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M-2030으로 이름을 바꾼 에스판디어리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강화되어 기본적인 능력이 현재의 인간을 현저히 넘어서는 인간을 소위 ‘포스트휴먼’이라고 지칭함을 앞선 글에서 살펴보았다. 또한 그러한 포스트휴먼의 등장을 기대하면서 이를 사변적으로 지지해 주는 현대 철학 사조가 ‘포스트휴머니즘’이라는 것도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포스트휴머니즘의 여러 유형들 중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현재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논의를 가장 선도적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급진적 포스트휴머니즘으로 간주되는 트랜스휴머니즘은 최신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지속적인 과학적 진화의 발전 과정을 거쳐서 육체와 정신 모두가 강화된 미래 인간, 곧 포스트휴먼으로의 전환을 지향하는 미래학자들에 의하여 20세기 후반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현대 철학의 사조이자 사회 문화 운동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용어의 첫 사용은 널리 알려진 공상과학소설 『위대한 신세계』(1932)의 저자인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형이자 유네스코 초대 사무총장을 역임한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에 의해서이다. 그는 그의 저서 『New Bottles for New Wine』(1957)에서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초월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닌 개념으로서 이 용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진화생물학자인 그가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진보적 비유인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마 9:17) 한다는 말씀에서 그의 저서의 제목(New Bottles for New Wine)을 착안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이 책에서 그는 단순히 트랜스휴머니즘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나는 트랜스휴머니즘을 믿는다”라고 말하면서 트랜스휴머니즘에 관해 확고한 믿음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 줄리언 헉슬리(Julian Huxley) - 『New Bottles for New Wine』(1957)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라는 용어에서 나타나듯이 접두어 트랜스(trans-)는 트랜스휴머니즘의 기본 의미를 알려주고 있다. 우선 ‘트랜스’라는 접두어는 헉슬리가 처음 의도했듯이 ‘초월하는(transcending)’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서 초월이라는 것은 이전의 인간의 상태를 떠나서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인간의 상태를 창출하려는 의미의 초월을 뜻한다기보다는, 이전의 흠 많은 인간의 상태를 강화시켜서 놀랄 만큼 진보된 차원의 인간의 상태로 발전시키려는 의미의 초월을 뜻한다. 물론 지속적인 인간 강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원동력은 유전학, 나노기술, 로봇공학, AI 기술과 같은 21세기 첨단 테크놀로지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첨단 테크놀로지를 통하여 미래에 무한히 강화된 인간과 인간의 제반 조건을 예견하면서 트랜스휴머니즘의 담론을 국제적으로, 다학문적으로 형성시켜 나가고자 노력한다.
다음으로 ‘트랜스’라는 접두어는 ‘전환하는(transitional)’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 초점을 두어 트랜스휴머니즘을 처음 개진한 인물은 이란계 미국 소설가이자 미래학자인 페레이둔 에스판디어리(Fereidoun M. Esfandiary)이다. 그는 『Are You a Transhuman?』(1989)에서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현재의 인간으로부터 미래 인간(포스트휴먼)으로 전환하는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트랜스휴먼을 최초로 언급했다.
전환한다는 의미는 현재 트랜스휴머니즘의 흐름과 방향을 가장 적절히 표현해 주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첨단 테크놀로지를 통해 최고로 강화된 인간 존재와 최상의 미래 환경을 만들어내려는 뚜렷한 목표를 설정한 후 이를 이루기 위하여 추진되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의 신체적 제한과 환경적 제약을 첨단 테크놀로지를 통해 끊임없이 극복하여 항상 현재보다 나은 강화된 인간으로 전환하려는 발전 과정에 초점을 두며 추진되고 있다. 이처럼 목적론적이라기보다 발전론적 입장을 취하는 이유는 트랜스휴머니즘이 기본적으로 과학의 진화론적 입장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보면 인간은 항상 진화하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로 파악되기에 트랜스휴머니즘은 보다 발전된 인간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된다.
진정한 트랜스휴먼으로의 전환을 갈망했던 에스판디어리는 1970년대 중반에 자신의 이름을 FM-2030으로 바꾸었다. 왜냐하면 2030년도는 그의 100세 생일이 되는 연도인 동시에 그가 예견했듯이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으로 더 이상 늙지 않고 영원히 살 트랜스휴먼으로 전환하게 될 마술과 같은 연도(magic time)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갈망과는 달랐다. 69세였던 2000년에 그는 췌장암으로 사망하였다. 현재 그의 몸은 미국 애리조나 주 스코츠데일에 위치한 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에 냉동보존 되어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철학적 논의를 공식화한 첫 인물은 맥스 모어(Max More)이다. 철학자이자 미래학자인 그는 「Transhumanism: Toward a Futurist Philosophy」(1990)라는 논문에서 현재의 인간을 미래의 인간(포스트휴먼)의 제반 조건 속으로 안내해 주는 철학적 사조로서 트랜스휴머니즘을 소개하였다. 특별히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의 가장 선도적인 철학적 입장으로서 엑스트로피아니즘(Extropianism)을 창안하여 제시하였으며, 1991년에 톰 벨(Tom Bell)과 함께 최초의 공식적인 트랜스휴머니즘 단체인 Extropy Institute(ExI)를 설립하였다.
