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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국론 1부~2부 주석
109p
서언
1. 하느님의 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앙으로 살아가면서, 불경스런 자들 틈에서 나그넷길을 가는 나라이기도 하고, 저 영원한 처소의 확고함도 아울러 갖춘 나라이기도 하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통치의 직접적 현현이라 여겨지는 물리적 로마제국의 붕괴에 대한 해답으로 또 다른 영역을 그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구절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역사적 한계를 극복한 하느님의 나라, 그리고 불완전한 세계속에서 살아가나 정신적 영역에서 확고불변한 내세에 대한 소망을 통해 확립되어지는 신앙 안에서의 하느님의 나라를 제시한다.
완벽한 물리적 조건으로서의 하느님의 나라가 이젠 정신적 영역에서 현실을 인내해가며 내세에 대한 소망으로 일궈가는 신앙 안에서 새로운 터전을 잡는 것이다.
1부 (1-7)
그리스도 경배로 중단된 전쟁
(1). 야만인들이 로마도성을 침탈할 때 그리스도의 적대자들을 살려준 까닭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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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지만 그들이 올바른 무엇인가를 조금이라도 지각할 수 있다면, 적병들에게 당한 모질고 잔학한 일까지도 하느님의 섭리로 돌려야 마땅하다. 섭리는 인간들의 타락한 습속을 전쟁으로 교정하고 척결하며, 심지어 살멸할 인간들의 의롭고 상찬할 인생마저 그 같은 시련으로 단련시키고, 그렇게 단련된 인생을 더 나은 곳으로 옮겨주거나 다른 용도로 이 지상에 아직 붙잡아 두거나 한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시에 최근 일어난 이민족의 로마침탈에 대한 변신론을 펼치고 있는 듯하다. 이미 일어난 폭력적 현실에 주안을 두기 보다는 이러한 현상에 너머에 플라토니즘 고유의 사상을 대입하여 오히려 현실과 물질적인 것에 가치를 두고 있는 삶의 태도를 비판하고 신앙심을 고취시키고 있는 것이다. 전쟁과 감각적 세계의 비극은 현실적 가치에 있어서 탈가치 되어 이성적 세계, 즉 정신적 실체인 하느님에 의한 교정과 단련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 비극에 대해 신앙적인 해석으로 삶에 대한 겸허하고 인내하는 자세를 함양하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현상에 대한 이와 같은 플라토니즘적 재해석을 이해할 수 는 있지만 공감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폭력은 폭력일 뿐이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신의 폭력이 정당화된다면 우리 안에는 신적 계시를 빙자한 수많은 폭력과 증오의 움직임에 대해서 단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윤리적 기준이 모호해진다. 역으로 그렇다면 심판으로 인한 신의 폭력이 설사 일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수많은 생명과 삶이 죽어나가는 속에서 침묵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인가?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되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질문은 후에 지속하기로 한다.
(2). 승자들이 패자들을 그들이 섬기는 신들 때문에 살려준 전쟁은 일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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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 사실은 결국 신상이 사람들을 지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신상을 지켰음을 의미한다.
: 이 구절은 물질로 이루어진 신상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 단순히 이방신의 무력함을 지적하며 동시에 기독교의 신적 영향력이 실제 사건 속에 일으켰다고 간주된 보호함에 대한 옹호로 여겨진다. 즉 이방신은 인간의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며 오히려 인간에게 자신의 운명을 의탁해야하는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 더불어 이방 민족이 로마를 침략할 당시 성당에 있던 자들이 보호받던 것을 상기하여 기독교 신앙의 실제적 효용을 입증하려 하는 듯이 보인다. 여기서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과 속이라는 이분법을 통해 절대적 정신적 실체인 하느님이 그것의 물질적 현현이라 할 수 있는 성소에서 실제적으로 삶을 보호할 수 있고 궁극적인 영향력을 끼쳐 질서를 세우는 능력임을 논증한다.
(3). 트로야를 지켜주지 못했던 가신들을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리라고 믿은 로마인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117p
4. 만일 베르길리우스가 그자들을 신이라고 하면서도 패자라고 일컫는다면, 그리고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인간에게 맡겨지는 존재라고 말한다면, 이런 신들에게 로마의 수호를 맡겨 왔다는 생각이 얼마나 미친 짓인가.
