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 년 1 월초 수송부 부대배치후 매일같이 반복되는 자동차 정비로 엉둥엉둥 몇달이 흐른다, 구형[1943 년형]2 차대전과
6.25전란중 사용하든 구형고물 트럭[일명 지에무시]과 찦 그리고 스리퀘터와 엠브렌스등등 9 0 여대의 반납 작전이엿다,
제발로 굴러 원주 페차수집창엘 가야하는바 부품이 낡고 없는걸 꿰여마추기란 그리 쉬운건 아니엿다, 부대배치직후 확인해보니 시동불량 부품 결손차등이 과반수에 달하엿으니 앞이 캄캄하기만,, 기실 모든차를 제발로운행해야 수송관과 선임하사등이[중상사 7 명] 고과점수가 - 되지않기에 수송관이하 중상사들에 지대한관심사엿다, 물론 정비전담인 나의입지또한 고공행진이엿다, 잠자리 특식사[수송부 자체식당] 야간보초가 특례로 면제됏다, 노력한끝에 다행히 9 9% 의 자체운행으로 원주까지 모든차를 반납 완료햇고 대신 일본산 토요타 트럭[디젤트럭]과 스리쿼터 그리고 미스비시 찦차로 완전 교체하엿다, 당시 나의 임무수행처럼 9 9 % 완성한예는 전군에서도 인정할만한일거의 쾌거엿다, 물론 이등병신분으로 연대장 표창도 받앗고,,그렇다보니 3 월 중순이되엿다,
강원도 화천꼴짜기의 얼음도 거의다 녹앗고 양지쪽 산비탈엔 진달래꽃이 여기저기 피여낫다, 드디여 홍천 화촌면 화촌리로 사단[연대]이 옴기게되엿고 무사히 이동햇다, 따뜻한 홍천강변을 바라보면서 매일의 정비일과를 치루게되엿다, 어느날 아침 집합시 수송관이하 전 중상사가 기절직전의 초 긴장상태로 전 수송대원을 집합시켯다, 매일격는 차량점호 집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엿다, 집합하고나니 수송관께서 박정희 소장이 드디여 군사 혁명을 잃으켯고 성공하여 국정을 군사정부가 통솔하게됏다, 하여 여러군은 일심단결 애국애족의 기치에 초심의 정신무장으로 철저히 근무하고 열심히 복무하라 하셧다, 그후 물론 업무는 변함없엇고 단 먹거리가 풍성해졋다, 그리고 피복 지급이 새것이엿다, 얼마후엔 새 막사[불럭 신축막사, 마루판 침상 베치카 온기를 듬뿍]로 이사를 하엿고 각처의 보급관련 새소식이 전해졋다, 우선 살맛나는 새로운 분위기엿다, 물론 나의 업무에서 크고작은 희노애락도 다분하엿으나 새차이기에 큰 애로는 별로엿다, 그렇다보니 봄기운도 무더워지는 6 월이 도래됏다, 아~ 이를 어쩌나?, 고향에선 이때쯤 보리타작에 모내기에 눈코뜰새없는데, 고심되엿다, 내가 운영하던 탈곡기는 누가 운영하나? 엿다, 드디여 하룻밤을새우고 만리장성 소원서를 작성햇다, 물론 선임하사님께 애사�� 이야길하고 소원서를 전해드렷다, 사무실로가신 선임하사님께서 나를 부른다, 사무실가�� 수송관과 몇분의 중상사님들이 둘러앉아 하시는말씀, 아 농번기에 부모형제를 도울려는 의지가 참으로 기특하다,
입대후 6 개월이 채 않되여 정기휴가는 가을에가고 이번엔 특별 보상휴가다, 가서 열심히 부모님 농사일 돕고 와라, 하신다,
