의 추방하신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듣고, 예수님의 권위를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그 소문이 곧바로 온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는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의 고백과 증언을 통해 예수님의 이 새로운 가르침이 널리 퍼져 나가야 합니다. 경험적으로 권위를 가진 사람 앞에서는 내외적으로 온전한 순명이 가능하지만, 권위가 없는 사람 앞에서는 단지 외적으로 순명이 있을 뿐 내면에서는 존경을,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말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라.”(1테 2,13 참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연히 옛날 사진 한 장을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 입학할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한참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자그마치 35년 전의 사진입니다. 우선 지금과 달리 너무 젊었습니다. 그리고 나름 멋을 내려고 했는지 머리카락에 신경을 썼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상당히 말랐습니다. 하긴 당시에는 60kg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가졌었던 생각도 떠올려졌습니다. 좋은 신부가 되겠다는 다짐,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겠다는 마음 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걱정도 많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학교 공부에 힘들어했고, 열심히 공부해도 향상되지 않는 제 모습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컸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많이 느꼈던 시간이었고, 그래서 과연 신부가 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신학생 때, 실패의 경험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수학과 과학을 좋아했던 제가 암기 중심의 철학과 신학을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하려고 했지만, 계속되는 좌절에 저의 미래를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실패의 내용이 사진 한 장에서 쫙 펼쳐졌습니다. 그렇다면 실패를 경험했던 그 시간이 잘못된 시간일까요? 만약 그 실패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주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신 것인지를 깨닫는 감사의 시간이었습니다. 또 주님께서 얼마나 대단하신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부족했던 저도 바꿔 쓰시는 그분의 힘에 감탄하게 됩니다.
과거의 제 모습을 보며, 현재의 모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포기, 좌절의 단어를 담아 사는 것이 아니라, 계속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 노력에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사랑이 합해져서 과거보다 더 나은 나를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그 큰 힘에 대해 오늘 복음은 증언합니다.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지요. 그는 “나자렛 사람 예수님,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던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달리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25)라고 꾸짖으십니다. 더러운 영의 말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직 그분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 자체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더러운 영들도 복종할 수밖에 없는 주님의 권능과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사랑을 전혀 보지 못해서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고, 자기 멋대로 쉽게 판단하고 스스로 좌절과 절망 속에 빠진 것이 아닐까요?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마르코 1,21ㄴ-28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깨끗한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악한 영을 쫓아내고
선한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어둔 영을 쫓아내고
밝은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내모는 영을 쫓아내고
보듬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부수는 영을 쫓아내고
이루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가르는 영을 쫓아내고
모으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움켜쥐는 영을 쫓아내고
베푸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짓밟는 영을 쫓아내고
세우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할퀴는 영을 쫓아내고
어르는 영을 품으리라
영성 깃든 사람이 되고자
죽이는 영을 쫓아내고
살리는 영을 품으리라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신 예수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은 힘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된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사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히브4,12)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몹시 놀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하느님의 힘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당신의 명예와 영광을 높이는 데 있지 않고 사람들, 특히 어려움 중에 있는 이웃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성장하게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도 자기를 열지 않는 사람은 그 권위를 체험하지 못하고 성장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는데 ‘가르치는 예수님’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은총을 주시는 분으로 기대합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앓는 이들을 일으켜 세우시며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시어 그들의 위로와 힘이 되어주셨듯이 오늘도 우리에게 그렇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데는 소홀히 합니다. 사실 은총은 그분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함으로써 발견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바를 잘 알아듣고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배우려는 노력과 실천도 하지 않으면서 어떤 기적이나 체험을 바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느님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데 그것을 신비로운 현상이나 꿈, 장미 향을 느끼는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어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일시적으로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며 분명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체험은 하느님 말씀을 통해 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전하는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은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1테살2,13) 하고 말합니다.
성경의 말씀이 단순히 문자가 아니라 나에게 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 깊은 감동과 기쁨을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체험케 됩니다.
성경을 읽는 순간 어떤 말씀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를 전율케 한다면, 실행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그 순간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권위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골로3,16)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 악령 들린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데, 더러운 영이 소리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1,24) 악령의 말은 사실이지만 일종의 아부, 타협의 제안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이 고수라는 것을 인정하니까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1,25) 하시며 단호히 타협을 거부하셨습니다.