: 로마수호의 일익을 담당해 왔다고 여겨지는 이방신들에 대한 비판의 근거로 베르길리우스의 사례를 인용하고 있다. 이 사례인용의 근저에는 신은 인간세계에 대하여 완전성과 초월성을 견지하고 있어야한다는 견해가 전제해 있다. 또한 이러한 신적 완전성에 근거하여 국가 공동체가 세워져야한다는 견지를 보이고 있는 듯하다. 그러한 점에서 기독교의 하느님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논지대로 이방민족의 침탈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존재, 이방인과 로마민족 모두를 심판하는 초월자로 대조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7). 로마 도성의 파괴중에 벌어진 잔혹행위는 전쟁의 관습대로 일어났지만, 아량이 베풀어진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진 위력에서 유래했으리라.
127p
5. 야만인들의 그 잔인 무도하고 악독한 마음을 떨게 만든 이는 그분이며, 그분이 그들에게 재갈을 물렸고 그분이 기적적으로 그들을 제어한 것이다. 까마득한 옛날 예언자를 통해 “내가 그들의 악을 매로 다스리고, 그들의 죄악을 채찍으로 벌하리라. 그러나 내 자비만은 그들에게서 거두지지 않으리라”고 말씀한 바로 그분 말이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질서에 대한 원인을 탐색하기 보다는 폭력의 침입 가운데 성소의 안전을 근거로 하여 하느님의 신적능력을 옹호하려고 한다. 더불어 이러한 신적능력을 입증하며 이것을 성서안에서 드러난 신의 속성(자비)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한다. 당대의 혼란에 대한 해석을 하는데 있어서 사용되어지는 통찰은 물질적이고 실제적인 악에 있지 않는 듯싶다. 이 무질서함은 감각세계의 정신세계에 대한 멀어짐과 그로인한 타락이라는 구도(도덕적)악에 대한 절대자의 심판과 자비라는 주권에 끊임없이 초점을 맞추는데 있는 듯하다. 이러한 도덕적 계도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회를 새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런 것과 상관없이 물질세계로부터 분리되어 사람들의 종교적, 도덕적 고양(플라토니즘 적인)에 인간 존재의 방점을 찍고 이를 통해 부가적으로 얻어지는 사회적 안정을 꾀했던 것일까. 어떤 방향이든 로마제국의 몰락과 더불어 의심받고 있는 기독교세계의 권위를 변증하려고 했음은 틀림없다.
제 2부
인생의 해악 혹은 시대의 해악
(8). 유리한 일과 불리한 일이 선인과 악인에게 공통으로 일어나는 일이 흔하다
(8)-1 재앙으로 악인들은 교정을 받고 선인들은 교육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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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 대신 잠시적 선과 잠시적 악은 양자에게 공통으로 있기를 바랐으니 이것은 악인들도 누리고 있음을 보고서 선인들이 잠시적 선을 너무 욕심스럽게 탐하지 않기 위함이고, 또 선인들도 흔히 겪고 있는 것임을 보고서 그 잠시적 악을 비굴하게까지 피하지 않게하려는 것이었다.
: 여기서 제시되는 선과 악은 절대적 의미로서의 선과 악이 아닌 상대적 가치를 지녔다고 여겨진다. 선과 악은 전통적 의미에서 궁극적으로 따르거나 피해야할 양대축이 아니다. 둘다 감각세계 내에 존재하는 일시적 행복과 불행을 결정짓는 물질적 요소로서 선인들 또한 악인들이 누리는 선을 보고서 이것에 탐닉하지 않기를 그리고 모든 선인들이 함께 겪고있는 일시적 악을 보고서 비겁하게 타협하거나 굴하지 않기를 요청한다. 즉 물질적인 선과 악을 경계하여 정신적 세계로의 편입을 그는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정신적 세계의 관점에서 로마 침탈이라는 시대의 해악의 맞은편에 물질적 선 또한 인생의 해악으로 자리할 수 있음을 위치시키고 시대적 해악이라는 문제에 대해서 플라토니즘적 도덕적 관념으로 변증하는 듯이 보인다.