그 후 Extropy Institute가 문을 닫는 시점에서 그 뒤를 계승한 단체는 세계트랜스휴머니즈트협회(World Transhumanist Association)였다. 1998년에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철학자이자 미래학자인 닉 보스트롬(Nick Bostrom)과 데이비스 피얼스(David Pearce)에 의해 창설된 이 단체는 2008년에 더욱 인간적인 이미지를 담아내기 위하여 Humanity+로 단체명을 바꾸었으며, 현대 트랜스휴머니즘의 담론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의 현대 담론의 내용과 방향을 가장 잘 요약해 주는 문서는 트랜스휴머니스트 선언(Transhumanist Declaration)이다. 이 선언의 초안은 1998년에 세계 각국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마련되었으며, 수년간의 검토와 수정을 거쳐 2002년 첫 선언문이 만들어졌다. 그 후 2009년에는 개정판이 만들어졌으며, 같은 해에 Humanity+에서 공식적으로 채택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인류는 미래에 과학과 기술에 의해 엄청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노화, 인지적 결함, 불의의 고통, 지구라는 행성의 제약을 극복함으로써 인간의 잠재력을 확장시킬 가능성을 바라본다.
2. 우리는 인류의 잠재력이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인간의 제반조건들을 멋지고 대단히 가치 있는 것으로 이끌어주는 시나리오들이 있다.
3. 우리는 인류가 심각한 위험들, 특히 새로운 테크놀로지들을 오용함으로써 오는 위험들에 직면해 있음을 인지한다.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 대부분, 심지어 전부를 상실하게 되는 시나리오들이 현실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시나리오들 가운데는 급격한 변화를 수반하는 것도 있고 부지불식간에 다가오는 것도 있다. 모든 진보는 변화에서 비롯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변화가 진보를 불러오는 것은 아니다.
4. 이런 전망들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에 투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위험을 줄이고 유익한 응용을 진척시키기 위해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건설적으로 토론할 수 있는 포럼과 책임 있는 결정들을 실행할 수 있는 사회질서가 필요하다.
5. 실존적 위험을 줄이는 것, 생명과 건강을 보존할 수단을 개발하는 것, 심각한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 인간의 예지와 지혜를 향상시키는 것은 최우선적으로 추구되어야 하고, 이를 위한 전폭적인 재정지원도 이루어져야 한다.
6. 정책 수립은 책임 있고 포용적인 도덕적 시각 속에서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진지하게 고려하고, 자율과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며,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이익과 존엄성에 대한 관심과 연대성을 보여주면서 이루어져한다. 또한 우리는 미래에 존재할 세대를 향하여 우리의 도덕적 책임도 고려해야 한다.
7. 우리는 인간과 인간이 아닌 동물, 그리고 미래의 모든 인공 지능체, 변형 생명체, 또는 기술과 과학의 진보로 인해 등장하게 될지도 모를 여타의 지성적 존재를 포함해서 모든 감정을 가진 존재의 행복을 지지한다.
8. 우리는 개인이 자기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독자적으로 폭넓게 선택하는 것에 찬성한다. 여기에는 기억, 집중력, 정신력을 보조하기 위해 개발될 기술의 사용을 비롯하여, 생명연장 시술, 생식에 관한 선택 기술, 냉동보존술, 그리고 수많은 인간 개조 및 강화 테크놀로지들이 포함된다.」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세계적 담론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된 트랜스휴머니스트 선언이 완성되어 공식 채택된 때가 2009년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트랜스휴머니즘은 지금도 형성되어가고 있는 최신 현대 철학 사조요 미래 지향적인 최근의 사회 문화 운동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의 형성 역사에 대한 논의와 트랜스휴머니즘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 또한 2010년 즈음에 들어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루어졌으며, 2012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트랜스휴머니즘의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의 수는 불과 5천 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랜스휴머니즘의 담론이 해가 거듭될수록 지속적으로 부각되고 있는 이유는 트랜스휴머니즘 형성의 실질적 배경이 되는 최신 테크놀로지의 급격한 발전과 실용화의 놀라운 속도이다. 그 속도에 힘을 얻어 미래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한 담론은 현대 철학의 논의에서 갈수록 더 큰 비중을 차지해가고 있으며,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현실적인 의존율이 급격히 높아지는 만큼 트랜스휴머니즘의 기술주의적 미래에 대한 낙관론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 또한 늘어나고 있다.
상대적으로 매우 소수이기는 하지만 기독교계에서도 트랜스휴머니즘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나름대로의 기독교적 논의를 시도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트랜스휴머니스트협회(Christian Transhumanist Association)는 첨단 테크놀로지를 활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급진적으로 더 좋게 만들 수 있다는 적극적인 방향성을 가지고 기독교 트랜스휴머니스트 선언(The Christian Transhumanist Affirmation)을 제시한다. 또한 그런 맥락에서, 물론 너무 진보적인 입장으로 필자에게는 여겨지지만, 자신들을 ‘기독교 트랜스휴머니스트’라고 정의 내린다. 이런 급진적 예시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기독교계에서 트랜스휴머니즘에 관한 균형 잡힌 논의를 속히 시작해야 할 필요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