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통 그 16 (임 춘앵 국극 단)
3학년 1학기말 고사를 이틀째 치고 영 찜찜한 마음으로 교문을 나서는데 K군이 나를 꼬드겼다.
“임 춘앵 국극 단 보러 갈래?”
“내일 마지막 시험이잖아?”
“그래서? 시험공부 하겠다 이 말이 가? 김밥 옆구리 터지겠다.”
K군이 내 옆구리를 손아귀로 피아노 건반 두드리듯 훑었다. 딴은 그렇다. X나게 공부 해봐야 엉뚱한 것만 나와 헷갈리게 하드라.
"가자!"
나도 흔쾌히 깃대를 꽂았다.
“후렛빠들 한데서 연락이 왔는데 여고 애들도 오후에 단체 관람 한단다.”
후렛빠 클럽은 안동 여고 7공주들의 모임 명칭인데 선배들과 더러 어울리기도 했다. 그 당시 남고나 여고 교복이 검은 무명이었는데 반해 그녀들은 검 청색 빛깔의 메끄리한 고급 천으로 만든 교복을 입고 다녀 후렛빠라고 했는지 시쳇말로 그 당시 풍습에 어깃장을 놓고 나름대로 폼을 잡는다고 그렇게 불렀는지 몰라도 우린 그녀들을 통상 후렛빠라고 불렀다.
“헌데, 선생님들이 뜨면 어쩌지?”
“형님만 믿어 !”
K군은 다짜고짜 자기 집으로 끌고 가드니 웬 군복 한 벌을 나에게 던졌다. 휴가 나온 형 거라고 했다. 그리고 자기는 노타이 차림의 양복에 맥고모자 까지 걸치고 나섰다.
우리는 극장까지 가는 내내 서로 손가락질하며 낄낄거리다 극장 앞에서는 의젓하게 허리를 곧추 세웠다. 극장은 역전 문화극장이었는데 한쪽에는 여고생들이 한창 입장하고 있었고 옆 통로는 일반인 차지였다. 우리는 일반인 통로를 통해 폼을 잡으며 입장하였다. 줄 행간에 떼 지어 서 있던 후렛빠들이 우리를 용케 알아보고 키드득거리며 요란을 떨었지만 우리는 제비원 부처마냥 더욱 의연하게 행동했다. 그것이 더 우스운지 그녀들은 배꼽을 쥐고 길바닥에 뒹굴었다.
1층은 여고생들 차지였고 일반인은 2층이었다. 우리는 마침 비어있는 맨 앞자리에 앉았다. 1층의 그녀들은 간혹 엄지손가락을 펴 보이며 관심을 표했다. 우리는 서로를 쿡쿡 찌르며 웃음을 참느라 정말 제비원 부처님 마냥 볼떼기에 사탕을 문 형국이었다.
국극의 제목은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였다. 국극이 점점 크라이막스로 향하자 장내는 탄식과 흥분의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K군이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턱짓을 했다. 1층 옆 출입구에 N선생님이 우리 쪽을 올려다보고 있고 뒤돌아보니 H선생님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모자를 한 번 더 깊숙이 눌러쓰며 몸을 한껏 움츠러뜨렸다.
“저- 혹시?”
“왜, 그래요!”
H선생님의 조심스런 물음에 비해 K군의 대답은 도리어 묵직하고 퉁명스러웠다. 순간 H선생님은 머쓱했다가 다시 어정쩡하게 더듬거리며 물었다.
“혹시 기남이가 아니 기남씨가.......?”
“어허, 그 참 성가시네. 지금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K군이 버럭 화를 내었다. 그 소리에 나는 도리어 간이 콩알만큼 졸아 들었다. H선생님도 엉겁결에 K군에게 꾸벅하고는 돌아섰다. 하긴 중요한 장면이었다. 낙랑 공주가 단검을 품고 자명고를 향해 갈등하고 있었다. ‘사랑을 따르자니 아비가 울고 아비를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 나의 눈도 두 갈래였다. 조금 있으니 H선생님이 N선생님 곁에 나타나드니 2층 우리 쪽을 보고 수군거리다 사라졌다. 두 분이 같이 닥칠 모양이다. N선생님이 오시면 끝장이다. 내 육사 입학을 위해 중요한 참고서까지 챙겨 주시는 분께 대한 배신이다.
“야, 뛰어 내리자!”
우리 둘은 2층에서 1층 통행로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무대 옆 출입구로 내 달렸다. 쇠똥이 굴러도 까르르거리고 낙엽 한 장에도 눈물짓는 사춘기 소녀들이 모인 곳이라 우리의 돌출 행동은 극장 안을 뒤집어 놓았다.
출입구를 가로막은 커튼을 제키고 들어서니 화장실과 분장실 표지판이 보였다. 우리는 고양이에게 쫒기는 쥐처럼 엉겁결에 분장실 문을 밀고 들어섰다.
“아.........!!”