(8)-2 하느님의 지극히 정의로운 경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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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만약 하느님이 그것을 청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량껏 확연하게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순경을 베풀어주는 일이 하느님 소관이라고 말할 것이고, 만일 순경을 청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소원대로 다 베풀어준다면 우리는 오로지 그런 상급을 받을 목적으로만 하느님을 섬겨야 한다고 여길 것이다.
.......당하는 수난이 비슷하다지만 당하는 수난자의 차이는 여전히 남느니, 동일한 환난 밑에서도 덕성과 악덕은 동일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힘이 덮쳐오는데 선인들은 시험하고 정화하고 걸러주는 데 비해 악인들은 단죄하고 파괴하고 말살시켜 버린다..... 그러니깐 무엇을 겪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누가 어떤 인간으로서 겪느냐가 무척 중요하다.
: 순경(형통)의 예를 들어 평탄하지 않는 인생에 대해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의 내면 자체가 적절한 순경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너무 적은 순경은 절망하게 하며 너무 많은 순경은 신에 대한 순수한 경외심을 훼손한다는 것. 이 논리를 빌어 똑같은 인생의 역경을 대함에 있어서도 사람마다 달라지는 결과를 통해 결국 외부세계가 아닌 자기자신의 정화의 문제로 새로운 시각을 갖기를 요청하는 듯하다. 지금까지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덕적 관념이 사회적 공정이라는 면이 아닌 개인 내면의 정화라는 면에서 현상을 재해석하기 위한 준비단계가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로마침탈과 개인의 삶의 역경이란 주제에서 그의 시선은 줄곧 그것을 대처하고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에 그의 눈길이 가 있었다. 모든 것에서 벗어난 초연함이 그 결과물로 보이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
(9) 교정을 위해 선인과 악인 똑같이 환난을 당한다.
9.1 그리스도인들도 적군의 파괴로 고난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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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저 선량한 사람은 파멸하는 이 악인들을 바른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는가? 그들과 함께 살면서 과연 그들과 함게 살아야 하는 도리를 다하는가?......
본인들이야 자신의 경미하고 용서받을 만한 죄마저 당연히 두려워하겟지만, 악인들의 단죄받을 죄악을 묵인하면서 넘어가기 때문에 악인들과 더불어 잠시나마 징벌을 당하는 것은 정당하다.......현세생활의 감미로움을 사랑하다가 범죄하는 사람들에게 선인들이 쓰라린 충고자가 되었어야 하는데도 쓰라린 인간이 되기를 싫어했던 것이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세적 고통의 유(특별히 로마침탈에 관련하여)를 하느님의 도덕적 교정의 목적 뿐만 아닌 악인들을 계도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들어 징벌의 목적 또한 부여한다. 여기서 세속적 세계에 대한 플라토니즘적 세계관과 기독교세계관의 조화를 이루려고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면모를 보게 된다.
플라토니즘적 세계관이 보이는 감각적 세계에 대한 전적인 부정과 지성적 세계에 대한 지향 사이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적 세계관과의 조화의 관점으로 정신적 세계의 우위를 인정하되 감각적 세계 또한 전적으로 부정하여 개인적 초탈을 하기 보다는 여타 다른 도덕적 악인들도 계도하여 변화시켜야할 대상으로 통합한 이해를 보이는 듯 하다.
9.3 선인들도 교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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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함께 매를 맞는데 둘다 악한 삶을 살기 때문이 아니고 둘다 현세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 징벌의 의미가 다시금 구체화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덕이해가 기독교의 복음서가 담고 있는 아가페적 사랑의 실천이나 신의 자비와 의지에 대한 복종, 예배보다는 플라토니즘적 세계관으로 다시 정의된 궁극적 실체(Reality)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추구, 즉 이 감각적 세계에 대한 욕망에서부터 자유함(금욕)과 실체에 대한 지적 추구(철학)이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덕해석에 주요 골자임을 이해할 수 있다. 현세의 삶을 사랑한 다는 것은 여기선 도덕적 계도를 회피하고 안락한 삶을 유지한다는 의미이지만 이 도덕적 계도 또한 감각적 세계로부터의 자유함과 자기절제에 그 주 내용이 이루어진다.