네가 특히 정비에 일심노력하엿기에 연대본부에 특별 휴가를 요청하여 허락받앗다, 귀대시간 엄수하고,, 몇칠간 휴가니 업무인계잘하고 낼 떠나거라 하신다, 나로선 꿈을 꾸는 느낌이엿다, 아 역시 노력앞에소원수리서? 하늘은 무심치 않는구나,,,그날밤 보초시 상등병께서 어 낼 휴가가면 어데선가 만나게되는 헌병 검문이 잇는바 이를 대비하여 군사 혁명공약 7 개항을 딸딸 외워두라고 하신다, 보초 한시간반을 서면서 30 여번의 혁명공약을 외웟다, 다음날 휴가차 인제원통발 서울행 일반버스에 몸을 실얻다, 얼마후 홍천 검문소에서 버스가 정차하엿다, 헐 헌병 두사람이 검문을한다, 특별보상 휴가증을 내보이니 둘러보고 하는말 혁명공약을 버스안 손님이 잘 알아듯도록 외치시라 하신다, 넷, 자리에서 벌떡잃어나 반 하늘을보고 혁명공약,, 1, 하면서 큰소리로 또렷하게 7 개항까지 외쳣다, 하 손님들 모두가 박수갈채 짝짝짝~~~하니 헌병은 수고햇다, 잘 다녀와라?, 넷, 생각보다 빠른 부딧침 무사히 잘 통과되엿다, 서울용산에서 호남선 군용열차[일반 여객열차에 TMO군용칸이,, 그날밤 늦은시간에 고향집 사립문을 밀치기하고 마당으로 들어서며 어머니? 하엿고 어머니께서 00 가 왓구나 하시면서 마루로 나오신다, 그날밤 어머님과 정담으로 꼬박 새우고 아침전 동녁무렵에 탈곡기 엔진을 시동거니 탕탕탕 잘돌아간다, 이웃집 아저씨께서 아 휴가 참 잘됏네 식구와 동리사람들이 걱정들 많이 하셧엇는데, 하신다, 아침먹고 그길로 탈곡기작전은 시작되엿다, 매일매일 힘겹게 그리고 밤늦게까지 맹 추격이엿다, 더러는 가뭄논에 물대기를 할땐 모기뜻겨가면서 밤샘도 하엿다, 피로한 18 일의 탈곡일을 마치고 다음날은 아침일찍 군용열차에 몸을 실엇다, 그리고 서울 청개천 상가에들려 수송관이 부탁한 자동차 키를 50 개나 복제하엿다[모든차종마다가 동일형 키], 그렇다보니 낫설은 전차를타고 청량리 역엘갓고 용문역에서 내려 다시 인제원통행 버스엘 탓다, 그후 후반기를 마치지않아 주특기가 없기에 6 개월이내 운전교육대 야전 정비대의 후반기 주특기 교육을 받아야햇다, 물론 수송관님께 당부하여 505 원주 야전 병기학교 차량정비를 받게됏다, 그것도 수송관님의 간곡한 당부로 연대에서 실무장교분의 노력으로 원주 병기학교로 지정받아 곧 교육차 원주로 갓고 그곳에서 첨엔 어리둥절햇으나 밤낮으로 열심히 자습한결과 미 8 군 원어 번역 교본으로 당시 사회에서는 어느 학교나 기관에서도 받을쑤없는 정통 정비교육을 잘 마쳣다, 물론 200 여명중 2 등을 하엿다, 영어에 미달한 내실력치곤 하늘의 도움이엿다, 그 후부턴 부대에 배송되는기술이란 기술서적을은 모조리 전부 수단방법 안가리고 취득하엿다, 그때문에 나는 제대이후 많은 학술적 정비상식 익혓고 그후 취업후에도 주경야독의 기치를 가하기에 이르럿다, [원주교육후 완젼 전문기술 습득],