순간 우리는 탄식을 했고 분장하던 많은 배우들도 놀라 비명을 지르거나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마구잡이로 우리에게 집어 던졌다. 우리는 멀리서 보니 그렇게 예쁘고 멋있던 그녀들을 가까이서 보니 메이크업이 너무나 진해 괴물 같았고 여자들만의 국극이라 가슴을 여상스레 내놓고 화장하는 그녀들 앞에서 쩔쩔 메기만 했다.
“너 거들 뭐야?”
그 중 나이가 지긋한 배우가 옷가지로 가슴을 가리며 소리 질렀다.
“사실 우리는 학생이거든요. 선생님이 잡으러 와서......”
K군이 다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들 얼굴에 갑자기 웃음꽃이 피며 선행 학습을 수 없이 경험한 노련한 나무꾼들 마냥 한마디씩 했다.
“싱싱한 수사슴 두 마리 횡재했네.”
“내 등 뒤에 숨어.”
어떤 분은 큰 치마를 뒤집으며 그 속에 숨으라고 농을 하기도 했다.
그때 나이 지긋한 분이 우리를 불렀다. 배우들의 태도로 보아 임 춘앵 단장 같았다.
“애들 머릿속을 짚단으로 채우려 나!”
그녀는 우리를 소품 뒤에 숨겨 주며 투덜거렸는데 그 말은 지금까지도 잊혀지지 않는다.
한참을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우리는 망각의 명수인 쥐처럼 머리를 내밀기 시작했다. 분장실에서 무대를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고 그녀들이 극의 진행을 위하여 분장하는 모습이나 무대에 나가고 들어오는 시스템이 정말 흥미롭고 재미가 쏠쏠했다. 그녀들은 진정 프로답게 자기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국극은 끝났다.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그녀들에게 고개를 꾸벅거리고 돌아 서는데 누군가 뒤통수에 한마디 던졌다.
“오늘 좋은 공부한거야. 싸나이답게 커라 !”
우리는 입구 쪽으로 가다 이심전심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화장실 옆으로 돌아 극장 뒤 담장을 동시에 뛰어 넘었다.
“이리와 !”
이미 N선생님이 그곳에 먼저와 버티고 있다가 우리를 불러 세웠다.
우리는 도축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어깨를 떨 군 채 선생님의 구두 뒤축만 보고 교무실 까지 끌려갔다. 선생님의 구두 뒤축이 한쪽으로 너무 많이 닳아 위태위태한데도 꼿꼿하게 걸으셨다.
“변장까지 하고 극장에 들어가! 중요한 장면이잖아요?. 엎드려!”
교무실에 들어서자마자 H선생님이 기다렸다는 듯이 몽둥이로 엉덩이를 들고 팼다. 나는 H선생님의 체벌이 강 할 수 록 위안이 되었다. 맞음으로 N선생님께 속죄하는 기분이어서 H선생님의 매질을 순한 한 마리 양이 되어 까딱도 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 H선생님은 그것이 도리어 얄미운지 계속 두드렸다.
“한심한 놈들 !”
H선생님은 제풀에 지쳤는지 몽둥이를 팽개치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다
“왜 우리가 한심 합니까?”
K군이 벌떡 일어나 H선생님께 대들었다.
“이놈 봐라! 그럼 오늘 일에 잘못이 없다?”
“예, 없습니다!”
“이 꼬라지는?”
“사복 입은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얼씨구, 극장 간 거는?”
“우리 나이에 그 정도도 못 봅니까?”
“점입가경이네. 내일 시험이자나!”
“그건 제가 알아서 합니다.”
“임마가, 정신이 빠져도 한창 빠졌구나!”
H선생님은 다시 몽둥이를 들었다. 그 때 N선생님이 끼어들었다.
“H선생, 그 정도면 됐어요. 보내 줍시다.”
그 날 교문을 나서는 K군의 어깨가 그렇게 넓어 보인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내 머리는 전차에 박힌 것처럼 엔간히 헷갈렸다.
첫댓글 기말 고사중에 극장가는 뱃장은 두둑하다못해 터진뱃장이구나. 하여튼 스릴 만점에 많은 것들을 경험했구나. 고등학교 시절은 야망과 낙만이 최고조에 달하고 엉뚱함이 언제 어디서 돌출 할 줄 모르고 뛰놀 때이지.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다.
난 문화 극장 영화보다 박호규 선생님께 명찰 뺐기고 영화다보고 나와 그이튼날 시험보다가 퇴장당했다 .그때생각하며 자네 글읽으니 웃음이 절로나는군.
기남이가 저승에서 빙긋이 웃겠다.
즐거운 추억의 한 페이지이군.
변장하고 "임춘앵국극단" 도둑관람 재밌었네요, 저도 친구몇이서 꼬리치마에 긴 코트입고 마후라쓰고 역시나 고재홍님과 또~옥같은식(영화) 관람했지만 들키진 않았었습니다..모두가 다시 상상해보는 옛추억의 작품들입니다..읽으면서 웃음이 나를 즐겁게 했답니다~
오랫만에 추억거리를 읽게 해주셧네 참 재미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