10. 그리고 왜 선인들이 악한 시련을 당하는가 하는 다른 명분이 있다. 바로 욥이 그 명분을 보여주었다. 인간 정신이 시험을 받음으로써 자기가 얼마나 경건한 덕으로 또 사심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법이다.
: 시련의 목적이 한 가지 더 추가된다. 시험을 통해 인간정신이 사심없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거꾸로 이 시험을 통해서만 인간은 하느님 사랑을 보일 수 있다는 것 아닐까. 이 사심은 현세적 복락을 추구하지 않는 시련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탈욕의 반의어일까. 성경을 통해 보이는 시련의 의미가 플라토니즘적 세계관으로 차용되는데 이 시험의 목적이 징벌과 계도에 있음이 큰 두가지 기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에 대해 징벌은 인간의 죄악과 교만에 대한 계도는 인간의 사심이 전제될 때만이 성립될 수 있다. 이러한 것이 전제가 될지라도 나는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속의 이성을 통한 공정에 대한 이해가 아닌 탈현실적인 플라토니즘적 세계관을 통해 성립된 인간의 죄악과 사심에 대해 의문을 가한다.
(10). 성도로서는 현세 사물을 상실해도 잃는 것이란 없다.
(10).1 신실하고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선으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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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사실 자족할 줄 아는 경건은 큰 이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갈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10).2 재산을 잃어도
그는 착실한 종답게 자기 주님의 뜻에 커다란 권능을 부여하고 믿었으며 그 뜻을 발자국마다 따라가면서 정신적으로 부유해질수 있었으므로,
: 정신적인 부유, 즉 내적 만족과 자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만족하여 불필요한 욕구를 조절하고 또한 하느님의 명령으로부터 삶을 조형해가는 정신적 부유함을 추구해 갈 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조언한다. 이러한 내적 삶에 충실하고 내적 인 삶을 위해 불필요한 욕구를 조절함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재화에 얽매이지 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금욕을 통한 자족과 내적인 삶의 풍성함을 통한 정신적 부유함을 삶의 이상으로 삼고 있다.
(10).3 고문을 당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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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그분은 자기를 위해 고난받은 사람들을 영원한 행복으로 부유하게 만들어 주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변하는 선을 사랑해야 한다는 법을 가르쳐 주엇다는 점에서는 저 재산보다는 차라리 고문이 더 유용했다는 말까지 할 수 있다.
: 현실적 불의의 문제(고문과 약탈)이라는 문제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재물에서 자유한가라고 되묻고 있다. 소유는 곧 이방인에 의한 고문으로 이어지는 구조로 글을 이어가며 금욕과 포기의 삶을 옹호하는 문체로 바뀐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재산과 고문에 대한 문제 뿐만 아닌 뒤의 로마침탈로 인한 부녀자의 강간문제와 자살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를 유지한다. 현실적 불의의 문제를 신적 계도와 심판으로 범주를 바꿔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정당한 신적정의인지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을 듯하다. 확실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가 아닌 현실적 가치에 대한 부정으로 초월을 옹호하고 있는 듯하다.
(16). 거룩한 동정녀들마저 포로 신세에서 추행을 당했는데, 그것의 의지의 동의 없이도 영혼의 덕성을 오염시킬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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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무엇보다 먼저 올바로 살아가는 덕성이라는 것은 정신의 처소로부터 육신의 지체들에 명령을 내리는 무엇이라는, 또 육신은 성스러운 의지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성스러워 진다는 입장을 확고히 해야겠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포로신세에서 추행당한 거룩한 동정녀들에 대한 위로를 위해 성스러움과 덕성에 대한 설명을 하기로 했음을 먼저 밝혔다. 육신 즉 감각적 영역은 정신적 영역에서 영향과 명령을 받는다는 전제를 편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침탈된 몸의 영역은 정신의 동의가 없다면 타락했다고 볼수 없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전과 같은 정신세계 중심적 사고를 펼치지만 이 경우는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거룩한 동정녀들의 입장을 옹호하고 변호하기 위해 이와 같은 논리를 활용한다. 그러나 역으로 보자면 어디까지나 이런 논리는 그들의 정신 또한 감각적 욕망에 물들지 않아야 한다는 전제 또한 필요로 한다. 폭력적 현실에 대한 회복과 위로는 그 변론의 목적에 담겨져 있지만 목적을 이끌어내는데 사용되는 논리적 과정은 회복적 정의에 눈길이 가 있지 않는 것 같다.