그러자 악령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습니다. 악령은 떠나갈 때도 순순히 물러가지 않고 발악합니다. 더럽게 떠납니다. 악령이 들린 사람의 태도는 오늘도 이웃 안에서, 바로 나 자신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악령이 예수님의 정체를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인정하면서도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하며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말 따로, 행동 따로입니다. 이것이 악령의 특성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선언해 놓고는 실제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있지 않은지 돌아볼 일입니다. 미사에 꼭꼭 참여하면서 아주 경건한 듯 보이지만 이웃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잊고, 생활 안의 주님을 따르기는 거부하는 ‘따로국밥 신앙’은 아닌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였다고 자랑하는 사람, 기도를 많이 한다고 뽐내는 사람, 각 신심 단체에 이름을 걸어놓고 위로를 삼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살지 않고는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여러분이 예수님을 닮아 주님의 가르침을 실행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권위를 지니게 되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권위의 원천인 하느님>
-하느님 중심의 삶-
어제 일간신문 1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스마트폰이 아이 뇌 잠식...‘도파민 인류’출현이란 제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알파(Alpha)세대. 인류통계학자들은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이후인 2010년 이후 태어난 세대를 알파 세대라고 부른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뇌가 일찌감치 유투브 등 짧은 영상 ‘쇼트폼’(Short-form)에 노출되면서, 글을 읽고 이해하는 정적인 활동에 흥미를 잃게 됐다고 지적한다. ‘짧은 유투브 동영상은 서사가 없어요. 그저 게임처럼 자극적으로 들어오는 거죠. 가만히 책 읽는 행위는 아이들에게 흥미를 유발하지 못해요.’ 스마트폰에 흥미를 뺏긴 아이들은 글을 낯설어하고 있다.”(한겨레 2024.1.8.)
아이뿐 아니라 모든 세대에 전방위적으로 확산되는 위시의 시대, 알파시대입니다. 현대판 악마가 되는 문명의 이기 스마트폰입니다. 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동영상의 유혹이나 중독에 빠지지 않기 위해 참으로 분별력과 자제력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저만해도 2000년까지는 손으로 온통 강론을 쓰다가 지금은 노트북을 사용하니 손으로 글 쓰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사실 요즘 손으로 쓴 친필 편지를 받아보기는 하늘에 별따기입니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만년필을 구입해 손 글씨를 쓰기 시작했고, 보속 시 말씀 처방전은 반드시 만년필로 씁니다.
보고 배웁니다. 듣고 배웁니다. 읽고 배웁니다. 가상의 세계가 아닌, 직접적인 살아 있는 만남의 관계가 사람됨에 결정적입니다. 믿음도 희망도 사랑도 기도도 겸손도 순종도 성실도 진실도 침묵도...보고 듣고 읽고 배울 것은 끝이 없습니다. 말그대로 배움의 여정입니다. 수도자의 기본 요소는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이라 했습니다. 영적지도의 두 목표는 하느님을 알게 해주는 것, 그리고 자기를 알게 해주는 것이라 했습니다.
권위 역시 보고 배웁니다. 권위주의는 배격해야 하겠지만 권위는 필수입니다. 권위를 잃어버리면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신뢰와 비전을 지닌 권위의 사람은 모두가 배움의 대상,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보고 배우는 공동체 지도자의 권위는 절대적입니다. 권위 상실보다 큰 불행은 없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공동체가 가정이 무너집니다. 권위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자기에게 맞는 참 권위의 형성이 중요합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답게’ 사는 분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로 말하면 존엄한 품위와 권위의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부터 42년 전, 1982년 늦깎이로 34세에 수도원에 입회하여 대학에 편입하여 희랍어를 배울 때 배운 '권위'라는 단어 뜻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권위(ex-ousia)’, 즉 ‘존재로부터’ ‘안으로부터’ 나온 권위의 어원입니다. 밖에서 덧붙여진 권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로부터 자연스럽게 저절로 흘러나온 권위입니다. 옷 잘 입었다고, 지위가 높다고, 재물이 많다고, 배운 것이 많다고, 학식이 많다고, 예쁘다고, 권력을 많이 지녔다고 권위가 아니라,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참되고 고결한, 깊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품이, 인격이, 품격이, 저절로 권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런 권위는 직감적으로 감지되며 이런 참 권위 앞에는 저절로 승복하게 됩니다.
어떻게 참 권위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답을 줍니다. 한결같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 하는 것입니다. 참 권위의 원천은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에 항구하여 날로 하느님을 닮아 겸손하고 온유한, 진실하고 성실한 참나가 되어갈 때 저절로 참 권위입니다. 하느님과 날로 깊어가는 신망애와 삶과 더불어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 권위입니다.
그러니 어린 자녀들이나 젊은이들은 어른이나 부모의 이런 권위를 보고 배웁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이런 어른에게서는 꼰대가 아닌 참 어른으로서의 신선한 매력을 발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말그대로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권위의 위력입니다. 더러운 영이 예수님의 권위를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예수님의 권위 있는 꾸짖음에 더러운 영은 큰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 고백합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움직이는 중심의 산같은 권위의 예수님입니다. 이런 참 권위 앞에 사람들은 저절로 존경과 사랑을 드리기 마련입니다. 저절로 공동체의 안정과 평화, 질서가 이뤄집니다. 24년전 불암산을 닮고 싶은 마음에 ‘큰 바위 얼굴’ 일화를 생각하며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 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묵묵히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18년전, 그리고 14년 전 써놨던 두 편의 시도 생각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산이다”-2006.4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2010.12
참 권위의 큰 어른을 상징하는 불암산을 닮고 싶은 마음에 흠모하며 쓴 시들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권위가 아닙니다. 날로 주님과의 깊어지는 신망애의 관계가 참 권위의 사람, 참 권위의 어머니로 만듭니다.