한여름이 기울무렵[삼복더위때] 농촌에는 비가않와 수리답을 제외한 봉천지기논은 매말랏다, 역시 수송관님께 당부 하소연하엿다,가뭄기에 탈곡기 엔진으로 논물퍼올리기 엿다, 어데선가 구해온 보상휴가증[물론 연대장발행] 구해왓다, 양역 8 월 이엿다, 먼저번의 보리타작보다는 수월햇지만 역시 기계 근처에서 잠자기란 그리 시원치는 않앗다 기계소리때문이엿다, 어느듯 가을이 되엿다, 한달 앞당겨 정기 휴가를 신청하엿다, 역시 정기휴가가 발효되여 고향으로 와서 힘겨운 탈곡을 하엿고 방앗간 한쪽편이 온통 내가 벌어놓은 볏가마가 수북히 싸엿다, 군생활의 가장 노력할시기는 이른봄과 겨울전 종합 군사령부 검사엣다, 물론 이때 몇밤씩 새우면서 정비를 엵심히 해냇기에 중상사와 수송관께선 의례히 한명수 휴가를 3 년간 매년 3 차례나 허락하엿다,[수송관과 중상사는 자주 바뀌여도 나에대한 배려는 마치 인수인계를 받은것처럼 순탄하엿다], 어찌보면 후방 무슨 나이롱 부대원과도 같이 1 년에 3 번의 휴가를 매년간 얻어낸다는게 세인들을 깜짝놀라게하엿다, 제대하고나니 여기저기 인기인처럼 소문나서 혼처가 수십명이엿다, 그렇나 나는 제대후 또하나의 고민에 쌓엿다, 결혼도 문제지만 그것보다는 취직이엿다, 몇년전엔 농기구를 많이 연구하여 농기계공장이 꿈이엿으나 물론 그것도 회망적이긴 햇지만, 그보다는 자동차에 더 관심을 갇게됏다,그렇나 사회의 정비공장이래봐야 겨우 품팔이수준에 미달하엿느니 어데 좋은 방법은?, 고민되엿다, 장가도 가야하고 취업도 해야하니 딱히 26 세 총각의 마음이 어리둥절, 사춘기인 17세때 읽어본 헨리 포드의 자동차 왕[王],, 이란 위인전"의 꿈이 그리도 쉬운건 아니엿다, 부산 차량창근처에 페차량을 불하받아 재생하여 여러종의 차를 조림하여 판매한다는 우리나라에선 제일 큰 자동차 조립공장을 알게됏고,제대후 다음해 첯봄 부산 신진공업사를 찾아같다, 마침 500 명 종업원으로도 부족한 마이크로 버스의 주문이 쇄도하여, 비교적 어려움없이 취업이 되엿다, 그곳이 현재의 대우자동차 버스공장 부산 전포동공장이엿다, 신진공업사란 간판으로 김창원 사장이 운영하는 우리나라에선 가장 큰 자동차 공장이엿다, 그런데 월급이 형편없엇다, 당시 쌀 한가마에 3000 원인데 쌀 두가마갑에도 못미쳣다, [여기서 다시말하자만 농촌의 탈곡기 운영은 그 맥이 끈기게된것, 첨엔 돈벌이가 된다 하니까 한동네에 2-3 대씩 처음보다 20 여배로 늘어낫기에 일거리가 거의 소진된 상태엿다]하여 신진공업사 입사를 천운으로 알고 일로 매진 적극노력하엿다, 하는일은 차량창에서 불하받은 각종페차량의 엔진의 완전 분해하여 .a . b, c 급 으로 분류하여 이를 재생후 다시 정밀 조립하여 시동후 이 엔진을 마이크로 버스에 얹어주는 작업이엿다, 그당시 대형버스와 서울 지하철 1~2~3 호 건설의 주역인 지엠씨트럭 그리고 중형버스와 신성호라는 찦차부품의 승용차엿다, 물론 반장은 꿈도못꾸고 생각보다 하위의 작업을 할쑤밖에, 그곳엔 육군 차량창의 한다하는 고참 기술문관들이 취업하여 들어온곳이니 충청도 합바지 어버리가 겡상도 부산에서의 직장생활이 가히 얼마나 고초를 겪엇겟씁니까 는 여러분 판단에 맏기지요, 그럭저럭 꾸준히 노력하니 신진은 일본 토요타와 제휴하여 정상 자동차 메이커가 됏고 부평공장도 인수받아 코로나를 대량생산하고 부산공장도 대형버스지만 토요타 가솔린 버스를 만들어 일부 수출도 하엿다, 서울시내전차를 철거하고 대형버스 300 여 대를 투입하여 서울 외곽권개발[시 직영버스로서 외관권 로선담역]의 핵심역할을한 신진버스가 바로 그것이엿다,