(17) 처벌이나 치욕이 두려워 자결하는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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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유다스도 자신을 처형함으로써 더는 자기를 벌하지 못하게 되니까, 진정으로 속죄하고 싶다면 자결을 삼가야 옳았다. 유다수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죄 많은 인간을 죽인 것이요 그리스도의 죽음을 초래한 죄인만 아니고 자신의 죽음을 초래한 죄인으로서 이승의 삶을 끝냈으니.... 그렇다면 악한 짓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사람이 자신에게 자살이라는 악을 행해야 하고, 유죄한 인간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죽임으로써 무죄한 자를 살인해야 한다는 말인가? 타인의 죄가 그 타인에게 돌아가는 것을 막으려고 자신에게 본인의 죄를 행한다는 말인가?
: 플라토니즘적 세계관에 의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와 성결 그리고 그 사이의 속죄의 논리로 신앙세계를 구축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 인생이란 성결과 속죄의 과정인 것일까. 내세적 심판에 대한 준비로 일생은 계획된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속죄논리를 받아들인다면 자살이라는 문제에 대해 유죄와 무죄라는 법률적 이해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수치심, 공포감 같은 폭력적 현실 앞에서 상한 영혼과 마음의 문제가 법률적 판단의 문제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지 단편화될 수 있는 문제인지에 대해서 나는 의문을 가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토니즘적 세계관에 서서 나름의 변호와 현실에 대한 신앙적 입장을 펼치지만 피해자, 희생자의 입장에 완전하게 서있지 못하며 오히려 죄라는 추상적 dirty로 인간의 행위를 과도하게 해석하여 폭력적 현실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문제의 본질을 가린다고 생각한다.
(18).2 강제추행이 영혼의 성덕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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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거룩한 절제의 선이 불결한 육체적 욕망에 양보하지 않는한, 자기 의도를 꺾지 않고 그 욕망에 지지 않고 저항하는 한 오히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육신 자체가 거룩해진다..... 그러므로 여자가 폭력으로 유린당하고 타인의 죄악으로 더럽혀졌더라도 본인이 아무런 동의를 하지 않았다면, 자발적 죽음으로 자신에게 벌을 내려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러니 당하기도 전에 미리 죽음으로 자신을 벌할 이유는 더욱 없다! 타인이 가하려는 그 범죄마저 아직 확실하지 못한터에 자신을 죽이는 확실한 살인이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 절제의 선이 자신에게 있어 육체적 폭력을 거절하는 한 그는 자유하다는 것이 플라토니즘적 변론이다. 즉 의지가 곧 능력이고 성덕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러한가? 또한 영혼의 거룩함이 이와 같은 범죄를 효력무효시키는 근거로 작용하는데 이는 당대의 정절기준에 의해 희생당할 수 있는 사람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로 여겨질수 도 있다. 그러나 정신적 성결의 강조로 인해 이러한 사람들에 대해 더욱 금욕적인 삶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공포와 수치의 문제가 과연 정신과 몸이 분리될 수 있는 문제일까? 자살이란 문제를 의지의 강건함 따위의 문제가 아닌 폭력에 대한 두려움, 절망으로 볼 순 없겠는가? 필자는 속죄와 정화라는 정/부정의 이분법적 정의가 아닌 상한것들을 곧게하고 치유하는 회복적 정의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19).2 그러나 그 자결은 자해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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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죄가 없으면서도 제손으로 죽음을 자초했고 빛을 증오하여 명계로 혼백을 던진 사람들 운명이 가로막느니 슬픔의 늪과 혐오스런 물살이 그들은 붙들어 놓느니라.
: 죄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현실에 가해진 폭력적 경험에 영혼이 눌린 것으로 볼 순 없겠는가? 거룩하다고 논리적으로 증언하는 ‘간주’와 실제적 폭력의 ‘경험’은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사자의 내면을 고찰하지 않고 신학적 명제와 시인의 판단을 기초하여 자신이 원하는 도그마를 확립하려 한다. 즉 근거 자체가 피해자의 경험과 괴리되어 있다.