1독서 사무엘기 상권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서 저는 어머니의 참 권위의 비결을 봅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부전자전이 아니라 모전자전의 경우는 얼마나 많은지요! 제 경우도 이에 해당됩니다. 제1독서 마지막 부분에서 기도의 어머니, 믿음의 어머니, 한나의 진면목이 드러납니다.
‘엘카나가 아내 한나와 잠자리를 같이하자 주님께서는 한나를 기억해 주셨다. 때가 되자 한나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한나는 “내가 주님께 청을 드려 얻었다.”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사무엘이라 하였다.’
하루하루 날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성인답게, 살아감으로 주님을 닮은 존엄한 품위를 지닌 참 권위의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거룩한 소명이자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참 권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아멘.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진정한 권위>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요즘은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걱정들입니다.
사법부의 권위, 통치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요즘 권위가 떨어진 것을 얘기함은 그런 권위를 말함이 아닐 것입니다. 스승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고, 성직자들의 권위도 전과 비교할 때 별로 없음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보다 스승과 성직자들의 권위가 사라짐을 걱정함은 이들이 바로 가르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이들의 권위가 있어야 이 길로 가던 사람이 저 길로 길을 바꾸고, 방황하던 사람이 마음을 잡고 올바른 길을 가며, 주저앉아 있던 사람이 다시 기운을 차려 일어설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인지 멘토니 멘티니 하는 서양말이 요즘 유행입니다. 멘토Mentor는 단순한 지식전달자와 기술 전달자가 아닙니다. 인생의 지혜를 알려주고 중요한 순간 옳은 판단을 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너도나도 멘토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며 비판적으로 얘기하자면 스승을 깔아뭉개면서, 멘토가 없으니 멘토가 있어야 한다는 요즘 젊은이들이 우습기도 하지만 나이 든 사람으로서 그리고 수도자요 사제로서 반성적으로 얘기한다면 부모로서, 스승으로서, 성직자로서 우리 기성세대가 권위를 상실하였음을 마음 아파합니다.
부모는 부모답고, 스승은 스승답고. 성직자는 성직자다웠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직능적 권위, 권력적 권위, 직위적 권위, 주둥아리 권위는 권위가 아닙니다.
그다움으로 지니게 되는 존재적 권위. 실천하는 바를 가르치는 실천적 권위. 사랑으로 다가서고 이끄는 동반적 권위. 행복으로 행복에로 이끄는 행복한 권위. 이런 것들이 진정한 권위이지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뛰어난 권위는 영적인 권위가 아닐까요? 그런데 그게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악령들을 퇴치하는 그런 권위인가요?
그런 영적인 권위가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런 영적인 권위는 없더라도 육의 영을 분별하고 부끄럽게 하는 영적인 권위, 그래서 지상이 아니라 천상을 갈망케 하는 영적인 권위만 있어도 좋을 것입니다.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1,25)
<권위!'>
오늘 복음(마르1,21ㄴ-28)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말씀'입니다.
주님세례축일인 어제로 성탄시기를 끝내고, 오늘부터 연중시기가 시작됩니다. 연중시기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구체적인 활동과 땀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주된 활동'은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이유는 율법 학자들과 달리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권위'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또 놀랍니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1,2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습니다.
'권위'는 '힘'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끄는 힘'입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더러운 영들을 쫓아내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 이 나라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이끄시는 공정과 정의 나라인 하느님의 나라인가?
모두 함께 잘 살고 일치되는 나라, 평화로운 세상을 지향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가?
정말로 믿는 이들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고 있는가?
우리는 매순간 '두 영(靈)', 곧 '깨끗한 영(성령)과 더러운 영(악령)에 의해 움직여집니다. 어떤 영을 따라가느냐는 문제는 '나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의 힘(권위)'으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더러운 영을 쫓아내고, 우리를 생명과 부활로 인도하는 성령을 따라갑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xPKP85uEpoQ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 25)
우리는
더러운 영이
아니라
하느님 생명을
먹고사는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입니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사랑은
언제나
하느님을 선택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올바른 선택에는
나쁜 거래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마귀의 고백이
올바른 선택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더러운
영의 추방은
새로운 삶을
열어주시는
각별하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
열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조용하지
않고서는
뜨거울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간절하신 마음이
우리를 살립니다.
우리의 어둠을
믿고 내어주어야
빛이 들어옵니다.
하느님을 닮은
올바른 인격으로
우리를
살게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빛은 고요하고
하느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부정할 수 없는
어두움과
부정할 수 없는
하느님의 빛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며
더러움을
치유하는
말씀입니다.
고독과 침묵으로
더 깊어지고
더 가까워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오늘도 우리는
하느님을 선택하는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인격은
말씀과 사랑으로
침묵과 고요로
더 아름다워지고
더 깊어져 갈
뿐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