월급 인상은 여전히 짧앗다, 결혼을하면 겨우 죽을 먹어야할형편이엿다, 그렇나 참앗고 67년 1월 고향 아가시와 결혼하엿고[2 9 세] 다음해 큰아들을 출산햇다,[언젠가 소개한 크리스마스날 처가집앞의 호남선 열찻길에서 미군트럭 구해낸 일, 후], 어렵사리 학고방 그것도 정셋방이엿다, 2 년을 허둥지둥 보냇고 68 년 여름이엿다, 현대자동차가 울산에 공장을 차렷고 공원모집에 내가 몇몇 정비 기술자와같이 이력서를 냇다, 그래서 서울 무교동 현대건설사무소를 찾앗는바, 기술등 면접은 없고 팜프릿 한장주며 아랫쪽의 희망급료를 적으라는것, 헐 다른자는 1 만원도 못받는 형편에 5 배나 높은 금액으로 적어놓고 나가더군, 나는 이에 응하지 않앗다,
기술 테스트를 받기전엔 희망금액을 못적겟다고 하엿다, 그제사 아 나는 전에 신진본사 기술과장이엿엇는데 현대 기술과장으로서 당신을 잘 안다고 하엿다, 귀께서 전장부품 개선껀 제안한적 기억되냐? 내가 신진본사에서 그 제안건을 심사하엿고 김 사장님 표창장도 결재올렷엇다, 당신은 내가 낫설지만 나는 이미 당신을 잘 알고잇다, 하 그렇습니까 고맙습니다, 하면서 나역시 5 만원을 적엇다, 그렇니까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내가 사장이라면 쾌히 당신을 채용하지요, 하나 나역시 일개 기술과장신분으로선 당신의 요구를 못들어주니 안타깝소 하신다, 그렇면 어짜면좋겟쏘 하니 뭐 현장 반장 케이스인데 좀 잇으면 희망이잇고 잔업하면 어북 될겁니다, 반장은 고참 계장급이니 3 만원[ 유명대 상위 10 위권이내의 우등생, 대졸사원 13000 원 3 년 계장 2 만원 5 년 계장 25000 원일때임,]을 기록하면 좋겟습니다, 하엿다, 좋습니다, 3 만원 쓰죠, 열두밤을 지새워도 수당포함 5 만원은 되길바랍니다? 하니 잔업금은 포함되지않으나 아마도 그 배가까이도 가능할껄요
[10 만원?], 하시더군요,
그럼 앞의 사람들은 어찌되나요 하니 그들은 별로 희망이 없을거요 하더군요, 그당시 기술인 초청등 신진과는혼잡한 심리전=급료를 높게올려라?그래야 합격취소된다 를,,] 시기엿엇죠, 나의 신진에서의 부품개선 제안건을 심사하엿든 신진기술과장의 나에대한 애착심이 그 열매엿던것같습니다 [인하공대 출신 미 유학후 기계공학 박사 김병철 현대기술 과장님],
그날밤 부산도착하니 벌써 현대 정사장명의의 전보가 한장 와잇더군요,
(( 내일 즉시 울산공장 총무부에 오전중 도착하라 )) 고요,,
후 우와이구나 ~~ 화이팅,~~ 팅, 오늘은 요기서,,