(19).3 아무리 정결했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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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타인들로부터 간통한 여자로 낙인찍히는 인간적 혐의라는 모욕을 피하려고 자살이라는 잘못을 저지름으로써 신법의 권위를 벗어나는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
: 내면의 고결함과 양심을 근거로 하여 신법의 권위 앞에 여인들의 삶을 격려하고 보호하고자하는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같은 장의 ‘자신은 간부가 아니면서도 스스로 목숨을 끓은 까닭은 정결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허약한 수치심 때문이었다.’는 구절에서 모든 것을 강인한 정신력과 허약한 인간적 감정으로 분류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되려 명예, 강인함과 남성다움, 논리적인 면만을 강조하는 차가운 윤리의 면모를 보게 된다.
(20) 어떤 이유로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자결할 권리가 주어져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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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이것들은 우리와 더불어 이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니, 동물들에게는 우리와 공통으로 이성이 주어져 있지 않다(그러므로 창조주의 지극히 의로우신 배려로 그것들의 생사는 우리의 소용에 귀속되어 있다).
: 하나는 이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자 한다. ‘죽이지 못한다’는 것을 축자적으로 해석하지 않겠으나 이른바 감관이라고 하는 이성의 증거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시할 수 밖에 없다. 당대에는 모르겠으나 현대 과학에서는 동물 또한 감정과 나름의 도덕율이 있으며 인간과 어느정도 정서적 상호성이 형성될수있다는 증거가 나오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과 동등한 수준의 이성이 없다는 것을 이성의 부재로 말한 것인가. 아니면 전적인 영혼부재의 개념으로서 설명한 것이 더욱 가까운 것인가. 현대의 환경신학에서는 창조세계를 하느님의 생명으로 공생하는 온생명적 공동체로서 정의하고 있다. 인간은 이 환경에서 이전과 같은 위계적 질서의 지배자가 아닌 모든 창조세계를 위해 봉사하는 관리인의 역할로 새롭게 정의되고 있다. 이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절대적 정신의 명령은 죽임이라는 윤리적 문제를 신적명령으로 합리화할 수 있다는 전제로 쓰고자 한다지만 현대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논리이다.
*성 프란체스코는 동식물을 같이 하느님의 생명을 공유하는 형제이고 자매로서 대했다.
(21). 살인죄에 들지 않는 살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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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그러므로 명령하는 분에게 복종하여 시행해야 하는 사람은 칼이 칼을 부리는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과 같으므로, 살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장본인으로 하여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나, 하느님의 법에 따라서 공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서 지극히 정당한 통치권의 명분으로 범죄자들을 사형에 처할 적에는 “죽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계명을 거술러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 생명과 하느님의 명령의 문제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생사여탈권이 모두 하느님께만 달려있다는 주장을 전제로 공권력의 질서유지를 위한 생사여탈권의 행사를 정당화하고 있다. 성서에서 또한 이와 같은 질서유지를 위한 공권력을 인정한 예는 있으나 끊임없는 인간적 오류, 즉 정당한 권력의 행사에 대해서 스스로의 판단을 의심하고 재고하여 공권력 행사의 정당성 만큼이나 그 행사의 명분이 되는 질서유지 그리고 질서유지의 궁극적 목적인 생명의 보호라는 취지에 걸맞게 생명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폭력을 통한 공권력의 유지가 과연 정치권력에 대한 신학적인 완전성을 갖추고 있으며 기독교의 도덕적 지향을 따르고 있는 것인가. 적어도 불완전한 세속 안에서 어느 정도의 균형의 정도라고 생각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물질적 세계에 대한 진지한 통합과 평화룰 위한 개입으로서의 플라토니즘의 적용을 꾀했다기 보다는 그저 신적 명령과 위계를 확립시키기 위해 플라토니즘과의 결합을 추구한 것 같다. 그는 하느님의 성품과 성서적 지향성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오로지 신적 권위의 정당성과 정신적 세계의 우위성에 대한 개념을 기독교 안으로 끌어들이고 정당화는데 골몰해 있는 듯하다.
(22) 자결하는 죽음이 위대한 정신력에 해당할 수 있는가
(22). 1 위대한 정신력을 내세워 자살을 변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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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누가 만일 어떤 역경을 견디지 못하거나 타인의 죄악을 견딜 능력이 없어서 자결하고 말았다면, 위대한 정신력이라는 이름도 걸맞지 않다.
: 경건한 신앙이 세속적 역경과 이른바 죄악에서부터 초탈한 ‘위대한 정신력’에 주안을 두고 있다고 다시 한번 확인한다. 오히려 이러한 위대한 정신력에서 자살의 현실적 문제를 짚어보지 않고 정신력이라든지 위대함과 같은 용어를 통해 판단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적 명분에 계속 의심어린 질문을 하게 된다.
(22).2 하물며 그리스도인에게는 더욱 안된다
179p
21 자살이 타당한 행위였다면 박해자들의 손에 닿지 않으려면 자기 손으로 자결하라고 권유하라고 권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옮겨오면 그들이 머물 영원한 처소를 당신이 마련하겠다고 언약했으면서도, 자기 제자들이 자살을 하는 방식으로 현생에서 옮겨가라고 명하거나 권하지는 않았다.
: 본 성서인용구의 본문들의 목적이 과연 자살예방에 있었냐는 질문이 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침탈의 여파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불의한 희생자를 위한 변론의 차원에서 이런 인용을 했다고 생각한다. 자살을 예방하기 위해, 생명을 보존하기 위함에 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25) 죄짓지 않기 위해 죄에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187p
22 그러나 육체와 그 쾌락보다는 하느님과 그분의 지혜에 복종한다면 그 어느 지성도 타인의 욕정에 자극되어 자기 육체의 욕정에 동의하는 일 따위는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말하거니와 그리스도인의 지성이 육체의 어떤 쾌락에도 추하게 동의하는 일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욕정에 찬 이 불복종은 사멸하는 인간 지체에 여전히 깃들어 있고 우리 의지의 법을 벗어나서 제멋대로의 법에 따라 움직인다! 만일 잠자는 육체에 일어나는 바가 본인의 탓이 아니라면 동의 않는 육체에 일어나는 일은 더욱 탓이 없을 것이 아닌가!
: 아우구스티누스는 겁탈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느님과 그분의 지혜에 복종한다면 어떤 지성도 타인의 욕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자기 육체의 욕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또한 동의해서도 안된다고, 다른 장과는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겁탈은 타인의 강압에 의해서 육체적 반응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욕정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의지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경험으로 남아버린 정서적 상흔들은 어떻게 바라봐야하는가? 그들은 지적으로 동의한 것인가? 아니면 왜 이런 상흔들이 남는 것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육신과 정신을 지나치게 논리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앞에서 말햇듯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혼란의 상황 속에서 피해자의 경험을 기초로하여 합리적으로 신학과의 조화를 꽤하는 것이 아닌 혼란스러운 환경에서 기독교 세계에 대한 확신과 우위를 확립하고자 지나친 지적 비약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6) 행해서는 안 될 일을 성인들이 행햇다고 알려지는 경우, 어떤 명분에서 행한 것으로 믿어야 하는가
189p
23 그 여자들이 인간적으로 속아서가 아니라 신적 명령을 받고서, 그러니까 잘못 그르쳐서가 아니라 하느님 명령에 순종하여 그렇게 투신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신전을 무너뜨리고 함께 죽은 삼손의 경우처럼 우리는 달리 믿을 도리가 없다.... 명령받지 않고서 행한 것이면 벌을 받는 그만큼, 명령받고서 행하지 않으면 또한 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양심에 귀를 기울여야지 하느님의 내밀한 비밀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처해서는 안 된다.
: 이율배반적이고 모순적이다. 증명할 수 없는 신앙과 내면의 영역을 근거로 동일한 현상에 대해 다른 해석을 가하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신적 질서는 없느니만 못하게 되는 것이다. 신적 질서가 일관성을 갖추지 않고 생명에 대한 문제에 대해 피상적 봉합만을 행하고 있다. 하느님의 심판적 정의, 정신의 물체에 대한 우위의 도그마는 모든 세계를 향한 회복적 정의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27) 죄에 떨어지는 경향 때문에 자발적 죽음을 바라야 할 것인가
193p
24 자발적으로 자살을 할 만한 정당한 명분이 만일 있을 수 있다면, 의심의 여지가 없이 지금 말한 이 명분보다 정당한 명분이 없다. 그런데 지금 말한 것도 자살할 만한 정당한 명분이 못 되므로 결국 자살할 만한 정당한 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자결하라는 논리조차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앞에서 ‘어째서 세례받은 사람들에게 힘들여 권유하면서, 그러니까 처녀들에게는 몸을 온전히 간수하도록 타이르고, 과부들에게는 수절을 지키도록 타이르고, 혼인한 사람들에게는 신의를 지키도록 타이르면서 시간을 낭비해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구절이 있다. 이 내용은 자살을 종용하는 이들의 주장에 대해 현재 기독교 신앙이 추구하고 있는 삶의 내용으로 반박한 것이다. 즉 기독교 신앙 내에서 죄로 벗어나기 위한 죽음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신앙은 현세적 삶을 긍정하면서 죄악으로부터 멀어져가는 것임을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 아닐까.
(28).1 억지로 당한 일은 겸손을 가르치는 훈계일수도 있다.
195p
25 그리고 여러분의 양심에 성실하게 질문을 던져 보라, 여러분이 혹시라도 처녀로서의 순결이나 유부녀로서의 절제나 과부로서의 정절이라는 선을 두고 지나치게 자만하고 있지나 않았는지, 인간적 찬사를 즐기면서 다른 여자들도 그런 덕성을 지니고 있으면 은근히 시샘하지나 않았는지 스스로 질문해 보라....... 그리고 인간적 영예, 그 영광에 애책하지 못하게 인간적 치욕이 뒤따른 것이다. 소심한 영혼들이여, 그 둘다를 두고 위안을 삼을 것이니, 은총에 힘입어 여러분이 시련을 통과한 것이고 영예를 두고는 여러분이 벌을 받은 셈이며, 전자로 인해 여러분은 의롭게 되었고 후자로 인해 여러분은 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사회적 불의라는 맥락을 개인의 교만이라는 도덕적 영역으로 치환시킨다. 이걸 통해서 종교적 열심으로 상황을 수용하게끔 하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이는 범주적 오류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폭력적 상황을 통해서 내적인 도덕성이 견고해지고 교만이 교정되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강간은 하느님이 하신 일으로 봐도 되는 것인가? 목적을 무엇으로 두고 현상을 봉합하려고 하는 시도보다는 현상을 있는 그 자체로 보고 대안을 생각하는 노력이 필요하진 않을까?
197p
26. 다만 자기들이 정절의 선으로 건방지게 뽐내고 있지 않았음을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있고, 그런데도 적병들의 폭력을 육체에 당했다면, 이런 여자들은 자기 나름의 어떤 숨은 약점을 안고 있었으며, 적군들의 침탈중에 이같은 굴욕을 피했더라면, 혹시라도 그 약점이 방약무인한 오만으로 뻗어나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봄직하다..... 앞의 여자들의 경우 엄존하는 자만심에 대한 처치가 이루어진 것이고 뒤의 여자들의 경우 임박하는 자만심에 대한 예방이 이루어진 셈이다.
: 내적 도덕의 성결의 정도가 모든 시련과 시험(운명)의 원인이 된다고 보는 환원주의적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 신앙적 전제에 동의한다면 이는 합당한 논리겠으나 이성적 원리로 본다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 그리고 확인할 수 없는 것, 이미 일어난 피해와 침탈에 대한 현실적인 구제책이 이루어지지 않는 비합리로 보일 수 있다. 즉 폭력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닌 교만에 대한 처방이 골자가 된 것이다.
(28).2 아울러 어떤 양심으로 하느님을 섬길지 암시한다
199p
27. 곧 당신이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셨고 성도들 안에서 당신이 사랑하시는 그 성덕이 육체의 순결을 잃음으로써 동시에 사라지는 그런 식으로 상실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신 성도들에게 정결이 유린되는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셨을지 만무하다는 것이다.
: 육체적 성격이 결국 정신적 영역에 의해 결정된다는 논리로 현실적 악의 유린을 정신적 영역을 부각시키고 고양하는 도구로 차용한다.
당대 사회적 혼란과 분열을 봉합하려는 의도로 이와 같은 도덕적 영역에 대한 조명과 로마침탈을 연결하였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